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으니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은 조심해주세요^^)

기억하라, 기억하라
11월 5일을....
화약 음모 사건. 그 사건은 결코 잊혀 져선 안 된다.

(Remember, Remember
The Fifth of November..... The Gunpowder Treason and Plot
I Know of no Reason Why the Gunpowder Treason
Should Ever Be Forgot)



나탈리 포트만이 연기한 극중 ‘이비’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되는 ‘브이 포 벤데타’는 개봉 전부터 많은 화제를 불러 모았던 작품이다. 그 화제의 주된 목적은 바로 ‘매트릭스’제작진이 만든 영화라는 것이었다. 사실 이런 홍보 문구가 번잡스럽게 치장하고 있는 영화들을 속속들이 살펴보면, 사실상 회자되는 영화에서 그다지 큰 역할을 담당한 경우가 아니거나, 매우 극소수의 스텝이라 ‘...팀’이라고 불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던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오히려 이런 홍보 문구들이 영화의 본질은 재껴두고 잘못된 기대심만 부추겨 영화자체의 평가를 시작부터 몰살시킨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결과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영화 ‘브이 포 벤데타’는 명실상부한 ‘매트릭스 팀’이 만든 영화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감독을 비롯해 매트릭스의 우수한 주요 스텝들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걸작이다. 매트릭스 시리즈의 조 감독이었던 제임스 맥티이그가 메가폰을 잡았으며, 워쇼스키 형제는 제작은 물론 원고의 초안을 쓰기도 했고, 매트릭스 세계의 전체적인 디자인을 담당했던 프로덕션 디자이너 오웬 페터슨이 ‘브이 포 벤데타’의 프로덕션 디자인을 맡고 있다. 그 밖에도 나중에 서플에 관해 이야기 할 때 다시 언급하겠지만 매트릭스 시리즈를 제작한 조엘 실버가 제작을 맡고 있다 (심지어 서플먼트를 잘 살펴보다보면 매트릭스 시리즈에서 키아누 리브스의 대역을 맡았던 배우가 스턴트맨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 또한 엿볼 수 있다).



분명 진정한 ‘매트릭스 팀’이 만든 영화임은 틀림없지만, 이번 경우에도 이 홍보문구는 조금의 잘못된 기대를 불러일으킨 경우가 될 듯하다. 물론 매트릭스 시리즈가 단순한 SF액션물이 아닌 ‘생각하는 SF’라는 평처럼 철학적인 내용과 굉장히 넓은 스펙트럼의 배경지식을 동원하는 작품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매트릭스 팀이 만든 영화라고 하면 대부분의 관객들은 SF액션을 기대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브이 포 벤데타’에도 액션이라 불릴 만한 장면들이 분명 존재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이 ‘액션’은 양념일 뿐, 영화의 장르는 정치 스릴러에 가깝다. 영화의 바탕이 되는 사건은 바로 1605년 11월 5일, 무정부주의자 가이 포크스가 영국의 제임스 1세 정부의 독재체재에 반하여 의회를 폭파시키려다 실패, 처형된 일명 ‘화약 음모 사건’이다. 3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획일화 되고 자유가 탄압받는 사회에 ‘브이’라는 남자가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 다시 한 번 세상에 이 사건을 되새기고, 의사당을 폭파시키겠다고 알리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코믹스였던 원작이나 영화인 ‘브이 포 벤데타’에서 이야기하는 정치적인 성향이 이전 영화들에게서 전혀 없던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이전에도 정부의 음모론이나 억압되고 패쇠된 사회에서 이에 항거하는 영웅들의 이야기는 많이 있어왔다. 하지만 미국에서 만들어지고 많은 돈이 들어간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특히 9/11 이후 테러에 관해 몹시도 조심하고 있는 미국사회에서 이런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우선 놀랍다. 2005년과 2006년에 들어오면서 점차 조금씩 테러와 관련한 영화들이 조심스레 차츰 늘어가고 있지만, 이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내용은 어찌 보면 너무도 직설적이다. 몇 가지 걱정스러울 정도로 정치적인 설정들을 말해보자면, 그 첫 번째로는 먼저 미국이 몰락한 세계정세에 있다. 영화는 미국이 일으킨 3차 세계대전 이후 몰락한 미국이 아닌 영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미국 내에서 만들어진 텍스트가 이런 설정을 지니고 있다는 자체가 놀랍다(물론 여기서 ‘놀랍다’라는 것은 메이저 제작사에서 제작한 블록버스터 영화라는 전제하에서 더욱 그렇다. 서플을 보다보면 제작자인 조엘 실버가 이런 영화를 가능케 해준 워너브라더스의 용기에 감사한다는 인터뷰도 만나볼 수 있다).



그 다음은 이 영화에 가장 근간을 이루고 있는 독재체제와 은폐되고 음모로 가득 찬 정부의 모습에 있다. 9/11의 충격이 가실 즈음 여러 저널리스트나 의식 있는 작가들은 이 사건에 얽힌 음모론에 관해서 조사하고 정리하여 사람들에게 알리기에 이르렀는데, 그 중 아마도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들 수 있겠다.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이 음모론에 근거하여 부시 행정부를 조롱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면 최근 다시 한 번 화제를 모았던 다큐멘터리 ‘루스 체인지 (Loose Change)’는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접근방법으로 소름 돋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 이 다큐멘터리의 내용을 간단히 종합해보자면 9/11 참사는 결국 사고가 아닌 미 정부의 치밀한 계획 아래 치러진 계획범죄라는 것이다. ‘브이 포 벤데타’는 이런 음모론이 나돌던 시기에 비교할 수밖에 없는 내용을 담고 개봉하기에 이르렀다. 극중에서 독극물로 인해 수만 명이 죽게 된 사건이 결국 정부의 음모였고 이를 은폐해 왔다는 것이 밝혀지는데, 이러한 설정 자체가 9/11 이후 계속되는 음모론과 너무나도 닮아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장면 영국 의회 건물이 폭발하는 장면은, 9/11 이후 테러와 관련된, 특히 건물 폭파 등에 관련된 장면에 대해 굉장히 조심했던 미국 사회의 분위기를 감안할 때, 정말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과감한 장면이 아니었나 싶다. 단순한 정치 원리와 자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는 설정들이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상당히 의미 있는 작업이 된 것 같다.



‘브이 포 벤데타’는 분명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탄압받고 획일화된 사회를 그려서 인지, 건물을 비롯한 배경의 디자인은 어두우면서도 고풍스런 16~17세기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미장센은 영화를 미래를 배경으로 한 작품임에도 ‘가까운 미래’라는 것을 현실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브이 포 벤데타’가 고급스러우면서 멋스러운 영화로 기억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V 역할을 맡은 휴고 위빙의 멋진 목소리라고 생각된다. 이미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서도 ‘엘론드’ 역할을 맡아 멋진 내레이션을 선보인바 있는 그는, 영화 내내 마스크를 쓰는 탓에 목소리가 매우 중요한 V 역할을 맡아 또 한 번 인상적인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평소에 대화 투에서도 멋진 목소리는 빛이 나지만, 연설이나 설교하는 장면들에서는 특유의 차분하면서도 흡입력 강한 어조와 목소리로 관객들을 손쉽게 사로잡고 만다. 사실 러닝 타임 내내 웃는 얼굴의 마스크로만 비춰졌던 V의 표정이 지루하지 않고 계속 다르게 느껴졌던 데에는 휴고 위빙의 멋진 목소리 연기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삭발 연기로 화제를 모았던 나탈리 포트만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삭발에 관한 이야기만 화제가 된 것이 억울할 정도로 그녀의 영화 속 연기는 매우 뛰어났다. ‘매트릭스’의 네오가 그랬던 것처럼 처음엔 평범한 방송국 직원이었던 ‘이비’가 압제에 저항하는 자유의지를 갖는 캐릭터로 변해가는 과정을 잘 그려내며, 그녀의 필모그래피에 또 하나의 멋진 작품을 남겼다. 핀치 경감 역할을 맡은 스티븐 레아도 빼놓을 수 없는데, 바바리를 입은 모습과 헤어스타일, 표정 등은 정말로 핀치 경감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완벽한 모습과 캐릭터를 만들어내며 느와르 영화와 형사 영화의 분위기를 이끌어냈다. 사실 이 영화를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V나 이비가 중심이 아니라 V가 일으킨 하나의 사건을 통해 수사를 거듭하여 결국 정부의 거대한 음모를 파해 치게 되는 핀치 경감 주연의 스릴러물로 볼 수도 있는데, 여기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이 바로 완벽한 캐릭터를 만들어낸 스티븐 레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셔틀러 의장 역의 존 허트, 디트리히 역의 스티븐 프라이, 루이스 프로더로 역의 로저 알람, 딜리아 역의 시네드 쿠삭 등 여러 중견 연기자들이 멋진 연기를 펼쳤다.



‘브이 포 벤데타’ DVD는 한정판과 일반판으로 나뉘어 출시되었는데, 특히 한정판은 이전 폭스의 ‘킹덤 오브 헤븐 DE'에서 사용되었던 슬림 틴케이스가 사용되어 소장가치를 더하였다. 2.35:1 와이드스크린의 화질은 최신작답게 우수한 화질을 선보이고 있다. 조명이 어두운 장면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암부 표현력이 최고라고 말하긴 어려운 수준이지만, 평균 이상이며 감상에 지장을 주거나 사물을 분간하기 어렵거나 하는 정도는 아니다. 어두운 장면이 많은 등장하는 것과 동시에 영화에 사용된 색들 또한 회색이나 검은색, 짙은 갈색 등 화려하고 다양한 색들 보다는 적은 수의 어두운 색들이 주로 등장하는데, 이에 대비되는 짙은 붉은 색 등의 표현은 평균 이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돌비디지털 5.1채널을 지원하는 사운드는 최신작에 걸 맞는 우수한 수준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초반과 후반의 폭발 장면에서 더 웅장한 폭발음을 기대하는 이들도 있을지 모르나 워너에서 DTS를 수록할 일은 아마도 없을 듯하니, 현재의 돌비디지털에 만족해야 할 듯(절대 돌비5.1이 부족하다는 뜻은 아님). V가 격투 중 단도를 휘두르고 던질 때에는 선명한 채널 분리도를 느낄 수 있으며, 쉐도우 갤러리에 흐르는 줄리 런던의 'Cry Me a River'도 공간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혹자는 센터스피커를 통해 전달되는 V의 대사전달이 조금 약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건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V의 대사 자체가 마스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현실적으로 반영한 사운드이니 문제가 되지 않을 듯하다.



2번째 디스크에는 서플먼트가 따로 수록되었는데, 최근 출시되는 타이틀의 경향으로 보았을 때 ‘브이 포 벤데타’ 정도의 타이틀에 감독이나 배우의 음성해설이 수록되지 않은 것이 먼저 아쉽다. 'Designing the Near Future'에서는 감독 제임스 맥티그와 제작자 조엘 실버, 나탈리 포트만, 휴고 위빙 등이 출연하여 인터뷰를 통해 영화에 등장한 89개의 세트와 베를린을 비롯한 로케이션 장소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Remember Remember : Guy Fawkes and the Gunpowder Plot'에서는 디트리히 역의 스티븐 프라이와 프로더로 역의 로저 알림의 소개로 가이 포크스에 관한 이야기를 짧지만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에 관련한 저서를 쓴 작가들의 인터뷰를 통해 가이 포크스의 의회 폭파 시도 사건이 갖는 역사적 의의와 16,17세기의 사회적 배경에 관해 들려준다. 영국 내에서는 가이 포크스와 이 사건이 제법 인지도가 있지만, 사실 이 영화를 통해 처음 접하는 경우가 많은 국내에서는 매우 유익한 영상인 듯하다. 'V for Vendetta and the New Wave in Comics'에서는 원작인 DC코믹스의 그래픽 소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원작 자체가 당시 코믹스에서는 없던 것들을 시도한 창시적인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이 밖에 사운드 트랙 광고 화면과 만화를 영화로 각색하는 과정, 영화에 삽입되었던 Cat Power의 뮤직비디오, 극장 예고편 등이 담겨있다.

2006.07.20
글 / ashitaka



아래는 보너스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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