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후드 (Boyhood, 2014)

12년이라는 시간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건 바로



수년 전 쯤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던 실제 12년 전의 뉴스 한 토막은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이 정말 기대된다는 생각을 가질 수 밖에는 없었던 뉴스였다. 에단 호크와 함께 한 비포 시리즈와 '웨이킹 라이프 (Waking Life, 2001)'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리차드 링클레이터가 또 한 번 에단 호크와 함께 촬영에 들어간다는 소식이었는데, 한 소년의 성장기를 무려 10년이 넘는 실제 시간을 들여 촬영하겠다는 놀라운 소식이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잊혀졌던 이 소식은 실제로 2014년 완성된 작품으로 극장 상영을 하게 되었고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이 형식적 기대감과 별개로 그의 최근 작이었던 '비포 미드나잇 (Before Midnight, 2013)'을 인상 깊게 본 터라 이 작품 '보이후드'는 극장에 가는 발 걸음 부터 몹시 두근거렸다. 과연 리차드 링크레이터는 12년이라는 긴 시간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 IFC Productions. All rights reserved


리차드 링클레이터가 12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조금씩 만들어 온 이 '진짜' 성장담. 작은 의미로는 한 소년, 더 큰 의미로는 한 가족의 성장담을 담은 이 영화는 무엇보다 그 세월 속의 평범하고 보편적이지만 소중한 일상 들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3시간에 달하는 러닝 타임이지만 영화가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요, 오히려 12년이라는 긴 시간을 3시간에 나누어 담기엔 숨 가쁘기 까지 하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무엇보다 감독은 시간의 흐름을 일부러 표현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관객에 이 압축된 3시간 동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12년이라는 세월을 문득 돌아보도록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최대한 배제하려고 하고 있다. 즉, 보통의 영화가 사용하는 '몇 년 후'의 자막은 쓰지 않을 뿐더러, 마치 우리가 실제 삶에서 10여 년 전을 추억하며 '그 때가 정말 엇 그제 같은데..'라고 얘기하는 것과 같은 감정이 들도록, 놀라운 3시간의 압축 물을 만들어 냈다. 이 것만으로도 '보이후드'는 놀라운 3시간의 기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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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후드'를 통해 새삼 느꼈던 감정은 최근 들어 종종 작품성 있는 영화들을 볼 때 느끼게 되는 것과 같은 감정이었는데, 내가 너무 일반적인 영화의 흐름 혹은 템플릿에 익숙해져 영화적인 선입견이 너무 많아졌다는 것이었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운전하는 장면을 보다가 조금이라도 부주의한 장면이 나오면 아마도 사고로 이어지겠지 라는 생각에 긴장감이 절로 발동하고, 비슷한 이유들로 기존의 영화적 방식에 익숙해져 나도 모르게 다음을 유추 (결국엔 착각)함으로 인해 미리 몇 가지의 결과를 대비하게 되는 습관 말이다. '보이후드'를 보면서도 그런 장면들이 여럿 있었는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리차드 링크레이터는 이런 순간들을 그리면서 그 어떤 자극적인 사고나 극적인 요소로 이끌지 않고 있다. 글의 서두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그저 일상, 일상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매일 살고 있는 일상 말이다. 영화는 이 일상을 묘사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시종일관 특별함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냥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덤덤히 지켜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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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0년 넘는 시간의 일상을 늘어 놓는 것 만으로도 사실 충분히 인상적인 결과물일 것이다. 하지만 '보이후드'가 정말 대단한 영화라는 것은 후반부 리차드 링크레이터가 드디어 본인이 전하려는 메시지를 꺼내 들었을 때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들을 보여주기만 했던 그는 주인공 소년이 다 커서 부모의 곁을 떠날 즈음이 되자, 하나 씩 감정이 심하게 동요할 만한 장면들을 선사한다. 스포일러 랄 것도 없지만, 즉 알고 있어도 이 장면에서 이 대사를 들었을 때 그 누구도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직접적인 이야기는 피하고 말하자면, 부모라는 존재에 대해 새삼스럽지만 다시금 진심으로 돌아보게 만드는 순간을 담고 있으며, 아마 내가 부모였다면 그 장면에서 더 큰 감정적 공감으로 인해 더 많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싶다 (이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참 인상적이었다. 패트리샤 아케이드의 연기도 정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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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실 더 놀라웠던 것. 마치 엄청난 반전 영화의 끝에 그 반전의 내용을 알았을 때 만큼의 충격을 받았던 소름 돋는 순간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사실 난 앞서 이야기한 부모 곁을 떠나는 주인공의 대화 시퀀스에서 영화가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이후의 한 시퀀스를 더 준비한 리차드 링클레이터는 비로소 본인이 말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전했다. 이 영화 감독이 무려 12년이라는 긴 시간을 들여, (아마도) 쉽지 않았을 제작과 촬영을 거쳐 끝에 하고 싶었던 말은 놀랍게도 '순간' 이었다. 12년이라는 세월을 실제의 시간으로 촬영하고 나서야 들려준 해답이 순간 이라니. 아, 정말로 소리 내어 '와!' 하는 탄성이 터져 나올 정도로 올해 극장에서 느꼈던 가장 황홀한 경험이자 놀라운 순간이었다. 너무 진부해서 한 편으론 오그라들 수도 있는 결론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그 해답을 찾은 감독이 관객에게 진정성을 얻고자 긴 시간을 투자해야만 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순간이라니. 순간의 중요성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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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 직전까지의 내용 만으로도 '보이후드'는 충분히 올해의 영화 중 한 편으로 꼽히기에 충분한 작품이었지만, 이 마지막 장면 아니 순간을 통해 '보이후드'는 내게 있어 정말 중요한 영화가 되었다. 나와 같은 경험을 더 많은 이들이 하길 바라며.



1. 극 중 소년의 누나로 나온 배우 로렐라이 링클레이터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실제 리차드 링크레이터에 딸이에요. 그렇다면 영화 속 아버지로 나온 에단 호크와의 피임 관련 대화 시퀀스에서 부끄러워서 얼굴을 못 들던 행동이 연기 만은 아니었겠네요.


2. 리차드 링크레이터의 영화 답게 영화 음악이 참 좋습니다. 극 중 밴드 활동을 하는 에단 호크가 부르거나 들려 준 노래들이 정말 좋아요.


3. 꼭 보세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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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 미드나잇 (Before Midnight, 2013)

세월의 무상함 보다는 성숙함



리처드 링클레이터와 에단 호크, 줄리 델피의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시리즈는 다른 시리즈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작품이었다. 두 작품 사이에 10년 가까운 텀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 시간을 고스란히 영화 속 인물들에게도 적용한 것이 더 큰 이유였다. '비포 선셋' 이후 다시 9년. 이들은 '비포 미드나잇'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찾아왔다. 제시 (에단 호크)와 셀린느 (줄리 델피)는 어느 덧 41살이 되었고, 관객 역시 이들과 고스란히 2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해 버렸다. 그리고 '비포 미드나잇'은 전혀 의외의 시점과 상황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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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이번에도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할 것만 같았던 영화는, 서로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자녀를 두고 함께 살아가고 있는 제시와 셀린느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리스 휴양지로 휴가를 떠나온 제시와 셀린느의 가족은 여느 부부가 그렇듯 아이들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여행지에서 만난 이들과 삶과 사랑에 대해 자유로운 대화를 하고 그리고는 정말로 오랜만에, 하지만 관객들로서는 가장 기다렸을 두 사람 만의 저녁 시간을 갖게 된다.


전작들이 그러하였듯이 '비포 미드나잇'도 이렇다 할 줄거리라고 할 것이 거의 없다.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또 한 번 이 두 캐릭터를 두고 끊임없는 대화의 대화를 이어간다. 거의 러닝 타임의 전부가 대화로만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텐데, 결코 수다스럽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아마도 그 대화의 전개 양상이나 이야기 거리가 우리도 삶에서 자주 겪게 되는 것들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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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그냥 휴양지로서 그리스라는 곳을 택한 것 정도가 아닐까 했는데, 제시와 셀린느가 나누는 대화를 쭉 듣고 있노라니 왜 그리스를 선택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비포 미드나잇'은 사랑의 근원에 대해 다시 말하고자 하는 것 같았다. 단순히 오랜 시간 사랑해왔던 둘 이 처음의 그 느낌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사랑이라는 것의 근원 혹은 그 정의에 대해 한 번 더 이야기하고자 하는 듯 했다. 한참을 육아를 위해 인생을 보내다가 오랜 만에 서로를 위한 시간을 갖게 된 제시와 셀린느는 자신들이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부터 지금 사랑해 오기 까지의 감정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다. 그리고 여느 연인들이 다툴 때 처럼 아슬아슬하게 서로의 감정을 비껴 가던 날 선 대화들은, 결국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에 까지 닿게 되고 서로의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드는 것까지 이르게 된다.


이 평범하다면 평범할 수 있는 연인들 간의 대화가 1차적으로 특별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굉장히 디테일 한 삶의 묘사 때문이었다. 즉, 평범하고 보편적인 다툼의 요소들로 인해 오히려 한참을 이야기하는 데도 집중해서 그 둘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둘째는 이 작품만이 갖는 특수성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영화처럼 아름다운 만남과 사랑을 나누었던 이들을 보았었고 또 이들과 똑같은 세월을 함께 한 관객들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나이를 먹은 이들의 대화에 빠질 수 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개인적인 이유로 너무 나도 나와 여자친구 사이의 관계를 문득 문득 떠올려 보게 만들고, 앞으로를 내다보게 만들어 더 깊이 와 닿는 대화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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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다투고 나서 해변가 카페에 앉아 나누는 이 둘의 대화는 울컥하기까지 했다. 왜 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결국 어쩔 수 없다는 것 때문 이라기 보단, 오히려 그래도 아름다운 사랑 때문이라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어찌 보면 남녀가 지내다 다투고 화해하고 하는 것이 전부인 시놉시스인데, 그 시놉시스가 얼마나 정교하게 실제 남녀 사이에 근거해서 만들어 졌던 지 나 외에도 수 많은 전 세계의 관객들이 '이건 내 얘기야' 하고 보게 될 듯 하다.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어떤 커플의 미래의 이야기이거나 과거의 이야기 임은 분명할 것이다.


세월의 무상 함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 보다는 성숙함, 부정하고 싶지 않은 성숙함을 담아낸 멋진 어느 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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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마지막 장면의 대화를 잊지 못할 것 같네요. 오래 연애를 했다 거나 오래 결혼 생활을 한 이들이라면 무언가 느껴질 수 밖에는 없는 장면이 될 거에요.


2. 어디선가 이 작품이 마지막 편이 될 것이라는 얘길 들었는데, 사실이라면 정말 안타까울 것 같아요. 제시와 셀린느가 더 나이를 먹고 등장하는 '비포 던'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말이죠 ㅠ 2020년 쯤 나올 거라고 기대해 봅니다.


3. 줄리 델피의 깜짝 노출에 여러가지 생각이 들더군요. 아마도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의도를 갖고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이 장면을 가져갔다는 생각 도요. 


4. 영화 음악도 참 좋았습니다. 국내 발매된 '비포 미드나잇' 사운드트랙에 해설지를 제가 쓰기도 했는데, 영화 만큼이나 잔잔하면서도 편안해 지는 음악들이 담겨 있어요.




5. 홍주희 씨가 번역을 맡았는데 아슬아슬한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역시 요새 유행하는 단어들이 많이 나오긴 해요.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는데 번역이 누구인지 인지할 정도이긴 했습니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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