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기 에반게리온]은 하나의 심리극이라 해도 좋을 만큼, 복잡한 내적 줄다리기와 상처받은 영혼들에 고통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다양하고 복잡한 캐릭터들 가운데서도 가장 중심에 위치해 있으며, 무엇보다도 우리들과 가장 닮아있는 캐릭터가 바로 '이카리 신지(碇シンジ)'이다.





이카리 신지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네르프의 총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이카리 겐도우와 유이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신지는 다른 애니메이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용맹하고 정신적으로도 터프한 주인공들과는 달리, 소심하고 내성적이며 혼자 음악듣기를 즐기는, 어찌보면 너무도 평범한 캐릭터이다. 그리고 신지는 아직 어린 14살의 소년이며 대부분의 또래의 소년들이 그러하듯 혼란스러운 청소년기와 사춘기를 겪고 있다. 신지는 지구와 인류의 운명을 짊어진 특별한 상황에 처해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그 무게의 차이일 뿐 [에반게리온]은 한 소년이 정체성을 이루어가고 고통을 이겨내는 성장 드라마에 성격을 갖고 있기도 하다.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 외에도 타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과 신지가 가장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바로 에반게리온에 탑승하는 이유, 즉 목적이다.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신지와 같은 상황이라면 당연히 인류를 구하기 위한 사명감으로 에바에 탑승하였겠지만, 신지의 경우는 달랐다. 신지에게는 인류의 구원이니 사도의 격퇴이니 하는 대의명분은 별로 중요치 않았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기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만으로 에바에 탑승했다고 볼 수는 없다). 신지는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기 위해, 사랑받고 칭찬받기 위해, 또한 아버지에게 관심을 받기 위해 에바에 탑승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지는 항상 에바 탑승에 관해 고민을 거듭하게 된다. 바로 '왜?'하는 물음말이다.





신지와 주변의 캐릭터들의 관계는 상당히 복잡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신지가 인식하는 상대에 느낌이라고 해야겠다. 신지는 같은 에바 파일럿인 아스카에게는 이성을 느끼지만, 레이에게는 모성과 이성을 동시에 느낀다(모성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미사토에게 역시 모성을 느낀다. 또한 시리즈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카오루에게도 미묘한 이성을 느끼게 된다(이러한 카오루와의 관계는 방영 당시 일본에서도 상당한 논란거리가 되었었다). 레이에게 모성을 느끼는 것은 이미 언급하였듯이 당연한 일이었고(왜 당연한 것인지는 레이 편에서 자세하게 설명하도록 하겠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떨어져 혼자 보냈던 시간이 대부분이었던 신지에게, 보호자격인 미사토의 존재 역시 모성으로 느껴지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사도이기도 했던 카오루와의 관계의 이유는 조금 다르다. 카오루는 신지가 늘 되내이던 문제들에 관한 답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스스로 해쳐나갈 수 있는 의지의 길을 열어준 존재였기 때문에, 어찌보면 존재를 뛰어 넘어 진실한 사랑에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여기서 말하는 사랑의 의미는 흔히들 말하는 남녀간의 사랑보다는 좀 더 총체적이고 초월적인 의미를 갖는다). 신지에게 카오루는 이렇듯 짧은 시간 함께 하였지만 소중한 존재였기에, 그가 마지막 사도임을 알게 되었을 때 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손으로 카오루를 죽음으로 이끈 죄책감에 더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신지가 이런 마음을 갖게 되기까지는 너무도 힘든 과정이 있었다. 수많은 반문들을 되내이고 되내인 끝에, 이러한 마음을 갖을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을 항상 다른 사람에게만 맞추려하다보니 상처받고 고민하고, 번번히 실패를 거듭하게 되면서 신지는 더더욱 자신을 미워하게 된다. 결정적으로 카오루와의 일을 계기로 무섭도록 자신의 존재에 대한 증오와 혼란을 겪게 된다. 이러한 신지가 자신의 존재를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의 의지였다. 표면상으로는 아스카, 레이, 미사토 등 주변 인물들이 그를 안심시키고 달래고 타이르며, 신지의 존재에 관해 이야기 해주고 있지만, 극 중 에서도 알 수 있듯, 이는 모두가 다 신지 자신이 만든 이미지에 불과하다. 즉 신지가 원하는 아스카, 신지가 원하는 레이, 신지가 원하는 미사토의 이미지가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들려주는 '축하해'라는 말은 신지가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처음이자 가장 큰 칭찬인 것이다.



이카리 신지가 겪게되는 극 중 모든 상황, 쉽게 말해 계속되는 자신과의 싸움은, 작게는 한 소년이 자아를 완성시켜가는 과정을, 나아가서는 한 영혼을 가진 존재가 자신의 존재로서의 의미에 대해 인식하는 과정을 너무나도 섬세하고 감각적이며 사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신세기 에반게리온]을애니메이션은 물론 실사 영화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의미를 갖게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모두 함께 겪었기에 신지의 마지막 대사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진한 감동을 준다.


2003.02.21
글 / ashitaka

이카리 신지의 독백은 곧 에반게리온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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