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도키, 뉴욕 (Synecdoche, New York, 2008)
외로운, 위로의 일기
내 인생의 영화인 <이터널 선샤인>은 감독을 맡은 미셸 공드리만의 것이라보긴 어려운 작품이었다. 사실 찰리 카우프만은 <이터널 선샤인> 개봉 당시에도 워낙에 유명한 각본가였기 때문에 미셸 공드리의 작품이라는 것 외에 그가 각본을 썼다는 이유만으로도 영화 팬들 사이에서는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었는데(이렇게만 써놓으면 은근히 공드리를 무시하는 듯도 하지만, 나는 공드리를 카우
프만 보다 더 좋아하면 좋아했지....), 카우프만의 각본과 공드리의 마술이 더해진 <이터널 선샤인>은 정말 수많은
시네필들을 감동에 빠지게 한 걸작이었다. 찰리 카우프만의 각본은 항상 독특했다. <존 말코비치 되기>를 본 사람들은
'이 영화가 정확히 어떤 이야기를 했었지?'
라는 것은 기억하지 못할 지언정 그 기이한 세계관과 .5층의 이미지는 잊지 못한다. <휴먼 네이처 (Human
Nature, 2001)>와 <어댑테이션 (Adaptation, 2002)>을 기억하는 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찰리 카우프만은 '천재 각본가'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창의적이고 놀라운 이야기를 매번 들려주었지만, 그의 연출
데뷔작은 카우프만 없는 공드리의 작품보다 어쩌면 더 걱정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기대와 걱정이 공존했던 찰리 카우프만이 첫
번째 연출작은, 참으로 복잡하고 많은 분석할 거리가 있고 무엇보다 너무 나를 들켜버린 것만 같은 깊디깊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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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연출자 케이든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은 항상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아간다. 불안한 듯 했지만 겉으
로는 표현하지 않으려고 했던 그의 삶은, 어느 날 화가인 아내 아델(캐서린 키너)이 어린 딸을 데리고 떠나버리면서 본격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내가 떠난 뒤 그 동안 자신을 사모해 오던 극장 매표원 헤이즐(사만다 모튼)과 관계를 이어가려고 하는
한편, 거금의 기금을 받게 되면서 평생 꿈꿔오던 연극 작품을 무대에 올릴 수 있게 된다.
<시네도키, 뉴욕>은 카우프만의 야심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전까지는, 공드리와 함께 했던 작품의 분위기를 풍긴다.
이야기보다는 소품같은 단편적 이미지들을 여기저기 배치하는 한 편, Jon Brion의 음악과 함께 몽상적이고 회화적인 이미지를
뮤직비디오처럼 펼쳐놓는다. 이 단편적인 몇 가지 것들은 얼핏 보아서는, 아니 집중해서 보아도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쉽게
유추하기 어렵다. 계속 노인이 주인공의 뒤를 따라오는 것 (혹은 귀신처럼 장면 장면에 등장하는 것)을 어렵게 발견했지만 이것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감을 잡기 어렵고, 변의 색깔을 두고 벌어지는 대화들이 어떤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단번에
분석이 되기 보단 무언가 소스를 늘어놓는 듯한 느낌이 강한 서두다.
연극 연출가인 주인공 케이든을 통해 새로운 작품에 대한 창작의 고통 (<8과 1/2>과 같은)을 이야기하려는 것인가,
혹은 개인적인 고뇌를 좀 더 확장시키려는 것인가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러닝타임이 지속될 수록 찰리 카우프만의 이 거대한 야심에
조금은 두려움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카우프만은 지금까지 전작들에서 항상 개인의 심리상태를 기본으로한 다양한 이야기를 해왔었지만,
어쨋든 소박한 그릇에 담겨 펼쳐진 경우가 많았었는데, 이번 작품은 본인이 연출을 맡은 첫 작품이라는 것에 용기를 얻은 것인지
두려움 없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아마도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닐까 싶은) 거대한 담론을(하지만 결국은 개인의
심리묘사인 이야기를) 주저하지 않고 풀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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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든이라는 캐릭터를 중심으로 제유법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펼치고 있는 카우프만의 이 놀라운 이야기는, 그 세계를 다층적으로
확장시키는 것을 반복했다가 다시 모든 거풀을 벗어내고 처음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케이든은 맥아더 제단으로부터 기금을
지원 받아 연극을 제작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간단하게 시작했던 이야기가 점점 확장되고 진실된 것을 투영하려는 의지가 뒷받침되며
본격적으로 자신 본연의 이야기를 무대 위에 그대로 올리게 된다. 이 자체가 제유법이라 할 수 있지만 카우프만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어느 날 나타난 남자는 케이든을 쭈욱 지켜보았고 자신이 케이든보다도 케이든을 더욱 잘 이해하고 있다며 그의 역할을
하기를 자청한다(이 남자는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기 이전부터 영화 시작부터 계속 화면 어딘가에 등장했었다). 이 남자 새미 (톰
누난)가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점점 더 제유법의 세계로 깊게 빠져든다.
새미는 단순히 연극에서 케이든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케이든 보다도 더 케이든 임을 믿고 있는(이건 분명 믿음이다) 존재라 가끔씩
케이든과 부딪히기도 한다. 케이든은 극중 자신을 연기하는 새미가 무대라는 공간을 넘어 현실에서 자신의 행세를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크게 제지하지도 않는다. 새미 말고도 케이든 주변의 모든 인물들이 연극 속에서 다른 인물들을 통해 복층 구조로
등장한다. 나중에는 케이든과 연극 속에서 케이든을 연기하는 새미, 그리고 극 속에서 연출을 하는 케이든까지.. 한 명의 캐릭터를
여러 개의 모습으로(신체로) 쪼개어 놓는다. 이런 카우프만의 세계는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의 기본 이론이 되었던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을 연상케 한다. 점점 제유법의 세계가 깊어지면서 이 극을 연출하고 있는 케이든도 그 속에서
케이든을 연기하는 새미도, 그리고 그 캐릭터의 본 주인들과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모든 캐릭터들은 정체성과 그 세계의 공간적
정체성에 혼란을 겪게 된다. 관객 역시 어디까지가 연극의 범주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의 범주인지 쉽게 구별되지 않아 혼란을 겪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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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복잡한 방법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긴 하지만, 제유법이라는 것이 부분으로 전체를 전체로 부분을 이야기하는 표현법이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카우프만의 이야기는 항상 부분 그러니까 케이든의 심리상태를 통해 인간 본연의 대한 깊은 심연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카우프만의 이야기를 항상 귀담아 듣게 되는 것은 사실 영상 예술의 화려함과 독특함 때문이 아니라, 그가 갖고
있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위로 때문이었다. 사실 영화가 초반에 이르러 중반으로 진행될 때 까지만 해도, 점점 거대해 지는
세계관을 보며 첫 단독 연출작이라서 그런지 너무 욕심'만'을 내는 것이 아닌가 부담스럽기도 했었는데, 나중에 가서는 다시 본연의
이야기로 돌아올 때 눈가가 저절로 뜨거워져 버리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카우프만이
케이든을 풀어내는 방식에는 앞서 말했던 것 처럼 위로가 기본이 된다. 복잡한 제유법이니, 공드리 같은 마술같은 기법이니,
분석하고 싶은 욕구가 드는 다양한 장치들이니 해도, 이것들은 모두 위로와 자기반영이라는 메시지를 꾸며주는 기법들일 뿐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바로 여기에 있다. 카우프만은 본인 첫 번째 연출작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이 작품은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영화적인 이야기가 되어버린 측면도 있다. <시네도키, 뉴욕>에서 제유법을 다루는 방식은 확실히
영화적인 요소에 도움이 된다. 물론 이 복잡한 구성 때문에 본질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생긴 것도 사실이지만, 어쨌든
카우프만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었다. 아마 본인도 작품을 완성하고나서 굉장히 뿌듯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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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위로의 메시지로 돌아와서. <시네도키, 뉴욕>이 개인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갖는 이유를 골똘히 생각해보았다. 그리곤
그 이유가 상당히 개인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매번 영화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이라고 얘기하는 나이지만, 이번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였던 것 같다. 개인적인 것이기에 영화는 더 많은 공감대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예술이기도 한데, 이 작품은 공감대를
얻으려는 노력 측면에 있어서 확실히 다른 작품에 비해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실 중반까지는 카우프만이 만든 이
세계에서 몹시도 혼란스러웠었다. 그런데 오히려 인물의 세분화되고 그 세분화된 인물들이 서로의 자리를 찾아가면서 (진심의 목소리를
들려주면서) 공감대는 한 순간에 폭발했다. 인간은 누구나 외로운 존재라고들 이야기한다. 곁에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가 있는 것과는
별개의 이야기다. 인간은 늘 내면의 나와 싸운다. 아니 누군가가 나를 내가 아는 것처럼 이해해주길 몹시도 바란다. 극중 케이든이
겪는 고뇌는 창작의 고통이라기 보다는 위로와 이해에 가깝다. 그래서 그는 여러 인물들에게 기대어도 보고,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기도 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극으로 만들어 보기도 하는 것이다.
말미에 케이든에게 또 다른 케이든인 새미가 진심으로 그를 이해하고 안쓰러워하며 메시지를 전할 때, 정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나왔다. 그 순간은 분명 이 영화에 클라이맥스였다. 내가 남들에게서 듣고 싶은 말을 나의 분신(결국 나)에게서 듣게 되는 이
순간, 즉 누군가가 (하지만 타인이라고 보긴 어려운 존재에게) 나를 100% 이해한다는 것을 믿게 되었을 때의 찰나는 어떤
기분일지 잘 상상이 되질 않았었는데, 비록 영화 속 새미는 타인이라기보단 내 마음 속 외침에 더 가까운 존재였고, 영화 속에서
벌어진 간접 경험이긴 했지만 매우 소중한, 그리고 감격적인 찰나였다. 찰리 카우프만과 나는 한 번 만난적도 없을 뿐더러 내가
그를 아는 것은 그가 쓴 몇 편의 작품일 뿐인데, 누군가가 나를 이렇게 뼈속까지 공감하게 만들었다니, 슬픔과 위로가 동시에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누구에게나, 아니 적어도 나에게는 아무리 가까운 이에게도 쉽게 말하지 못한 나만의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결핍일 수도 있고,
부끄러움일 수도 있으며 사랑일 수도 있다. 이런 말 못할 이야기를 위로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영화에 가장 큰 미덕이 아닐까.
그래서 찰리 카우프만의 <시네도키, 뉴욕>은 적어도 나에게는 <이터널 선샤인>과 더불어 가장 소중한 작품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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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연한 배우들의 연기가 모두 너무 만족스러웠습니다.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이야 더 말할 것도 없고, 아델 역할을 맡은 캐서린
키너도 그 이미지가 참 좋았으며, 새미 역을 맡은 톰 누난과 여전히 빛나는 미셸 윌리엄스 등 너무 많은 좋은 배우들이 나와
그들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흐뭇했던 작품이었습니다. 특히 에밀리 왓슨이나 제니퍼 제이슨 리, 다이안 위스트 등은 출연사실 조차
몰랐기 때문에 더욱 반가웠구요.
2.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배우를 꼽으라면 헤이즐 역할을 맡은 사만다 모튼이었어요. 사실 <마이너리티 리포트> 당시만 해도 이 배우가 이렇게 연기로서 성장할 줄은 몰랐었죠. <컨트롤>을 통해 그녀를 다시 보게 되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더욱 노련한 연기의 그녀를 만나볼 수 있어요.
3. Jon Brion의 음악은 확실히 좋습니다.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그의 음악 때문에 공드리의 작품 냄새가 좀 더 짙어진다는 것 정도일 것 같네요. 국내에도 OST가 발매될 수 있을까요.
4. 본래는 각본만 카우프만이 쓰고 연출은 스파이크 존즈가 하려했던 작품이었는데, 그의 버전도 나쁘지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카우프만의 연출작에 100% 만족하게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