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서독 리덕스

그리고 왕가위 감독과의 GV



왕가위 감독의 '동사서독'은 많은 그의 팬들이 그러하듯이, 내게도 그의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다. 어린 시절 좋아하는 배우들이 여럿 나온다는 이유로 비디오 테입을 통해 보았던 '동사서독'은, 설명할 수는 없어도 정말 좋아할 수 밖에는 없는 작품이었다. 그런 '동사서독'을 재편집한 '동사서독 리덕스'를 극장에서, 그것도 왕가위 감독과 함께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일단 극장에서는 처음 보게 된 '동사서독 리덕스'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그대로인대 내가 변해서 그런가, 나이를 먹은 탓인지 오히려 더 좋았다. 사실 처음 보았을 때는 한창 영웅문에 빠져있을 때라, 왕가위의 영화 자체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김용의 사조영웅전 속 인물들과의 접점을 찾느라 집중했었던 기억인데, 이번에야 말로 오롯이 인물들의 감정과 고민, 번뇌에 더 빠져들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무협의 최고 수준은 몸으로 겨루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마음 속으로) 겨루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왕가위는 최근 작 '일대종사'를 통해서도 보여주었던 것처럼 바로 그 단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이미 '동사서독'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동사서독 리덕스'는 1:1 대결 장면이 없는 것처럼, 상대와 마음 속으로 겨루거나 혹은 나 자신과 겨루는 장면들이 등장하는데, 영화 내내 등장하는 사막과 파도치는 바다의 장면이 바로 그런 의미다. 물론 이렇게 영화가 나오기 까지는 그가 의도하지 않았던 여러가지 환경적 요소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럴 수 밖에는 없었던 부분들도 없지 않겠지만, 결론적으로 왕가위 감독은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가장 높은 수준에 있는 무협 영화를 완성해 냈다.





영화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시절 내가 가장 사랑했던 장국영, 임청하, 장만옥, 양가휘, 장학우, 양조위, 양채니 등 멋진 배우들을 스크린 가득 만나볼 수 있어 무척이나 반가웠다. 특히 장국영, 임청하, 장만옥 이 세 사람은 정말 좋아하는 배우들인데, 전성기 시절의 모습을 스크린을 통해 만나보니 그것만으로도 울컥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 뒤 시작된 GV.





영화평론가 정성일 씨의 진행으로 왕가위 감독을 모시고 짧지 않은 시간 동안 GV가 진행되었다. 정성일 씨의 말처럼 왕가위 감독이 이렇게 친절한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한국 관객들을 위해 본인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물론 정성일 씨의 무거운 질문을 슬쩍 피하면서 구체적인 에피소드로 답변을 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그 에피소드 하나 하나가 지금 들어도 정말 재밌고, 이 우여곡절 많기로는 손꼽힐 만한 영화인 '동사서독'이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 그 제작 과정에 대한 웃지 못할 이야기들도 들을 수 있었다 (시사회 시작 시간까지 편집이 완료되지 않아, 일단 상영을 시작하고 마지막 필름 릴이 담긴 차가 배송되는 시간에 따라 어느 지역에서는 90분짜리 영화를, 어떤 곳에서는 80분, 70분 짜리 영화를 보기도 했다는 에피소드는 참 ㅎ).







그렇게 왕가위 감독과의 GV는 참 귀하고 값진 경험, 아니 시간이었다. 한 동안 잊고 지냈던 왕가위 감독 작품들에 대한 사랑이 다시 금 피어오르는 것은 물론, '동사서독'이란 영화를 두고두고 다시 봐야 할 의미를 다시 찾게 되기도 했다.


아... 은퇴한 임청하도,

먼저 세상을 떠난 장국영도 보고 싶구나.


1. GV에 자세한 내용은 아래 기사에서 확인하실 수 있어요

http://news.maxmovie.com/movie_info/sha_news_view.asp?newsType=&page=&contain=&keyword=&mi_id=MI0099917222





글 / 사진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일대종사 (一代宗師 The Grandmaster, 2013)

왕가위의 21세기 동사서독



처음 왕가위 감독이 오랜만에 신작을 연출한다고 했을 때, 그리고 그 작품이 양조위, 장쯔이 등과 함께한 엽문의 이야기라고 했을 때, 기존 견자단이 연기한 '엽문' 영화와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지만 어느 정도 무협 액션 영화가 아닐까 라는 정도의 예상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는 내가 왜 그런 안이한 예상을 했었는지 답답할 정도로, '일대종사'는 전혀 다른 영화였다. 즉, 내가 이 영화를 예상했을 때 가장 간과한 것은 바로 감독이 왕가위 라는 점이라는 얘기다. '일대종사'라는 제목과 최근 들어 더 익숙해진 '엽문'이라는 인물 때문에, 스타일리시 하긴 해도 액션이 중심이 되는 영화가 아닐까 싶었지만, 왕가위의 '일대종사'는 마치 그의 전작 '동사서독 (東邪西毒 Ashes Of Time, 1994)'과 마찬가지로 무예의 정수를 기본으로 하되, 각 인물들의 외로움과 정적인 심리에 주목하고 있는 또 다른 매혹적인 작품이었다.



ⓒ CGV무비꼴라쥬. All rights reserved


영화의 초반. 엽문(양조위)이 빗속에서 수 많은 상대들과 결투를 벌이는 장면은 왕가위 특유의 스타일과 슬로우모션을 통해 감각적으로 표현된다. 이 시퀀스를 보고 있으면 오랜 만에 무협 영화로 돌아온 그가, 다른 무협 영화들과는 다른 한 차원 높은 액션 장면을 보여주겠다는 야심을 엿볼 수 있다. 엽문을 주연으로 하고 있는 영화답게(물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왕가위의 무협 영화는 이랬을 확률이 높지만) '일대종사'의 액션은 정중동(靜中動)의 틀 안에서 움직인다. 즉, 빠르기나 힘의 표현과 과장 보다는 멈춰있는 이미지와 그 순간 상대 앞에 서 있는 인물의 마음가짐에 더 주목한다. 만약 이러한 캐릭터 내면의 묘사가 없었더라면 이 영화는 그냥 제법 스타일리시한 무술 영화에 그쳤을 것이다. 기법만 놓고 봤을 때 이 영화의 액션 시퀀스는 인상적이기는 하나 새롭다 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가위가 '일대종사'를 통해 보여주려고 했던 건, 액션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것은 왕가위와는 어울리지도 않는다. 왕가위는 양조위가 연기한 엽문과 장쯔이가 연기한 '궁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중국의 혼란스러운 역사 속에서 한 문파를 대표해야 했던 인물들의 대의 적 삶의 모습은 물론, 그 시대와 역할에 가려졌던 한 인간의 삶과 무예라는 것의 근본을 통해 그가 생각하는 진정한 '고수'의 모습을 보여준다.



ⓒ CGV무비꼴라쥬. All rights reserved


'일대종사'는 왕가위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서도 그 아름다움 만을 놓고 보자면 첫 번째로 꼽을 만큼 강렬한 인상을 주는데, 그 아름다움에는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미 적인 성취 외에 캐릭터의 마음가짐 (심리 상태와는 의미가 좀 다르다)을 표현하는 방법으로서 활용되고 있다는 것이 다른 점일 것이다. 양조위는 물론, 장쯔이가 등장하는 거의 대부분의 장면은 '황홀하다'고 느낄 정도로 영화의 아름다움이 극에 달했을 때를 보여주는데, 어찌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황홀하지만 그 만큼이나 외롭고 쓸쓸함이 깊게 묻어 나는 것이 '일대종사'의 매력이자 여운일 것이다. 왕가위의 영화는 항상 이미지가 잔상 처럼 오래 남곤 하는데, 이 작품 역시 실화를 바탕으로 오랜 세월 동안의 중국 역사를 배경으로 했음에도, 극장을 나오며 기억에 남는 건 일대종사들이 오롯이 서 있을 때 이를 가능케 한 발 동작들과 그들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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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일대종사로서 뚜렷한 이미지가 새겨 진 엽문과 궁이에 비해 장첸이 연기한 캐릭터는 조금은 겉도는 듯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는데, 보는 중간에는 아마도 후반 부에 가서 엽문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겠구나, 그래서 각각의 일대종사로서 서로를 바라보게 되겠구나 라고 예상했으나 영화가 끝난 뒤, 장첸이 연기한 캐릭터에 대해 왕가위의 의도는 무엇 이었을까 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엄밀히 말해서 장첸의 캐릭터는 없어도 전혀 이야기 전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럴 수록, 그렇다면 왜 이 이야기를 적지 않은 비중으로 함께 그려냈을까 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반대로, 본래 예상했던 대로 만약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 각자의 도장을 차리고 제자를 가르치던 엽문과 그가 만나게 되었다면, 이것은 너무 전형적이고 쓸쓸함과 아쉬움을 담은 이 영화에 정서와는 맞지 않는 마지막이 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왕가위는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영웅이 되기 보다는 개인으로 남을 수 밖에 없었던 엽문과 궁이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수 많은 각자의 이야기가 존재하고 있음을 전하기 위해 어쩌면 이들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캐릭터의 이야기를 주변에서 진행되도록 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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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혼란스러웠던 시대를 그리면서 시대와 무방한 이야기를 그리는 것은 자칫 무책임한 것으로 그려지곤 하는데, 왕가위의 '일대종사'는 시대에 무심한 듯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그리면서도 그들이 겪어낸 시대를 미사여구 없이도 완전히 담아낸 그런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아.... '동사서독'을 오랜 만에 다시 보고 싶다.



1. 이소룡과 관련된 장면은 마치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로빈 장면처럼 등장하더군요. 딱 이 정도가 좋았던 것 같아요.


2. 이 영화는 정말 장쯔이를 위한 영화입니다. 앞으로 그녀가 어떤 작품에서 또 어떤 연기를 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과연 '궁이' 만큼 인상적인 캐릭터를 또 만날 수 있을지... 그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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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음악이 참 좋았어요. 영화처럼 너무 극적이지 않으면서도 무게감이 느껴지는 것이.


4.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는 (물론 최고는 궁이와 마삼의 기차역 대결 장면), 엽문이 궁이의 아버지에게 인정 받기 위해 대결을 벌이는 장면이었는데, 정말 정중동을 제대로 표현한 장면이었어요. '영웅문' 등의 무협지에서 보던. 진짜 고수들 간의 대결을 영화적으로도 멋지게 표현해낸 장면이 아닐 수 없겠네요.


5. 쿵 리는 어디서 많이 봤다 했는데 영화에서 본 줄 알았더니 바로 UFC 옥타곤 위 였군요 ㅎㅎ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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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My Blueberry Nights, 2007)
왕가위의 헐리웃 뮤직드라마

무엇보다 왕가위 감독이 주드 로, 노라 존스, 나탈리 포트만, 레이첼 와이즈 등 헐리웃 배우들을 데리고
어떤 영화를 찍었을까 궁금하게 했었던 영화. 왕가위 스타일은 <동사서독>에서부터 많이들 좋아했던
<중경삼림>은 물론, 많이들 난해해했던 <2046>에 이르기까지 잘 즐겨왔던터라 크게 걱정하지 않았지만,
걱정과 기대가 동시에 되었던 건 역시 노라 존스의 주연 캐스팅이었다.
'Don't Know Why'의 재즈/블루스/컨츄리 뮤지션으로 너무도 유명한 노라 존스이지만,
그가 과연 배우로서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는 참으로 걱정이었다. 특히나 내가 알고 있는 노라 존스는
그렇게 활달한 성격도 아니고 순둥이라면 순둥이인 성격을 지닌 사람인데, 자신의 주 영역도 아닌
아니 전혀 다른 분야인 연기를 어떻게 해냈을지가 사실 걱정이었다.
영화를 보니 어느 정도는 왕가위 감독도 인간 노라 존스를 알고 있었는지, 조금은 순둥이같은 캐릭터를
연기한터라 크게 어색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 영화는 확실히 '왕가위' 영화다. 왕가위 영화 특히 <중경삼림>을 인상깊게 본 이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이 영화가 왕가위 영화임을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중경삼림>등 그의 주요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특유의 영상들(약간 느린 슬로우모션과 멈춰있는 배경속에서 인물들은 빠르게 움직이는 등의 기법)이
이 영화에서도 여전히 등장하고, 서로 다른 몇몇의 인물들이 시간과 공간을 두고(이 영화에서는 공간/지역을
두고)얽히고 섥히는 과정을 감각적인 영상미로 그려내는 방법 또한 여전하다.

씨네21 리뷰를 보다보니 '신인 헐리웃 감독이 왕가위에게 오마쥬를 바친 작품인듯 하다'라는 평을 했던데,
이 평에 어느 정도 공감하는 바이다. 이 영화는 분명 왕가위스럽긴 하지만 더 나아가지는 않고, 말그대로
그저 배경과 인물들만 서양으로 옮겨와 답습한 분위기를 지울 수 없었다. 물론 옮겨오는 것 만으로도
이 황홀한 배우들 덕분에(여기나오는 배우들은 노라 존스까지 포함해서 내가 모두 평균이상으로 좋아하는
배우들이라^^;)충분히 볼만했던 영화였지만, 작가로서의 왕가위라면 무언가 옷을 갈아입는 것 외에 더 나아가는
무언가를 기대했던 팬들에겐 조금은 아쉬운 결과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 영화에서 스토리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스토리보다는 이미지와 음악이 깊은 인상을 주고 있는
영화인데, 일단 이미지를 중시한 스타일에 있어서 배우들의 캐스팅은 적절했다고 생각된다. 앞서 말했듯이
실제 노라 존스의 이미지를 많이 그대로 가져온 '엘리자베스'캐릭터를 비롯하여, 말끔한 정장만큼이나 이런
내츄럴한 이미지도 잘 어울리는 주드 로도 그렇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레이첼 와이즈가 오랜만에 좀
강한 캐릭터를 보여준 듯 하고, 나탈리 포트만은 확실히 한살 한살 먹을 수록 연기가 성숙해지고, 자신만의
아우라가 강해지는 것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굿 나잇, 앤 굿 럭>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던
데이빗 스트래던의 연기도 인상적이었다.



이 영화를 얘기하면서 음악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일단 노라 존스가 출연하는 만큼
노라 존스 특유의 편안한 재즈/블루스 음악을 만나볼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겠다.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신곡 'The Story'는 이 영화의 전반을 둘러싸고 쉽지 않은 연인들의 이야기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다.
이 영화의 영화음악은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으로 유명한 라이 쿠더가 맡고 있는데,
그의 다양하고 박식한 음악적 역량을 또 한번 발휘한 음악작업이 아니었나 싶다. 라이 쿠더 외에도
<바벨>등 영화음악감독으로 유명한 구스타보 산타올라야의 곡도 수록이 되어있으며, Cat Power, Amos Lee 등
잔잔하면서도 깊은 감흥을 주는 곡들이 가득하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영화의 특성상, 다른 영화들보다는 장면과 음악과의 아주 직접적인 관계는 없기
때문에 사운드트랙만으로도 충분히 들을만한 음반이 되지 않을까 싶다.


전체적으로는 왕가위가 만든 한 편의 헐리웃 뮤직드라마로 다가왔지만,
단순하게 그렇게 지나치기에는 너무 황홀한 배우들의 모습과, 헐리웃의 옷을 입은 왕가위의
화려한 영상미를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팬들에게는 놓칠 수 없는 작품이 될 듯 하다.



 

 
글 / ashitaka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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