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키리 (Valkyrie, 2008)
서스펜스로 돌아온 브라이언 싱어
며칠 전 내한하여 수많은 한국팬들에게 톱스타 다운(혹은 답지 않은) 엄청난 매너와 그 많은 팬들에게 일일이 싸인을
해주어 일부에서는 '성인'으로 까지 추앙받기도 했던 톰 크루즈 주연의 스릴러 영화 <발키리>를 보았다(이 영화를 액션 대작
으로 잘못 알고 극장을 찾은 분들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할 따름이다). 국내에서는 <작전명 발키리>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는데,
잘 알려졌다시피 히틀러 암살 계획을 다루고 있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이 영화가 개봉전 부터 큰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비단 톰 크루즈 때문만은 아니었다. <엑스맨>과 <유주얼 서스펙트>를 연출했던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오랜만에
스릴러 장르로 돌아와 만든 작품이었기 때문에, 과연 <식스 센스>오 더불어 가장 대표적인 반전 영화로 꼽히기도 하는
<유주얼 서스펙트>의 완성도를 다시 한번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재미있는건 <유주얼 서스펙트>는
범인이 누구인가를 맞추는 '퀴즈'같은 형식이었다면, <발키리>는 이미 누구나 다 결말을 알고 있는 이야기를 다룬 '해설'
같은 형식이라는 점이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영화다 보니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 같네요 ^^;)
히틀러 암살 작전에 관한 영화는 이전에도 몇 편있었고, 굳이 영화가 아니더라도 역사로서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사건이라
영화화 하는 것에 부담이 되었을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워낙에 반전 자체에만 목을 매는 국내 관객들을 감안해보자면
차라리 '어떻게 될까?'하고 기대를 하지는 않을테니 나쁜 선택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을 듯 하다(그런데 재미있는건 극장에서
분위기를 보니 이 이야기가 어떻게 결말이 나는지 잘 모르고 있는 사람이 의외로 많았다는 것이다(?). 그랬다면 더 흥미진진한
서스펜스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 결말이 이미 나와있는 이야기라면 결국 그 과정을 얼마나 설득력있고, 긴장감 넘치게
그려내는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일터. 정말 잘 만들어진다면 이미 결말을 알고 있음에도 문득 문득 '히틀러가 정말
암살되었던가?하고 착각할 정도로 서스펜스를 이끌 수도 있을텐데, 이런 면에서 브라이언 싱어의 <발키리>는 합격점을
줄 만하다. 확실히 브라이언 싱어는 장르 영화에 재주가 있는 감독이다. 결말을 다 아는 이야기를 영화화 할 경우, 그 과정을
그리는 방법에 있어 새로운 방식이나 이야기를 담아내는 경우가 많은데, <발키리>는 이런 경우도 아니라 하겠다.
이 작품이 다큐멘터리는 아니지만, 실제 역사와 흡사한 설정과 장면들을 디테일하게 배치하였고, 현실감을 더 하기위해
제작비의 대부분을 미장센을 만들어내는데 쓰기도 했다. 영화적으로 보았을 때도 서스펜스 영화들에 자주 등장하는
클리셰들을 여기저기 배치하고 있다. 영화 초반 슈타펜버그(톰 크루즈)가 적군의 폭격을 받아 부상을 당하는 장면에서,
고개를 옆으로 하고 쓰러지는데, 이 장면은 그의 최후에 그대로 다시 복선으로 등장하며, 영화의 주된 긴장 요소라고
할 수 있는 '가방'에 관한 시퀀스도 매우 전형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브라이언 싱어가 만들어낸 <발키리>에서는
'저거 예전에 본 거 아니야?'하는 생각이 거의 한 번도 들지 않았다. 이것은 감독의 연출력은 물론이고, 여러 중견 배우들의
무게있는 연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발키리>에 출연하고 있는 배우들의 면면은 결코 가볍지가 않다. 개인적으로 영화에 대한 정보를 거의 얻지 않은 상태에서
항상 영화를 감상하기 때문에 익숙한 배우들이 한 명 한 명 등장할 때마다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었는데, 영화가 영화이니 만큼
이들 중 한 두 명만 있어도 가능할 법한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모두가 적절하게 분량을 나눠가진 듯한 느낌이었다.
최근 <추적>을 연출하기도 했던 케네스 브래너를 오랜만에 스크린에서 만나볼 수 있었고(해리포터 이후 스크린에서는 오랜만에
만난것 같네요), 빌 나이, 톰 윌킨슨, 크리스찬 버켈, 토마스 크레취만 등 여러 작품을 통해 인상적인 조연으로 만나볼 수
있었던 중견 배우들을 가득 만나볼 수 있었다. 특히 토마스 크레취만 같은 경우 최근 <원티드>를 비롯해, <킹콩> 'U-571',
<피아니스트> 등을 통해 개인적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던 배우였는데, 이 영화에서 선과 악을 동시에 표현해 내는 그만의
독특한 아우라를 느낄 수 있었다.
거의 여자 배우가 출연하고 있지 않은 이 영화에서 슈타펜버그의 부인 역할로 등장하는 캐리스 밴 허슨은 비중이 특히
더 적어 좀 아쉬웠던 경우였다. 그녀는 이미 <블랙북>을 통해 비슷한 시기의 인물을 연기한 적이 있어서 그런지,
영화의 배경과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으나 비중 자체가 많지 않아, 외모를 비롯한 보여지는 것외에 연기를
펼칠만한 여지는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수 많은 인상 적인 조연 연기자들 가운데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배우는
단연 테렌스 스템프라 할 수 있는데, 그는 특히 최근들어 <원티드> <예스맨>등에 비중있는 조연으로 출연하면서,
다시금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 같아 더욱 반갑기도 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수 많은 조연 연기자들이 비중을 적절히
나눠 갖은 것은 한편으론 '적절하기도'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캐릭터를 표현할 여지가 많지 않다는 뜻도 되는데,
테렌스 스템프 역시 워낙에 아우라가 강한 배우여서 그렇지, 연기로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카리스마 넘치는 마스카와 목소리 만큼은 여전히 유효했다.
<발키리>는 서스펜스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수작임에는 분명하지만, 개인적으로 스티븐 스필버그가 연출한 <뮌헨> 정도의
깊은 인상은 주지 못했던 것 같다. 일단 짧지 않은 러닝타임이긴 했지만 히틀러를 두고 벌이는 이 '암살작전'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왜 충성을 맹세한 것을 거두고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하느냐'에 대한 동기부여는 충분히 설명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슈타펜버그는 그저 본래 부터 히틀러를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거나, 그저 조국 독일을 위하는
애국심이 넘치는 사람 그 이상으로는 그려지지 않는데, 그의 가족을 조명하는 장면에서 어느 정도 의도는 알 수 있었으나,
설득력 면에서는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암살작전에 가담하는 다른 조연 캐릭터들의 경우는 더더욱 부족한 면이 있어
전체적으로 서스펜스에는 이끌려가지만, 감정적으로 동화되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작전 자체에 집중한 것도 좋았지만, 구테타 세력이냐 히틀러냐를 두고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선택해야만 하는 인물들의
심리적인 갈등을 좀 더 비중있게 그려주었다면 좀 더 깊은 인상을 남긴 영화로 기억되었을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조금은 아쉬웠다(만약 이대로 되었다면 아마도 리뷰의 부제목이 '역사의 선택의 놓인 사람들' 정도가 되지
않았을까 ^^;).
아, 얘기하다보니 정작 톰 크루즈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못했는데, 개인적으로 항상 톰 크루즈는 연기력에 대해 과소평가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이 영화에서 톰 크루즈는 역시 또 한 번 부족할 것 없는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발키리>에서 그가 맡은 슈타펜버그가 톰 크루즈 최고의 연기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라고 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사실 <발키리>는 톰 크루즈와 여러 중견배우들과의 연기 앙상블을
보는 재미가 더욱 쏠쏠한 영화이기도 했다.
1. <발키리>는 나치당원인 독일인들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독일인들이 매우 반길 만한 영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2. 히틀러 역할을 맡은 배우의 연기도, 그 캐릭터도 괜찮더군요. 문득문득 '독재자'다운 포스가 느껴졌달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