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을 쫓는 아이 (The Kite Runner, 2007)

이 영화의 원작은 2003년 발간한 동명 소설 <연을 쫓는 아이>인데 이 소설은 2005년 전미 베스트셀러 3위를
기록하고, 2004년 미국도서관협회의 '청소년이 읽을 만한 성인도서'로 선정될 만큼 미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베스트셀러이다. 영화는 이 소설을 스크린으로 옮겨왔는데, 대부분의 대사가 자막으로 처리될 만큼
영어가 아닌 그들의 언어가 사용되었으며, 아프칸과 그 사람들의 이야기와 과거를 훌륭한 문체로 풀어낸
작품으로 주목을 받았다. 원작을 쓴 할레드 호세이니는 영화 속 주인공 아미르 처럼,
아프칸에서 태어나 소련 침공시 미국으로 망명한 '아프칸 출신 미국인'이다.

사실 이 영화는 얼핏 깊게 생각하지 않고 스쳐 지나가면 매우 감동적인 드라마로 다가온다.
베스트셀러 소설답게 이야기를 끌어가고 감동을 자아내는 재주가 탁월하며, 주인공 아미르의 감정변화에
보는이가 흠뻑 빠지기 쉽도록 영화도 좋은 전개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중에도 약간 불편한
마음이 있었다. 그러다가 영화 속에서 아미르가 아이를 찾기 위해 다시 카불을 찾았을 때, 예전 핫산에게
피해를 주었던 친구가 '너는 왜 돌아왔느냐, 소련이 침공하고 공산주의와 싸울 때 너는 어디있었느냐,
우리는 스스로 민족을 지켰다'라고 얘기할 때 비로서 이 영화에 대한 감정 정리가 제대로 되었다.
얼핏 보면 아프칸의 어려운 정치적 상황 속에서 피어난 인간애를 통해 탈레반의 잔혹함과 동시에,
모든 아랍인을 적으로 생각해선 안된다는 메시지만을 주는 것 같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건 어디까지나
'아프칸'인이 아니라 이제는 '미국인'이 되어버린 사람의 시각에서 쓰여진 작품으로서, 그들의 이야기인양
교묘하게 위장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어린 시절 아미르와 핫산의 관계는 충분히 훗날의 이야기에 감동을 전해줄 만큼 소중했던 것은 맞다.
이 둘은 주종 관계였지만, 분명 가장 친한 '친구'였다. 하지만 자신을 지켜주던 핫산이 당하는 것을 그저 보고만
있었던 아미르는 죄책감으로 스스로 핫산을 더 멀리하게 되고, 오히려 자신을 떠나도록 만드는 계기를 제공한다.
어른이 된 아미르는 우연한 기회에 핫산의 소식을 듣고 그가 이미 죽은 것과 아이가 혼자 고아원에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만약 여기서 아미르가 핫산에게 진정으로 미안한 마음을 그동안 가지고 속죄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이 아이를 구하기 위해 전후사정 생각하지 않고 카불로 떠났어야 했다. 하지만 영화 속 아미르의
모습은 다르다. 처음에는 분명히 '제가 굳이 가야됩니까. 돈이라면 얼마든지 주겠다며, 사람을 보내서 아이를
데려오라고 한다. 하지만 자신이 핫산과 형제고 결국 이 아이가 자신의 조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더군다나 아미르 부부는 불임으로 아이가 없는 불완전 가정이다), 그 때야 직접 카불로 가겠다고 한다.
이것은 결국 속죄의 의미처럼 보이지만, 진정한 속죄라기 보다는 이기적인 이유로 아이를 되찾으려 하는 것
밖에는 되질 않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에 감동하는 이유는 바로 '핫산'의 충직함 때문일 텐데,
어린시절도 그렇고 어른이 되어서도 작은 거짓말만해도 살 수 있었던 경우마다 충직하게도 주인에게
피해가 갈까봐 자신을 돌보지 않았던 핫산은 결국 죽음에 까지 이르게 된다. 그래서 관객들은 핫산에게
연민을 느끼면서 아미르의 속죄에 더욱 공감을 하게 되는 것인데, 이것도 감정적으로는 상당히 훌륭한
장치일지 모르지만, 본질적으로는 주인과 하인이라는 관계를 더욱 심하게 인식시키는 것 밖에는 되지 않는다.
결국 미국인의 입장에서는 '친구'였어 라기 보다는 '충직한 하인'이었어가 되면서, 계급 평등 혹은 계급이라는
것 자체의 무의미로 생각이 발전하지는 않고, 반대로 '저런 충직한 하인이 있었으면 좋겠다'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물론 탈레반은 나쁜 사람들이다.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사람을 죽이고 테러를 저지르는 행위가 절대 정당화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입장에서보면 미국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근데 이 영화는 2000년까지의
이야기만 담고 있다. 즉 9.11이전의 상황만 담고 있기 때문에 아프칸의 탈레반은 무조건 악당이고, 미국은
이를 피해 온 아프칸 사람들에게 낙원처럼 그려진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지 않는가. 물론 이 작품이 2003년에
출판되었다고 해서 2003년에 쓰여진것은 아니겠지만, 이 작품은 분명 9.11이후 미국내에 아프칸계 이민자들에
대한 입장이 담겨있는 영화이다. 당시 전시 상황에서 미국으로 망명해 지금까지 미국사회에서 미국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들은, 영화에서 보다시피 아프칸에서 살 때에도 테러범과는 거리가 먼 지식인에, 엘리트고
민주주의를 생각하는 옳은 사람들이었으며, 나중에 아미르가 아이를 찾으러 카불로 가서 겪는 일들을 보여주면서,
탈레반의 극악함은 강조하고, 결국 나는 아프칸 사람이었지만 탈레반과는 전혀 다르다라는 것을
같은 땅에 살고 있는 미국인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전적으로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테러를 저지르는 탈레반들과 일반 아프칸 사람들이 동일시
될 수는 없으며, 9.11이후 미국내에서는 모든 아랍인들을 테러범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를 얘기하는 방법이 좋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차라리 대놓고 이야기 했으면 좋았을 텐데,
교묘하게 감정으로 녹아들도록 자신들의 처지와 입장을 빙 둘러 설명한 영화가 결과적으로는 생각해봤을 때
뒷 맛이 씁쓸했다. 이런 점에서 자신의 조카로 밝혀진 뒤에 아이를 찾으러 고아원에가서 그곳을 책임지는
사람이 아미르에게 '다른 아이들은 어찌할거냐, 그 아이만 빼가면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해야되나'라는 말에
더 무게가 실린다. 물론 아미르가 슈퍼 히어로도 아닌터라 민족 해방을 위해 탈레반과 싸울 수는 없겠지만,
결국 아이를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와 편안하게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연을 날리는 장면은, 이런 면에서
상징적이라고 해야겠다. 결국 영화는 이데올로기를 제외하고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나누었던 우정을
감명 깊게 그리는 것으로 포장되지만, 사실은 아프칸에서 망명한 '미국인'의 개인적인 성공담이었을
뿐인 것이다.

영화를 다 보고 분노까지는 느끼지 않았지만, 뭔가 방법이 옳지 못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미국인들은 이 영화를 보며 감동과 아프칸이라는 미지에 세계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만약 아프칸에서 지금도 살고 있는 그들이 보면 어떤 기분이 들까. 아마도 미국인들이
느끼는 것과는 분명 다를 것이라 생각된다.


* 추가로 영화를 본 내 생각과 너무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신 씨네21 기사가 있어 아래 링크로 대신한다.
   황진미 기자님은 나보다도 훨씬 더 분노하신 듯 싶다 ^^;
http://movie.naver.com/movie/mzine/read.nhn?office_id=140&article_id=0000010532




 
글 / ashitaka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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