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속스캔들 (2008)좋은 가족영화, 괜찮은 성장영화
'과속스캔들'이라는 저 제목과, 저 포스터. 그리고 차태현이라는 배우와 저 홍보문구들.
이 영화는 기대는 물론이고, 볼 생각이 사실상 없었던 영화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비슷한 제목과 설정으로 이루어진
한국영화들이 이미 여럿 있었고, 그 영화들 모두 다 이렇다할 재미를 보여주지도 이야기를 들려주지도 못했기 때문이었죠.
특히나 코미디 영화라고 하면 최근 개봉했던 <
미쓰 홍당무>를 제외하면, 너무 저질 코미디 일색이라(여기서 저질이란
저질을 만들려고 작정한 코미디가 아니라, 만들다보니 저질이 된 경우입니다 ;;;) 제대로 된 코미디 영화를 보기 어려웠던
것들도 이 영화를 기대하게 하지 않았던 또 다른 이유 중 하나였구요(잘 만든 스릴러보다 잘 만든 코미디 영화 한 편 만나기가
더 어려운 것이 사실인것 같습니다). 그런데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이 영화에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개봉이후
주변 보신 분들의 평들이었습니다. 이런 영화를 절대 보지 않을 것 같았던 분들도 보고 오셔서는 괜찮다고 하시고,
'올해 최고의 영화다!' '가장 감동적 영화였다!' 등 최고의 수식어까지는 부여되지 않았지만, 다들 잘 만들어진 코미디 영화
혹은 가족영화라는 것에는 적극 공감하는 분위기였죠. 그리고 차태현을 비롯해 출연한 배우들에 대한 칭찬들과 더불어
'괜찮은'영화다 라는 평이 지배적이었구요. 영화 감상기를 쓸 때 자주 언급하곤 하는 말이지만, 영화를 선택함에 있어서
'선입견'만큼 무서운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에이~ 뭐 뻔한 얘기에, 뻔한 캐릭터들뿐인, 뻔한 영화겠지'하고 선입견을
갖었던 <과속스캔들>에서 신선한 재미와 즐거움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요.
(영화는 각기 가족을 이루지 못한 인물들이 하나의 가족을 이뤄가는 '가족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과속스캔들>은 12월에 잘 어울리는 시즌 영화이자 가족영화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극중 차태현이 연기한 남현수는
가족 없이 혼자 지내는 (나름)유명 DJ인데, 어느날 갑자기 자신의 딸이라는 어린 여자가 손자라는 어린 아이와 함께
집으로 들이닥치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갑자기 나타난 존재 탓에 남현수는 사실을 부정하기에 급급하고,
오랫동안 홀로 지냈던 자신 만의 공간에서 남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것에 굉장한 불편함을 느끼게 되죠.
그런데 동물병원에서 검사한 혈액검사 결과를 통해 실제 부녀관계임을 알게 된 이후, 막상 떠나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되었던
이들이 떠난다고 했을 때, 남현수는 뭔가 썩 내키지는 않지만 이 모자를 붙들게 됩니다(갑자기 든 생각인데, 만약 피 검사가
이렇게 빨리 결과가 나오지 않고, <
살인의 추억>의 경우처럼 한참 이후에나 결과가 나오는거라 일단은 같이 사는 걸로 했는데,
나중에 결과가 나와보니 실제 부녀는 아닌 것으로 판명되지만, 그 동안 쌓인 정들로 인해 검사결과와는 상관없이 행복하게
살기로 했다....라고 하면 오벌까요? ㅎ).
같이 살기로 했다고 해서 이 둘의 관계가 급속도로 좋아진 것은 아니었죠. 남현수는 자신의 연예인으로서의 커리어와 명성에
흠집을 내지 않기 위해서 딸인 황제인(박보영)과 손자인 황기동(왕석현)의 존재를 계속 숨기게 되고, 이 와중에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언젠가 터질지도 모를 불안요소를 계속 안고 가게 되었던 것이죠. 이들의 관계가 점점 변화하게 되는 것은
처음부터 그저 남이었으면 좋겠다하고 바라기만 했던 남현수가 점차 이들을 자신의 가족으로 인식하게 되면서 부터 급물살을
타게 됩니다.
(가족영화이기 이전에 이 영화는 차태현이 연기한 '남현수'라는 캐릭터의 성장영화이기도 합니다)
씨네21에 수록된 강형철 감독의 인터뷰를 보니 본래부터 '가족영화'라는 생각으로 만들었다기 보다는, 애초에는 남현수라는
캐릭터가 변화를 겪으면서 성장하는 일종의 성장영화로 기획했었다고 하는데, 확실히 그런 측면에서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영화의 초반 타이틀컷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연예인으로서 깔끔떨고 럭셔리한 삶을 영유하는 남현수라는
인물이, 전혀 다른 상황에 맞닥들이게 되면서 조금씩 변해가는 과정이 이 영화에 가장 주된 이야기 줄기라고 할 수 있겠네요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타이틀컷은 참 인상적이더군요. 마치 <패닉룸>을 연상시키는 장면들과 영상에 배우와 스텝들의
이름을 삽입한 센스가 돋보이는 시퀀스였는데, '남현수'라는 캐릭터에 대한 설명을 간단하지만 효과적으로 해내고 있습니다).
앞서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황제인과 황기동을 남처럼 여겼던(여기고 싶었던) 남현수는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이들을
가족으로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얘가 바로 유치원에서 기동이가 헌 옷과 촌스러워 보이는 모습 때문에
따돌림을 당한다고 했을 때 불끈하게 되는 장면인데, 이건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잘 캐치해낸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리 맘에 안드는 사람이라고 해도 누가 내 가족, 내 친구를 욕하거나 하면 욱하게 되는 것이 현실인데, 그런 과정을
오버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잘 그려내고 있더군요. 이후에 라디오 방송국에서 스텝들이 황제인을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할 때 폭발하는 것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는 장면이었구요.
이렇듯 어떻게 보면 항상 자신만만하고 자신 밖에는 몰랐던 연예인 남현수는, 자신의 딸과 손자라는 이들과의 만남과 이별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해 돌아보게 되는 것이죠. 이런 것들을 완전히 몰랐다기 보다는 애써 외면하고 살려고 했던 자신을
뒤늦게 뉘우치고 더 이상은 이렇게 살 수 없다라는 식의 구조라 더욱 마음에 들었습니다. 주변 인물들로 인해 주인공이
변화를 겪게 되는 류의 영화는 참 많은데, <과속스캔들>은 코미디라는 장르 내에서 크게 무리하지 않으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술술 풀어낸 영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다들 그러셨듯, 이 영화는 박보영이라는 배우를 발견할 수 있었던 영화이기도 합니다 ^^)
<과속스캔들>이 좋았던 건 이 영화가 기본적으로 코미디 적인 요소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족 영화라는 요소와
성장영화라는 요소를 코미디라는 그릇에 잘 담아낸 케이스라고 할 수 있는데, 한국영화에서 보여주는 코미디라는 것이
대부분 조폭 코미디나 사투리를 이용한 코미디가 주를 이뤘던 것에 반해, <과속스캔들>은 캐릭터와 상황이 만들어내는
재미로 끝까지 힘을 잃지 않는 좋은 코미디 영화이기도 합니다. 억지스러움이 거의 없으면서도 시종일관 웃을 수 있는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건 물론 시나리오의 힘이 기본이겠으며, 배우들의 연기가 크게 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일단 이 영화가 재밌는 영화라고 기억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배우라면 아역 연기자인 왕석현이 연기한 황기동 캐릭터를
들 수 있을텐데, 그저 얼굴만 봐도 미소가 지어지는 이 아역배우의 연기는 그저 아이가 어른스러워 보이는 것에서 오는
재미 그 이상의 재미를 선사합니다.
감독은 실제로 기존의 아역연기자들이 일반적으로 보여주었던 웃음 포인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가능한한 연기경험이
없거나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를 찾기 위해 수많은 오디션을 봤다고 하는데, 왕석현이라는 아역배우를 찾아낸 것은
이 영화의 또 다른 발견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극중 황기동은 어른같은 말투를 내뱉기도 하고, 고스톱에도 일가견이
있으며 센스또한 어른을 능가하지만, 그것보다는 그 상황을 표현해내는 방식이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러워 미소지을 수
밖에는 없더군요(실제로 극장에서 왕석현군이 클로즈업 되거나 개그 한 마디를 던질 때마다 객석 여기저기에서 '귀여워'라는
탄성이 터지더군요). 특히 무표정과 큰웃음을 급격하게 오가는 표정연기가 압권이었는데, 앞으로도 CF 좀 찍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황기동 역할을 맡은 왕석현 군의 독특한 표정연기 작렬! 그 배꼽인사와 더불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일각에서는 <미녀는 괴로워>에 김아중과 비교하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보다 더 돋보이고 앞으로가 기대되는 배우가
바로 박보영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영화 전에도 몇몇 드라마를 통해 크지 않은 배역들로 선을 보였던 그녀인데,
개인적으로 작품을 통해 보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뭐랄까 이 영화가 다른 영화들 과는 다르게 연인관계가
아닌 부녀관계가 영화를 이끄는 주요 관계설정이라고 보았을 때, 아이가 있는 애엄마 역할이긴 하지만 무언가 어려보이면서도
순수함이 묻어나는 황제인 캐릭터에 박보영의 마스크는 더할나위 없이 적역이었다고 생각되네요.
굉장히 남성스러워보이는 말투와 행동거지부터 너무 천진난만해 보이는 웃음까지....박보영이라는 배우에 흠뻑빠지게 된
영화였습니다. 그리고 노래도 가수 뺨치는 실력을 보여주었는데(감독 인터뷰를 보니 100% 박보영이 부른 것은 아니고
대부분 그녀가 소화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본래는 노래를 해야하는 캐릭터라 가수를 캐스팅할까 계획하기도 했다더군요).
어찌하다보니 순서가 3순위로 밀려버렸지만 차태현의 연기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네요. 사실 차태현이 기존에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여주었던 캐릭터들에 조금 지루함을 느끼기도 했었고, 그다지 좋아하는 배우는 아니었던 터라
처음 영화를 선택할때 선뜻 나설 수 없는 것이기도 했는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는 차태현이라는 배우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난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치 시나리오 단계섭부터 차태현이라는 배우를 염두에 두고
썼다고 해도 믿을 만큼, 그와 참 잘 어울리는 캐릭터였습니다.
주연배우들 외에 유치원 선생님 역할로 <미쓰 홍당무>의 황우슬혜가 출연하고 있는데, 분량이 아주 많은 것은 아니지만
역시나 그 선한 포스는 계속 내뿜어주시더군요. 옷도 천사같은 옷만 입고나와서 웃으며 차태현을 바라보는 장면들은
황우슬혜라는 배우를 좀 더 각인시키도록 만드는 것 같습니다. 제 주변에는 황우슬혜양이 출연하다는 정보만으로
이 영화를 선택하신 분이 제법 있었는데, 그 분들께는 황우슬혜양 덕분에 좋은 영화를 만나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이 밖에도 분량은 짧지만 재미있는 조크를 여럿 던지고 빠지기를 반복했던 성지루의 연기도 좋았고, 무엇보다 불꽃 연기를 펼친
홍경민의 연기도 잊혀지질 않는군요 ㅋ
(황우슬혜 양이 출연한다는 사실만으로 이 영화를 선택한 이가 제법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높아진 위상을 느낄 수있었네요 ^^;;)
범상치 않은 인트로 장면부터 느낄 수 있었지만, 이 영화는 코미디/드라마 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영상적인 측면에서
신선하고 세련되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카메라 앵글 같은 면에서 기존에 잘 사용하지 않는(특히 이런 장르에서)
구도로 인물들을 배치한다던가, 방안 구석구석을 비추는 장면을 봤을 때, 이 부분에 있어서 상당히 많은 실험과 노력을 했음을
어렵지 않게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편집측면에서도 어찌보면 참 과감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컷을 분할한 느낌을 얻을 수
있었는데 시도가 그리 나쁘지 만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대놓고 들어나지는 않지만 어찌보면 반대로 상당히 전면적으로 패러디가 몇몇 장면 등장하고 있는데,
자칫 패러디 영화로 생각되지 않도록 짧지만 강렬하게 치고 빠지는 작전을 사용한듯 하더군요. 몇몇 장면은 카메라 앵글을
그대로 따라하기도 했는데 너무 짧게 짧게 지나간 탓에 정확하게 기억이 나질 않네요;;(분명 보면서는 저건 저 영화에서
가져왔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어찌되었든 이 영화 <과속스캔들>은 저 제목만 가지고, 혹은 다른 선입견들을 가지고 판단해 놓쳐버리기에는 후회가 남을
괜찮은 작품이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연말에 보기에 좋은 시즌 영화이자 크리스마스와도 잘 어울리고, 가족 혹은 연인들이
보기에도 괜찮은, 대중영화가 아닐까 싶네요. 올해 한국영화들 가운덴 꽤 괜찮은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네요~
1. '아마도 그건'을 대부분 모르더군요. 난 왜 알고 있지 -_-;;
2. 홍경민의 불꽃 연기!!!
3. 제목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근데 원래는 '과속삼대'로 할려고 했다는데...음....
딱히 더 완벽한 제목이 떠오르지는 않지만 분명히 제목에서 주는 이미지가 영화와는 조금 다른것 같습니다.
4. 왕석현 군의 저 파마머리, 아들 갖고 있는 엄마들 사이에서 유행할지도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