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버 렛 미고 (Never Let Me Go, 2010)

외로운 영혼의 나직한 노래



가즈오 이시구의 베스트 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마크 로마넥의 '네버 렛 미고 (Never Let Me Go)'는, 인간 복제나 장기 기증 등에 대한 배경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블레이드 러너'나 'A.I' 등 과는 조금 다른 차원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네버 렛 미고'는 이 설정을 제외한다면 거의 SF라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인간미가 짙게 깔린 작품인 동시에, 반대로 그래서 더 SF라는 장르가 갖고 있는 또 다른 진면목을 아름답게 승화시킨 작품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네버 렛 미고'가 관객에게 던지는 화두는 비슷한 주제를 다룬 다른 SF 작품들과는 조금 다른데, 인간을 위해 희생하는 이들의 존엄성이나 정체성 등에 대해 옳은가 그른가를 묻는 것보다는, 장기 기증을 위해 태어나고 길러지고 '종결 (Completion)'되어지는 운명에 힘겹게 순응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비교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온전히 인간성에 대해 그리고 영혼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게 끔 한다. 



ⓒ Fox Searchlight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네버 렛 미고'에 전반적으로 드리워져 있는 정서는 체념과 순응 그리고 나직한 슬픔이다. 극 중 주인공들은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알고 나서 정체성에 대한 방황을 겪기도 하지만, 이들의 여정은 정체성에 대한 의구심과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경계를 넘는 사투를 벌이는 것 보다는, 그저 어쩔 수 없는 순응의 범주 안에서 그 누구도 강하게 탓하지 못하는 쓸쓸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 작품이 인상적인 것은 이런 주인공들의 여정이 답답하거나 지루하게 느껴지기 보다는 (공감대를 형성할 만한 구성적 측면이 조금 부족하게 느껴졌음에도), 담담하게 자신의 삶을 읽어내려가는 캐시 (캐리 멀리건)에게 애잔함이 드는 동시에 동정이 아닌 같은 존재로서의 슬픔마저 느껴졌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어쩔 수 없이 소멸되어 가는 이들의 운명에 빗대어 '그러면 나는 어떠한가?'를 생각하게 끔 하는게 아니라 더 큰 범주에서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라는 질문과 슬픔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 Fox Searchlight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원작은 읽어보지 못해 영화와 비교는 할 수 없지만, 이들의 존재론 적인 화두보다는 오히려 세 남녀의 미묘한 삼각관계와 그 관계 속에서 어느 누구도 자유롭지 못했던, 그래서 오랜 시간 동안 마음의 짐을 안고 살았던 그들의 이야기에 더 많은 비중을 할애한 것은 결과적으로 더 큰 인상을 주었다. 결국 방법론의 차이 정도일 수도 있지만, 마크 로마넥이 선택한 이 방식은 이 작품을 SF라는 장르에서 자유롭게 해주었고, 인간과 인간을 위한 존재에 대한 영화가 아닌 그냥 '우리'에 관한 영화로 받아들일 수 있게 했다. 앞서 운명에 순응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했었는데, 이 순응이 극복이나 반항보다 인상적인 이유에는 여러가지를 들 수 있겠다. 첫 번째는 개인적으로 결핍과 장애 혹은 경계 아래에 있는 인물들을 바라보는 시선 때문인데, 이런 것들을 반드시 극복해야할 대상으로 보기 보다는 견디는 과정에 더 포커스를 둔 방향성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만드는 타자의 입장에서는 이런 환경에 놓인 인물들의 이야기를 너무 쉽게 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결국에는 극복하도록 강요하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는 점에서, 캐시의 1인칭 입장에 가깝게 그리려고 한 영화의 과정이 더욱 인상적이게 느껴졌다.



ⓒ Fox Searchlight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두 번째 이유는 첫 번째에서 언급했던 그 과정, 바로 견디는 것에 대한 깊은 성찰과 시선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극 중 캐시의 대사를 보면 이런 점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데, 영화와 캐시가 말하고자 했던 점은 '우리는 결국 너희와 같다'라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너희보다 더 인간적이다'라는 것도 아니었으며 그냥 담담히 '우리는 결국 삶을 끝까지 살아냈다'라는 것이었다. 정확히 알지 못했고 모두를 이해할 수도 없지만 '삶을 끝까지 살아냈다'라는 캐시의 이 말은 인간들을 한탄하는 메시지보다도, 한계를 넘어 새로운 존재가 되는 이야기보다도 더 강한 인상과 무게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참고로 표현상 구분했을 뿐이지, 저에게 이들의 이야기는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인간 아닌 존재가 아니라 그냥 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였어요;). 결국 이런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여정은 단순히 답답한 순응이라기 보다는 내적인 치열함의 또 다른 방향이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캐시의 말처럼 그 누구도 이해했다 쉽게 말하기는 어려운 하나의 소중한 '삶'이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Fox Searchlight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1. 글로 표현하기는 어려운데 무언가 먹먹함과 쓸쓸함 그리고 자기연민까지 느껴지는 작품이었어요. 그리고 나중에는 영화로 기억되기보다는 음악이나 한 폭의 그림으로 기억될 것 같기도 하구요.

2. 캐시 역할의 캐리 멀리건은 정말 캐릭터와 잘 어울리더군요. 아역을 맡은 배우도 멀리건과 많이 닮아있어서 보는 순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구요. 전 '언 애듀케이션'보다 '네버 렛 미고'의 캐리 멀리건이 더 좋았네요.

3. 짧은 출연이지만 샐리 호킨스와 샬롯 램플링도 워낙에 좋아하는 배우들이라 인상 깊었네요. 샐리 호킨스는 '해피 고 럭키' 이후로 계속 이렇게 조연으로 등장하는 작품들만 보게 되는 것 같네요;

4. 기회가 된다면 가즈오 이시구의 원작 소설도 꼭 읽어보고 싶네요. 영화 속에 나오는 저런 바닷가에 앉아서 보면 더 확확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네요 ^^;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본문에 사용된 모든 스틸컷/포스터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모든 이미지의 권리는 Fox Searchlight Pictures 에 있습니다.




어톤먼트 (Atonement, 2007)
오해와 거짓말의 나비효과

올 골든글로브 드라마 부분 작품상과 아카데미에서도 많은 화제를 모았었던 <어톤먼트>를 오늘에야
관람할 수 있었다. 예전에 포스터만 보고서는 그저 전쟁통에 남녀간의 애틋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그린
영화인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예전 <브릭>을 리뷰할 때 선댄스 영화들은 다르다는 얘기를 했었는데, 확실히 워킹 타이틀의 영화 역시
그 이름만으로도 믿고 관람할 수 있는 브랜드인 듯 하다. 워킹 타이틀의 영화들이 그러하였듯이 <어톤먼트>역시
훌륭한 이야기 구성과 높은 영화적 완성도를 보여준 수준급의 작품이었다.
이 영화는 2002년 출판된 이완 맥이완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소설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많은 소설의 팬들이 이 미묘한 심리 묘사들을 과연 어떻게 영화화 할 수 있을지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인물들이 겪는 무거운 마음들을 매끄럽게 묘사한 좋은 작품이었다.



(스포일러 있음)
이 영화의 주제는 사랑도, 전쟁도 아니다.
바로 한 사람의 거짓말과 이로 인한 오해가 가져온 무수한 일들. 거짓말을 할 때에는 이런 일이 생길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으나, 이로 인해 오해를 받은 인물들의 평생을 좌지우지할 엄청난 결과가 생겨버리게 되는,
소녀의 거짓말이 이들 세 사람을 어떻게 만들어버렸는지를 조용하지만 무섭게 다루고 있는 이야기이다.

사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제목인 <어톤먼트>(속죄, 참회)가 스포일러가 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로비를 사랑했던 10대 소녀 브라이오니는 언니 세실리아와 로비가 관계를 맺는 것을
보고 난 뒤, 그 날 밤 저택 부근에서 있었던 강간 사건의 범인을 보았음에도 범인이 아닌 로비를 범인으로
지목하게 된다. 이로 인해 로비는 감옥에 가게 되고, 감옥에서 징병이 되어 전쟁에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되고,
세실리아 역시 로비를 찾아 간호사로 전쟁에 뛰어들게 된다. 브라이오니는 어른이 되어서야 자신의 거짓말이
로비와 세실리아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를 깨닫고, 뒤늦게 속죄하지만 이미 이 둘에게는 그 속죄의
뜻을 전할 수 조차 없게 되어버렸다. 브라이오니는 작가가 되어 자신의 이 자전적인 이야기를 마지막 소설로
남기는데, 자신의 속죄하는 마음을 담아 로비와 세실리아가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상상의 이야기를 수록하지만,
이것은 말그대로 상상의 이야기일 뿐, 브라이오니의 속죄는 이미 너무나도 늦어버린 뒤였고, 돌이킬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 영화는 의도적으로 현재를 보여주고 몇 일 전, 몇 년 전으로 되돌아가는 방식의 구성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브라이오니의 속죄로 돌이킬 수는 없었던 이들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장치라 할 수 있다.
이 영화가 본격적으로 흥미로워지고 깊은 인상을 주기 시작했던 것은, 브라이오니가 어른이 되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 시작한 순간 부터였는데,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가고, 처참한 고통을 당하는 군인들의
모습들도 등장하지만 그 무엇보다 안타깝고 슬펐던 것은, 브라이오니가 속죄를 해도 이미 모든 일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는 마지막 인터뷰 장면이었다.

이 마지막이 인상적이었던 건, 바로 노년의 브라이오니 역할을 맡은 바네사 레드그레이브의 연기가 크게
한 몫을 하고 있다. 예전 주디 덴치가 가장 짧은 러닝 타임만을 출연하고도 아카데미 조연상을 수상했던 것처럼
영화의 마지막 안타까운 속죄의 마음을 전하는 브라이오니의 인터뷰 장면에서의 레드그레이브의 연기는,
결정적으로 이 영화가 슬픈 영화가 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미션 임파서블>의
'맥스'역할로 익숙한 바네사 레드그레이브의 연기는 어린 브라이오니 역할을 맡은 시얼샤 로넌의 연기와
더불어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다.



물론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키이라 나이틀리와 제임스 맥어보이의 연기도 좋았지만,
<어톤먼트>를 보고나면 가장 큰 인상이 남는 것은 바로 어린 브라이오니 역할을 맡은 시얼샤 로넌의
그 연기와 표정일 것이다. 흡사 공포영화에서 볼 법한 시얼샤 로넌의 차가운 마스크는 그 새침한 단발 머리와
맞물려 이 모든 일들을 있게한 브라이오니의 캐릭터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어톤먼트>로 인해 가장 주목을 받게 된 영화인이라면 아마도 어린 이 소녀가 되야 할 것이며,
앞으로는 또 어떤 영화에서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 무한 기대가 되는 바이다.

마릴린 먼로의 그 유명한 치마폭을 감싸 앉는 장면에서 등장했던 의상을 물리치고, 당당히 영화사상 가장
아름다운 의상으로 선정되었다는 키이라 나이틀리의 녹색 드레스는, 이미 이렇듯 화제가 된 바를 알고 가서
인지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이에 반해 너무 짧은 시간 등장한 것 같아 아쉬웠다.
아, 그리고 주인공인 제임스 맥어보이.
분명히 어디서 본 듯은 한데, 영화를 보는 내내 잘 기억이 나질 않았었는데, 집에와서 찾아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나니아 연대기>에서 톰 누스 역할로 출연을 했었기 때문.
분장을 지운 멀쩡한 얼굴을 보니 본듯은 하지만 확실히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
그 역시 이 불쌍하고 기고한 운명에 처해진 로비 역할을 자연스럽게 소화해 낸 듯 하다.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한 것처럼, 이 영화의 음악은 굉장히 창조적이면서도 감동적인 면을 동시에 들려주고
있다.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타이핑 소리를 음악의 소스로 사용한 것은 매우 참신하게 다가왔으며,
세 인물의 기고한 운명을 음악으로 극대화 시키는데 공헌을 하고 있다.
아, 그리고 촬영기법에 대한 이야기도 빠질 수 없는데, 두 주인공의 서재에서의 키스씬은 거의 얼굴만을
클로즈업 하고 있지만 마치 <색. 계>의 배드씬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감각적인 촬영기법이었으며,
전쟁의 참혹한 현장을 대사없이 단 한 번에 모두 설명해 내는 아주 긴 롱테이크 샷은, 놀라울 정도로
완벽한 준비에 의해 만들어진 장면이 아닌가 싶다.

굉장히 고전적인 배경과 스타일을 갖고 있지만, 그럼에도 굉장히 세련되게 뽑아낸 것은 아무래도 감독의
연출력이 아닐까 싶다. 조 라이트 감독의 전작 <오만과 편견>은 개인적으로 아직 보질 못했는데,
확실히 꼭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운명이라 말하기엔 너무도 잔인한,
하나의 거짓말이 얼마나 큰 재앙을 불러올 수 있는지에 관한 슬픈 이야기,
어톤먼트 였다.



 

 
글 / ashitaka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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