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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哭聲, 2016)
의심과 현혹으로 탄생한 지옥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나홍진 감독의 신작 '곡성 (哭聲, 2016)'은 인간의 의심과 무지 그리고 그로 인한 현혹을 주제로 신과 악마의 이야기를 가장 현실적인 공간의 배경에 풀어 놓은 흥미로운 작품이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는 감독이 분명한 하나의 의도를 가지고 있음에도 관객들로 하여금 다양한 해석이나 이해가 가능하도록 만든 구조의 작품들인데, '곡성'도 그 중 하나다. 개봉 첫 날 부터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 다양한 담론이 형성되고 있는데 (담론이라기 보다는 궁금함으로 인한 해석과 설명들), 이런 영화들은 사실 한 가지의 답이 존재한다기 보다는 몇 가지의 답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겠다 (하긴 모든 영화가 그렇지만). 그만큼 개봉 전부터 많은 기대를 불러 모았던 나홍진의 '곡성'은 충분히 흥미로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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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의심에 관해 이야기한다 (영화의 시작 인용한 성서 구절과 마지막 동굴 시퀀스에서 외지인이 들려주는 대사는 그렇게 의심이라는 주제로 수미상관을 이룬다). 그리고 그 의심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의 가벼움에 대해서도 말한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의문의 연쇄 살인이 발생하고 동네에서는 사람들의 입을 거쳐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바로 외지인인 일본인 (쿠니무라 준)이 범인이라는 혹은 귀신이라는 얘기. 경찰인 종구 (곽도원)는 처음에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웃어 넘겼지만 주변 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었던 이야기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향을 받게 되 그 역시 외지인을 의심하기 시작하고, 몇 가지의 확신할 만한 상황들이 벌어지게 되면서 이 의심은 더 확고한 확신으로 번져 간다. 한 번 생겨난 의심 그리고 이를 더 확고하게 해 줄 만한 말들과 현실들이 더해지면서 사태는 것잡을 수 없이 빠르게 전개 되어 간다.
여기서 중요한 건 종구의 의심과 현혹됨이 관객에게도 동시에 진행되고 발전된다는 점이다. 관객은 주인공인 종구의 시점을 공유하며 같은 입장에서 인물들을 의심하고 그 현혹된 시점으로 이야기를 바라보게 된다. 의심에 관한 텍스트는 주인공의 결백 등과 맞물려 다른 영화에서도 종종 만나볼 수 있었던 이야기인데 '곡성'은 여기에 종교적인 이야기를 적절하게 겹쳐 놓았다. 신, 특히 종교야 말로 의심이라는 것에서부터 태어났으면서도 의심이 허용되지 않는 존재가 아니던가. 나홍진은 이를 아주 효과적으로 활용하며 관객들의 의심 역시 십분 활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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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니무라 준이 연기한 외지인의 모습은 영화 속에서 가장 (특히 초반)공포스럽고 악마 같은 존재로 그려진다. 벌거벗은 채로 고라니를 뜯어 먹고, 그것이 설령 꿈이라고 하더라도 새빨간 눈동자를 한 모습과 피해자들을 전시해 놓듯 사진들로 가득 찬 그의 공간은 그를 연쇄 살인마 이상의 악마로 (혹은 귀신으로)의심하고 확신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그리고 이 외지인 귀신을 떨쳐내기 위해 고용된 무당 일광 (황정민)은 그 등장에서 부터 완벽하게 일본인의 대척점에 있는 인물로서 묘사된다. 더 나아가 일광이 한참 귀신을 쫓기 위해 굿을 벌이던 중, 종구가 결국 약해진 딸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약해져 굿판을 중지 시키게 되었을 때 관객은 '아, 조금만 더하면 귀신을 죽일 수 있었는데 아쉽다..'라는 생각까지 이르게 된다.
하지만 이 후 외지인은 힘을 잃고 일광도 떠나고 종구의 딸은 병원에 맡겨진 뒤 영화는 다른 국면을 맞게 된다. 그간 일방적으로 확신을 가졌던 종구의 시점을 뒤흔든다. 귀신이라고 믿었던 외지인이 만져지고 죽음에 이르는 것을 종구가 직접 목격하게 되는 것 (그 시체를 다른 사람들이 볼까봐 길 아래로 던져버리는 행동도)이나 이를 멀리서 마치 귀신처럼 지켜보는 무명 (천우희)의 모습은 무명 = 목격자, 외지인 = 귀신이 아니라 일광의 전화가 알려준 것처럼 무명 = 귀신, 외지인 = 무당 이라는 해석으로 단숨에 전환된다. 그러면서 영화는 마치 이것이 반전인 것처럼 급박하게 휘몰아 친다. 마치 귀신일지도 모를 무명을 종구가 다시 마주하게 되는 위기의 순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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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 가족의 목숨이 귀신 혹은 악마에게 모두 빼앗겨 버릴 위기에 놓여있는 종구 앞에 이제는 가장 두려운 존재인 무명이 나타난다. 무명은 딸과 가족을 살리려거든 닭이 세 번 울 때까지만 참으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미 자신이 직접 외지인의 시체를 목격한 경험과 일광의 전화로 무명의 존재에 대해 깊이 의심하게 된 종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이 상황은 외지인이 악마임을 확신하고 죽이고자 찾아간 부제인 이삼 (김도윤)의 상황과 겹쳐진다. 그리고 이전과는 달리 귀신이 아닌 악마 적인 모습을 대놓고 드러내는 외지인과 이삼의 대화가 영화의 주제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외지인은 이삼에게 '너는 나의 존재를 의심해서 알아보고자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심을 확인하러 온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묻는다. 대답하지 못하는 이삼에게 외지인은 마치 영화의 시작 성서에서 인용된 예수의 말씀처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나는 있느니라' '나를 만져보아라'라고 말하며 마치 십자가의 못 박힌 예수의 상흔과 같은 손바닥의 상흔을 보여준다.
이 동굴에서의 대화는 겉으로는 반그리스도 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 하지만, 사실 그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곡성'의 반그리스도적 상징과 묘사들은 '의심'이라는 주제를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서 스며들어 있다. 언급 했던 것처럼 종교, 신 과 같은 절대적인 믿음의 상징들은 의심이라는 주제를 설명하기에 가장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도구이기 때문이다. 의심이 아니라 자신의 의심을 확인하려고 온 것이 아니냐는 질문은 이 영화의 핵심이다. 참으로 별 것 아닌 말들과 오해들로 갖게 된 의심이 어떻게 확신이 되고 그 확신을 포기하는 것을 인간이 과연 해낼 수 있는 존재인가에 대한 비관적인 질문은 영화 '곡성'이 던지는 진짜 질문이다. 악마, 악, 공포 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심과 그 의심이 스스로 끌어들인 현혹이 어떤 지옥을 만들어 냈는지를 말하고자 한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같은 인물이 귀신도 그 귀신을 쫓으려는 무당도 될 수 있고, 악마가 신(예수)의 모습과도 하나도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통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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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영화가 지속적으로 말하고자 한 또 한 가지가 바로 무지다. 귀신을 봤다는 사냥꾼이 자신의 텅빈 냉장고를 보여주며 '이게 바로 증거다'라고 말할 때 종구와 관객 모두가 웃어 넘기지만 사실 이 장면 역시 영화의 메시지와 깊게 맞닿아 있다. 부활한 예수를 보고 직접 손과 발을 만져보고서야 믿게 된 제자들을 보고 '너희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라고 말한 예수의 말처럼, 이 장면 역시 의심의 관한 영화의 메시지를 더욱 견고하게 한다.
'곡성'에서 말하는 무지란 전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무명도, 귀신에 씌인 딸도 종구를 똑바로 쳐다보며 이렇게 묻는다. '뭐가 중요한지 알기나 해'.
몇 번을 묻지만 이 질문은 오히려 너무 직접적이라 종구는 결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미 종구의 마음엔 확신 만이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렇게 벌어지는 상황들로 인해 계속 불안해 하는 종구에게 무슨 확신 만이 있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따지고보면 종구는 불분명한 것들로 인해 불안함을 겪어 왔다기 보다는 지속적으로 확신을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단지 그 확신이 계속 옮겨 갔을 뿐이지. 편협된 혹은 어쩔 수 없이 편협된 정보들로 이룬 자신 만의 결론과 확신을 두고 직접적으로 질문을 받게 되었을 때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스스로 혼란에 빠져 버리는 인물들의 모습에서 이 비극은 더 깊어져만 가고, 맨 마지막 종구가 남긴 '괜찮아, 아빠가 다 해결할께'라는 말은 이 비극을 쉽게 해피엔딩으로 위로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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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홍진은 이번에도 관객들을 아주 불편하게 하고 특히 영화 속 인물들을 아주 고약하게 괴롭히고 마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영화가 주인공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을 대부분의 관객들은 불편해 하는데, '곡성'은 결과만 보면 그렇지만 자세히 보면 딸과 모든 것을 잃어버린 종구에 대한 연민과 위로가 담겨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악마와 맞서 싸우는 퇴마사의 이야기거나 혹은 연쇄 살인사건을 파해치는 형사나 전문가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별다른 걱정 없이 살아온 듯한 평범한 주인공이 어느 날 연쇄 살인과 귀신이라는 거대한 사건을 맞닥 들이게 되고, 더 나아가 바로 자신의 딸이 휘말리게 되면서 겪게 되는 과정은, 영화의 주제인 의심과 무지의 매개체로 활용되고 있기도 하지만 한 편으론 어쩔 수 없이 당할 수 밖에는 없었던 한 인물의 비극 그 자체라는 점을 영화는 주지 시킨다.
그저 평범한 사람이 과연 자신의 딸의 목숨이 걸려 있는 상황에서 합리적 의심과 자가 비판 등을 통해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하여 누구의 말이 옳은 것인지 선택할 수 있겠는가 라는 것의 위로. 그리고 끊임 없이 '왜 우리 딸이' '왜 아무 잘못도 없는 우리 딸에게 이런 일이'라고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그래야 스스로 이해할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묻지만, 마치 낚시 처럼 그저 네 딸이 걸려든 것 뿐이라는 얘기를 듣게 되는 종구의 모습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가족을 잃거나 상처를 받아야 했던 피해자들에 대한 위로가 엿보인다. 다시 말해 영민한 전문가가 자신의 꾀에 빠져 스스로 자멸하는 패배가 아니라, 어쩌면 의심할 수 밖에는 없고 빠르게 의심을 확신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되었던 종구의 비극을 말이다 (그 상황에서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밖에는 없었던 존재가 악마의 하수인이었던 일광이었다는 점도 가슴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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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곡성'을 미스테리 스릴러 장르로만 본다면 아쉬운 점이 없지 않을 듯 싶다. 개연성을 중시하는 시점으로 바라 본다면 몇 몇 장면은 완벽하게 설명되지 않는 측면이 있고, 어떤 측면으로 보아도 모든 퍼즐 조각이 다 맞아 떨어지는 명쾌한 해석은 어렵기 때문이다 (아, 환각 버섯으로 인한 사건으로 보면 100% 이해될지도 모르겠다). 글의 마지막 이야기했던 것처럼 만약 '곡성'을 피해자에 대한 위로의 방식으로 본다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울 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어떤 문제에 직면하거나 특히 피해를 입었을 때 그 원인과 이유에 대해 (반드시)정답을 알고자 하는데, 세상에는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하거나 알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왜 나인지 알 수 없는 일 가운데는 가족을 잃게 되는 끔찍한 일들도 있으며, 피해자들은 결국 의심하고 또 확신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지옥같은 현실에 놓이기도 한다는 것. 나홍진의 '곡성'은 의심과 현혹으로 탄생한 지옥을 그리지만, 그럴 수 밖에는 없었던 피해자들에 대한 위로도 담아낸 작품이었다.
1. 홍경표 촬영 감독이 담아낸 영상미가 인상적이었어요. 오컬트적 요소를 담은 영화 답게 곡성의 아름답고도 서슬퍼런 풍광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듯 한.
2. 영화에 대한 평을 보니 호불호가 극과 극으로 나뉘고 있는데, 뭐 둘 다 그럴 수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물론 그 중에는 아예 잘못 읽고 있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영화의 주제와 빗대어 얘기하자면 이미 재미있게 봤거나 재미없게 본 이들이 나중에 평을 나누다가 바뀔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재밌다는 사람이 재미없다는 글을 보는 이유는 '재미없을 리가 없는데'라는 의심을 확인하기 위해서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그래서 이 논쟁에 뛰어 들고 싶다가도 절대 끝날 수가 없는 (답이 없는. 둘다 맞는) 논쟁임을 깨닫고 현혹되지 말아야지 하고 있지요 ^^;;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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