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와 눈 (La Tigre E La Neve, 2005) _ 사랑의 기적

<인생은 아름다워>로 외국어영화상과 남우주연상 등 3개 부분을 수상하며 전세계적으로
자신의 이름과 영화를 알렸던 로베르토 베니니.
그 이후 만화를 원작으로 한 코미디물 <아스테릭스>와 아마도 베니니의 성향과 가장 잘 어울렸을 법한
소재였던 피노키오를 소재로 한 영화 <피노키오>를 만든 뒤, 2005년 개봉한 그의 가장 최근 작품이다.
<피노키오>는 미처 보지 못했지만, 당시 얼핏 보았던 예고편이나 평들, 그리고 골든 라즈베리 시상식에서
그해 최악의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등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한 작품이었다.
그래서 인지 그의 새 영화 <호랑이와 눈>이 개봉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선뜻 쉽게 결정이 내려지지
않았었다. 결국 극장 앞에서 얼마간을 고민하다가 그냥 포기하고 말았었는데,
어젯 밤 TV에서 '희망을 주는 이야기'(였나?) 라는 주제로 이 영화를 방영하는 것이 아닌가.
1시를 조금 넘긴 늦은 시간이었고, 베니니의 영화를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극장에서 못본 영화를 TV에서 이렇게 얼마 되지 않아 해준다니 기쁜 마음에 감상하기 시작하였고,
결과적으로는 첫 번째로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되었으며,
두 번째로 너무나 큰 감동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영화는 여러가지 면에서 그의 최고 히트작인 <인생은 아름다워>와 닮아있다.
<인생은 아름다워>가 홀로코스트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이 영화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이 점에서 이 두 영화는 가장 큰 시점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데,
<인생은 아름다워>의 경우 주인공이 사건의 중심에 있는 당사자로서 겪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면,
이 영화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라는 사건과 바그다드 라는 곳에서 이탈리아인이라는 제 3자의 입장으로서
겪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혹자들은 이 영화를 보고 <인생은 아름다워>에 비해 주인공의 처한
상황이나 태도가 정치적인 그들의 상황은 무시한채 너무 이기적인 것이 아니냐 라는 점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그래서 <인생은 아름다워>보다 이 영화 <호랑이와 눈>이 더 자연스럽고,
더 베니니 스럽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전작을 통해 이미 직접 사건에 중심에 위치한 당사자로서의
이야기를 한 번 해보았던 베니니로서는, 이 번에는 자신이 실제 처한 제 3자로서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감으로서, 전작과는 다른 방법으로 이야기를 해볼 수 있고, 또 다른 제 3자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화자로서 좀 더 효과적인 전달 수단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영화 속 처럼 로베르토 베니니를 비롯한 미국과 이라크를 비롯한 다른 많은 나라의 관객들은
제 3자의 입장이며, 어쩌면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되었던 먼나라의 전쟁 이야기 속에,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전쟁의 무의미함과 잔혹함을 직간접적으로 전달하게 되는 기능을 발휘하고 있으며
소수의 이기심으로 발생한 전쟁이라는 악이 얼마나 관련없는 무고한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하는지
보여주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물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기적인 것이 아니냐는 지적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을 테지만, 이런 방식이 역기능 보다는 순기능이 많다는 점에서 좋은 영화라고 생각된다.



로베르토 베니니의 다른 영화들이 거의 다 그러하듯이,
이 영화 역시 사실상 동화에 가깝다. 로베르토 베니니는 잔혹한 현실 속에서 동화적인 이야기를
동화적인 화법으로 풀어내는데 재주가 있는데, 이 영화 역시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혹은 울다가
웃음이 나는 그런 장면들이 많다(그럼에도 가장 동화적인 소재였던 '피노키오'가 가장 최악이었던 건
아이러니다). 영화 속 아틸리오(로베르토 베니니 분)의 희망은 오로지 한 가지다.
어찌하다 그리되었는지 모르지만(사실 이 부분이 이 영화의 가장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다. 어떻게 이리도
아내를 사랑하고 가정적인 남자가 어쩌다가 아내와 두 딸을 놔둔채 떠나게 되었는지 말이다),
지금은 멀어진 아내(빅토리아)에 대한 사랑. 그 것 뿐이다. 미국의 침공이 한창 진행중인 바그다드에서
그녀가 다쳐 목숨이 위태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오로지 가야한다는 생각으로, 의사를 위장해
적십자 비행기를 타고 이라크에 도착했고, 차가 고장나면 아무것도 없는 사막을 걷기도 했으며,
약이 없다는 의사에 말에도 포기하지 않고 방법을 찾아내 직접 약을 재조하기도 한다.
물론 여기에는 동화적인 우연의 배치와 베니니만의 재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아내가 사실상 더이상 살아나기 힘든 상황에서, 모두 포기하고 포기할 수 밖에는 없었던
상황 속에서도 아틸리오는 끊임없이 말하고, 의식이 없이 잠들어있는 아내에게 끊임없이 다정한 말과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해주었고, 그 와중에 벌어지는 이들 속에서도 계속 유머를 잃지 않는 모습은
역설적으로는 그렇지 않으면 한 번에 우르르 무너져버릴 수도 있음을 알기에, 어쩌면 눈물을 펑펑
흘리는 장면보다 몇 배 더 슬픈 장면이었다. 보통 다른 영화 같았으면 주인공이 몇 번은 더 절규하고
펑펑 눈물을 쏟고, 독하게 변해갔을 이야기였겠지만, 동화나라의 아틸리오는 그 와중에도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기름이 떨어져 걸어가야가게 되자 '이라크에서 기름이 떨어지다니 이게 말이돼?'하며
혼잣말을 하는 캐릭터였던 것이다. 여기에는 아틸리오의 직업이 시인이라는 점이 훨씬 더 영화를
풀어나가는데 좋은 구실이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이 '아틸리오'인지 '베니니'인지 해깔릴 정도로
시종일관 수다를 떠는 그의 모습은, 그 이기에 가능했던 연기라고 생각된다.

 

'아틸리오'인지 '베니니'인지 해깔린다는 말은, 실제로 로베르토 베니니도 저런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때문이었다. 실제로 베니니의 아내 사랑은 유난스러운데, 이 영화를 비롯 대부분의 베니니의 영화에서
여주인공이자 연인으로 등장하는 배우는, 다름 아닌 그의 아내 니콜레타 브라스치이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자 의자위로 뛰어올라 껑충껑충 뛰던 모습만 봐도
그가 얼마나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사람인지 엿볼 수 있었다. 그래서 인지 뭐랄까 이 영화 <호랑이와 눈>은
보는 관객들에게도 인상 깊은 영화이지만, 영화를 만든 베니니와 그의 아내 니콜레타에게도 매우
인상적인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하긴 대부분의 베니니 영화가 그렇겠지만).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로베르토 베니니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구나, 또 그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는 니콜레타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의 영화의 주제는 항상 같다. 자칫 동화적인 이야기로만 비춰질 수도 있지만,
기적은 이뤄진다는 것. 그리고 그 기적의 원동력은 대부분 사랑이라는 것. 즉 사랑의 기적은 이뤄진다는 것.
유치하고 억지스럽다고 느껴질런지는 몰라도, 그래도 마지막 비토리아가 그 모든 것을 해 준 사람이
다름 아닌 아틸리오라는 것을 뒤 늦게 알고 흐뭇한 미소를 지을 때, 나도 모르게 함께 미소짓게 되는건
어쩔 수 없는 동화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2008.01.07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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