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다 걸프 해안의 작은 마을에 사는 8살의 핀 벨(Finnegan Bell: 에단 호크 분)은 누나와 함께 산다. 가난한 집안형편이지만 화가가 꿈인 핀은 아름다운 바다를 그리며 자신의 꿈을 키워나간다. 어느 날 그는 탈옥한 죄수 루스티그(Prisoner - Lustig: 로버트 드니로 분)를 우연히 만나 그의 발목에 찬 족쇄를 풀어주면서, 그의 단순하고 평화로운 생활이 깨어짐을 느낀다. 인근에서 가장 부자로 소문나 있는 노라 딘스무어 여사(Ms. Dinsmoor: 앤 밴크로프트 분)로부터 갑작스런 초대를 받게 된 핀은 그녀의 은둔자적인 비밀스런 삶에 두려워 하면서도 그녀의 조카인 에스텔라(Estella: 기네스 펠트로 분)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사랑으로 매일 그녀를 찾는다.



에스텔라는 그런 핀에게 상류사회 특유의 냉정함과 오만함으로 일관하지만 핀이 그녀를 그린 그림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에스텔라를 사랑한다면 그의 마음만 아플 거라는 노라의 충고에도, 어느새 커버린 그들은 서로에 대한 호감을 억누를 수 없다. 노라의 말대로 에스텔라는 홀연히 파리로 떠나버리고 절망에 빠져 헤매던 핀은 그림그리기를 포기한 채 나날을 보낸다. 갑작스런 익명의 후원자 덕분에 뉴욕에 보내진 그는 화가로서의 꿈을 이루며 뉴욕 미술계의 유망주로 떠오른다. 부와 지위, 명성을 한꺼번에 얻게 된 핀은 에스텔라와의 갑작스런 재회에 행복해 하지만 그녀는 다른 남자의 청혼을 받아들였다는 한마디 말로 그에게 또 한번 깊은 상처를 남긴다. 괴로워하는 핀 앞에 갑자기 나타난 루스티그는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며 그가 누리는 위대한 유산의 의미를 깨우쳐 주는데.



[위대한 유산]을 보고 나서 머리 속에 가장 강하게 남는 이미지는, 영화 내내 스크린을 녹색 빛으로 물들였던, 녹색 그 자체의 색감일 것이다. 이러한 색의 이미지는 다분히 감독에 의해 의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온통 초록색의 나무들과 넝쿨 들이 어지럽게 감싸고 있는 딘스무어의 저택과 그녀의 화려한 초록색 옷차림. 그리고 어린 에스텔라의 초록색 원피스와 영화의 중반 뉴욕에서 다시 만날 때의 초록색 의상까지... 어찌 보면 원색 계열이나 우울한 정서를 한껏 담은 블루 톤에 비해 수수하고 무난한 것이 초록이라 하겠지만, [위대한 유산]에서는 얘기가 조금 다르다. 초록 자체의 느낌은 밝고 생동감 있는 것이지만, 영화의 쓰인 그린(Green)의 느낌은, 블루(Blue)보다 우울하고, 레드(Red)보다도 강렬하며, 어떤 컬러보다도 뇌리에 깊이 파고드는 인상을 준다.



이 영화는 알다시피 너무나도 유명한 찰스 디킨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것이 리메이크가 되었던 처음이 건 간에, 원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작품들은 엄청난 부담감을 지고 갈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대부분의 리메이크 작품들은 원작보다는 못하다는 평을 듣는 경우가 지배적이었고, 평균적으로 보자면 [위대한 유산]도 마찬가지라 하겠다. 영화 [위대한 유산]은 분명 동명 소설에서 기초하고 있지만, 일련의 리메이크 영화들과 동등하게 분류하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을 듯싶다. 감독인 알폰소 쿠아론은 원작에 기초하되 가능한 한 새로운 작품을 만들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고, 이 같은 의도는 비교적 성공했다고 여겨진다. 멕시코 출신인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이 영화와 [이투마마]로 자신만의 색을 드러내며 평단과 관객을 모두 만족시키는 감독으로 떠올랐고, 최근에는 줄곧 해리포터 시리즈를 감독했던 크리스 콜롬버스의 뒤를 이어, 3편인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를 작업하고 있다.



[위대한 유산]이 헐리웃 적이고 대중적인 것은 아무래도 출연한 배우들의 영향력이 컸다.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배우들이 ‘즐비’까지는 아니나 ‘제법’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러브스토리의 남여주인공은 에단 호크와 기네스 펠트로가 맡았다. 상업영화에 출연하면서도 헐리웃 적이지 않고, 이지적인 매력을 풍기는 에단 호크는 이 영화에서도 그러한 자신의 매력을 충분히 보여준다. 혹자는 이 영화에서 에단 호크의 연기가 카리스마가 없고 이미지도 약하다고 평하지만, 그것이 연기를 잘 한 것이다. 극중 핀의 캐릭터는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소심하고 자신감이 부족한 여린 캐릭터라 할 수 있다. 영화 내내 자신감이 없어보이던 핀의 얼굴은, 마지막 장면에 가서야 비로서 편안함과 여유를 찾게 된다.



[위대한 유산]에서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기는 배우는 누가 뭐래도 기네스 펠트로 라고 할 수 있다. 도대체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과 행동으로 얄밉기까지 한 에스텔라 역을 맡은 기네스 펠트로는, 적역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 만한 열연을 펼쳤다. 신비스럽고도 도도한 에스텔라 역은 사실 다른 배우가 맡았으면 말 그대로 재수 없는(?)역할이 되었을 런지도 모를 일이다. 대부분 배우들의 이름이 스크린에 오를 때 주연 배우들 외에 유명한 배우들이 조연이나 카메오 등을 맡았을 경우 'and'로 표현되곤 하는데, 위대한 유산에는 'with'가 추가되었다. [졸업]으로 많은 영화 팬들에게 인상을 남겼던 앤 밴크로프트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녀는 이 작품에서 멕시코만의 갑부인 노라 딘스무어 역할을 맡아 그야말로 관록있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짙은 화장과 담배로 외롭게 살아가는 딘스무어 역은 두 주인공보다도 [위대한 유산]을 더 [위대한 유산]답게 만들어 주었다. 슬픈 눈으로 ‘배사매 무쵸’를 부르던 그녀의 연기가 인상 깊게 남는다.



그렇다면 'and'는 누구인가? 더 이상 연기력을 논할 여지가 없는 로버트 드니로가 그 주인공이다. 로버트 드니로는 이 영화에서 출연하는 러닝 타임은 길지 않지만,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위대한 유산’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중요한 인물로서 짧지만 강한 인상을 준다. [위대한 유산]은 이렇듯 젊고 색깔 있는 두 배우와 노련미가 저절로 느껴지는 두 배우가 조화를 이루면서, 영화의 완성도는 뒤로 하더라도 연기력만큼은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영화가 되었다.



영화 속 주인공 핀은 화가로 등장하는데, 그의 그림들을 보다보면 참으로 개성 있고 독특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영화의 등장하는 모든 그림을 그려준 이는 프란치스코 클레멘테(Francesco Clemente)라는 이탈리아의 실제 화가이다. 1952년 나폴리에서 출생한 클레멘테는 80년대 등장한 트랜스 아방가르드 계열의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장 미셀 바스키아와 공동작업으로 전시회를 열기도 했던 화가이다. 처음 이탈리아 벽화를 그리는 화가로 알려졌던 클레멘테는 인물과 사물을 관찰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시선과 밝고 어두운 단면을 모두 잘 소화해 내는 능력을 톡톡히 인정받고 있다. 그러한 면을 반영하듯 영화 속 그의 그림들은, 물고기나 사물을 나타낸 그림들은 비교적 수채화 같이 밝게 느껴지지만, 에스텔라의 초상화라던가 조 삼춘의 초상화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어둡고 슬픔이 묻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필자도 그러하였듯 평소에 이러한 그림들과 화가들을 접할 기회가 드문 이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고, 영화를 계기로 프란치스코 클레멘테 라는 화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 또한 될 것이다.



[위대한 유산]을 아쉽다고 말하는 이들의 공통분모는 극의 후반부로 갈수록 구성이 엉성해지고, 느닷없이 억지스러운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 지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구성에 엉성함이라고 얘기되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사실 이렇다 저렇다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자세히 풀어놓으면 너무 자세하게 얘기해버려서 재미가 반감되었다는 반응이 나올 것이고, 과감히 생략하게 되면 이번처럼 느닷없고 구성이 엉성하다는 반응이 나오듯이, 어차피 양면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피 엔딩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반박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마지막 장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핀은 이혼하여 혼자가 된 에스텔라를 다시 만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된다.



‘해피 엔딩’이란 말 그대로 영화가 다 끝나고 자막이 올라갈 때, 마음이 ‘해피’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개인만의 생각이 될 지도 모르지만, 자막이 올라가고 음악이 흐를 때, 결코 행복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슬픈 운명에 휘말려버린 주인공들이 안타깝게 느껴졌고, 인물들 하나하나를 떠올려 보니 더욱 더 그러한 마음은 배가 되었다. 핀은 오직 에스텔라에게 인정받기 위해 그림에 정진했고, 성공적으로 개인전을 마친 뒤, 보란 듯이 부자가 되었다며 소리쳤지만, 오로지 성공에 집착하느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도 변해버린 모습에 씁쓸함을 느꼈을 것이다. 에스텔라는 자신을 사랑하는 핀에게 확신을 주지 않은 채 아무 말 없이 멀리 떠났지만, 결국 돌아와 보니 남는 것은 후회 뿐 이였다. 딘스무어 역시 에스텔라를 위해 핀을 이용한 것에 대해 뒤늦은 후회에 눈물을 흘렸다. 그래도 루스티그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그는 평생 도망자로 살아온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준 단 한 사람이 어린 핀을 위해,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후원을 하였고, 위대한 유산을 남겼다. 결과적으로 핀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정말 위대한 유산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루스티그에게는 그나마 편히 눈감을 수 있는 이유가 되었던 것 같다.




[위대한 유산]의 아름다운 영상과 이야기를 더욱 돋보이게 한 것은, 장면 장면을 더 인상 깊게 만들었던 음악이었다. 영화와 잘 맞아 떨어지는 팝과 락 넘버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몇몇 아티스트들이 눈길을 끈다. 먼저 'Finn Runs'와 ‘Siren' 두 곡을 수록하고 있는 토리 에이모스를 들 수 있겠다. ’Siren'으로 에스텔라와 그림을 모두 접고 일상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잊고 살아가려는 핀의 마음을 빠른 리듬과 그녀만의 신비한 음색으로 전하고 있다. 그 다음 수록 된 곡은 모노(Mono)의 ‘Life is Mono'인데, 토리 에이모스와 마찬가지로 몽환적이면서도 신비스런 노래로 핀과 에스텔라의 묘한 관계를 역설하고 있다.

이 외에도 최근 오디오 슬레이브(Audioslave)로 활동 중인 크리스 코넬(Chris Cornell)의 'Sunshower'과 펄프(Pulp)의 ’Like a Friend', 스톤 템플 파일러츠(Stone Temple Pilots)의 보컬이였던 스콧 웨일렌드(Scott Weiland)의 ‘Lady Your Roof Brings Me Down', 그리고 이기 팝(Iggy Pop)의 ’Success'까지 편안하면서도 강렬한 락 음악들이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락 음악들보다 [위대한 유산]에서 더욱 기억이 남는 곡은 아마도 ‘Besame Mucho'일 것이다. 세사리아 에보라(Cesaria Evora)가 부르는 ’Besame Mucho'는 영화 속 딘스무어가 흥얼대던 그 느낌과 핀과 에스텔라의 슬픈 사랑, 그리고 핀의 성공과 그를 뒤에서 후원한 루스티그의 운명까지도 모두 포용해 버리는 원숙함을 들려준다. 또한 사운드 트랙의 맨 마지막에 자리하였듯, 이 한 곡으로 영화의 모든 감정을 모조리 정리해 버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장면과 감정들을 스쳐가게 한다.


2003.06.13
글 / 아시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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