그곳에 가다

홍상수 감독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영화를 평균 이상으로 좋아하다보니 가끔 실제 장소를 배경으로 촬영한 영화들을 보면 최대한 그 장소를 직접 찾아가서 다시 한 번 영화의 기운과 여운을 느껴보고자 하는 편이다. 바로 지난 주에 본 홍상수 감독의 신작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도 보는 즉시 그곳에 가고 픈 욕구가 발동하는 영화였다. 홍상수 감독의 작품들은 워낙 저예산이기도 하고 짧은 시간 같은 공간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많아 실제 존재하는 장소를 배경으로 하는 것은 물론, 특별한 장소를 일부러 찾아 촬영하기 보다는 그냥 어떤 동네의 평범한 장소들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아 그의 영화를 보면 꼭 한 번 그 동네를 찾아보고픈 생각이 들곤 한다. 이번 작품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수원화성 근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영화를 본 바로 다음 날 가벼운 마음으로 수원을 찾았다.





영화의 첫 장면에 화성행궁 앞에서 극 중 함춘수 (정재영)가 담배를 피는 장면은 바로 저 큰 나무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참고로 이 영화를 겨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늦여름 찾아간 것이 아쉬움이라면 아쉬움. 입김이 나는 계절에 찾아왔더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나서 화성행궁에 입장하기 위해 입장권을 구매하는 장면. 참고로 내가 간 날은 행사 기간이라서 무료 입장이었다.




그리고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소라고 할 수 있는 곳. 바로 복래당 (福內堂)이다. 이 곳에서 함춘수는 윤희정 (김민희)을 처음 만나게 되어 어색하고 짧은 대화를 나누게 된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정재영이 앉아있던 자리는 볕이 몹시 잘 들었다. 정말 솔솔 잠이 올 것 만 같은 햇살.





이 쪽은 극 중 김민희가 앉아서 요구르트를 먹던 자리. 특별할 것은 없지만 영화 속에서 워낙 그의 내레이션을 통해 이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는 소개를 듣다보니 달리 보이는 곳이기도 했다. 참고로 화성행궁은 정조가 머물던 임시처소였고 복내당은 정조가 행차시에 머물렀던 곳이였다고 한다.





이 곳은 바로 화성행궁 옆에 위치한 수원호스텔 건물인데, 영화 속에서는 거의 첫 장면 쯤에 정재영이 저 외쪽 창문을 열고 바로 사진을 찍은 이 아래 쪽의 고아성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이곳은 행궁 옆의 골목을 조금만 걷다보면 왼편에 나오는 가게인데, 바로 극 중 정재영과 김민희가 술을 마시며 오랜 대화를 나누던 바로 그 스시집이다. 이 곳은 보시다시피 가게 앞에 영화 포스터도 전시해 놓으며 촬영지라는 걸 알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리얼리티를 위해 직접 들어가서 스시에 소주 한 잔을 할까도 했지만 너무 낮시간이라 이번엔 패스.




그리고 여긴 극 중 김민희가 사는 집으로 등장하는 곳인데, 이 곳 역시 바로 행궁 옆에 위치하고 있었다. 참고로 영화를 보면 이 집 바로 뒤에서 절이 있어서 종 치는 소리가 들리곤 하는데, 실제로 뒤 편에 큰 불상이 위치해 있었고 종소리도 가깝게 들려왔다.


이 곳 말고도 가보려고 했는데 깜빡하고 못 갔던 곳이 '시인과 농부'라는 찻집인데, 극 중 인물들이 술을 마시는 장면의 배경이 된 카페다. 이 곳 역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여긴 영화 촬영과 상관없이도 독특한 분위기로 제법 소문이 난 찻집이다. 참고로 이 곳은 개인적으로도 아는 지인들이 다녀온 후기로 먼저 알게 된 곳으로, 영화 속에서 다시 보니 더 반가운 곳이기도 했다.


이렇게 짧게나마 홍상수 감독의 영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배경이 된 수원 화성행궁 근처를 둘러보았다.

찬바람이 부는 한 겨울 즈음에 다시 한 번 찾아, 입김 호호 불며 또 한 번 영화를 느껴보고 싶다.




글 / 사진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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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Right Now, Wrong Then, 2015)

무릅쓰고 편안하게



홍상수 감독의 신작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제목을 붙여 쓴 것이 감독의 의도인 듯 하여 그대로)는 감독의 최근작들의 경향과 마찬가지로 같은 인물들의 다른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북촌방향'이나 '옥희의 영화'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등과 이 영화가 다른 점이라면 두 가지의 다른 이야기의 구분이 더 명확한 동시에 특별한 시공간적 (혹은 차원적) 변화로 인한 이야기의 갈래가 아닌 아주 미세한 말과 행동으로 인한 변화의 줄기를 따르는 영화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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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를 이렇게 저렇게 분석해 보고 픈 마음이 가득 들었던 '북촌방향'과 같은 영화와는 다르게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얼핏 또 같지만 다른 이야기를 영화적 구성을 곁들여 펼쳐 놓은 영화가 아닐까 싶지만, 사실은 훨씬 더 직관적이고 가벼우며 편안한 작품이다. 1부의 이야기는 극 중 영화감독인 함춘수 (정재영)의 주관적인 기억 혹은 조작된 과거, 아니 이런 구성적 가능성은 다 재쳐두고, 그저 솔직함 보다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계산하고 절제하고 고민한 결과물을 만나게 된다. 함춘수는 우연히 만나게 된 윤희정 (김민희)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녀에게도 호감을 얻기 위해, 쉽게 말해 되지도 않는 말로 그녀를 칭찬하고 환심을 사기 위해 많은 말과 행동을 하며 이른바 그녀에게 많은 공을 드린다. 하지만 어찌보면 처음부터 잘 될리 없었던 이 불안한 관계는 결국 더 나아가지 못하고, 함춘수는 다음날 그 화를 고스란히 떠안으며 쓸쓸히 수원을 떠난다.


그에 반해 2부의 이야기는 훨씬 더 자연스럽다. 2부의 함춘수 역시 윤희정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하기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드러낸다. 2부의 이야기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건 그녀의 그림에 대해 냉정하게 이야기해서 관계가 어긋나는 듯 했지만 그렇지 않았고, 특히 그녀의 지인들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추태를 부렸지만 관계가 깨어지기 보다는 오히려 '그럴 수도 있지'하는 정도로 지나간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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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라는 영화의 제목처럼, 이 이야기는 아주 작은 말들로 인해 관계가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울도 되지만, 그보다는 바로 그 순간 순간의 말과 행동에 너무 집중하고 고민하며 살아가는 나에게 '그렇게 솔직하게 다 보여줘도 아주 큰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 같아 인상적이었다. 영화 속 대사를 빌리자면 이 루틴이 깨진다고 세상이 망하는 건 아니라는 걸 유쾌하게 전하고 있달까. 지금은 맞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그 때는 틀렸다고 생각되었을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존재하기 때문에 결국 아무 소용없다는 허무한 감정보다는, 그러니까 너무 일희일비하며 자신을 옥죄일 필요는 없다는 말로 느껴졌다. 그래서인가, 근래 본 홍상수 감독의 영화 가운데 가장 소소하고, 부담 없고, 좋은 의미에서 머리 쓸 일 조차 거의 없는 편안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묘하게 또 보고 싶은, 그래서 그 순간의 찰나를 발견하고 픈 영화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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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번 영화는 수원화성 근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영화를 본 다음 날 바로 다녀왔어요 (이건 곧 별도로 쓸 예정). 영화 속 처럼 추운 겨울에 한 번 더 다녀왔으면 좋겠다 생각이 들더군요.

2. 김민희의 연기는 너무 자연스러워서 연기와 실제가 구분이 안되는 차원이더군요. 이 영화의 유일한 성립필요 조건은 극중 김민희가 연기한 캐릭터가 얼마나 매력적이냐 라는 것 정도였을텐데, 완벽 그 자체.

3. 최화정의 '감독님 왜 그러세요!' 이 대사 잊지 못할 것 같아요 ㅋㅋ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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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희 (Our Sunhi, 2013)

우리는 누군가를 알고 있는가



홍상수 감독의 신작 '우리 선희'는 그의 전작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이나 '다른 나라에서' '북촌방향' 등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또 다른 작품이다. 흔히 어떤 좋은 것을 평가할 때 정반대의 개념을 들며, '이러면서도 이러하다'라는 평가를 하곤 하는데, 홍상수의 최근 작품들만큼 이러한 경향을 그대로 보여주는 예는 아마 없을 것이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선희'는 살짝 기대를 덜하기도 했었다. 홍상수 월드에 이미 녹아든 정유미, 이선균, 김상중과 새롭게 합류한 정재영이라는 조합, 그리고 대략의 시놉시스는 '아, 또 대충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겠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우리 선희'는 정말 또 한 번 큰 재미와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작품이었다. 최근 몇 년 간 본 영화들을 통틀어 봤을 때, 개인적으로 '재미있다'라는 표현을 이렇게 매번 사용한 감독은 아마 홍상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정말 재미있다. 사실 보는 내내 그 재미에 흠뻑 빠져서 흥분이 될 정도다. 어쩌면 이렇게 단촐해 보이는 구성으로도 무궁무진한 재미를 계속해서 만들어 내는지, 놀라움과 부러움이 아니 들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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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의 최근 작은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이야기와 구성을 담고 있었는데, 같은 이야기를 두고 다른 시각의 버전을 포개어 논다거나, 시공간의 모호함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 한다거나, 같은 인물을 두고 서로 모르는 다른 인물들이 벌이는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한 편으론 단순하지만 사실 굉장히 복잡하면서도 흥미로운 구성을 만들어 냈었다. '우리 선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번엔 선희(정유미)라는 같은 인물을 두고 세 남자가 각각의 관계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과연 누군 가를 정말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홍상수는 최근 작들을 통해 자신이 의문을 갖고 있는 어떠한 개념들(너무 일반적이라 우리가 잘 생각해보지 않는 것들에 대해)에 대해 하나 씩 작품을 만들어 왔다. 그의 최근 작들을 보면 반드시 등장하는 대사들이 있는데, '이뻐' '착해' 등이 그렇다. 홍상수 감독은 이 일반적인 표현들을 담기 위해 반대로 복잡한 이야기 구성과 깊이를 들고 있다. 이쁘다고 할 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떤 사람을 보고 이쁘다고 할 수 있는지. 착하다는 것은 진정 무엇인지. 누군 가에게 착하다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등 그는 이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주제를 최근 탐구해 왔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우리 선희'는 이런 맥락에서 누군가를 안다고 했을 때 우리는 과연 정말 안다고 할 수 있는 지에 대해 스스로 자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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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그의 작품들에서 특히 도드라졌던 또 다른 점은, 이야기의 소재나 방식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에게 있었다는 점인데, 즉 자신이 실제로 겪었던 사소한 일들에서 시작한 아주 개인적인 것들이 많았다.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영화 감독이거나 영화과 학생들, 교수들 인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주 단순하게 얘기하자면 홍상수는 자신이 실제 겪었던 일들을 토대로 조금의 상상력을 더해 관객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계속 비슷한 이야기처럼 보이는 측면도 있는데, 우리 내 하루하루가 매일 똑같지 않듯이, 그의 이야기도 항상 새로움을 들려준다. '우리 선희'를 보면서 특히 더 본인 스스로에게 하는 이야기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단 극 중 인물들 가운데 하나를 자신으로 설정하지 않고 선희를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의 남자에게 자신의 캐릭터를 각각 분배하여 결국은 자신이 살면서 후회스러웠던 행동이나 말, 그러니까 한 번 내뱉거나 실행해 버려서 두 번째 기회를 갖지 못했던 순간들에 대해, 세 명의 캐릭터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듯 했다. 즉, 김상중과 이선균, 정재영이 연기한 각각의 인물들은 두 번째 기회를 갖지 못하지만, 이 셋을 한꺼번에 보면 서로에게 두 번째 기회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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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 셋이 선희를 둘러싸고 관계를 맺어 가는 방식이 이 영화의 포인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군 가에게 선생님이나 선배가 되어 이야기를 해줄 때가 생기게 되는데, 그 말들이 나중에 생각하면 잘못된 이야기인 경우도 있고, 더 나아가 말하는 순간에도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자존심이나 여러가지 이유들 때문에, 그냥 지나치고 마는 일들이 종종 있다. 영화는 이 세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관객만이 볼 수 있는 이들의 두 번째 기회, 그러니까 직접적이진 않지만 다른 상황, 다른 인물을 통해 기회를 얻게 되는 두 번째 순간을 잘 보여준다. '우리 선희'라는 제목도 그런 측면에서 참 흥미롭다. 남자 셋은 각각 선희를 '우리 선희'로 생각하고 있지만, 과연 선희는 이들에게 '우리 선희'였는지 아니면 누군 가에게만 그러했는지, 영화는 참 덤덤하게 이 과정을 묘사한다.


누군 가를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가라는 질문과 더불어 우리는 과연 누군 가를 평가할 수 있는 가에 대한 질문도 함께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 두 질문은 같은 질문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과연 잘 알지도 못하면서 누군 가를 평가할 수 있느냐는 얘기가 된다 (이러고 보니 홍상수의 전작들은 다 같은 맥락이었음을 또 한 번 깨닫는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누구의 딸도 아닌 선희를, 우리 선희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싶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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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희'는 홍상수 감독의 최근 작 가운데서도 가장 명확하고 대중적인 구성을 갖추고 있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무언가 깊은 슬픔이나 화두를 떠안기 보다는, 오히려 '피식'하는 미소와 함께 '그래 맞아..' 라며 혼자 중얼거리게 만든다. 아... 정말 홍상수 월드의 끝은 어디일까. 금방 끝이 보일 것만 같았던 이 세계가 어쩌면 영원히 끝나지 않는 세계라는 걸 이제는 인정해야 할 것만 같다.



1. 무엇보다 정말 재미있어요. 보는 내내 너무 재미있어서 안달 날 정도. 그의 팬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아직도 뭔지 잘 모르겠는 분들은 '우리 선희'를 보세요.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홍상수 영화의 정수는 그대로 인 흥미로운 작품이었어요.


2. 이제 이선균과 김상중은 얼굴만 봐도, 목소리만 들어도 큭큭 거림이 ㅋㅋㅋ


3. 이민우씨는 이번 작품으로 거듭나려나 했는데 비중이 거의 없더군요. 은근히 잘 어울릴 것 같았는데 아쉬웠어요.


4. 영화를 본 분들이라면 이 곡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겠죠. 정말 신의 한수!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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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 표류기
그들은 과연 괜찮아졌을까?


사실 장진+정재영 조합에 어느 정도 지쳐있기도 했고, 완전 코미디인 것만 같은 홍보방향에 안봐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하고 크게 계획에 없던 영화였는데, 시사회를 통해 들려오는 지인들의 소문은(이 '지인'가운데는 저만 일방적으로 알고 있는 이들도 존재합니다 -_-;;) '괜찮은' 영화다가 지배적이어서 내심 속으로, 역시 <천하장사 마돈나>를 이해영 감독과 함께 쓰고 연출했던 이해준 감독이 재능이 어디가진 않았나보다 라는 생각에 개봉 첫 주에 냉큼 보게 되었다. 얼핏 보면 톰 행크스 주연의 <캐스트 어웨이>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하는 <김씨 표류기>는 코믹한 요소를 전면에 배치하고는 있지만, 잘 따져보면 되게 슬픈 영화인 동시에 이런 코미디 영화에서는 잘 취하지 않는 결론을 택하면서 요즘 한국영화계에 불고 있는 약간의 '일본식' 감성이 더해진 묘한 영화 한편을 만들어냈다.



(아래부터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들께서는 맨 마지막 단락으로 이동해주세요~)




영화의 간단한 줄거리는 카드빛이 억대가 되어 갚을 능력이 없게 된 남자 김씨(정재영)가 자살을 기도하며 한강 다리 위에서 떨어졌으나 죽지 못하고 밤섬에 표류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리게 된다. 또 다른 주인공인 여자 김씨(정려원)는 히키코모리로서 벌써 몇 년째 방안에 틀어박혀서 세상과는 담을 쌓고 지내고 있으며, 유일한 취미는 달 사진을 찍는 것 뿐이다.

일단 이 영화를 사사건건 따지고들자면 애초의 설정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서울 시내 한 복판에 있는 밤섬에서 몇 달 동안이나 표류하게 된다니. 핸드폰 베터리가 떨어졌다는 설정이 가미된다고 해도 이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를 논리적으로 파고들게 되면 이미 시작하기 전부터 말이 안되는 설정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캐스트 어웨이>처럼 정말 무인도를 배경으로 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아니면 도심 한가운데 맨홀 구멍에 빠진다던가 해서 고립되게 되는 좀 더 설득력있는 설정을 가져올 수도 있을텐데 왜 밤섬에 남자가 표류된다는 설정을 가져오게 된 것일까. 해답은 영화 속 카메라 앵글들을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무인도는 말그대로 사방이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이기 때문에 별로 희망자체가 없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없다기 보다는 완전히 막연한 공간이랄까. 하지만 <김씨 표류기>속 밤섬은 완전히 다르다. 마치 탈출을 시도하고자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을 정도로 멀지 않은 곳에 서울시내가(속세) 보인다. 63빌딩이고 한강을 가로 지르는 다리고, 유람선이고, 고층 아파트고 다 보인다. 카메라는 이를 의식하듯 남자 김씨의 시선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밤섬에 앉아서는 거의 섬 밖 서울을 바라본다.

처음 자살을 시도하는 것에서 부터 드러났지만, 남자는 자살까지할 용기도 없는 사람이다. 정말 자살을 원했다면 애초부터 63빌딩 정도로 향해야 했을 것이고 섬에서 그렇게 오래 표류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 밤섬이라는 공간은 그냥 카드빛 등 경제적인 문제, 이성 문제등으로 속세에서 지친 영혼이 모두 훌훌 털고 떠나고만 싶은 일종의 파라다이스에 가깝다. 무인도라는 공간이 어떻게 낙원이 될 수 있는가 되물을 수도 있겠지만, 속세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린 이에겐 아무런 속박없이 지낼 수 있는 무인도 만큼 좋은 곳은 아마 없을 것이다. 초반에 잠깐 탈출을 꿈꾸던 남자는 이내 이 곳에 적응하게 되고 자신만의 공간을 이곳에 꾸미게 된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는 이 곳에 또 하나의 자신만의 공간을 꾸민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다. 쓰레기를 주어다가 이것저것을 만들고 고장난 티비를 주어다가 안에다가 사루비아 꽃을 넣어두고, 패트병으로 신발을 만들어 신는 것들은 단순히 생존의 문제라기 보다는 또 하나의 소유로 볼 수 있을 듯 하다. 사회의 경제논리에서 살아남지 못한 이 남자는 아무것도 없는 이 곳에 와서도 결국 몸에 밴 습성대로 자신만의 욕망을 채워나가게 되는 것이다. '짜파게티'를 먹기 위해 직접 씨앗을 심고 결국 세상 어느 곳에서도 맛볼 수 없을 음식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절망에서 희망을 찾아가는 과정으로도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속세에 물든 남자가 모든 것으로 부터 자유로운 공간에 놓여졌음에도 결국 속세의 연을 끊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측면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 중 하나를 꼽으라면 '진화라는 건 점점 맛있어 지는 것을 뜻하나 봅니다'라는 대사였는데, 굉장히 재미있는 조크로도 사용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 보았을 때 여러가지 면에서 꼽씹어 생각해 볼만한 대사였다고 생각된다. 폭풍우가 치는 밤에 결국 집과 같은 오리배를 떠나보내게 되는 것은 자세히 보면 '놓쳤다'기 보다는 '놓아주었다'라고 보는 편이 더 맞을 듯 싶다.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한 오리배를 떠나보낸 건 세상 속에서 다시 싸울 용기가 없는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며, 스스로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밤섬에 남고 싶은 욕망이 발휘된 행동이기도 할 것이다. 여기서 남자가 흘린 눈물은 집을 잃어서 라기 보다는 결국 세상으로 다시 돌아갈 용기를 얻지 못하는 본인에 대한 연민이기도 할 것이다.

보통같으면 마지막에 군인들이 섬에 도착했을 때 쌍수를 들고 환영했겠지만 남자는 반기기는 커녕 오히려 잡히지 않으려도 안간힘을 쓴다. 그 때 그는 '그냥 여기살면 안되요?' '이것 조차 허락 안되는거에요?'라고 얘기하는데 여기서도 앞서 언급한 욕망의 고리와 자기 연민을 발견할 수 있다. 보통 무인도가 등장하는 영화에서 이런 경우라면, 단순히 오랫동안 머물렀던 공간에 대한 추억과 정이랄까, 일종의 시원섭섭한 감정 때문에 쉽게 떠나지 못하는 것이겠지만, 이 영화에서는 돌아갈 곳도 없고 돌아갈 자신도 없는 주인공의 심리 상태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 영화가 슬프게 다가왔던건 주인공 남자가 자신의 이런 처지를 스스로 잘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지금까지 영화 속에서 슬픈 장면들을 떠올려보면 은근히 먹는 장면에서 울컥하는 장면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지금 막 떠오르는 예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가 온천장에서 하루를 보내고 하쿠를 만나 주먹밥을 얻어먹는 순간 갑자기 슬픔이 밀려와 눈물을 왈칵 쏟는 장면!), 이 영화에서는 직접 짜파게티를 조재해 먹는 장면이 바로 그 장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친듯이 이 짜장라면이 먹고 싶은 남자에게 여자는 짜장면을 배달시켜 주지만 남자는 보란듯이 거절하고 만다. 일종의 자존심이라는 얘긴데, 이건 이미 남자가 밤섬에서 어느 정도 살만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마도 여기서 짜장면을 그저 눈물 흘리며 먹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진정성이 있음은 물론 덜 유치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직접 씨뿌리고 반죽하고 '조리예'를 정확히 지켜 예시 그림의 상태로 완벽한 시식을 하다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맛있어'서도 있겠지만 남자 스스로 '내가 겨우 이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게 짜파게티를 직접 만들어 먹는 것 뿐이구나'라는 것에서 울컥했던 것이며 속세에서 해내지 못한 자신의 무능에 대한 연민이기도 했을 것이다.

사실 이 영화가 감정적으로 좀 더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려면 왜 이 남자가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어느 정도로 한계에 몰렸었는지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이 있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그로 인해 잃게 되는 부분도 분명 생겼겠지만, 이런 과정이 없다보니 이 남자가 밤섬에 표류하며 하는 일들에는 별로 '절실함'이나 '절박함'이 느껴지지 않으며, 그저 용기없는 낙오자로 생각될 뿐이다. 그러니까 세상이 나은 낙오자라기보다는 세상이야 어떻튼 낙오될 확률이 높은 사람으로 밖에는 생각이 안든달까. 남자 김씨에게 절실함의 공감대를 얻을 수 있었다면 영화는 아마 더 좋지 않았을까.




사실 히키코모리이기는 하지만 여자 김씨의 설정 자체는 더 영화적이다. 영화 속 정려원 같은 미모를 같은 여자가 외모 컴플렉스를 갖고 있다는 점도 설득력이 부족하고(ㅎ), 역시 왜 그렇게 마음을 닫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기 때문에 공감대까지 얻기는 부족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밤섬에 표류한 남자와 도심 속 방안에 표류하고 있는 히키코모리를 접합시킨 것은 흥미로운 시도였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공감대를 100% 느끼기 어려웠음에도 이 영화가 괜찮은 영화로 느껴진데에는 영화 속 주인공들이 조금이나마 영화를 통해 배우게 되는, 발전하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혼자가 아니라 두 명의 주인공을 배치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히키코모리인 여자는 남자를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룰을 깨트려 가면서 대화하는 법,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고, 남자는 여자를 통해 삶을 포기하려던 순간에서 혹은 돌아올 자신이 없던 세상에 미약하나마 돌아올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면서(물론 자의로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결국 세상으로 나오려는 절실함과 용기가 없었던 이들이 조금이나마 에너지를 얻게 되는 영화였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 영화가 개인적으로 좀 더 좋았던 건, 마지막에 마냥 행복하게만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자는 자신의 룰을 많이 깨어버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금방 다른 사람들처럼 정상적인 삶을 살기는 어려울 것이고, 남자 역시 수억원의 빛이 갑자기 없어질리 만무하다. 그렇다고 둘이 급속도로 사귀기라도 할 것 같은가 하면 그건 더더욱 아닐 것이다. 결국 두 김씨는 일종의 해프닝을 겪으면서 조금 배우게 되었지만 세상은 그대로이고 담은 여전히 높기만 하다. 그래도 이 영화가 절망적이지만은 않았던 건, 작지만 배움이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이 배움이 갑작스럽지 않고 갑자기 모든 것을 해결할 정도의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깔끔하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찌보면 일시에 '결심했어'하고 단숨에 모든 것을 바꿔버리곤 하는 영화/드라마 속 인물들보다는 더 현실적이라 마음에 들었다. 영화의 느린 속도도 마음에 들었고.




1. 그런데 엔딩 크래딧에서 정작 '농심'의 이름은 확인하지 못했었는데(정확하진 않지만. 그래서 일부 상품은 다른 의도로 쓰이지 않았다는 문구도 삽입되었죠), 이런 경우라면 예전 <여.친.소>와 비교하자면 훨씬 좋은 방향의 PPL이라고 생각되네요. 정식으로 협찬 받지 않았다면 PPL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 아닐까요.

2. 히키코모리가 등장하는 영화를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이건 정말 부자들만 할 수 있는 거에요. 가난하면 은둔생활 할려고 해도 일하지 않으면 못한다는 ;;; 한강이 바로 보이는 뷰를 갖춘 고층 아파트에 살 정도니 역시 잘사는 집인듯.

3. 옥수수콘 깡통에 다시 옥수수를 심는 설정도 재밌더군요.

4. 뽁뽁이로 이뤄진 침대는 한번쯤 해보고 싶더군요. 아, 그리고 크리닝 테이프로 수면 최면 거는건 정말 탁월했어요.

5. 은근히 CG가 많이 사용되었더군요. 특히 하늘 묘사 부분에 CG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6. 음악이 처음에는 정말 많이 좋았었는데, 갈수록 조금씩 진부해지긴 하더라구요;;

7. 민방위 훈련의 필요성을 홍보하는 대국민 홍보영화랄까요 ㅎ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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