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달 (紙の月 Pale Moon, 2014)

공허하게 떠도는 유령의 그림자



무언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영화들이 있다. 담아내고자 한 이야기가 너무 거대해서 일일이 말이나 글로 옮기는 것이 버거운 경우도 있고, 정반대로 명확하게 전달하기 보다는 모호하게 담아내 딱 부러지게 표현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는데, 요시다 다이하치의 '종이 달 (紙の月 Pale Moon, 2014)'은 후자에 더 가까운 작품이다. 국내 개봉 포스터를 보면 메인 카피로 '그녀가 그토록 원한 건 무엇이었을까?'라는 문구가 있는데, '종이 달'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이지만 영화가 끝나도 그 명확한 답은 주지 않는다. 아니 주지 않았다기 보다는 애초에 답이 없었다는 편이 더 맞겠다. 은행의 계약직 사원으로 평범한 생활을 해오던 리카 (미야자와 리에)에게 어느 날 갑작스럽게 하지만 오래 전 부터 이미 천천히 그녀를 잠식했었던 '무엇'으로 인해, 그녀의 삶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뒤틀려 간다. 이렇게 평범하고 별 문제 없어 보이던 그녀가 깊은 늪에 빠지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녀가 그토록 원한 건 무엇이었을까?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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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달'엔 크게 두 가지 사건이 하나로 묶여 전개 된다. 하나는 유부녀인 리카가 우연히 만난 젊은 남자와 부적절한 관계에 빠져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은행원인 그녀가 거액을 횡령하게 되는 범죄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종이 달'이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 끝은 불륜이나 범죄 사건이 모두 아니다.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그녀가 우연히 만난 젊은 남자와 관계를 맺고 일탈하게 되는 것은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며, 은행원의 신분을 이용하여 점점 큰 금액을 횡령하는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이유는 돈에 대한 욕심이나 부에 대한 욕망 때문이 아니다. 영화는 처음부터 이 두 가지의 가능성을 부정한 뒤, 그렇다면 그녀는 왜 이런 행동들을 하게 되는지에 대해 아주 천천히, 섬세하게 묘사해 간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듯한 대화나 장면에서도 그녀의 마음 속은 복잡한 소용돌이가 일고 있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별 문제 없어 보이는 남편과의 관계로 무언가 단절된 듯한 느낌이 있고, 퇴근 길에 우연히 들린 화장품 가게에서 평소 완 다르게 과소비를 하게 되는 모습에서도, 직장 동료의 얘기를 흘려 듣는 듯 하는 순간에서도 그녀는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음이 목격된다. 그리고 이 작은 일상의 순간들은 거대한 파도가 되어 그녀를 삼켜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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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카가 점점 더 고가의 사치를 누리게 되고, 그에 따라 더 큰 비용을 횡령함에 따라 점점 더 늪의 수렁으로 깊게 빠져드는 과정도 일련의 다른 이야기와는 조금 달리 볼 필요가 있다. 흔히 평범한 인물이 범죄, 도박 등 어떤 것에 빠져들게 되면서 나중에는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할 정도로 완전히 잠식되는 이야기가 일종의 중독에 관한 것이라면, 리카의 행동은 삶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 혹은 완전한 탈출(자유)에 대한 추구라고 봐야 할 것이다. 즉, 리카의 이상 행동이 점차적으로 커져가는 과정은, 그 과정 속에서 아직까지도 그녀가 얻고자 하는 답을 얻지 못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영화의 첫 번째 질문으로 돌아가서, 그녀가 그토록 원한 건 무엇이었을까? '종이 달'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 지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일상을 살아내야 했던 인물에 대한 질문이다. 리카가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만나 관계를 맺는 것은 그저 흔한 일탈이 아니라 그 남자에 대한 가여움 때문이다. 큰 비용을 빚지고 대학생 신분으로 학비도 내기 힘든 그를 리카는 진심으로 돕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고, 그와 동시에 그녀가 점점 더 큰 사치를 하게 되는 것은 일종의 행복을 사고자 한 행위였으나 끝까지 알 수 없었기에 계속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로 영화가 리카와 관계를 맺게 되는 남자를 빚 때문에 의도적으로 리카에게 접근하거나 이용한 것으로 그리지 않은 것은, 리카의 행동에 대한 질문과 답이 흐려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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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달'이 범죄영화거나 스릴러가 아니라는 점은 후반부에 드러난 영화의 태도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결국 모든 범죄 행위가 발각된 리카는 자신의 죄를 묻는 동료와의 대화 중 자신의 진심을 처음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리카의 진심을 듣게 된 동료 역시 그녀를 연민과 더 나아가 부럽기까지 한 눈으로 바라본다. 그런 의미로 이 시퀀스에서 리카가 유리창을 깨고 달려가는 장면은 몹시 인상적이었다. 왜냐하면 이건 그럼에도 아직 답을 찾지 못한 그녀가 결국 삶의 늪에 잠식되어 스스로 죽음을 수긍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설령 그것이 유령처럼 현실을 떠도는 것일지라도 이 곳에서 벗어나 여정을 계속 하겠다는 것으로도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리카의 여정은 또 다시 파국으로 혹은 죽음으로 치닫을 확률이 더 클 것이다. 답을 찾기엔 그녀는 이미 너무 오랜 시간을 그 속에서 살아냈고, 더 나아가 그 답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는지 조차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종이 달'은 그래서 참 쓸쓸한 영화였다. 그것은 아마도 모든 것을 잘못한 그녀를 동정할 수 밖에는 없었던 이 가짜 세상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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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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