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No Country For Old Men, 2007)

지난 해 말부터 개인적으로 <아메리칸 갱스터> <스위니 토드>와 더불어 가장 기대되었던 작품 중,
그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었던 이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파고>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등을 만든 코엔 형제의 작품으로, '서부의 셰익스피어'로 불린 다는
미국의 작가 코맥 맥커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아무래도 코엔 형제의 대표적인 서스펜스 영화를
들자면 <파고>를 들 수 있겠는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여기에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는
(왜냐하면 <파고>도 상당히 장인의 솜씨가 묻어나는 작품이었기 때문에), 즉 고수가 달래 고수라 불리는게
아니라는 진리를 스스로 확인시켜주고 있는 영화라 할 수 있겠다. 엄청난 서스펜스와 긴장감, 그리고
역시 고수대열에 들거나 혹은 이미 들었거나 한 배우들의 출중한 연기력, 그리고 아직도 그 능력이 한참이나
남았음을 보여준 코엔 형제의 연출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수준 높은 작품이었다.



이 영화의 원작이 된 동명 소설은,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코엔 형제가 아주 좋아하는 이야기이다.
극중 인물은 특별한 상황에 놓이게 되고(이 영화에서는 돈가방을 얻게 되는 것), 그를 둘러 싸고 각자
다른 인물들이 개입되면서 얽혀나가는 과정 중에 서스펜스와 긴장감을 부여하고, 그 속에는 단순하지만
무거운 주제 의식을 깔고 가는 형식을 이 영화는 갖고 있다. 이런 점에 있어 <파고>와 자주 비교를 하게
되는데, <파고>가 좀 더 유머가 있고, 극적인 요소가 있었다면, 이 영화는 <파고>보다도 좀 더 담담한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있고, 좀 더 장르영화적인 구성을 갖추고 있는 것은 물론, 캐릭터가 돋보인
영화이기도 했다. 이 영화를 감상하면서 가장 놀라웠던 점은 엄청난 긴장감과 서스펜스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아주 느긋하게, 담담하게 풀어가는 방식이었는데, 일반적인 서스펜스라하면 최근 개봉했던 우리영화 <추격자>
처럼 속도감있는 방식과 치닫는 형식을 갖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영화는 이런면에서 너무도 느긋하다.

얘를 들어 인물들은 서로를 숨이 막힐 정도로 뛰어서 쫓지도 않고, 극박한 상황에 극적인 음악이 흐르지도
않지만, 조용히 서로 전화통화를 나눈다던지, 문을 사이에 두고 한 동안 대립한다던지 하는 것 만으로도,
극한 긴장감을 조성한다. 극 중 모스(조쉬 브롤린)는 자신을 쫓는 이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모텔을 여기저기
옮겨다니고 시거(하비에르 바르뎀)는 이를 계속 뒤 쫓기는 하지만, 이 것이 극박하게 그려지지는 않는다.
마치 모스가 덫을 놓고 시거를 기다리는 냥 생각될 정도로 느긋함이 느껴지지만, <추격자>에서 느꼈던 것과는
또 다른 극한 긴장감을 아니 느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이 영화는 영화 음악이 거의 없다.
서스펜스 영화의 경우 극적인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해 효과적으로 음악을 사용하는 경우가 아주 많은데,
이 영화에서는 거의 음악을 찾아볼 수가 없고, 극적인 상황에서도 단순히 효과음 만으로 이를 보조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시거가 사용하는 그 무기(?)가 발사될 때의 효과음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것 같다.
이렇게 음악도 없고 느긋하게 전개 되지만 긴장감이 유지되는 것을 넘어 넘쳐났던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바로 소름돋도록 냉정한 대사에 있었다. 특히 시거가 내뱉는 대사들은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하는, 냉정하고
잔인한 현실 세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자신만의 정해진 원칙에 따라 잔인하게 살인을 저지르는,
그리고 저지르게 전에 마치 상대의 목을 조르는 듯한 압박감을 전해주는 그의 말투와 대사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가 직접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들 보다도, 그가 말을 할 때 더 공포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역시 이처럼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시거가 사람들을 죽일 때의 텀을 매우 짧게하여
그야말로 무자비함, 냉정함을 잘 표현해내고 있다. 나중에 또 이야기하겠지만, 여기에는 하비에르 바르뎀의
연기가 큰 몫을 했다.



사실 내용적인 면에서는 얼핏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돈 가방은 누가 결국 가져갔는지,
시거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모스의 아내는 결국 죽은 것인지 등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것들부터 조금은
추측할 수 밖에 없는 것들도 있지만, 이 영화가 말하려는 것은 결국 누가 돈가방을 차지함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속에서 모스와 시거, 보안관 에드를 통해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같은 모호함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나 나중에 곱씹어 보면 영화의 이야기를 대충 가늠해볼 수 있었던
초반 에드의 독백과 영화의 제목도 그렇고, 자신만의 원칙은 꼭 지키던 시거가(그 원칙을 지키기 위해 안죽여도
되는 모스의 아내를 나중에 죽이기까지 한 시거가), 자신은 파란불 신호를 잘 지켰음에도 신호를 지키지 않은
다른 사람에 의해 사고를 당하게 되고, 지나가던 아이들이 전혀 댓가없이 도와주려고 했던 것을 통해,
원칙대로 해도 결국에는 어쩔 수 없는(바로 그 자신도), 현명한 보안관인 에드가 막아보려고 했었지만,
결국에는 모스의 죽음도, 시거를 잡을 수도 없었던 것을 통해, 최소한의 인간성 조차 매말라버린,
그리고 이를 바로 잡으려는 힘없는 자들의 지혜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냉혹한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댓가없이 옷을 건네주었던 아이와 그 친구조차, 돈을 받고나서는 서로 나누자 말자로 다투는 모습을 멀리서
보여준 것도, 이 냉혹함을 빗대어 보여준 좋은 장면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토미 리 존스가 아내에게 담담히
꿈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끝나는 듯 하지만, 이 엔딩이 곰곰히 생각해보면 정말로 심오한 마지막이 아니었나 싶다.



하비에르 바르뎀의 연기는 정말로 후덜덜 그 자체였다. 스페인 출신의 그의 연기를 가장 인상적으로 보았던
영화는 <씨 인 사이드>였는데, 물론 두 영화에서 그가 연기한 캐릭터의 헤어 스타일이 유독 많이 차이나긴
하지만(^^), 그래도 과연 이 두 캐릭터를 한 배우가 연기한 것인가 생각될 만큼, 전혀 다른 스타일의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가 이번 영화에서 보여준 독특한 단발 스타일은 가발이 아니라 실제 그의 머리라고 하는데,
예고편에도 등장하는 도로 변에서의 살인 장면에서만 해도 약간은 코믹함이 느껴질 뻔 했으나, 나중에는
그 단발머리 조차 무서워질만큼, 오랜만에 무서운 악역을 만난듯 했다. 가장 최근에 <아메리칸 갱스터>에서
비리 경찰의 더러움을 잘 보여주었던 조쉬 브롤린은 이 영화에서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인간의 군상을 그린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는데, 평범함과 섬찟함을 동시에 갖고 있는 그의 얼굴은, 돈가방을 우연히 얻게 되며
어려움를 겪는 모스를 연기하는데 효과적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영화를 통해서 좀 더 좋은 많은 작품에서
또 그를 보게 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토미 리 존스. 그가 이 영화에서 보여준 연기는 정말 그야말로 내공없이는 할 수 없었던 연기가
아니었나 싶다. '나이가 먹으면 하느님이 어떻게 도와주시겠지 했었는데, 이제는 힘이 부친다'라고 말하는
그의 주름진 얼굴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제목을 또 한 번 실감하게 되는 연기 그 자체였다.
담담한 듯 하면서도 애써 위안할 수 밖에는 없는 보안관 캐릭터를 연기한 토미 리 존스의 연기는, 어쩌면
강렬해 보이는 하비에르 바르뎀의 연기에 가려져 돋보이지는 않지만, 아마도 영화를 두번 세번 보게 되고,
다시금 떠올려본다면 '와, 참 대단한 연기였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지 않을까 싶다.

영화를 볼 때는 그 속에 몰입되어 있어 정확히 알 수 없었는데,
이렇게 보고 난 뒤, 한 발작 물러서서 다시금 생각해보니 참으로 대단한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참, 대단하구나 코엔 형제!


1. 중반에 모스가 히치하이킹을 하게 될 때, 노인 운전사가 했던 말이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2. 우디 헤럴슨은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인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_-;;




 

 
글 / ashitaka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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