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 어머니, 알모도바르의 이야기

마드리드에 살고 있는 젊고 아름다운 라이문다는 한없이 거칠고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일상을 살아간다. 그녀는 기둥서방과 다름없는 남편과 사춘기에 접어든 딸을 둔
실질적 가장으로 모든 현실이 짐스럽기만 하지만, 뭐든지 해내는 억척스런 생활력으로
가정을 이끌어 가고 있다. 그리고 어느 날 밤, 그녀의 딸 파울라가 성추행 하려는 아버지를
칼로 찔러 죽이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날 밤, 라이문다의 언니 쏠레에게도 비밀스런 사건이 시작된다. 열정적이고 거친 라이문다와는
 다소 다른 소심하고 조용한 성격의 쏠레는 고향인 라 만차에 다녀오는 길에
엄마의 유령을 만나게 된다. 쏠레는 불법 미용실을 운영하며, 미용실 손님과 바람난 남편에게
 버림받은 후 홀로 살고 있었다. 그녀는 엄마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라이문다에게 숨긴 채,
미용실 손님들에게 엄마를 러시아 노숙자라고 소개한다. 엄마는 미용실 손님들과 차츰 어울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쏠레의 현실에 적응해가지만, 정작 가장 만나고 싶었던
라이문다에게는 나타나지 못한 채 그녀를 바라보기만 하는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제 59회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과 6명의 여자 배우들이 여우주연상을 공동으로
수상하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던 <귀향 (Volver)>은, <그녀에게> <나쁜 교육>등으로 잘 알려진 스페인 출신의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최신작이다. 이미 전작들을 통해 스페인 특유의 정체성을 배경으로
감독 자신만의 빛나는 감수성으로 많은 팬들을 만들어낸 알모도바르는 <귀향>을 통해 다시 한 번
자신의 진가를 십분 발휘하게 되었다. 특히 이 영화는 스페인의 라 만차 지역을 배경으로
감독 자신의 어린 시절 경험에 빗대어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는데, 어린 시절 주변 인물들이
대부분 여성들 밖에는 없었다는 그의 말과 같이, <귀향>은 전적으로 여성들을 위한,
여성들에 위대함에 바치는 찬사의 작품이다. 특히 주인공 라이문다 와 같이 끔찍한 일들을 겪으면서도
쉽게 눈물을 보이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 강인한 여성들에 대한 찬사이자, 감독 자신이 밝혔듯
영화의 제목처럼 스스로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언젠가는 꼭 만들어야만 했던 영화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이 영화에서 남성의 존재는, 그저 자신의 성적 욕구에만 매달리는
무능하고 본능적인 존재이자, 여성들의 모든 고통과 슬픔의 원인을 제공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귀향>은 전작 <나쁜 교육>처럼 감독 자신의 유년기에 대한 추억과 감정 등을 담고 있긴 하지만,
<나쁜 교육>과는 달리, 유머러스함이 기본에 깔려 있으며, 여기에 눈물을 자극하는 감동과 판타지,
미스터리한 요소까지 담아내고 있는 독특한 작품이다. 특히 영화의 줄거리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어머니의 캐릭터에 관한 미스터리. 감독은 어머니가 실제로 유령인가 아닌가 하는
미스터리를 영화 전반에 매우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는데, 단순한 미스터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영화의 주제와 완벽하게 결합시켜 나중에는 왜 어머니가 살아있음에도 평생을 유령처럼
살 수 밖에 없었는지를 말해주면서 찡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또한 유령일지도 모르는 어머니가
러시아 아줌마로 분해 손님들을 접하고, 손녀딸과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묘한 재미를 선사하기도 한다. 영화의 마지막, 파울라를 돌보았듯이 자신이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슬픔을 갖고 죽음을 기다리는 아우구스티나를 돌보기 위해, 또 다시 유령처럼 나타나
라이문다와 헤어진 뒤 홀로 눈물을 훔치는 라스트 씬은 진한 여운을 남게 한다.



이 영화는 여성들에 대한 찬사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가족, 그리고 그 중에서도
어머니와 딸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모든 인생은 오해를 풀기 위한 연속이다’라는 말처럼
가장 가까운 가족간, 모녀간임에도 서로에 감정 때문에 미처 하지 못한 말, 풀지 못한 오해들로 인해
서로 오랜 시간을 떨어져 있고, 단절되어 있는 관계와 그 해결에 대해 알모도바르 식의
풍부한 감성으로 풀어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귀향>을 보고 가장 감동 받은 장면을 꼽으라면
아마도 극 중 라이문다가 영화 팀들 회식자리에서 우연히 어린 시절 노래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어머니가 연습시켰던 곡을 노래하는 장면을 꼽을 텐데, 전작 <그녀에게>에서도 극중
카에타노 벨로소가 부른 ‘쿠쿠루쿠쿠 팔로마’로 <나쁜 교육>에서는 ‘문 리버’로 인상 깊은 장면을 연출했던
알모도바르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도 음악을 통해 감정을 극대화시키는 장면을 삽입하였다.
노래를 부르던 중 어머니 생각에 눈물을 글썽이는 라이문다와 그를 먼발치 차 속에서
몰래 지켜보다 숨어서 눈물을 흘리던 어머니의 모습은 격정적인 플라멩고 곡과 함께
최고의 순간을 선사한다(음성해설을 통해 알 수 있었던 사실은, 많은 사람이 실제로 페넬로페 크루즈가
이 노래를 부른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 장면은 립싱크로 촬영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그녀의 립싱크 연기가 대단했다는 반증도 될 듯).
또한 나중에 어머니가 유령으로 살 수 밖에 없었던 사연을 전해 듣고 두 모녀가 벤치에서 그토록 원하던
대화와 오해를 풀고 포옹하는 장면 역시, 이 영화에서 상징적인 장면으로 매우 인상 깊었다.



감독의 연출력 못지 않게 이 영화에서 주목할 것은 뛰어난 여배우들의 빛나는 연기이다.
앞서 소개했듯이 지난해 칸 영화제에서는 유례없이 여우주연상을 <귀향>의 여배우들에게 공동수여 하였는데,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배우들의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이 같은 수상결과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복잡한 감정 선들이 교차하는 캐릭터를 맡은 로라 두에나스와 블랑카 포르틸로는 물론, 제목 ‘귀향’처럼
오랜만에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작품에 출연한 카르멘 마우라의 연기는 이 영화를 든든하게
지탱해주고 있는 커다란 버팀목 같은 역할을 한다. 코믹스러운 표정 연기도 전혀 오버스럽지 않게 표현해내고,
슬쩍 눈물을 훔치는 것만으로도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그녀의 연기는 페넬로페 크루즈 처럼
전면에 부각되지는 않지만, 절대 놓쳐서는 안될 부분이다.



그리고 페넬로페 크루즈. 그녀는 이 작품 전에도 여러 작품에서 좋은 연기를 선보이긴 했지만,
그 동안에는 연기에 비해 스캔들이나 글래머러스한 몸매가 더욱 화제가 되곤 했었다.
하지만 <귀향>에서 그녀가 보여준 연기는, 단연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최고의 열연이라 할 수 있으며,
진정한 배우로서 거듭나는 연기를 펼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많은 사람이 <귀향>에 등장하는 페넬로페 크루즈를 보면서 소피아 로렌을 떠올리게 되었는데,
소피아 로렌과도 같은 여성스런 매력과 우아함을 물씬 풍기고 있으며, 그 동안 그녀가 출연한 영화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자연스럽고도 관객의 감정을 자극하는 연기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현역 최고의 스페인 여배우로 칭하게 되는 결과까지 가져오게 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작품에 출연하는 것이 어렸을 때부터 꿈이었다는 그녀의 소박한 인터뷰와는 달리,
그녀는 어느덧 그녀 스스로가 그리도 선망하던 감독 자신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보낼 만큼
훌륭한 배우가 되어 버렸다. <귀향>은 한 편으론 영화의 줄거리와 감동과는 무관하게
더 멋진 배우로 성장한 그녀를 보는 것 만으로도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는 영화이기도 하다.



2.35:1 와이드스크린의 화질은 최신작답게 선명한 화질을 제공하고 있다.
특히 이 영화에서는 더욱 강조되는 붉은 색감의 표현도 자연스러우며, 어두운 장면에서 암부의 표현력도
우수한 편이다. 돌비디지털 5.1채널의 사운드도 크게 흠잡을 데가 없는데, 대사 전달력도 또렷하며
극중 라이문다가 노래하는 장면에서도 공간감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첫 번째 디스크에는 감독과
페넬로페 크루즈가 참여한 음성해설이 수록되었는데, 상대적으로 빈약한 부가영상에 비해
극 중 캐릭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라던지, 배우들의 연기에 관한 칭찬 등 유익한 내용이
가득 담겨 추천할 만하다. 서플먼트로는 예고편과 포토 갤러리, 그리고 감독과 주연배우들의
인터뷰가 수록되었는데, 별다른 제작과정 다큐멘터리가 수록되지 않은 것은 아쉽지만,
인터뷰의 내용이 짧지만 핵심적인 이야기가 수록되었다는 점에 만족해야 할 것 같다.
여기에 영화를 보고 나면 꼭 한 번 들어보고 싶은 O.S.T CD가 추가로 수록되어,
영화의 감동을 다시 한번 음악으로 즐겨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2007.02.08
글 / ashita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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