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Right Now, Wrong Then, 2015)

무릅쓰고 편안하게



홍상수 감독의 신작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제목을 붙여 쓴 것이 감독의 의도인 듯 하여 그대로)는 감독의 최근작들의 경향과 마찬가지로 같은 인물들의 다른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북촌방향'이나 '옥희의 영화'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등과 이 영화가 다른 점이라면 두 가지의 다른 이야기의 구분이 더 명확한 동시에 특별한 시공간적 (혹은 차원적) 변화로 인한 이야기의 갈래가 아닌 아주 미세한 말과 행동으로 인한 변화의 줄기를 따르는 영화라는 점이다.



ⓒ 전원사. All rights reserved


텍스트를 이렇게 저렇게 분석해 보고 픈 마음이 가득 들었던 '북촌방향'과 같은 영화와는 다르게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얼핏 또 같지만 다른 이야기를 영화적 구성을 곁들여 펼쳐 놓은 영화가 아닐까 싶지만, 사실은 훨씬 더 직관적이고 가벼우며 편안한 작품이다. 1부의 이야기는 극 중 영화감독인 함춘수 (정재영)의 주관적인 기억 혹은 조작된 과거, 아니 이런 구성적 가능성은 다 재쳐두고, 그저 솔직함 보다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계산하고 절제하고 고민한 결과물을 만나게 된다. 함춘수는 우연히 만나게 된 윤희정 (김민희)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녀에게도 호감을 얻기 위해, 쉽게 말해 되지도 않는 말로 그녀를 칭찬하고 환심을 사기 위해 많은 말과 행동을 하며 이른바 그녀에게 많은 공을 드린다. 하지만 어찌보면 처음부터 잘 될리 없었던 이 불안한 관계는 결국 더 나아가지 못하고, 함춘수는 다음날 그 화를 고스란히 떠안으며 쓸쓸히 수원을 떠난다.


그에 반해 2부의 이야기는 훨씬 더 자연스럽다. 2부의 함춘수 역시 윤희정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하기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드러낸다. 2부의 이야기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건 그녀의 그림에 대해 냉정하게 이야기해서 관계가 어긋나는 듯 했지만 그렇지 않았고, 특히 그녀의 지인들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추태를 부렸지만 관계가 깨어지기 보다는 오히려 '그럴 수도 있지'하는 정도로 지나간다는 점이다.



ⓒ 전원사. All rights reserved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라는 영화의 제목처럼, 이 이야기는 아주 작은 말들로 인해 관계가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울도 되지만, 그보다는 바로 그 순간 순간의 말과 행동에 너무 집중하고 고민하며 살아가는 나에게 '그렇게 솔직하게 다 보여줘도 아주 큰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 같아 인상적이었다. 영화 속 대사를 빌리자면 이 루틴이 깨진다고 세상이 망하는 건 아니라는 걸 유쾌하게 전하고 있달까. 지금은 맞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그 때는 틀렸다고 생각되었을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존재하기 때문에 결국 아무 소용없다는 허무한 감정보다는, 그러니까 너무 일희일비하며 자신을 옥죄일 필요는 없다는 말로 느껴졌다. 그래서인가, 근래 본 홍상수 감독의 영화 가운데 가장 소소하고, 부담 없고, 좋은 의미에서 머리 쓸 일 조차 거의 없는 편안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묘하게 또 보고 싶은, 그래서 그 순간의 찰나를 발견하고 픈 영화이기도 했다.



ⓒ 전원사. All rights reserved


1. 이번 영화는 수원화성 근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영화를 본 다음 날 바로 다녀왔어요 (이건 곧 별도로 쓸 예정). 영화 속 처럼 추운 겨울에 한 번 더 다녀왔으면 좋겠다 생각이 들더군요.

2. 김민희의 연기는 너무 자연스러워서 연기와 실제가 구분이 안되는 차원이더군요. 이 영화의 유일한 성립필요 조건은 극중 김민희가 연기한 캐릭터가 얼마나 매력적이냐 라는 것 정도였을텐데, 완벽 그 자체.

3. 최화정의 '감독님 왜 그러세요!' 이 대사 잊지 못할 것 같아요 ㅋㅋ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본문에 사용된 모든 스틸컷/포스터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모든 이미지의 권리는 전원사 에 있습니다.




자유의 언덕 (Hill of freedom, 2014)

홍상수의 시간



홍상수 감독이 최근 작품들에서 관심을 가졌던 형식적인 측면은 '시간'이었고, 내용적인 측면은 '착함' 그리고 '관계' 그 자체에 대한 것들이었다. 가장 현실적인 이야기 속에서 우주를 발견해 내는 그의 영화 답게, 이번 신작 '자유의 언덕'은 더 직접적인 시간에 대한 묘사를 통해 시간이라는 것을 형식 그 이상의 주제로 이끌어 내며, 이를 영화 안에 머물지 않고 영화 밖 현실로까지 끌어내는 야심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 전원사. All rights reserved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최근 작들에서 홍상수 감독은 의도적으로 시간의 재배열, 그리고 꿈과 현실의 모호함과 관계에서 오는 각자의 기억을 통해 매번 같은 이야기 같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었는데, '자유의 언덕'은 '생활의 발견' '극장전' 등 김상경이 주연을 맡았던 작품들이 담고 있었던 남녀간의 이야기까지 결합한 버전의 또 다른 시간의 관한 작품이었다. 이전 작품들에서 홍상수 감독은 가끔은 무심한 듯 이것이 꿈이어도 상관없고 현실이어도 상관 없으며, 또한 누구의 이야기가 맞고 틀려도 상관 없다는 식으로 화자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했었는데, 이번 작품은 이런 모호함 보다는 아주 직접적인 방식으로 시간의 재배열에 대해 형식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각 장의 형식으로 이야기를 나누거나 중간 중간 화자가 등장하여 이야기를 나누거나 다시 시작했던 것과는 달리, 이번 작품에서는 극중 서영화가 연기한 '권'이 '모리 (카세 료)'가 남긴 편지를 읽는 장면들을 중간 중간 삽입하여 그 때마다 이야기가 새롭게 전개된다는 것을 영화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거의 첫 장면에서 '권'이 모리가 남긴 편지를 가지고 어학원 계단을 내려오다가 떨어트려 그 편지의 순서가 바뀌게 된 것은 이 영화가 갖게 된 형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자유의 언덕'은 상당히 친절한 방식으로 이 시간의 재배열, 아니 각각의 시간에 대해 시작과 끝을 분명히 설명해 준다.




ⓒ 전원사. All rights reserved


처음에는 이 뒤 섞여 버린 편지 속 일기 같은 이야기의 순서를 제대로 맞춰보려는 노력도 해보았으나, 사실 이렇게 시간의 흐름대로 이야기를 재조합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겠다 싶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 영화는 홍상수의 세계 속에서 또 다른 자연스러운 영화가 되었겠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시간의 뒤 섞임을 설명하고 있는 데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감독의 의도는 물론 보는 이에 따라 다른 해석을 할 수 있을 텐데 나는 일종의 인과관계의 무상함에 대한 이야기로 느꼈다. 처음 이 이야기가 뒤섞인 줄 모르고 어떤 에피소드를 보게 되면 저 인물들이 왜 저런 대화를 하는 지 잘 이해가 가지 않지만, 그 다음 이 이야기가 본래는 이 에피소드 이전 시점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아, 저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랬었구나'하고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 이 영화를 보게 되는 첫 번째 방법인데, 이건 크리스토퍼 놀란의 '메멘토'처럼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자체가 중요한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읽게 되면 너무 심심한 영화일 것이다.



ⓒ 전원사. All rights reserved


외국인이라는 설정. 그렇기 때문에 거의 모든 대사가 영어로 진행되는 설정은 구성적으로 보았을 때에도 그 전달 되는 어감 때문에 다른 분위기를 전달하는 것은 물론, 홍상수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아마도) 말하고자 했던 것 중 하나인 일상 속에서 번번히 벌어지는 '무례함'에 대한 배경이 되기도 한다. 일본인으로서 북촌에 위치한 게스트하우스에 머무르게 된 모리는 처음 만나는 한국 사람들로 부터 매번 같은 질문을 받게 된다. 일명 호구조사 라고도 하는 이 일반적인 질문들을 던지는 사람들의 자세는 친해지기 위한 선의인 경우도 있고, 무언가 의심스러움으로 인한 경계심도 있으며, 정말 별다른 감정 없이 의례 던지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무덤덤히 다루고 있는 모리의 에피소드를 보고 있다보면 별다른 동기 없이도 모리의 입장에서서 약간의 불쾌함이나 피곤함이 느껴진다.


모두들 각자의 방식이 있고 바라는 바가 있을 텐데, 외국인인 모리의 상황을 빌려 보게 되는 사람들의 모습은 상대의 대한 배려보다는, 혹은 배려하려는 마음으로 그러했다 하더라도 결국 온전히 홀로 의지에 따라 있고 싶은 사람을 그냥 두지 않는 무례를 범한다. 여기서 '무례함'이란 단순히 극 중 이민우가 연기한 캐릭터의 경우처럼 직접적인 불쾌함을 주는 경우 외에도, 불쾌함을 주지 않았을지라도 극 중 '상원 (이의성)'이 연기한 캐릭터가 모리를 대하는 경우처럼 그것이 나쁘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을 지라도 100% 내 의지로 행해진 결과는 아니었다는 것까지 포함된 의미로 봐야 할 것이다. 뭐랄까. 우리는 언제부턴가 (특히 영화에서) 우연과 운명에 대한 기대감에 고취되어 있는데, 한 편으론 그저 스스로가 처음 원했던 계획대로만 끝까지 (그것의 성공여부와는 상관없이) 진행하기 어려운 사회와 관계라는 존재의 피로감을 '자유의 언덕'은 홍상수 식으로 표출하고 있는 듯 했다. 그것과 연결지어 이번 작품에서 특히 많이 등장한 '행복해요?'라는 질문은 이렇듯 나 자신을 오롯이 제어하지 못하는 사회 속 인물들에게 던지는 질문 같아 보였다.



ⓒ 전원사. All rights reserved


다시 이야기를 처음 꺼냈던 '인과관계의 무상함'으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이 뒤섞인 이야기를 이해하게 되면서 극 중에 펼쳐진 일종의 에피소드들의 인과관계를 맞춰보고 논리를 완성하게 되는데,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홍상수 감독이 전달하려는 바는 물론 이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만약 이 이야기들이 정상적인 시간의 순서대로 벌어졌다고 하더라도 그 뒤섞여 있을 때 불쾌하거나 무례하다고 느꼈던 순간들이 과연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가까울 것이다. 그리고 관객이 이 인과관계의 퍼즐을 맞춰가고 있을 때 쯤 몇 가지는 맞추었다는 착각을 하도록 힌트나 (관객 스스로가 생각하는) 답을 던지고 있지만, 일부는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채,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그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데에 무관심한 채 그냥 내버려둔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모리가 누군 가와 싸웠다는 것만 알 수 있도록 하고 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처럼).


즉, 홍상수 감독은 관객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을 이용해 관객들이 오해하고 착각하도록 만들고, 너희 들이 틀렸어 라는 답을 짠~ 하고 내어 놓으며 반전을 선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영화를 끝내고는 관객들이 스스로 돌이켜 생각해 볼 수 있도록 공간을 남겨두고 있다. 만약 '자유의 언덕'이 더 재기발랄하고 형식을 강조하는 작품이었다면 아마도 편지에 쓴 거의 모든 이야기가 끝난 마지막 게스트 하우스 장면에서 영화가 끝났을 것이다 (사실 여기서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홍상수 감독은 편지의 이야기가 다 끝난 뒤의 이야기를 조금 더 남겨둠으로서, 이 이야기를 영화 안에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관객에게 던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이런 이야기가 있어'라고 마무리 지었었다면, '자유의 언덕'에서는 '자 이런 이야기가 있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라고 직접적으로 묻고 있는 듯 했다.


홍상수의 영화는 이번에도 참 놀랍다. 그리고 더 놀랍게도 계속 더 발전하고 있다.



1. 영화 속에 등장한 북촌 코스는 한 번 쭈욱 돌아봐야 겠네요 ㅎ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본문에 사용된 모든 스틸컷/포스터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모든 이미지의 권리는 전원사 에 있습니다.




여배우들의 진짜 같은 모습

크리스마스 이브. 유명 패션지 '보그 (Vouge)'의 특별 화보 촬영을 위해 20대부터 60대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여배우 여섯 명이 이례적으로 한 자리에 모이게 된다. 윤여정, 이미숙, 고현정, 최지우, 김민희, 김옥빈, 이렇게 여섯 명의 여배우들이 함께 한 이 자리는, '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 '정사' 등을 연출한 이재용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되었는데, 리얼 다큐멘터리인듯 하지만 사실 극영화인 영화 '여배우들'이 오늘 소개할 작품이다.





영화는 '남자, 여자, 그리고 여배우들이 있다'라는 의미심장한 문장과 함께 시작된다. 그리고 나서는 실제 배우들의 짤막한 인터뷰가 이어진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한 자리에 모이기 어려운 각기 다른 여섯 명의 여배우가 하나의 프레임에 들어오게 된 이유는 패션지의 특별 화보 촬영을 위해서였다. 이 프로페셔널 한 이벤트는 다큐멘터리에 가깝게 묘사되는 배우들의 진짜 같은 모습과 함께 관객들에게 한껏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영화 촬영을 위해 패션지 화보 촬영이라는 컨셉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패션지와 영화의 기획된 콜라보레이션이라할 수 있는데, 이 같이 패션업계라는 트랜디한 - 그리고 스타를 동경하는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업계라는 점에서 더욱 - 집단의 이야기 배경은, 자신을 연기하는 여배우들의 이야기를 더욱 진짜처럼 보이게 한다. 이런 점이 이 영화 '여배우들'의 가장 흥미로운 점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도 아니요, 잘 짜여진 이야기를 연기하는 100% 극영화도 아닌, '있는 그대로를 연기하는' 영화라는 점 말이다.




사실 이런 비슷한 컨셉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의 경우 대부분은 너무 '진짜인 것처럼' 연기하려는 극영화 성격이 강해 이런 미묘한 감흥을 느끼기 어려운 것이 보통인데, 이재용 감독의 '여배우들'은 이 미묘한 지점을 잘 간파하고 있다. 사실 제목은 '여배우들'이지만 여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깊은 고뇌와 속 시원한 이야기들 보다는, 대중들이 궁금해하는 것들에 기인한 토크쇼 식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즉, 이 여섯 명의 여배우들의 대한 기본 정보 - 혹은 가십거리 - 에 관심이 많으면 많을 수록 이들의 이야기에 더욱 흥미를 갖게 된다. 물론 대한민국에서 여배우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선후배간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지만, 영화는 이렇게 무거운 주제보다는 그 이면에 더 본능적으로 존재하는 대중의 호기심에 기인하고 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윤여정 보다 윤여정을 더 잘 연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고, 김옥빈 보다 김옥빈을 더 잘 연기할 여배우도 없을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누구보다 자신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에게 보여지는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그대로 연기할 때 더 큰 리얼리티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여배우들'에 출연한 여섯 명의 배우에 관해 박수를 보내야 할 점은, 연기력이 아니라 자신 만이 알고 있는 진짜 자신과 대중들이 알고 있는 여배우로서의 자신을 모두 자신의 캐릭터 안에 녹여내었다는 점일 것이다. 극중 최지우는 한류스타 '지우히메'로서 다른 다섯 명의 배우와 자신을 차별하려 하고 특히 조금 애매한 관계에 놓여있는 고현정과는 껄끄러운 부분이 있다. 고현정 역시 이런 최지우를 못마땅해 하며 이를 참지 못해 최지우와 한바탕 말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이런 부분은 분명 대중들이 이들의 이미지를 통해 만들어낸 갈등관계라 할 수 있을 텐데, 이런 장면이 진짜 같은 이 영화에서 펼쳐졌을 때 대중들은 묘한 재미와 긴장감을 얻게 된다. 이렇게 스스로를 더 진짜 같이 연기하는 구성 덕에 진짜 이 둘의 사이가 불편한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린다.




이렇게 계속 '진짜'를 강조하던 영화는 갑자기 창밖에 내리는 눈, 그리고 여자친구에게 몰래 기타 연주와 함께 휴대폰으로 러브 송을 들려주는 한 남자 스텝의 이야기와 함께, 조금은 급작스럽게 이 영화가 극영화임을, 더 나아가 판타지일지도 모른다는 뉘앙스를 준다. 사실 이 눈 내리는 장면을 처음 보았을 때는 영화의 제목을 '여배우들'보다는 '크리스마스의 기적' 쯤으로 하는 것이 더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그 이후 전개과정을 보니 이재용 감독은 이 시퀀스를 일종의 경계로 사용하고 있는 듯 했다. 이 시퀀스 이후 영화는 와인과 함께 좀 더 본격적인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리고 여기에는 ‘무릎팍 도사’를 한 차원 넘어서는 여배우들의 솔직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진짜를 바탕으로 진짜와 허구가 뒤섞여 있는 이 오랜 대화 시퀀스는 이 작품을 평가하는데 좋은 지점이 된다.

DVD Menu




DVD Quality

1.85:1 애너모픽 와이드스크린의 영상은 평균적인 화질을 수록하고 있다. 극영화이긴 하지만 리얼 다큐멘터리 같은 구성을 갖추고 있는 작품이기에 화질 자체가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반대로 화질 자체가 크게 중요한 타이틀도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아름다운 여배우 여섯 명의 모습을 블루레이 화질로 보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기도 하지만, DVD화질로도 충분한 편이다. 돌비디지털 5.1 채널을 수록한 사운드 역시 멀티 채널을 크게 필요로 하지 않는 인터뷰와 대화가 99% 이상인 작품인지라 사운드 퀄리티가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99%를 차지하는 대사 전달 부분이 아쉬운 것은 아니니 염려하지 않아도 될 듯 하다.





DVD Special Features

‘여배우들’의 진면목은 바로 음성해설에서 드러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6명의 여배우가 모두 참여한 음성해설 트랙은 이번 타이틀의 가장 큰 장점이다. 6명의 여배우는 물론 연출을 맡은 이재용 감독까지 총 7명이 참여한 음성해설은, 영화 속 ‘여배우들’이 어찌되었든 ‘연기’하고 있다는 점으로 미뤄봤을 때, 진짜 ‘여배우들’을 만나볼 수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실제로 이 작품 이전부터 친했던 혹은 이 작품을 통해서 친해지게 된 이 배우들이, 짧았던 촬영 기간을 추억하고 영화 속 보다 더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탈함을 넘어 거침없이 나누는 분위기는 영화 속 장면에 비할 바가 아니다. 실제로 와인을 한 잔씩 하며 아주 편안한 분위기에서 이뤄진 음성해설은 참여하고 있는 여배우들도 듣는 DVD구입자들도 시종일관 웃음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정말 재미있다. 이 음성해설 트랙만으로도 DVD타이틀의 소장가치가 충분하다 할 수 있겠다.





두 번째 디스크에는 본격적인 부가영상들이 수록되었는데, 일단 이채로운 것은 작품을 멀티 앵글로 새롭게 즐겨볼 수 있는 ‘그녀들의 대화’를 들 수 있겠다. 아무래도 다큐멘터리처럼 촬영하다 보니 일반 극 영화에 비해서는 앵글이 한정적으로 사용된 부분이 있었는데 이 부가영상을 통해서 본편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다른 각도의 그녀들을 만나볼 수 있다.




‘여배우, 이야기’에서는 여섯 명 여배우들의 진솔한 인터뷰를 만나볼 수 있다. 그녀들 각각이 생각하는 ‘여배우’라는 것에 대한 의미, 배우가 된 계기 등에 대한 솔직한 답변들을 만나볼 수 있다. ‘제작과정’은 제목 그대로 촬영장의 뒷얘기들을 살펴볼 수 있는데, 작품 자체가 뒷이야기 그 자체에 가깝다 보니 보편과 큰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 되겠다.



마지막으로 ‘촬영현장 스케치’ 영상과 ‘포토 갤러리’ ‘예고편’이 수록되었다.



[총평]
처음에는 단순히 한 자리에 모이기 힘든 여배우들이 모였다는 것 정도의 이슈로 그칠 것만 같았지만, 이재용 감독의 ‘여배우들’은 무겁지 않으면서도 그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 괜찮은 작품이 되었다. 작품 자체도 괜찮았지만 진짜 여배우들을 만나볼 수 있는 음성해설 트랙으로 인해 좀 더 완벽해진 느낌을 갖게 된 타이틀이었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 주의 : 본 컨텐츠의 저작권은 'dvdprime.com'에 있으며 저작권자의 동의 없는 무단 전재나 재가공은 실정법에 의해 처벌 받을 수 있습니다. 단, 컨텐츠 중 캡쳐 이미지에 대한 권리는 해당 저작권사에게 있음을 알립니다.





하녀 (2010)
계급사회에 대한 쌍방향적 비아냥


임상수 감독이 김기영 감독의 원작을 리메이크 한다고 했을 때, 그리고 극장에 '하녀'를 보러 갔을 때까지도 계속 머릿 속으로 주문처럼 외웠던 것은 '김기영 감독의 '하녀'는 잊자' 였다. 대부분의 리메이크는 원작보다 좋기 어렵다는 사실을 재쳐두더라도, 김기영 감독의 '하녀'가 주었던 충격과 완성도와 그 독특함은 현대의 그 어떤 감독이 다시 만들더라도 쉽게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는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임상수의 '하녀'에 대한 좋지 않은 평들이 흘러나오는 것은, 원작의 구조만 빌려온 수준은 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쓰지는 않은 약간 모호한 지점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김기영의 원작을 기억하는 이들은 저절로 두 작품을 비교해보게 되니 아쉬움이 보일 수 밖에는 없고, 일반 관객들에게는 좀 어려워 보이는 '막장 드라마'를 보는 듯해 끝나고 나서는 허무함을 감추지 못하는 듯 했다. 어쨋든 개인적으로 임상수의 '하녀'는 김기영의 원작과는 다르다, 그러니 아예 비교를 말자 라고 수없이 되새긴 다음에 보게 된 작품이었다. 그래서인지 우려(?)와는 다르게 임상수 특유의 잘못된 사회에 대한 비아냥과 영화적인 장치들을 효과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괜찮은 작품이었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들께서는 마지막 단락으로 이동해주세요~)
 

 싸이더스 FNH. All rights reserved

일산의 라페스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매우 현대적인' 오프닝 시퀀스는 무언가 원작과의 거리를 두려는 감독의 의지 같아 보였다. 이 오프닝만 보고 있노라면 절대 '하녀'라는 작품을 떠올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이 죽음이 담긴 오프닝은 마지막을 위한 대구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바쁜 도시, 어떤 여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지만 사람들에게는 그저 잠깐의 이슈일 뿐, 큰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는 바로 본연의 이야기인 '하녀'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임상수의 '하녀'는 너무 노골적인 계급사회에 대한 비아냥이다. 그런데 이 비아냥은 일방적이지 않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서민이고 이들과 갈등을 겪는 자들은 지배 계급이자 부자인 것이 아니라, 주인공 역시 아파트를 전세주었을 정도로 별로 서민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 처음부터 쉽게 빠져들기 어려웠던 이유는 바로 전도연이 연기한 '은이' 캐릭터에 공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은이가 스스로 자각하는 순간은 사실상 영화가 끝나기 바로 전, 그러니까 스스로가 죽음을 선택하는 그 순간에야 비로소 이뤄졌다고 볼 수 있을텐데, 그 이전까지 은이의 행동들을 보면 단순히 남성이 그리워하는 유혹하는 여성도 아니고, 주어진 하녀일에만 열심히 하려는 일꾼도 아닐 뿐더러, 주인집을 이용해 신분 상승을 노리려는 야심찬 자도 아니다. 그런데 극중 은이에게는 이런 요소들이 미약하게 나마 중간중간 드러난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은이라는 캐릭터에게 공감을 얻지 못한 부분이었다. 

주인집에 하녀로 들어온 첫 날 부터 별로 주눅들지 않아 보이는 대범함도, 주인집 남자의 유혹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드는 모습도, 나중에 가서야 이들을 심판하고 저주를 내리고자 스스로를 산화하는 모습도 모두 갑작스러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싸이더스 FNH. All rights reserved


쌍방향적 비아냥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극중 은이에게서는 관객의 공감을 얻을 만한 부분이 사실상 거의 없다. 그러니까 은이 역시 비아냥의 대상이 된다. 주인집의 엄청난 부를 부러워 하는 동시에 별다른 갈등 없이 성의 유혹에 사로 잡히고(이 순간을 신분 상승을 위한 행동으로 보기에는 너무 공감대가 없다), 극중 안주인 (서우)의 대사처럼 정말 인간적으로 잘해준 안주인을 봐서라도 거부해야 했던 것이었지만, 앞서 이야기했듯 은이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주인집 남자를 받아들인다. 이렇듯 '은이'라는 캐릭터는 확실히 주인집과 마찬가지로 또 하나의 비아냥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렇듯 '은이' 역시 비아냥의 대상으로 삶으려던 것이라면, 그러니까 이런 부를 누리고는 싶지만 그러지는 못하고 이를 불평만 하는 중산층 (혹은 서민)으로 그릴려고 했다면(다시 말해 갖을 수 있어도 갖지 않은 자가 아니라, 갖고 싶지만 갖지 못해 못 갖은 자) 좀 더 확실할 필요가 있었는데 영화 속 은이는 무언가 모호하다. 그리고 이런 모호함은 주인집과 은이 사이에 놓인 늙은 하녀 (윤여정)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사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이전 김기영 감독의 '하녀'를 리메이크한 '화녀'와 '충녀'에 출연한 것으로 인해 어느 정도 작은 배역을 부여 받은 것으로만 생각했었는데, 막상 보고 나니 이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은 그가 연기한 또 다른 '하녀'인 것 같았다. 윤여정이 연기한 하녀는 '은이'가 보여주지 못한 공감대를 어느 정도 불러 일으킨다. 무엇보다 그녀의 행동과 감정선이 더욱 확실하다. 그녀는 주인집 사람들에게는 오래 일해온 만큼 깍듯이 예의를 갖춰 대하지만, 역시 오래 일해온 만큼 이들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들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며 (왜 은이에게도 계속 얘기하지 않던가), 이런 부 역시 동경하여 주인 집이 집을 비웠을 때 자신이 이 공간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 것을 충분히 누리는 모습을 보여주며, 검사 아들과 주인집에 무시 당했을 때 술취해 혼잣말 하는 장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분 상승에 대한 욕망 역시 가지고 있다. 


 싸이더스 FNH. All rights reserved

그리고 무엇보다 은이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연민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연민은 은이에 대한 연민인 동시에 자기 연민의 성격이 더 크다. 은이가 주인집 남자와 관계를 갖는 소리를 몰래 듣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묘한 부러움의 정서가 담겨 있으며, 그런 은이가 큰 돈을 받게 되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는 장면에서 역시 질투 같은 것이 느껴진다. 반대로 주인집의 무서운 사람들로 인해 은이가 완전히 망가지는 모습을 보는 시선에서는 연민과 동시에 어느 편에 서야할지 고민하는 모습도 엿볼 수 있다(그런데 나 같아도 고민할 것이, 극중 은이는 주인집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비아냥의 대상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을 시원하게 선택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윤여정이 연기한 하녀는 마지막 은이가 자살을 시도하려 할 때 적극적으로 막지 않고 그저 '그냥 안하면 안돼?'라는 정도로만 이야기 하는 것으로 그친 것이다. 은이가 안타깝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은이에 대한 비아냥과 주인집 사람들과 같은 지배 계급에 대한 분노, 그리고 이런 응징에 대한 대리 만족 등 복합적인 정서가 담겨있기 때문이다(재미있는 건 극중 늙은 하녀가 은이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한 때 이 하녀를 연기했던 배우가 윤여정이였기 때문에 독특한 정서가 생겼다는 점이다)


 싸이더스 FNH. All rights reserved

어쨋든 주 비아냥의 대상인 주인집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겠다. 윤여정이 연기한 하녀 다음으로 인상적인 캐릭터를 꼽으라면 이정재가 연기한 주인남자를 들 수 있을 정도로, 작정하고 만들어진 이 계급사회의 지배 캐릭터는 친절한 듯 하지만 강압적이고, 깨어있는 듯 하지만 누구보다 꽉 막혀있는 캐릭터로 그려진다. 단순히 돈만 많은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미술 작품이나 피아노 연주)를 즐기는 듯 하지만, 오히려 이 저택에 있는 예술 작품들은 이런 허상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도구로 작용한다. 피아노 연주 역시 이들의 동물같은 본성을 숨기려는 도구라고 볼 수 있겠다. 이 캐릭터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은 역시 장모님(박지영)과의 대화 장면을 들 수 있겠다. 이 캐릭터의 정서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감히'를 이야기 할 수 있겠는데, 다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듯 보이지만 이 지배 계급에게는 뼈속부터 '감히 너희들이 나랑 말이나 섞을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정서를 갖고 있음을 이 시퀀스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마치 사극에 등장하는 왕처럼, 결혼관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내 아이는 누가 낳아도 내 아이이거늘, 누가 감히 나에게 뭐라 할 수 있느냐'라는 식의 정서.

비아냥의 주 대상인 만큼 임상수는 이들 가족을 (특히 이정재를) 깍아내리는 대에 주저함이 없어 보인다. 불타는 은이에 놀라 당황하며 서둘러 집을 빠져나가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나, 영화의 마지막 이런 일을 몇년 전에 겪었음에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오히려 더욱 추해지고 가짜스러운 모습은, 왜 이들이 '정말 무서운 사람들'인가를 잘 보여준다.



 싸이더스 FNH. All rights reserved


임상수의 '하녀'를 보면서 눈여겨 본 것은 역시 세트와 구도 였는데, 세트는 '계단'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인상적으로 사용되지는 못했으며, 여러 공간이 등장하지만 로비에 가깝도록 큰 거실이 '와, 넓다'라는 느낌을 준 것 외에는 큰 효과를 주지 못한 것 같다. 김기영 감독의 가장 큰 장기 중 하나가 미장센이라는 점을 미뤄봤을 때 아무리 비교안하려 해도 이 세트를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 부분이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카메라 앵글은 의도적인 샷이 굉장히 많았다. 일단 인물을 정확히 중앙에 두고 좌우의 여백을 크게 두는 앵글이 상당히 많았고, 무엇보다 한 샷을 여러개의 공간으로 나눠서 사용하는 구도를 자주 볼 수 있었다(그와 마찬가지로 이런 구도를 사용할 때는 포커스 인과 아웃 방식이 매우 자주 사용되고 있다). 마치 그래픽 노블을 보듯 공간을 통해 정확히 선을 그어 인물과 인물을 나누는 구도 등은 영화가 말하려는 메시지의 이해를 돕는 하나의 도구로 적절히 사용되고 있다. 그 외에 윤여정이 술에 취해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는 장면에서의 흔들리는 카메라 앵글도 딱 한번 뿐이어서 그런지 인상적이었다.


 싸이더스 FNH. All rights reserved

임상수의 '하녀'는 김기영의 '하녀'를 인식하지 않으려는 시도는 좋았지만, 좀 더 확실했더라면 좀 더 좋은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임상수 감독 특유의 풍자와 비아냥이 부족한 스릴러에 오히려 잠식 당하는 느낌이 있었지만, 그래도 윤여정의 캐릭터를 중심으로 본다면 좀 더 괜찮은 드라마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도 나쁘지 않았지만, 아직 김기영 감독의 '하녀'를 못 본 이들이라면 반드시 보길 바란다. 


1. 아드메치.
2. 첫 시퀀스에 나온 일산 라페스타는 예전 회사가 있던 곳이라 감회가 새롭더군요. 더군다나 극중 전도연이 올랐던 그 옥상은 바로 예전 저희 회사 건물이었던 것 같아요.
3. 쥐는 나오지 않지만 주인집 거실에서의 마지막 시퀀스는 약간 기괴한 것이 원작을 살짝 떠올리게 하더군요.
4. 처음 캐스팅 소식을 들었을 땐 하녀 역할로 오히려 서우가 더욱 어울린다는 생각이었는데, 막상 영화를 보고나니 임상수의 '하녀'에서는 안주인 역할에 서우가 더욱 어울렸던 것 같아요.
5. 예전에 심혈을(?) 기울여 썼던 김기영 감독의 '하녀' DVD 리뷰 입니다. http://www.realfolkblues.co.kr/1049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본문에 사용된 모든 스틸컷/포스터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모든 이미지의 권리는 싸이더스 FNH 에 있습니다.



 



하하하 (夏夏夏, 2010)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 대한 철학적 놀이


(참고로 이 글은 영화를 보고 나서 하루를 훌쩍 넘기고도 그 여파를 감당하지 못해, 결국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막걸리 한 잔을 건하게 걸치고 나서 작성하는 글 임을 밝힌다. 본래 술을 마시고 쓰는 글은 매번 위험하지만, 이번 '하하하' 리뷰 만큼은 이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랬다. 일단 이것저것 복잡한 것을 떠나서 홍상수 감독의 열번째 장편 영화 '하하하'는 나에게 있어 술을 부르는 영화였다. 참고로 그의 전작 '잘알지도 못하면서'는 그해 본 영화 가운데 가장 재미있는 영화였지만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라는 슬픈 국환 때문에 차마 글을 남기지 못했었는데, 이번에는 그래도 나름 술 한잔을 더해가며 글을 가져가게 되었다. 최근 15주년 기념 버전으로 발행된 '씨네 21'이 특별히 홍상수 에디션을 내어놓은 것도 그렇고, 일반 대중들에게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영화 팬들 사이에서는 이른바 홍상수가 대세라고 할 정도다. 사실 나는 예전 홍상수 영화에서는 별로 재미를 느끼지 못한 편이었다. 특히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같은 작품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떠나서 별로 달갑지 않게까지 느껴졌던 작품이었다. 그랬던 홍상수를 다시 보게 된 것은 역시 '잘알지도 못하면서' 였다. 남들은 몰라도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 이전과 이후의 홍상수가 확연히 달라보일 만큼, 인상적인 변화였고 가볍지만 더욱 생각할 거리는 많아진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이전과는 다른 기대를 갖고 보게 된 '하하하'는 새로워진 홍상수 월드를 좀 더 견고하게 하는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 전원사. All rights reserved


홍상수 영화를 논하면서 많은 이들이 '속물 근성'을 이야기하는데, 사실 나도 '잘알지도 못하면서'를 보았을 때는 이런 논리에 동의 했었으나 '하하하'를 보면서 이것이 단순히 '그래, 너도 나도 다 속물이다'라는 것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더 높은 차원의 이야기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영화는 두 남자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두 남자는 각각 통영에 다녀온 추억이 있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고는 각각 자신의 이야기를 술 한잔에 실어 나누기로 한다(나중에 들었던 생각이지만 이 설정은 은근히 무협지 속의 인물들의 그것과 닮아있다). 그렇게 두 남자는 서로 만이 겹쳐지지 않은 두 가지 이야기(하지만 하나의 이야기)를 서로에게 들려준다. 이 두 남자의 이야기가 서로 겹쳐진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관객들 뿐이다(영화의 마지막 왕성옥이 이 일부분을 알게 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일부분이다). 

'하하하'를 보면서 시종일관 느껴졌던 주제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 대한 대화들이었다. 이 영화의 제목을 그의 전작 '잘알지도 못하면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이 작품은 아는 것에 대한 물음과 주장을 끊임없이 펼치고 있다. 각각의 인물들의 대화를 살펴보면 단 한 시퀀스도 이 주제를 다루지 않은 대화가 없을 정도로, 영화 속 인물들의 대화는 서로가 알고 있는 것, 내가 알고 있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 무엇이 안다는 것인가에 대한 선문답으로 이뤄져있다. 영화는 끊임없이 묻는다. '당신이 뭘 알아요?' '이걸 안다고 할 수 있어?'



ⓒ 전원사. All rights reserved


이런 '알고 모르는 문제'는 영화가 택하고 있는 구조로 더 선명히 드러난다. 영화는 두 남자의 하나이지만  두 개인 이야기로 진행되는데, 각자는 서로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이야기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관객에게 그대로 드러나듯 이들의 이야기는, 그러니까 이들이 각자 말하는 인물들과 관계의 이야기는 제 3자의 입장에서 보면 거짓이 많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즉 이들의 이야기는 안다고 하지만 모르는 이야기인 것이다. 하나의 인물을 두고 각자가 보는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 같은 대상을 두고도 말하는 화자에 따라 청자의 입장에서 '좋은 어머니'도 되었다가, '돈 많은 식당 주인'도 되는 것, '동굴 같은 곳'에서 '희망을 꿈꾸게 되는 집'도 되는 것이 이 영화가 말하는 알고 모름의 방식이다. 사실 여기까지는 그리 어려운 비유가 아니다. 그리고 특별한 방식도 아니다. 그런데 홍상수 감독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인물들의 속내를 겉보다도 더욱 진솔하게 드러낸다.

홍상수 월드의 인물들을 이야기하며 '속물'이내 뭐내 하는 것은 바로 이 미칠듯한 진솔함 때문일텐데, 사실 이런 솔직함을 그냥 '찌질함'으로 얼버무리기에는 정말 아쉬운 부분이 많다. '하하하'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정확히 얘기하자면 찌질한게 아니라 지극히 솔직한 것 뿐이다. 뭐랄까 우리가 일상에서 속으로만 하는 이야기들을 모두들 겉으로 거침없이 이야기할 뿐이다. 이것은 분명 찌질함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지나치리 싶을 정도의 솔직함은 (그런데 개인적으로 홍상수 영화를 보면서 가장 크게 느끼는 점은, 이런 솔직함 자체를 '지나치다'고 느끼는 것 자체가 영화가 의도하는 점이라는 것이다), 묘하게도 극 중 인물과 나를 완전히 겹치도록 만든다. 겉으로는 웃을 지언정 그 안에서 내가 완벽하게 보이기 때문에 영화 속 인물들처럼 솔직하게 '저건 완전히 나다'라고 말하지는 못해도, 속으로는 '맞아, 나도 저런 적 있어'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이상하기만 한 듯한 영화에서 나를 보는 완벽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단순히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은 홍상수 영화가 갖는 가장 큰 미덕 중 하나라 하겠다.



ⓒ 전원사. All rights reserved


사실 '하하하'에 대한 감회를 짧은 글 하나로 정리하기에는 너무 부족함이 따른다. 진짜 홍상수 월드 속 인물들처럼 (홍상수 월드의 인물들은 모두 주당이다) 대낮부터 나 한잔 너 한잔하며 이야기 꽃을 피워줘야 어느 정도 정리해볼 수 있을 정도다. 그렇기 때문에 이 어설프게 남아버린 글에서 더 본격적인 것으로 나아가기는 어려울 것 같아, 다시 영화적인 이야기로 돌아오려 한다. 이번 씨네 21에 실린 홍상수와 정성일의 엄청난 대담을 보면(아직도 못 본 이들이 있다면 웃돈을 주고서라도 지난 호를 반드시 소장해야 한다. 그 만큼 압도적인 컨텐츠가 실려있다), 홍상수는 줌을 사용하는 것이 일종의 리듬으로 사용한다고 했는데, 확실히 '하하하'에 사용된 줌에서는 리듬 감이 느껴진다. 그냥 인물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정도가 아니라 영화의 전체적인 리듬을 살리는 효과를 내고 있다. 그리고 음악 역시 굉장히 적극적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홍상수 영화에 이렇게 음악이 많이 사용되었던가 싶을 정도로, 많은 음악이 인식되었다. 

배우들의 연기는 또 어떤가. 이제는 다른 설명 필요없이 그냥 '홍상수'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인상을 짙게 풍기는 김상경은 말할 것도 없고(주책 떠는 그의 연기가 단순히 '주책'으로만 보이지 않고 진정이 느껴졌던 것은 오롯이 그의 몫이라 하겠다), 전작에 이어 또 다시 출연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점점 만들어내고 있는 유준상의 발견은 계속 되고 있으며(영화를 보고나니 흡사 한석규의 말투를 연상케하는 그의 말투를 자꾸 따라하게 된다), 예지원, 윤여정, 김강우, 김민선의 연기들도 잘 녹아들고 있다. 앞선 두 사람이야 더 말할 것이 없지만, 김강우나 김민선의 경우는 홍상수 월드에 들어오게 되면서 발견할 거리를 제공한 듯 하다. 이순신 장군 역의 김영호도 인상적이었으며(리뷰를 하다보니 이 시퀀스에 대해서 아무 언급도 하지 못했는데, 작정하고 쓴다면 이 시퀀스만 가지고도 한 편의 글을 써야할지 모르겠다), 가장 평범하면서도 가장 연기를 하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던 문소리의 연기가 무엇보다 압권이었다. 개인적으로 문소리가 출연한 작품들 가운데서 가장 인상적인 그녀의 연기였던 것 같다('오아시스' 보다도 말이다).


ⓒ 전원사. All rights reserved


구성이 없는 듯 했던 전작들과는 다르게 완벽한 구성으로 이루어진 이번 영화 '하하하'. '잘알지도 못하면서'와 마찬가지로 인물 하나하나의 대사를 곱씹어 볼 수록 그 속에서 나와 너를 발견하게 되는 아름다운 대사들. 이제는 홍상수 월드에 완벽히 적응한 페르소나들과 이제막 세계에 입성한 신예들의 신선함이 돋보이는 연기. 그리고 무엇보다 홍상수. 내게 있어 '하하하'는 참 재밌고, 참 의미있고, 참 깊은 영화였다.


1. 리뷰를 그저 '하하하하하하하하'라고 써보고도 싶었지만 차마 용기가...
2. 개인적으로는 몇 년 전 영화 속 배경이 된 통영에 다녀온지라 살짝 남다르더군요. 나폴리 모텔에서 잘 뻔도 했었구요.
3. 서두에 밝혔듯이 술을 부르는 이 영화 때문에, 아래의 그림 처럼 순대에 막걸리 한잔하고 쓰는 글입니다. 영화 속 처럼 '막걸리에 도토리묵', '순대에 소주'는 아니지만, 이 정도면 영화 분위기가 나더군요 ㅎ




4. 재미있어요. 또 보고 싶네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본문에 사용된 모든 스틸컷/포스터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모든 이미지의 권리는 전원사에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시대를 너무 앞서간 기이한 그 이름
김기영



사실 김기영이란 감독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한창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감독 등의 영화를 좋아하던 때에 어느 인터뷰에선 가 이들 감독이 존경하는 감독으로, 혹은 극찬했던 작품으로 그의 작품을 꼽으면서, 현재 한국 영화를 이끌어 가고 있는 감독들이 모두 다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는 국내의 감독은 과연 누구일까 하는 궁금증 때문에 부끄럽지만 ‘김기영’이라는 거장의 이름을 그제 서야 찾아보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원로 감독들이라고 하면 개인적으로도 신상옥 감독 외에는 그다지 잘 알고 있는 감독이 없었는데, 김기영 이라는 이름 앞에 항상 붙는 수식어인 ‘기이한’으로 미뤄봤을 때, 쉽게 말해 메이저 성향이라기 보다는 마니아들에게 인정받는 언더그라운드 감독이라 잘 몰랐었구나 하고 언뜻 생각했지만, 김기영은 놀랍게도 당대의 흥행 감독 중 한 명이었다. 물론 그의 작품 세계가 유난히 독특하고 기괴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그의 영화 <화녀>와 <충녀>는 1971년과 72년에 각각 그해 최고 흥행작이기도 했으며, 신상옥, 유현목 감독과는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었다(실제로 <고려장> 개봉 시에 노모를 지게에 지고 가는 장면이 신상옥 감독의 <열녀문>에도 등장해 고소장을 접수하는 사건이 있는 등, 별로 서로에 대해 좋게 이야기하는 경우가 드물었다고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흔히 들 말하는 옛날 영화, 흑백 영화라 하면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지루하고 고리타분 하고 재미없는 것으로 생각하지만(이런 선입견을 갖게 된 데에는 실제 재미없는 한국 흑백 영화를 더 먼저 접한 이유도 있었다), 김기영 감독의 작품들은 6,70년대 군사 정권 하에 만들어 졌다 고는 믿어 지지 않는, 오히려 최근 만들어지는 작품들도 범접할 수 없는 특유의 스타일과 개성으로 가득 찬 ‘재미있는’ 영화였다. 물론 김기영 감독의 영화는 이른바 ‘친절한’ 영화는 아니다. 그는 당시 사회에서 모두가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썩고 곪아 있는 곳을 과감하게 드러내고, 이를 통렬 하게 비판하는 텍스트로서 오히려 ‘불편’하고 보기 힘든 작품을 만들어왔다. 여기에 기인에 가까운 그의 연출 방식에 대한 집착과 행동들은 김기영 식 영화를 더욱 ‘컬트’로 몰아가는데 일조를 한 경향이 있다 하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는 실제로 영화를 정식으로 배운 영화 학도 출신이 아니라 의사 출신이었다. 당시 잘나가던 치과 의사였던 아내가 꿈을 펼쳐보라며 기회를 준 탓에 김기영 감독은 자신의 표현에 따르자면 ‘취미 활동’하 듯 영화를 만들게 된다.)



그는 의사 출신 답게 문제를 바라볼 때 단순히 겉에서 상처를 치료하는 정도에 머무르지 않고, 배를 째고 해부를 하는 수준까지 문제를 바라보면서, 당시 경직된 시대 상황에서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 같은, 반대로 그런 시대 상황이었기에 해야만 했을 이야기를 일관되게 해왔다. 그는 또한 자신의 작품 <하녀>를 <화녀> <충녀> <화녀 82> 등으로 리메이크하기도 했는데, 이는 단순히 흥행작인 원작의 요소를 불러내 비교적 흥행이 보장된 안전한 작품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하녀>에서는 미처 다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그 시대의 시대 정신에 맞게 변주 하는 형식으로 비슷해 보이지만 또 다른 문제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또한 김기영 감독은 다른 감독들과는 다르게 영화의 모든 전반적인 것을 직접 컨트롤해야 직성이 풀리는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연출은 물론 카메라 구도 같은 것도 카메라 감독에게 전적으로 맡긴 다기 보다는 자신이 일일이 체크하곤 했으며, 특히 재능을 보였던 미술 분야(특히 세트와 소도구) 같은 경우는 그의 손길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봐도 전혀 무방하겠다. 더 나아가 영화를 찍는 도중에는 스텝들은 물론 배우들도 자신이 지금 무슨 영화를 찍고, 무슨 연기를 하고 있는지 잘 모르고 연기를 했을 정도로, 배우들의 연기 디테일까지 일일이 디렉팅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충녀>에 출연한 윤여정 씨의 경우, 침대 위에 쥐가 잔뜩 등장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 실제로 어떤 얘기도 해주지 않아 아무것도 모른 채 촬영에 임했다가 촬영 시에 크게 놀라기도 했다고 한다).


올해는 이런 김기영 감독이 1998년 자택에서 화제로 우리 곁을 떠난 지 10주기가 되는 해로서 갖가지 행사와 재조명의 기회가 많았었다. 각종 영화 관련 지와 사이트에서는 김기영 감독을 비중 있게 다뤘으며 특히 지난 6월에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김기영 감독 전작전’이 열려 화제를 모으기도 했었다. 무엇보다 이번 특별전 행사가 끝난 뒤 김기영 감독의 작품 네 편을 DVD로 소장할 수 있는 ‘김기영 컬렉션’이 발매된 점이 가장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겠다.


이번 DVD에는 <고려장 (1963)> <충녀 (1972)> <육체의 약속 (1975)> <이어도 (1977)> 이렇게 4편이 수록되었는데, 특별전에도 상영되었던 김기영 감독의 대표작 <하녀>가 빠진 것이 아쉽게 느껴질 수도 있겠는데, <하녀>의 경우는 현재 추가적으로 복원이 진행 중임으로 올해 말이나 늦어도 내년 초쯤에는 단독으로 DVD가 출시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 본격적으로 이번 ‘김기영 컬렉션’DVD에 수록된 네 작품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갈까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흔히 ‘고려장’이라고 하면 신파 드라마가 아닐까 하고 섣불리 오해할 수 있지만, 김기영 감독이 만든 <고려장>은 이런 오해를 불식 시키고도 남을(아니 넘쳐 날) 정도로, 극한 상황에 닥친 인간의 모습과 기이하고 상식을 뒤집는 설정과 메시지, 그리고 권력자와 이에 굴하지 않는 인물의 이야기로서 정치적인 텍스트로까지 연결되는, 상당히 복잡한 이야기들을 ‘고려장’이라는 소재를 빌려 이야기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고려장의 크레딧 장면. 화면 가득 한자가 뿌려지고 그 가운데 스태프들의 이름이 보여 지는 방식의 이 장면은 지금 봐도 상당히 인상적이고 신선하게 느껴진다)


일단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공간적인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겠다. 이 영화에서 지리적 공간이 갖는 의미는 여러 가지 내용 적인 면에서 중요한 모티브가 되고 있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 등장하는 현대적인 좌담회에 이어 타이틀 롤과 함께 보여 지는 첩첩산중의 이미지는, 현대 사회와는 고립되어 있는 일종의 원시사회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으며,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당시로서는 더욱) 가부장 적인 유교 적 가족의 이미지라던가, 기본적인 도덕적 윤리가 통용되지 않는 극한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일종의 비현실적 공간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런 비현실적인 요소는 극심한 가뭄과 식량 부족으로 인한 지배 권력의 등장과 경제 논리로서 더욱 섬뜩하게 묘사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감자를 먹기 위해 조부모를 구타하는 아이들이나, 배고픔을 호소하는 늙은 아버지에게 ‘먹는다고 더 산다는 보장도 없고, 더 살아봤자 아이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니’하며 오히려 산으로 내버릴 생각만 하는 10형제의 모습이나, 감자를 얻기 위해 딸을 산 채로 바치는 어미의 모습 어디에서도 윤리적인 가치관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것이 아무리 극적으로 묘사된 비현실적인 공간에서의 상황 이라고는 하지만, 1963년 당시로서 이 정도로 상식을 뒤집는 극렬 한 묘사는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겠다. 특히 어른이 했다 하더라도 독하디 독한 대사들이 아이들의 입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것이나, 부모나 부인을 자기 손으로 죽이는 참극에 가까운 장면들은 ‘이것이 정말 1963년도 작품이 맞나?’ 할 정도로 충격적인 묘사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고려장이 보여준 원시사회의 모습을 보았을 때, 적어도 고려 시대 이전 사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지만, 저 뒤편에 자리 잡은 병풍의 그림은 누가 봐도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김기영 감독은 거리낌 없이 조선시대의 그림을 사용하면서(이 바로 앞 장면의 결혼식 혼례 장면에서도 조선시대의 결혼예식을 엿볼 수 있다), 영화 속 역사적 시간의 모호함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얼핏 보면 <고려장>에 등장하는 원시 사회는 말 그대로 원초 적인 배고픔에 의해 행동이 결정되는, 본능이 지배하는 사회로 보이기도 하지만, 가뭄으로 피폐해진 마을에 유일한 식수 원을 10형제가 소유하게 되면서 이 영화는 절대 권력에 의한 지배 구조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미 육체적인 힘과 수적인 우세에서 비롯되는 힘이 윤리적 도리를 앞서는 것을 보여주었다면, 이후부터는 경제적인 우위가 바로 절대 권력이 되는 21세기인 현재에 더욱 어울릴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사실상 더 큰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무당과 고목으로 대변되는 무속 신앙을 들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극 중 간난이가 구룡에게 ‘당신을 닮은 아이를 빚고 싶다’면서 정사 장면으로 이어지는데, 당시 검열을 피하기 위해 노골적인 정사 장면이 아니라 김기영 감독은 위와 같이 손을 어루만지는 장면으로 대체하고 있는데, 마치 아이를 빚기 위해 구룡의 신체를 익히려는 듯 구룡의 손을 어루만지는 장면은, 굉장히 은유 적이면서도 에로틱한 장면이었다.)


영화의 초반 구룡이 10형제를 잡아먹을 것이라는 무당의 예언 때문에 10형제는 구룡에게 평생 콤플렉스를 겪고 경계하게 되고, (비록 10형제에 의해 간난이가 목숨을 잃을 위기에 있긴 했지만) 끝까지 고려장을 거부했던 구룡마저 마을에 비가 내리기 위해서는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며 위협해, 결국 노모를 선인봉에 버리고 오게 만드는 것도 다름 아닌 무당이었다. 10형제가 갖게 된 권력은 경제적 상황으로 인한 인위적인 것으로 볼 수 있으나, 무당의 권력은 이 마을 대대로 애초부터 갖고 있던 것으로서, 모두가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따라왔던 것이라는 점에서, 영화 말미에 구룡이 고목과 무당을 쓰러트리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고 하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김기영 감독은 <고려장>의 제작노트에서 ‘4.19때 학생은 고목을 쓰러뜨리는 데 104의 목숨을 잃었다’라고 언급하였는데, 이런 말에 비춰 본다면 <고려장>의 텍스트는 상당히 정치적인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해석될 수 있다기 보다는, 그냥 ‘정치적인 텍스트다’라고 보는 것이 더 옳겠다), 당시 시대적 상황 상 검열을 염두 해 두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을 미뤄봤을 때 원시적이고 비현실적인 배경의 묘사는 이를 위한 장치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영화에서 연이 역할을 맡은 아역 연기자 전영선 씨는 신상옥 감독의 1961년 작인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그 유명한 옥희 역을 맡기도 했었다. 아역 연기자들의 연기를 연출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고려장>에 등장하는 아역 연기자들은 전영선 씨를 비롯해 모두들 비교적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다.)


이 영화가 지금으로부터 45년 전이 영화가 맞나 하고 놀라게 된 것은 비단 메시지 적인 것 만은 아니다. 이 영화는 세트 미술이나 장면의 묘사, 대사의 묘사 같은 것에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옛날’영화라고는 믿기 힘든 연출이 등장한다. 일단 잘 알려졌다시피 김기영 감독은 미술 적인 면에 상당히 뛰어난 감독이라 할 수 있는데, <고려장>에서도 세트의 디자인이나 동선의 구성 등이 매우 뛰어남을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거의 95% 이상이 세트에서 촬영되었는데, 구룡의 집이나 그 집 앞 마당, 그리고 10형제의 대장간, 고목이 위치한 마을 어귀, 그리고 선인봉으로 가는 산길 세트와 선인봉의 세트는 영화적으로도 그렇고, 미술 적인 면에서도 봐도 당시로서는 상당히 뛰어난 감각이 묻어 나는 디자인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선인봉의 저 그로테스크한 세트는 지금 봐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해골들이 너무 하얀 것이 플라스틱인 티가 너무 나기도 하지만, 당시로서 저 정도로 괴기스런 세트를 한국영화에서 보여주었다는 자체가 놀랍다)


세트의 구조물을 통해 조명을 컨트롤 하는 것은 당시의 열악한 제작 환경을 슬기롭게 극복해내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해골이 가득한 선인봉의 이미지는 괴기스런 음악과 더불어 그로테스크함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선인봉으로 올라가는 지그재그 형의 세트가 인상적이었는데, 효율적인 면에서도 캐릭터를 한 컷 만으로도 오래 담아내는 동시에, 구조물을 적절히 이용해 가며 전체적으로 장면에 리듬 감마저 부여하는 영리한 세트였다고 생각된다. 또한 고목이 있는 마을 세트 같은 경우는 사실상 별다른 구조물이 없는 연극 무대와 같은 단순한 세트이지만, 인물들의 배치와 카메라 앵글, 샷을 치밀하게 계산하고 만들어진 세트임을 뒤늦게 비로써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세트는 아주 영리한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단일 구조물이지만 하나의 마스터 커트에서도, 돌아가도록 이동 경로가 설정되어 있는 것과 기둥들로 인해 다양한 움직임과 리듬감을 표현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세트이다. 김기영 감독은 영화 속에서도 이 세트를 비롯해 선인봉으로 올라가는 길로 만들어진 세트들을 쉽게 버리기 아까웠는지, 굳이 넣지 않아도 될 만한 장면들을 추가 시키면서 이 세트에 대한 노출 빈도를 높이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번 <김기영 컬렉션>에 포함된 작품 가운데 제작 연도는 가장 앞선 작품이지만 반대로 영상의 화질은 가장 좋은 편이다. <고려장>의 경우 이미 복원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제작 연도를 감안한다면 상당히 우수한 화질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라면 필름 일부가 유실되어 전체적으로 20분 정도 분량이 아무 장면 없이 사운드만 수록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는데, 그래도 이번 DVD의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함께 동봉 된 책자에 이 유실 부분에 대한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담겨있어 조금 이나마 아쉬운 마음을 달랠 수 있을 듯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음성 해설에는 김기영 감독에 대해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영화 평론가 이연호씨와 <혈의 누>의 감독인 김대승 감독이 참여하고 있다. 이 음성 해설은 매우 유익하다고 할 수 있는데, 실제로 김기영 감독과 여러 차례 인터뷰를 나누기도 했던 장본인인 이연호씨가 들려주는 영화의 뒷이야기와 영화에 관한 설명들은 <고려장>을 좀 더 정확히 이해하는 데에 더없이 훌륭한 지침서로서 부족함이 없으며, 김대승 감독은 영화감독의 입장에서 장면에 대해 연출 방식이나 조명, 미술 등에 관한 도움말을 들려주고 있다.


특히 일반적인 음성 해설과는 살짝 다르게 여기에 참여한 두 화자가 평론가로서(혹은 여자로서), 감독으로서(혹은 남자로서) 각각 영화를 바라보고 있다 보니, 몇몇 장면이나 설정을 보는 방식이 다름에서 오는 두 사람 간의 의견 불일치는 오히려 신선한 느낌도 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김기영 감독은 자신의 작품을 몇 번 씩 반복하여 리메이크 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이른바 ‘녀’시리즈로 불리는 <하녀>의 리메이크 작 들이 그것이다. 이번 DVD컬렉션에 포함된 <충녀>역시 <하녀>를 리메이크 한 작품으로서 직접적으로는 역시 <하녀>의 리메이크 작인 <화녀>와 더욱 가까운 영화라 하겠다. 이는 <화녀>의 출연진인 남궁원, 윤여정, 전계현 씨가 그대로 <충녀>에도 등장하는 것에서도 유사 점을 찾아볼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김기영 감독 영화에서 계단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공간으로 매번 등장한다. <충녀>에서도 첩의 딸인 이명자가 자신도 첩이 되고 마는 신분과 계급에 관한 의미와 마지막에 사건의 모든 것이 몰락하는 장소로도 등장하면서 김기영 감독의 계단에 관한 사랑(?)을 유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 김기영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런 것 외에도 단순히 계단에서의 액션이 더욱 박력 있고 스릴러 적이라 좋아한다고 밝힌 적이 있다.)


<충녀>에서 등장하는 명자는 <하녀>를 비롯한 다른 리메이크 작 과는 조금 다르게, 명자의 과거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고, 이를 통해 좀 더 명자의 입장에서 영화를 바라보고 있어 관객들로 하여금, 명자에게 좀 더 동정심을 유발하도록 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작품 역시 1972년에 만들어진 영화라고는 보기 어려운 설정과 메시지, 장면들이 가득 담겨있다. 먼저 당시는 박정희 정권 하에 어느 시대보다 남성 성이 강조된 남성 우월 사회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시대를 완전히 뒤엎는 여성 상위의(남자 주인공인 김사장님(남궁원 분)의 모습은 이에 반해 너무 무기력하고 도피 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회상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 그 첫 번째이다. 명자가 처음 호스티스가 되어 일하게 된 곳에서 보스로 군림하는 권력자도 여성인 마담(박정자 분)이며, 그녀가 첩이 된 뒤에 주도권을 잡고 있는 것도 여전히 그 김사장이 아닌 본부인(전계현 분)이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당시에도 여전히 강한 여성의 포스를 보여주고 있는 박정자 씨의 연기도 인상적이고, 풋풋한 매력이 묻어 나는 사미자 씨의 젊은 시절 모습도 인상적이다. <충녀>가 또 인상적이었던 것은 당시 한국 영화들이 대부분 전문 성우들의 더빙으로 이루어졌던 것에 비해 <충녀>는 박정자 씨를 비롯해, 사미자, 윤여정 씨 등 대부분의 주연 배우들의 목소리 연기를 배우가 직접 소화했다는 점도 이채롭다. 이미 여러 인터뷰를 통해 알려졌다시피 김기영 감독은 윤여정이라는 배우의 그 특이한 목소리를 너무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


영화의 중반 이후부터 여성의 지배하는 권력 구조는 더 심화되어 등장하는데, 남편은 직업이 없고 무능하며, 사업 수단이 좋은 부인이 집안의 경제력을 지배하고, 이를 통해 가정 전체를 지배하며 심지어 나중에는 첩인 명자에게까지 월급까지 주면서 이를 모두 컨트롤 하는 모습은, 남편이 첩을 들인다고 하면 남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울며불며 애원하는 일반적인 영화 속 본 부인의 모습에 비춰 봤을 때 상당히 파격적이고 인상적인 설정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또한 단순히 여성 우월을 넘어서서 여성이 남성을 사육하는 식의 설정은 당시 군사 정권하에서 만들어 졌다고는 믿기 힘든 설정들이다(이 같은 무기력한 남성을 여성이 사육한다는 설정은 <육식동물>같은 영화에서 정점을 이룬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면도칼은 이 영화에서 고비마다 중요한 도구로서 사용되고 있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초반, 중반, 후반에 면도칼을 각각 등장 시키며 하나의 매개체를 통한 내러티브를 강조하고 있다. 또한 <하녀>와 마찬가지로 피아노가 등장하며, 김기영 감독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동물 중에 하나 인 ‘쥐’도 이 영화에서 아주 중요한 도구로 사용된다.)


<충녀>를 보면서 가장 놀라게 되는 것 중 하나는 70년대 영화 라고는 보기 힘든 세련된 디자인이다. 김사장과 본부인이 사는 2층 집은 물론 상당히 부잣집이라고는 하지만(김영진 평론가는 음성 해설에서 ‘초상류층’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렇다고 해도 상당히 세련된 조명 기구들과 벽지, 구조물들은 지금 봐도 별로 촌스러움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특히 명자가 사는 2층 집의 디자인은 그야말로 놀라운데, 마치 요즘의 원룸을 보는 듯 한 구조와 벽지, 부엌과 거실이 뚫린 벽으로 연결되는 공간 디자인은 최근 개봉하는 영화의 세트로 쓰여도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세련된 미술 적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현대적인 세트 디자인은, 위에 걸려있는 컵과 조리 용구들과 마치 미술관처럼 벽을 향해 위에서 아래로 걸려있는 조명기, 그리고 윤여정의 알록달록한 의상과 맞물려 훌륭한 미장센을 만들어낸다.)


김기영 감독은 세트를 만들 때 공간의 깊이를 가장 중요하게 염두 해 두고 만든다고 하는데, 위의 장면처럼 인물을 원근 감 있게 배치하면서 그 깊이를 표현하면서도, 오히려 그 반대의 효과를 내기 위해 조명의 효과와 더불어 갖가지 소도구들을 굉장히 빡빡하고 많은 수를 배치하면서 넓은 공간임에도 무언가 답답하고 갇혀있는 듯 한 느낌도 연출해 내고 있다. 이 영화는 잘 보면 본 부인의 집보다는 명자의 아파트와 2층 집을 그릴 때 좀 더 많은 소도구를 배치하여 명자의 답답하고 억눌린 심리를 반영하려고 애쓰고 있다. <하녀>의 경우 같은 2층 집 안에서 1층과 2층 이라는 공간의 차이를 두고 계급과 두 여성 간의 대결 구도를 그려냈다면, <충녀>에서는 공간은 각자의 집으로 다르지만, 12시에는 남편을 본 부인에게 다시 돌려주고 혼자 남아야 한다는 시간의 제약으로 이 구조를 또 다르게 그려내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계속 본 부인의 2층 집과 명자의 집을 오가다 가도 가끔씩 현실의 서울 시내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은, 앞서 언급한 답답한 구조의 명자의 집과 극 하게 대비되면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리고 이것과는 별개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여의도 광장의 모습을 스크린에서 볼 수 있는 것도 이채롭다.)


<충녀>는 초반에는 흔한 멜로 적인 요소가 등장하긴 하지만, 중반 부부터 치정 극으로 치닫기 시작하면서 점차 호러나 서스펜스에 가까운 연출을 보여준다. 특히 아이를 갖지 못하는 명자와 김사장 커플에게 이사와 함께 갑자기 아이가 생기면서 이런 극 변화는 더욱 더 가속도를 얻게 된다. 정말 영화 속에서 이 아이가 보여주는 행동의 묘사들은 상당히 충격적인데, 요즘 만들어지는 영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충격적인 묘사가 당시에는 어떻게 받아 들여졌을 지가 더 궁금하다. 젖먹이 아기가 쥐를 먹고 잎에 피를 잔뜩 묻히고 있는 장면은 정말 전 세계 영화사를 뒤져봐도 흔치 않은 극한 설정으로, 이후 쥐가 때로 등장하는 설정과 더불어 이 영화를 더욱 기이한 영화로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유리 판 위에 색색 사탕을 뿌려 넣고 벌이는 정사 장면의 연출은, 정말 당시에 저런 장면을 어떻게 떠올렸을까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미 적으로 상당히 우수한 장면이 아니었나 싶다. 이후 바로 이어지는 사탕이 마구 흔들려 떨어지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 외에, 거의 직접적으로 정사 장면이 묘사되는 영상도 담겨있는데, 아마도 당시 극장 상영 시에는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번 DVD컬렉션에 수록된 <충녀>에는 붙박이로 스페인어 자막이 포함되어 있는데, 아쉽게도 현재로서는 이 판 본만이 남아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화질 상태는 컬렉션에 수록된 네 작품 가운데 가장 좋지 않은 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일단 잡티는 쉽게 찾아볼 수 있고 가끔 씩 색이 변질되는 현상도 종종 일어난다. 화질의 아쉬움은 DVD영상 자체의 퀄리티와는 무관하게 보관된 필름의 상태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이도 어쩔 수 없다고 볼 수 있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감독이기 보다는 김기영 감독의 열혈 팬으로서 음성 해설에 참여한 봉준호 감독조차도 웃음을 참지 못하며, 도대체 어떤 의미로 저런 연출을 하셨는지 의아스럽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던 바로 그 문제의 장면. 피로를 풀어주겠다며 안마를 해주다가 갑자기 두 번 손으로 소리를 내는 제스처는 정말 컬트 적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화 속 명자는 저렇게 찡그리듯 웃는 표정을 몇 차례 보여주는데, 이는 김기영 감독이 윤여정씨에게 직접적으로 지시한 하나의 연출이라고 한다. 얼마 전 회고전에 맞춰 EBS 시네마천국에서 있었던 윤여정 씨의 인터뷰에서도 전해들을 수 있었 듯이, 윤여정 씨는 영화 촬영 전에 김기영 감독의 집에서 합숙을 하다시피 했는데, 감독은 이 때 봐두었던 윤여정의 표정들을 캐치하여, 나중에 영화를 촬영할 때 그 때 지었던 표정, 뭐할 때 지었던 표정 하며, 직접적인 표정들을 요구했다고 한다. 영화를 보다 보면 저 표정이 너무 의도적으로 드러나 약간 민망하기도 하지만, 분명 나름 매력이 느껴지는 표정과 연출이 아닐 수 없다.)


<충녀>에는 영화 평론가인 김영진 씨와 봉준호 감독이 음성 해설에 참여하고 있다. 영화의 내용 적인 면이나 뒷이야기들이 주가 되었던 <고려장>의 음성 해설과는 달리 <충녀>의 음성 해설은 장면에 대한 영화적 기법들과 연출의 의도, 미장센 등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특히나 봉준호 감독은 존경하는 감독으로서 김기영 감독이 만들어낸 인상적인 장면들과 구도, 설정 등에 혀를 내두르며 감탄하기도 한다. 또한 김영진 평론가와 얘기를 나누던 중 히치콕에게 ‘새’가 있다면 김기영에게는 ‘쥐’가 있다는 말과 함께 만약 히치콕이 살아서 김기영 감독의 영화를 보았다면 분명히 충격을 받고 존경을 했을 것이라며(‘아마도’ 수준이 아니라 확신하고 있다), 브뉘엘과 히치콕, 김기영 감독이 서로를 알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이야기도 나누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흑백 영화 시대를 대표하는 이만희 감독의 <만추>를 리메이크 한 것으로 알려진 작품이 바로 이 작품 <육체의 약속>인데, 김기영 감독이 직접 밝힌 ‘원작의 30% 이상은 사용하지 않는 불문율’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 영화는 알려진 <만추>의 내용과 분위기와는(<만추>는 개인적으로도 물론 볼 수 없었으며, 현재 필름이 남아있지 않아 유추해볼 뿐이다) 많이 다른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김기영 감독은 <육체의 약속>이라는 제목 답게 또 한 번 인물들을 극한의 상황에 몰아넣고 남자와 여자의 관계, 여성이 남성에게 갖고 있는 피해 의식과 한 여성을 중심으로 매우 복잡한 심리와 인간성에 대해 직설적인 대사와 은유 적인 표현으로 만들어낸 김기영 감독의 또 하나의 명작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육체의 약속>에서도 어김없이 김기영 감독의 인장 과도 같은 ‘계단’ 장면이 등장한다. 하지만 <하녀>나 <충녀>등에 비하면 단순히 등장하는 정도로 머무는 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김기영 감독의 소도구에 대한 애정은 가히 집착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영화에서는 특히 소도구 들을 통한 복선과 의미 전달 방법이 강하고 반복 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시계를 비롯해 거울이나 사탕 등의 도구들을 이용해 은유 적으로 이 영화를 꿰뚫고 있는 주인공 여자의 심리 변화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소도구에 관한 작은 에피소드를 말하자면, 김기영 감독은 영화에 쓰인 소품이나 소도구들을 본인의 집에 모두 가져다 쌓아 놨다고 하는데, 아들 분께서도 평소에 저 많은 걸 나중에 어떻게 처리하나 고민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택 화제로 돌아가시게 되면서 소품도 모두 불에 타 없어졌는데, 마지막에 돌아가실 때도 결국 소도구들을 모두 가져가신 것 같다고 하는 말이 인상 깊게 들렸다.)


김기영 감독의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대부분 정상적이지 않다고(혹은 극적으로 솔직하다고)볼 수 있는데, <육체의 약속>에 등장하는 남자들의 모습은 여성들을 종족 번식을 위한 도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로맨스나 사랑 따위는 아예 없으며, 오로지 종족 증식을 위해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으로 여기며 죄 의식은 전혀 없이 섹스를 위해 달려들고 행위가 끝나면 버리고 마는 식이다. 이런 점에서 특히 이 영화에서는 이런 설정들을 인간적으로 보기 보다는 동물의 행위에 가깝게 연출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데, 제목에서도 느껴지지만 영화 속 정사 장면들이 인간들의 ‘섹스’로 느껴지기 보다는 동물들의 ‘교배’에 더욱 의미가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또한 김기영 감독은 이렇게 격자 구조의 창틀이 라던가 창살이 있는 창문 구조를 의도적으로 삽입하여, 어딘 가에 갇혀 있고 격리되어 있는 듯한 느낌과, 여자 주인공의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지 못하고 남성의 도구로만 사용되는 영화의 분위기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이 영화는 3개의 플래시백으로 이루어진 구조를 띄고 있다. 이미 남편과 아이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한 여성이 기차를 타고 여수로 내려가면서 지난날을 회상하는 구조인데, 이 세 가지의 플래시백은 아주 밀접한 연관을 띄고 있으며, 필연적으로 그 다음 에피소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즉 이야기는 계속 반복되고 확장되는 와중에 여자 주인공의 심리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 그리고 그 사건들이 다음 에피소드에 어떻게 작용하게 되었는 지를 염두 해 두고 영화를 보면 이 영화의 내러티브에 좀 더 집중할 수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앞서 언급한 거울이나 사탕, 시계 등의 소도구가 중요한 의미의 전달 자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고려장>이나 <충녀>등에서 김기영 감독만의 세트 연출을 만나볼 수 있었다면 <육체의 약속>에서는 로케이션에서의 미장센을 다루는 연출 방법을 만나볼 수 있다. <육체의 약속>은 실제로 세트에서 촬영한 장면이 거의 없는 편이고, 대부분이 달리는 기차 안에서 촬영 되었거나 야외에서 촬영된 장면들이 많은데, 기차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도(더군다나 별로 움직임 없이 인물들이 고정되어 있음에도) 지루하지 않게 인물들을 잡아내는 구도는 아주 인상적이다. 특히 창에 서려있는 서리들이 녹아내리면서 마치 여자 주인공이 흘리는 눈물처럼 묘사되거나, 배우들의 연기 만으로 열차가 덜컹 하는 효과를 내는 기본적인 트릭 같은 것은, 어쩌면 상투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 한정된 공간 내에서 충분히 변화의 요소로 훌륭히 작용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거울과 사탕은 영화의 많은 부분에서 반복 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거울이 그 곳에 원래 있었는지, 아니면 주인공이 스스로 꺼내 들었는지, 사탕을 언제 먹었는지, 누가 먹여 주는지, 뱉었는지 등등 각 장면과 방식에 따라 아주 다양하게 해석되고 주인공의 심리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으로 쓰이고 있다.


이 영화는 김기영 감독의 다른 영화들과는 대사가 그리 많지 않고(특히 여주인공을 맡은 김지미 씨의 대사는 거의 없다), 오히려 여자 주인공의 내레이션이 등장하는 독특한 형식을 갖고 있다. 정성일 평론가는 그럼에도 김지미 씨가 이 영화에서 보여준 연기가 그녀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가장 뛰어난 연기 중 하나라고 평했는데, 대사 없이도 이렇듯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 배경에는 물론 김기영 감독의 치밀한 연기 디렉팅이 있었을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김기영 감독의 작품에는 먹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 어느 것 하나 예사롭지 않은 장면이 없다. <육체의 약속>에서는 영화의 거의 말미에 가서 이른바 ‘최후의 만찬’식의 식사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에서 세 인물은 ‘먹는다’라기 보다는 ‘보충 한다’에 가까울 정도로 미친 듯이 먹어 댄다(정성일 씨는 ‘쳐 먹는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는 지속적으로 깔려 있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과 유사 점에 대한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DVD컬렉션에 포함된 <육체의 약속>의 화질은 그리 나쁘지 않은 편이다. 필름이 유실 된 부분도 없으며, 크게 색의 변질이 일어나는 점도 없고, 잡티도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다. 사실 이런 영화의 화질을 논하는 것이 큰 의미는 없겠지만, 의미를 따져본다 하더라도 크게 불편한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밝혀둔다. <육체의 약속> 역시 음성 해설을 수록하고 있는데, 네 작품 중 유일하게 두 명이 아닌 정성일 평론가의 단독 음성 해설로 이루어져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저 이름으로만 들었었던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배우들에 절정에 달했을 때의 연기를 만나볼 수 있는 것은, 그 시대를 함께 하지 못했던 다음 세대의 관객으로서 무척 반가운 일일 것이다. 김지미 씨도 그렇고, 이정길 씨나, 다른 작품에 출연했었던 김진규, 남궁원 씨 같은 배우들이 왜 세대를 넘긴 지금까지도 이름으로 나마 전해지고 있는지, 그들의 당시 연기를 보면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이다.)


혹자가 대한민국의 영화 평론가는 ‘정성일 씨와 정성일 외로 나뉜다’라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를 적극 공감할 정도로 엄청난 분석과 깊이가 담긴 음성 해설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겠다. 본 <육체의 약속> DVD 리뷰를 쓰면서도 정성일 씨의 음성 해설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밖에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장면과 설정 하나 하나의 의미를 분석적으로 파고드는 정성일 영화 평론가의 음성 해설은, 어쩌면 이 영화에 숨겨진 상징과 은유 들을 많은 부분 그냥 놓치고 말았을 부족함을 완벽하게 채워주는(그래서 영화 자체가 더욱 완벽하게 느껴지는) 훌륭한 음성 해설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말미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 전문가들이 참여한 음성 해설 트랙만으로도 이번 김기영 컬렉션 DVD는 높은 소장 가치를 보장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70년대 후반 한국 영화계는 외화 쿼터를 채우기 위해(한국 영화 몇 편을 만들면 외국영화 1편을 수입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문예 영화라고 해서 소설을 원작으로 한 한국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지곤 했는데, 1977년 작인 <이어도>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진 이청춘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이다. 이런 문예 영화는 말 그대로 쿼터를 채우기 위한 의무적인 영화였기 때문에 감독에게 있어서 흥행의 부담 없이 만들 수 있는 이점이 있기도 했는데, 김기영 감독은 여기 서도 자신 만의 색깔을 여지없이 드러내며 그의 또 다른 걸작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기존 영화들에서도 한정된 공간과 극한의 상황 속에 놓인 인간들의 이야기를 보여주었던 김기영 감독은 <이어도>에서는 ‘섬’이라는 특수한 공간적 제한을 통해 본격적으로 고립되고, 또한 <고려장>처럼 원시적이고 무속 신앙이 지배하는 사회를 배경으로 역시 번식에 관한 집착과 비극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이어도>는 <육체의 약속>처럼 플래시백이 사용된 영화이지만, <육체의 약속>이 정해진 플래시백에 따라 다음 내러티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던 것에 비해, <이어도>에서 사용된 플래시백은 그 수도 잦고 무엇보다 큰 하나의 플래시백 안에 여러 개의 플래시백이 반복해서 존재하는 혼란 스런 구조를 갖고 있다. 사건에 진행에 따라 플래시백이 등장 한다 기 보다는 인물이 등장한 뒤 그 인물이 한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쓰여지기 때문에 시점이나 시기 등이 뒤죽박죽 섞여있어 자칫 집중하지 않으면 전개를 놓치기 십상이다. 그런데 보통 영화 같으면(특히 스릴러나 서스펜스 영화 같은 경우), 이러한 플래시백들을 내러티브의 연결 상 상당히 비중 있게 관찰해야 하지만, 어쩌면 김기영 식 영화에서는 영화의 주요 인물이 되는 ‘천남석’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라는 것 보다는 감독이 줄기차게 이야기하고 있는 지배 구조나 종족 번식의 본능에 관한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이 영화를 더 흥미롭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영화는 당시 영화로는 드물게(드물게 라기 보다는 거의 유일하다고 보는 것이 더 맞겠다), 환경오염에 관한 설정이 비교적 자세히 되어 있다. 당시는 군사 정권 하에 오로지 개발에만 신경 쓰던 근대화 시기임을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사실상 그 당시에는 아무도 걱정하지 않았던 문제라고 생각되는 공해로 인한 환경오염 문제를 1977년 작에서 들고 나왔다는 사실은, 환경오염으로 고통 받는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으로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수질 오염으로 인해 죽어간 물고기 들이나 야심차게 준비했던 전복 양식 업이 오염으로 인해 물거품이 되는 것, 폐타이어들이 쌓여 있는 공터의 모습 등 근대화의 발전 논리에 의해 나타난 환경오염이 만들어낸 공허함을 짧은 시간이지만 정확하게 묘사해 내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어도>에서는 유난히 푸른 빛의 라이팅이 된 장면들을 자주 만나볼 수 있다. 특히 검은색과 파란색의 조화는 스산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내 인물들마저 그런 분위기가 풍기도록 하고 있으며, 반대로 무당의 옷이나 술집 여자의 옷처럼 빨간 색이 더 돋보이는 효과도 얻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또한 프레임 안에 프레임을 만들어내는 촬영 기법도 자주 쓰이고 있는데, 정일성 촬영 감독은 문이나 인물의 뒷모습, 구조물, 조명 등을 이용해 장면 내에서 일부분을 잘라버리면서 또 하나의 프레임을 만들어내는 기법을 즐겨 쓰고 있다.)


이번 DVD에 수록된 평론가나 감독들의 음성 해설을 들어봐도 그렇고, 일반적으로 감독들이 김기영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다 보면, 내러티브의 자연스런 전환에도 어울리지 않는 쇼트들이 너무 많고, 너무 엉뚱한 설정들이 난데없이 등장하는 경우도 많으며, 도대체 저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과장, 과잉에 표현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쉽게 말해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대놓고 막 가버리는 식이다. 편집 같은 부분에서도 그렇고, 너무 나도 눈빛만이 지나치게 강조된 연기 들도 그렇고 일반적이라면 잘못된 방식으로 평가될 수 있지만, 김기영 감독은 오히려 이 같은 점을 과감하게 사용하면서 그것도 자신의 작품들에서 지속적으로 반복하면서 일관되게 표현해 왔기 때문에, 이를 하나의 그 만의 스타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박정자씨가 굿을 하는 이 장면은, 본인이 나중에 보아도 참 그 때 잘했다는 생각을 하셨을 정도로 인상적인 연기였다. 박정자 씨는 김기영 감독의 작품의 여럿 출연하였지만 아마도 <이어도>에서의 무당 연기가 가장 인상 깊지 않았나 싶다.)


<이어도>를 보면서 또 놀랐던 점은 세트의 마술사라고 불리 우는 김기영 감독이 로케이션에서도 엄청난 장면들을 쏟아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치 김기영 감독이 풀을 보고 이리 누우라면 풀들이 이리 눕고, 바람을 어느 쪽에서 어느 쪽으로 불어오라면 그리 불고, 파도를 어찌 치라면 어찌 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연 현상들을 영화 속에 너무 나도 완벽하게 녹여내는 장면들을 볼 때, 영화의 내용 적인 기이함을 떠나서 미 적 아름다움에 흠뻑 취할 수 있었다. 그런 장면들은 아마도 오랜 시간의 기다림에 끝에 만들어진 일종의 노력에 의한 장면이겠지만, 하나의 장면으로 접하는 관객 입장에서는 놀라운 미 적 경험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결과를 낳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빨간 옷과 우산을 쓴 술집 여인이 섬을 거니는 장면인데, 그야말로 어느 것이 하늘 빛이고 어느 것이 바다 빛인지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파란 색의 배경과 그 속에 자리 잡은 강렬한 빨간 색이 인상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린 민자가 강간당하는 장면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 중의 하나인데, 바닷물이 바람에 의해 빛을 발하며 이는 장면은 정말 보는 순간 소름이 돋을 정도로 놀라웠다. 캡쳐 화면으로는 이 장면이 주는 놀라움에 반에 반도 전달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김기영 감독의 영화는 90년대 후반 ‘컬트’라는 개념이 국내에서 급속도로 인기를 끌면서 나중에 컬트 감독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그의 모든 작품이 기이하고 충격적이긴 하지만 <이어도> 후반 부에 시체가 등장하는 시퀀스부터의 장면들은, 정말로 가장 기이하면서도 컬트 적인 요소가 넘쳐 나는 충격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겠다. 무당이 굿을 해 영혼도 아닌 시체를 직접적으로 불러내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 시체의 씨를 받아 아이를 얻기 위해 시체의 성기에 관을 꽂아 산 사람과 시체가 섹스를 벌이는 이 장면에서는, 정말 ‘와’하는 짧은 탄성과 함께 입을 떡 벌리고 아무 말도 못한 채 바라볼 수밖에는 없을 정도로 상상을 뛰어넘는 충격을 받았다. 2008년에 본 관객의 입장에서도 이러한 데 이것이 1977년 도에 만든 작품이라니 당시에 이를 심의한 검열관들의 표정은 어땠을지 궁금하다(물론 이 장면은 검열에서 삭제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장면을 비롯해 <이어도>에서는 광각으로 담아낸 몇몇 장면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이런 광각 렌즈를 통한 장면들은 극의 기이함을 더욱 증폭시켜 주고 있다.)


김기영 감독의 영화에서는 유독 여배우들이 큰 인상을 주고 있는데, <이어도>에 출연한 이화시 씨만큼 인상적인 마스크를 보여준 여배우는 아마 없었던 것 같다. 이화시 씨의 얼굴은 그 과장된 눈빛 연기와 함께 스산함과 기이함을 전달하는 탓에, <이어도>를 보고 나면 영화의 자세한 줄거리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해도 그 얼굴 만은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인상을 남긴다. 특히 당시 70년대 한국 사회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마스크로서 보편적인 여배우들의 인상과는 너무도 다른 얼굴이라 할 수 있는데, 그 때문에 ‘퇴폐 적’이라는 공식 이유를 들어 활동하는 데에도 제지를 받았다고 한다(이 모든 작품들이 이런 시대에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어도>의 모든 것은 다 잊어도 이화시 씨의 저 표정은 절대 못 잊을 것 같다. 잊고 싶어도 잊혀 지지 않을 거 같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어도>도 역시 만족할 만한 화질이라 할 수 있겠는데, 물론 가끔 잡티가 있긴 하지만 제작 년도를 감안한다면 이 정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듯하다. 음성 해설에는 김영진 평론가와 <킬리만자로>를 연출한 오승욱 감독이 참여하고 있는데, 전체적으로는 <이어도>라는 영화에 장면마다 집중하기 보다는 김기영 감독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후반부의 충격적인 장면이 등장 할 때 이들이 반응을 보는 것도 또 다른 흥미 거리라 하겠다.


다른 세 작품은 모두 서플먼트로 다큐멘터리나 인터뷰 등 추가 영상이 있던 것에 비해 <이어도> 디스크에는 추가 영상 없이 사진 자료 모음만이 담겨있다(앞서 작품을 이야기할 때 언급을 안 한 것 같은데, 다른 세 작품의 디스크에도 모두 사진 자료 모음이 서플로 수록되어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번 DVD 컬레션에는 <이어도>가 담긴 디스크를 제외하면 모두 각각 다큐멘터리 영상을 하나 씩 수록하고 있는데, 이 영상들은 김기영 감독의 세계를 좀 더 자세하고 이해하고, 그의 인간적인 면모와 생전의 각종 에피소드들을 전해들을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 담겨져 있다. 특히 김기영 감독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DVD컬렉션에 수록된 네 작품 외에 다른 작품들에 관한 이야기나 김기영 감독에 대한 연대기적인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어 더욱 유익한 영상이 될 듯하다. <고려장>이 수록된 디스크에 포함된 다큐멘터리 [감독들, 김기영을 말하다]는 최근 열렸던 ‘김기영 감독 전작전’에서도 상영이 되었던 것으로 김홍준 감독이 만든 48분 분량의 영상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다큐에서는 현재 한창 활동 중인 박찬욱, 봉준호, 류승완, 송일곤, 김지운, 박진표, 장준환, 변영주, 김대승 감독 등 여러 명의 감독들이 각자 김기영 감독의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의 느낌이나 그의 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장면들, 그리고 만약 김기영 감독이 살아 계셨다면 어떤 질문을 하고 싶은 지에 대한 답변들이 담겨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다큐는 48분으로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이긴 하지만 여러 감독들이 들려주는 에피소드들을 듣다 보면 시간이 언제 지나갔었는지 모를 정도로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다. 특히 개인적으로 만남을 가졌던 경험이 있던 송일곤 감독이 전해주는 이야기에서는 강한 카리스마 뒤에 숨겨진 인간적인 면모의 김기영 감독의 모습을 전해들을 수 있고, 근처에 살았던 관계로 김기영 감독이 돌아가신 자택의 화제 현장을 지나칠 수 있었던 김지운 감독이 추억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도 전해 들을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충녀>가 수록된 두 번째 디스크에는 한국 영상자료원에서 제작한 36분 분량의 [김기영이 김기영을 말하다]가 수록되었다. 이 영상은 김기영 감독 자택에서 진행된 것으로 영상 내내 인터뷰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김기영 감독 본인이 직접 들려주는 자신이 영화를 하게 된 계기나, 자신의 영화 세계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다시금 젊은 세대 들에게 컬트영화로서 인기를 얻게 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 그의 중 저음의 독특한 목소리와 더불어 이제는 더 이상 만나볼 수 없는 그의 인터뷰 영상이라는 점에서 높은 소장 가치가 있는 영상이라 할 수 있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육체의 약속>이 수록된 세 번째 디스크에는 역시 한국 영상자료원에서 제작한 [김기영 감독 다큐멘터리]가 수록되었다. 이 다큐멘터리는 한국의 예술인을 집중 조명하는 시리즈 중 하나로, 1997년 당시 제 2회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회고전을 갖기도 했던 시기에 제작된 영상이다. 이 영상에는 먼저 제 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김기영 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 박정자 씨, 안성기 씨 등이 참석한 기자회견장 모습을 담고 있는데, 대한민국에서 40년 동안 영화를 만들어 온 원로 감독이 특별 전을 처음으로 여는데, 모르긴 몰라도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을 수많은 후배 감독들 가운데 어쩌면 임권택 감독 한 명만이 참석할 수 있냐며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리는 정일성 촬영 감독의 말이 가슴에 남는다. 하지만 오히려 이 유명한 업계의 스타들을 모두 자신의 영화에서 배출해 냈다는 자부심이 든다며 상관없다는 투로 이야기하는 김기영 감독의 대꾸도 인상적이었다. 이 영상에는 상당 부분 두 번째 디스크에 수록된 <김기영이 김기영을 말하다> 다큐와 중복 수록되어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총평] 이번 ‘김기영 컬렉션’ DVD는 무엇보다 시네마스코프로 제작된 영화들이 모두 애너모픽 와이드 화면으로 수록되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겠다. 기존에 고전 영화들이 DVD로 출시되는 경우 4:3 비율로 출시가 되거나 비 애너모픽으로 출시되는 경우가 많아 아쉬운 점이 많았는데, 네 작품 모두가 애너모픽 와이드 영상으로 수록된 점은 또 한 번 이 컬렉션의 소장가치를 높이고 있다.


네 편의 영화 모두 본편에 한국어와 영어, 일본어 자막이 수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음성해설에도 한국어, 영어 자막이 수록되어 있어 한국영화에 관심있어 하는 외국인들에게 선물하기도 좋으며, 앞서 <고려장>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언급되었던 것처럼 별도의 해설 책자가 포함되어 있어, 유실된 부분의 시나리오라던가 감독의 연보, 작품의 대한 줄거리와 비평 등을 만나볼 수 있다(이 책자는 또한 영문판으로도 함께 제공하고 있다).


이번 ‘김기영 컬렉션’ DVD를 리뷰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그의 신작을 이제는 더 이상 만나볼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깝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앞선 세대의 감독으로서 동시대를 함께 하지 못한 것이 어찌 보면 불가항력 적인 것일지는 모르겠으나, 1998년 화재로 돌아가시기 직전 까지도 <하녀>의 또 다른 리메이크작인 <악녀>를 준비하면서, 반드시 올해 안에 멋지게 선보이겠다고 아이처럼 흥분하며 말씀하시던 영상 속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이 대감독의 작품을 동시대에서 만나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지곤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쉽지만 무엇보다 그의 작품을 지금에나 마 DVD로 만나볼 수 있게 된 것이 너무도 다행스럽게 느껴지며(소장가치를 평하는 점수가 10점으로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 너무도 아쉽다), 앞으로 이 네 작품 외에 <하녀>의 디지털 복원작과 더불어 제 2의, 제 3의 김기영 컬렉션도 차근차근 출시되길 기대해 마지 않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 주의 : 본 컨텐츠의 저작권은 'dvdprime.com'에 있으며 저작권자의 동의 없는 무단 전재나 재가공은 실정법에 의해 처벌 받을 수 있습니다. 단, 컨텐츠 중 캡쳐 이미지에 대한 권리는 해당 저작권사에게 있음을 알립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