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녀 (2010)
계급사회에 대한 쌍방향적 비아냥


임상수 감독이 김기영 감독의 원작을 리메이크 한다고 했을 때, 그리고 극장에 '하녀'를 보러 갔을 때까지도 계속 머릿 속으로 주문처럼 외웠던 것은 '김기영 감독의 '하녀'는 잊자' 였다. 대부분의 리메이크는 원작보다 좋기 어렵다는 사실을 재쳐두더라도, 김기영 감독의 '하녀'가 주었던 충격과 완성도와 그 독특함은 현대의 그 어떤 감독이 다시 만들더라도 쉽게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는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임상수의 '하녀'에 대한 좋지 않은 평들이 흘러나오는 것은, 원작의 구조만 빌려온 수준은 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쓰지는 않은 약간 모호한 지점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김기영의 원작을 기억하는 이들은 저절로 두 작품을 비교해보게 되니 아쉬움이 보일 수 밖에는 없고, 일반 관객들에게는 좀 어려워 보이는 '막장 드라마'를 보는 듯해 끝나고 나서는 허무함을 감추지 못하는 듯 했다. 어쨋든 개인적으로 임상수의 '하녀'는 김기영의 원작과는 다르다, 그러니 아예 비교를 말자 라고 수없이 되새긴 다음에 보게 된 작품이었다. 그래서인지 우려(?)와는 다르게 임상수 특유의 잘못된 사회에 대한 비아냥과 영화적인 장치들을 효과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괜찮은 작품이었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들께서는 마지막 단락으로 이동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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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의 라페스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매우 현대적인' 오프닝 시퀀스는 무언가 원작과의 거리를 두려는 감독의 의지 같아 보였다. 이 오프닝만 보고 있노라면 절대 '하녀'라는 작품을 떠올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이 죽음이 담긴 오프닝은 마지막을 위한 대구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바쁜 도시, 어떤 여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지만 사람들에게는 그저 잠깐의 이슈일 뿐, 큰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는 바로 본연의 이야기인 '하녀'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임상수의 '하녀'는 너무 노골적인 계급사회에 대한 비아냥이다. 그런데 이 비아냥은 일방적이지 않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서민이고 이들과 갈등을 겪는 자들은 지배 계급이자 부자인 것이 아니라, 주인공 역시 아파트를 전세주었을 정도로 별로 서민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 처음부터 쉽게 빠져들기 어려웠던 이유는 바로 전도연이 연기한 '은이' 캐릭터에 공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은이가 스스로 자각하는 순간은 사실상 영화가 끝나기 바로 전, 그러니까 스스로가 죽음을 선택하는 그 순간에야 비로소 이뤄졌다고 볼 수 있을텐데, 그 이전까지 은이의 행동들을 보면 단순히 남성이 그리워하는 유혹하는 여성도 아니고, 주어진 하녀일에만 열심히 하려는 일꾼도 아닐 뿐더러, 주인집을 이용해 신분 상승을 노리려는 야심찬 자도 아니다. 그런데 극중 은이에게는 이런 요소들이 미약하게 나마 중간중간 드러난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은이라는 캐릭터에게 공감을 얻지 못한 부분이었다. 

주인집에 하녀로 들어온 첫 날 부터 별로 주눅들지 않아 보이는 대범함도, 주인집 남자의 유혹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드는 모습도, 나중에 가서야 이들을 심판하고 저주를 내리고자 스스로를 산화하는 모습도 모두 갑작스러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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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방향적 비아냥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극중 은이에게서는 관객의 공감을 얻을 만한 부분이 사실상 거의 없다. 그러니까 은이 역시 비아냥의 대상이 된다. 주인집의 엄청난 부를 부러워 하는 동시에 별다른 갈등 없이 성의 유혹에 사로 잡히고(이 순간을 신분 상승을 위한 행동으로 보기에는 너무 공감대가 없다), 극중 안주인 (서우)의 대사처럼 정말 인간적으로 잘해준 안주인을 봐서라도 거부해야 했던 것이었지만, 앞서 이야기했듯 은이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주인집 남자를 받아들인다. 이렇듯 '은이'라는 캐릭터는 확실히 주인집과 마찬가지로 또 하나의 비아냥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렇듯 '은이' 역시 비아냥의 대상으로 삶으려던 것이라면, 그러니까 이런 부를 누리고는 싶지만 그러지는 못하고 이를 불평만 하는 중산층 (혹은 서민)으로 그릴려고 했다면(다시 말해 갖을 수 있어도 갖지 않은 자가 아니라, 갖고 싶지만 갖지 못해 못 갖은 자) 좀 더 확실할 필요가 있었는데 영화 속 은이는 무언가 모호하다. 그리고 이런 모호함은 주인집과 은이 사이에 놓인 늙은 하녀 (윤여정)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사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이전 김기영 감독의 '하녀'를 리메이크한 '화녀'와 '충녀'에 출연한 것으로 인해 어느 정도 작은 배역을 부여 받은 것으로만 생각했었는데, 막상 보고 나니 이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은 그가 연기한 또 다른 '하녀'인 것 같았다. 윤여정이 연기한 하녀는 '은이'가 보여주지 못한 공감대를 어느 정도 불러 일으킨다. 무엇보다 그녀의 행동과 감정선이 더욱 확실하다. 그녀는 주인집 사람들에게는 오래 일해온 만큼 깍듯이 예의를 갖춰 대하지만, 역시 오래 일해온 만큼 이들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들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며 (왜 은이에게도 계속 얘기하지 않던가), 이런 부 역시 동경하여 주인 집이 집을 비웠을 때 자신이 이 공간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 것을 충분히 누리는 모습을 보여주며, 검사 아들과 주인집에 무시 당했을 때 술취해 혼잣말 하는 장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분 상승에 대한 욕망 역시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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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무엇보다 은이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연민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연민은 은이에 대한 연민인 동시에 자기 연민의 성격이 더 크다. 은이가 주인집 남자와 관계를 갖는 소리를 몰래 듣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묘한 부러움의 정서가 담겨 있으며, 그런 은이가 큰 돈을 받게 되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는 장면에서 역시 질투 같은 것이 느껴진다. 반대로 주인집의 무서운 사람들로 인해 은이가 완전히 망가지는 모습을 보는 시선에서는 연민과 동시에 어느 편에 서야할지 고민하는 모습도 엿볼 수 있다(그런데 나 같아도 고민할 것이, 극중 은이는 주인집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비아냥의 대상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을 시원하게 선택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윤여정이 연기한 하녀는 마지막 은이가 자살을 시도하려 할 때 적극적으로 막지 않고 그저 '그냥 안하면 안돼?'라는 정도로만 이야기 하는 것으로 그친 것이다. 은이가 안타깝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은이에 대한 비아냥과 주인집 사람들과 같은 지배 계급에 대한 분노, 그리고 이런 응징에 대한 대리 만족 등 복합적인 정서가 담겨있기 때문이다(재미있는 건 극중 늙은 하녀가 은이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한 때 이 하녀를 연기했던 배우가 윤여정이였기 때문에 독특한 정서가 생겼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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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쨋든 주 비아냥의 대상인 주인집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겠다. 윤여정이 연기한 하녀 다음으로 인상적인 캐릭터를 꼽으라면 이정재가 연기한 주인남자를 들 수 있을 정도로, 작정하고 만들어진 이 계급사회의 지배 캐릭터는 친절한 듯 하지만 강압적이고, 깨어있는 듯 하지만 누구보다 꽉 막혀있는 캐릭터로 그려진다. 단순히 돈만 많은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미술 작품이나 피아노 연주)를 즐기는 듯 하지만, 오히려 이 저택에 있는 예술 작품들은 이런 허상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도구로 작용한다. 피아노 연주 역시 이들의 동물같은 본성을 숨기려는 도구라고 볼 수 있겠다. 이 캐릭터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은 역시 장모님(박지영)과의 대화 장면을 들 수 있겠다. 이 캐릭터의 정서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감히'를 이야기 할 수 있겠는데, 다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듯 보이지만 이 지배 계급에게는 뼈속부터 '감히 너희들이 나랑 말이나 섞을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정서를 갖고 있음을 이 시퀀스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마치 사극에 등장하는 왕처럼, 결혼관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내 아이는 누가 낳아도 내 아이이거늘, 누가 감히 나에게 뭐라 할 수 있느냐'라는 식의 정서.

비아냥의 주 대상인 만큼 임상수는 이들 가족을 (특히 이정재를) 깍아내리는 대에 주저함이 없어 보인다. 불타는 은이에 놀라 당황하며 서둘러 집을 빠져나가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나, 영화의 마지막 이런 일을 몇년 전에 겪었음에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오히려 더욱 추해지고 가짜스러운 모습은, 왜 이들이 '정말 무서운 사람들'인가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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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수의 '하녀'를 보면서 눈여겨 본 것은 역시 세트와 구도 였는데, 세트는 '계단'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인상적으로 사용되지는 못했으며, 여러 공간이 등장하지만 로비에 가깝도록 큰 거실이 '와, 넓다'라는 느낌을 준 것 외에는 큰 효과를 주지 못한 것 같다. 김기영 감독의 가장 큰 장기 중 하나가 미장센이라는 점을 미뤄봤을 때 아무리 비교안하려 해도 이 세트를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 부분이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카메라 앵글은 의도적인 샷이 굉장히 많았다. 일단 인물을 정확히 중앙에 두고 좌우의 여백을 크게 두는 앵글이 상당히 많았고, 무엇보다 한 샷을 여러개의 공간으로 나눠서 사용하는 구도를 자주 볼 수 있었다(그와 마찬가지로 이런 구도를 사용할 때는 포커스 인과 아웃 방식이 매우 자주 사용되고 있다). 마치 그래픽 노블을 보듯 공간을 통해 정확히 선을 그어 인물과 인물을 나누는 구도 등은 영화가 말하려는 메시지의 이해를 돕는 하나의 도구로 적절히 사용되고 있다. 그 외에 윤여정이 술에 취해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는 장면에서의 흔들리는 카메라 앵글도 딱 한번 뿐이어서 그런지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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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수의 '하녀'는 김기영의 '하녀'를 인식하지 않으려는 시도는 좋았지만, 좀 더 확실했더라면 좀 더 좋은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임상수 감독 특유의 풍자와 비아냥이 부족한 스릴러에 오히려 잠식 당하는 느낌이 있었지만, 그래도 윤여정의 캐릭터를 중심으로 본다면 좀 더 괜찮은 드라마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도 나쁘지 않았지만, 아직 김기영 감독의 '하녀'를 못 본 이들이라면 반드시 보길 바란다. 


1. 아드메치.
2. 첫 시퀀스에 나온 일산 라페스타는 예전 회사가 있던 곳이라 감회가 새롭더군요. 더군다나 극중 전도연이 올랐던 그 옥상은 바로 예전 저희 회사 건물이었던 것 같아요.
3. 쥐는 나오지 않지만 주인집 거실에서의 마지막 시퀀스는 약간 기괴한 것이 원작을 살짝 떠올리게 하더군요.
4. 처음 캐스팅 소식을 들었을 땐 하녀 역할로 오히려 서우가 더욱 어울린다는 생각이었는데, 막상 영화를 보고나니 임상수의 '하녀'에서는 안주인 역할에 서우가 더욱 어울렸던 것 같아요.
5. 예전에 심혈을(?) 기울여 썼던 김기영 감독의 '하녀' DVD 리뷰 입니다. http://www.realfolkblues.co.kr/1049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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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안개와 굴레에 관한 담론


<질투는 나의 힘>을 연출했던 박찬옥 감독의 7년 만의 신작입니다. 신작을 만나기 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개인적으로는 전작보다 <파주>가 더 취향에 맞았던 것 같습니다(어떤 인터뷰를 보니 전작보다 더 대중적인 요소에 신경을 썼다고 했는데, 사실 그건 어느 정도 수긍이 되기도 하지만 애매한 부분도 있구요 ;;;). <파주>는 이선균과 서우라는 배우들 때문에도 기대를 갖게 되었던 영화였습니다. 특히 서우의 경우 <미쓰 홍당무>를 통해 주목할 만한 연기를 선보였던터라 더욱 기대가 되었는데, 전작과는 전혀 다른 캐릭터라 과연 이런 어두운 캐릭터는 어떻게 소화해 낼지가 궁금하기도 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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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는 안개 자욱한 파주를 배경으로 시작됩니다. 이 영화는 제목을 '파주'가 아니라 '안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파주와 안개는 비슷한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파주'는 '밀양'처럼 미지의 공간은 아니에요. 어찌되었든 아주 멀지는 않은 곳에서 오랜 시간을 살았던터라 그 지명이 낯설지 않은 것도 있고 대략의 동네 분위기도 알고 있었으니까요. 영화에서 이 파주란 공간은 하나의 굴레처럼 작용합니다. 극중 주인공들은 이 파주에 자의든 타의든 오게 된 뒤, 역시 자의로 혹은 타의로 떠나게 되지만 그 이별이 영원하지는 못합니다. 눈에는 보이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안개처럼, 떠나려고 하지만 결국엔 떠날 수 없는 커다란 굴레 같은 것이지요. 은모(서우)가 파주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쉽게 생각하면 단순히 그 곳에 부모님이 남겨준 집이 있어서, 혹은 친구가 거기 있어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상 떠나지 '못'하고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건 바로 어쩔 수 없음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됩니다.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어서 무작정 인도로 여행을 떠났을 만큼 남아있고 싶지 않은 곳이었지만 돌아와서 왜 갑자기 떠났는지를 설명해야 된다는 부담감을 무릎쓰고라도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데에는 분명, 형부 중식(이선균)에 대한 미묘한 감정 만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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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를 얘기하면서 이 영화의 홍보 방식에 대해 문제를 삼은 적이 있는데, 왜냐하면 이 영화를 형부와 처제의 불륜으로 인한 격정멜로로 포장하여 홍보했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이 홍보방식은 분명 받아들이는 이들을 생각해보았을 땐 문제가 있는 방법이었지만, 말자체를 따지고보면 전혀 틀린 말은 아니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여러가지 굴레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어쨋든 '멜로'영화라고 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형부와 처제에게 묘한 감정이 생긴다 하더라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불륜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고(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과는 다른 의미로요), 이 미묘한 감정 사이에는 각 인물들마다 개별적으로 생각해볼 만한 큰 사건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확실히 단순 멜로로 보기 어려운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멜로적인 스토리 외에 영화에는 철거민의 이야기가 비중있게 그려지는데, 이 부분의 비중에 대해 감독과 스텝들도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네요. 확실히 이 부분의 비중이 커지면서 큰 멜로의 줄기에서 보았을 때 이야기가 분산되는 경향이 생긴 한편(이에 따라 호불호가 생길 수도 있겠구요), 최근 벌어졌던 용산참사를 떠올리게 하면서 정치 사회적인 생각들도 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거든요. 그런데 이 영화는 분명히 얘기하지만 하나의 배경과 캐릭터를 설정하기 위한 소스로 철거민 이야기가 존재할 따름이지 이것이 주가 되는 스토리는 아닙니다. 이런 뉘앙스는 철대위 대책위원장을 맞고 있는 극중 중식의 태도에서 드러나는데, 중식은 젊었을 때 대모를 시작하게 된 것도 정치적 의도가 강해서라기 보다는 여자 선배의 모습에 반해 시작하게 된 점이 분명 있었고, 철거민이 아니면서 철대위를 맞게 된 것도 생존을 위한 사투의 측면보다는 자기 위안적인 성격이 강한 편이거든요. 그래서 영화 후반 은모가 '왜 이런 일들을 하세요?'라고 했을 때 중식의 대답은 흥미로웠습니다. 결국 중식에게 철대위는 또 하나의 파주처럼 위안이자 상처인 굴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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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옥 감독의 전작 <질투는 나의 힘>이 대사와 관계에서 오는 미묘한 갈등으로 풀어갔던 작품이라면, <파주>는 의외로 많은 대사보다는 이미지로 풀어가는 작품이었습니다(그래서 몇몇 장면에선 많은 분들이 이름 때문에 해깔리시곤 하는 박찬욱 감독의 작품이 연상되기도 했네요). 안개 자욱한 첫 장면도 그렇고 방안에 누운 중식을 바라보는 카메라 앵글도 움찔할 정도였으며(이런 장르에서는 잘 쓰지 않는 조금 다른 앵글이었거든요), 안개처럼 표현된 거친 화면의 입자들까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이미지로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영화였고, 대사가 있을 때 보다는 오히려 없을 때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장면은 영화 후반부 철거현장으로 돌아온 은모가 마치 유령처럼 대치 건물로 들어가는 컷트였는데, 약간의 슬로우 모션과 진짜 유령처럼 주변의 상황과는 아랑곳 하지 않고 유유히 건물로 향하는 은모의 모습은 흡사 알폰소 쿠아론의 <칠드런 오브 맨>의 그 유명한 롱테이크 장면을 떠올릴 정도로(허름한 건물로 걸어들어가는 장면이 하나의 테이크로 이루어져서 더욱 그렇게 느꼈던 것 같네요)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었습니다(이 장면을 다시 보기 위해서라도 한 번쯤 극장에서 다시 보고 싶을 정도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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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에서 중식 역할을 맡은 이선균을 보면서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의 한석규가 떠올랐습니다. 무언가 본심을 말하지 못하고 그냥 혼자서 웅크리고 터트리지 못하는 것 때문인지도 모르겠고 다른 한 편으론 이제 이선균이라는 배우에게서 특별함이 느껴지기 시작해서 인지도 모르겠네요. 확실히 중식이라는 인물은 이선균이 연기하면서 좀 더 멋진 캐릭터라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파주>에서 여전히 돋보이는 배우는 역시 서우입니다. <미쓰 홍당무>를 보며 '야, 저렇게 잘 우는 연기를 하는 여배우가 또 있을까?'싶었었는데, <파주>에서도 그녀의 우는 연기는 역시나 독보적입니다. 무언가 서러움이 붇받치면서도 연기가 아니라 진짜 우는 것 같은 착각에 막 어깨를 토닥여 주고 싶을 정도랄까요. 국내에서 중고생부터 성인까지 모두 어색하지 않게 소화할 수 있는 여배우를 꼽으라면 다시 한번 서우를 주저없이 꼽을 수 있을 것 같네요.

이선균, 서우의 경우 어느 정도 기대를 하고 갔던 경우라면 은모의 언니이자 중식의 아내인 은수 역할을 맡은 심이영의 연기는 기대하지 않았던터라 더 인상적인 경우였는데, 굉장히 낯설지 않은 얼굴이면서도 막상 따져보니 제대로 작품을 본 적은 없었던 그녀의 연기는, <파주>의 작은 발견 중 하나였습니다. 그녀의 후속 작품을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1. 철거민 동료들 가운데 <똥파리>에 출연했었던 정만식씨의 모습도 반가웠습니다.
2. 이경영씨 역시 특별출연하고 있는데 거의 대사 없는 캐릭터였음에도 그 날카로운 눈빛 만큼은 기억에 남네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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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영화시상식 이라는 것이 어차피 주최하는 신문사나 주요 스폰서에 구미에 맞게 진행되는 터라 크게 관심을 갖는 편은
아니지만, 도대체 내가 보았던 영화들 가지고 상을 주는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이상했던 '청룡 영화제'가 워낙에
실망스러웠기 때문에 '대한민국 영화대상'을 보는 마음은 한결 편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아카데미도 그렇고, 사실상 모든 시상식이 주최측에 입맛에 따라 결정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국내 시상식의 경우 그 주최측에 판단에 문제가 많다는 것이, 항상 문제다;)


개인적으로는 작은 영화들이나 소외된 영화들에 특히 관심이 많기 때문에 어차피 주목 받는 영화들만의 잔치인
국내 영화 시상식이 취향에 맞지는 않지만, 최소한 대중적인 면이라던가 여러 사람이 공감할 만한 수상이라면
크게 불편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의지도 없는데, 그러면에서 제 7회 대한민국 영화대상은 대부분 수긍할 만한
수상이었던 것 같다. <추격자>의 스윕은 어느 정도 예상되었던 바. 그럼에도 불안했던 것은 <추격자>라는 영화가
이른바 나이 많은 심사위원들에 구미에는 그리 땡기는 영화가 아니었기 때문에 혹시나...하는 불안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는데(뭐 이미 이런 불안감이 현실로 들어난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최우수작품상을
비롯해, 감독상, 남우주연상, 신인감독상, 각본/각색, 편집, 조명 등 대부분의 주요상을 <추격자>가
휩쓸고 말았다. 김윤석의 수상 멘트는 이미 여러번 들었던 것이긴 했지만, 말미에 아내나 가족 등이 아닌
파트너였던 '하정우'를 언급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여우조연상의 경우 개인적으로는 <우.생.순>의 김지영 수상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이건 이 영화에 대해서 어느 정도
실망했던 것이 작용했다고 봐도 되겠다. <놈놈놈>의 경우 MBC와는 사이가 별로인지 주요상의 노미네이트도
되지 않았으며, 방준석은 <고고 70>으로 음악상을 수상하였다.

여러가지 수상 중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누가 뭐래도 여우주연상 부분이었다.
사실 올해 여우주연상은 모조리 <미쓰 홍당무>의 공효진이 수상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한해였는데,
역시나 이 영화나, 그녀의 연기나, 심사위원들이 좋아하는 취향이 아닌터라 철저히 외면 당했었고,
이 날도 예쁘게 차려입은 손예진을 보면서 '설마.....'하는 걱정을 할 수 밖에는 없었다.
뭐랄까, 배우의 수상 소감을 들으며 심하게 공감해 눈물 마저 글썽거렸던 적은 아카데미에서 포레스트 휘태커가
주연상을 수상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공효진의 경우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여자 신인상을 받은 서우와 감독인 이경미는 정말로 펑펑 울었는데, <미쓰 홍당무>를 올해 최고의 한국영화 중
한편으로 꼽는 나로서도, 왠지 모르게 공효진의 수상이 남다르게 다가왔다. 무언가 금단의 벽을 넘는 듯한
승리가 엿보여서였달까.

어쨋든 '단상'이라고 했으니 여기서 마쳐야 겠다.



1. 윤정희씨는 등장할 때마다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2. 우리나라는 정말 제대로 된 시상식을 할 수 없는 것일까. 상을 타는 사람만 참석을 하고, 못타는게 확정되면
    식이 끝나기도 전에 집에 가버리는 일들이 언제까지 반복될지.
3. 신성일씨의 파마는 조금 쇼킹했다.
4. 박철민씨의 시상 소감은 나름 신선했다!
5. 이제 '비'와 여배우들을 오가는 카메라 워크는 식상하다.


미쓰홍당무 여우주연상/신인여우상 수상 기념 리뷰 다시보기!



미쓰 홍당무 (2008)
궁상이라 욕해도 좋다!


개봉 전 부터 제법 화제가 되었던 <미쓰 홍당무>를 오늘 드디어 감상하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가 왜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되었는지 많은 분들이 이미 아시다시피, 박찬욱 감독 제작작품이라는 점 때문이었죠. 일반관객들에게는
<올드보이>의 박찬욱 감독이 제작한 작품이다라는 걸 마케팅 측면에서 강조하여 홍보하고(전 근데 아직도
박찬욱 감독이
대중적인 홍보 포인트가 된다는 현실이 아이러니하게만 느껴집니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흥행 실패한 이유는
관객들이 박찬욱이라는 감독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기대하는 바가 전혀 달랐음으로 벌어진
현상이라고 생각되거든요. 
<복수는 나의 것>이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올드보이>보다는 더 박찬욱스럽다고 생각되는데, <올드보이>의 엄청난 성공이 그를 너무 대중적인 감독으로 많은 이들이 오해하도록 만든것이 아닌가 싶거든요 ㅎ),
영화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역시 박찬욱 감독이긴 하지만 그 이름 자체가 아니라, 박찬욱 감독이 오랫동안
숨겨왔던 비밀병기를 드디어
꺼낸다는, 신인 이경미 감독에 대한 기대감으로 주목을 받았던 영화였죠.

개인적으로는 처음에는 아주 큰 기대를 가졌었다가 막상 포스터 등이 공개되던 시점에서는 그저 그런
코미디인가 보다,
즉 안면 홍조증이 주가 되는 코미디인가 보다 해서 살짝 기대를 접었었는데, 이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안면 홍조증은
마치 주인공이 안경을 썼다 안썼다 정도의 차이일뿐 그저 캐릭터를 소개하는 하나의
소재일 뿐이더군요.
<미쓰 홍당무>는 정말 오랜만에 대한민국에서 만나는 캐릭터가 빛나는 영화이며,
 마치 우디 알랜의 영화처럼 수다에서 오
는 재미도 느낄 수 있고, 찰리 채플린의 영화처럼 슬랩스틱
코미디서부터 결국엔 유쾌한 웃음과 씁쓸한 웃음마저
동시에 느껴지는 보석과도 같은 2008년
한국영화의 수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장면에서 두 배우의 슬랩스틱 코믹연기는 정말 빛이 나더군요. 왠지 '허걱'이란 통신용어를 몸으로
시각화 하는
 느낌이었달까요)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공효진의 인상적인 표정으로 떡하니 채워져있는 포스터가 인상적인 <미쓰 홍당무>는
정말 리얼한
캐릭터 영화입니다. 일단 공효진이 연기한 주인공 '양미숙'의 캐릭터는 한국영화에서는 보기 드문
여성 캐릭터이자, 오
랫동안 기다렸던 본격적인 캐릭터랄까요. 안면 홍조증으로 인해 시도때도 없이 붉게
변하는 얼굴 빛을 재쳐두더라도,
그녀의 다양한 표정연기와 표정연기에 가려 도드라지진 않지만 몸을 쓰는
연기에서도 '양미숙'이라는 캐릭터가 얼마나 그
 자체로 독보적인 존재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양미숙'은 캐릭터 영화의 주인공 답게 마치 히어로 영화의
히어로처럼 의상도 거의 저 회색 코트의 단벌로
등장하고 있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양미숙'이라는 캐릭터가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바로 그녀의
대사에 있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 영화는 우디 앨런의 영화를 연상
시킬 만큼
(실제로 이경미 감독은 우디 앨런의 영화와 찰리 채플린의 영화 같은 분위기를 염두에 두었었다고 합니다),

속사포 같은 대사들과 굉장히 잡다한 대사들이 가득한데, 바로 그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수다'라는 것의 미덕은 단순히 그 양이 많아서 좋은 것이라기 보다는, 그 쓸때 없어 보이는 많은 말들 가운데
(나름) 논리적인 바탕이 깔려있어야 한다는 것을 들 수 있을텐데, '양미숙'의 말들을 듣다보면 굉장히
많은 말들을 하고
또 반복해서 말하고 있지만, 그 안에는 철저히 양미숙 만의 논리적인 바탕을 깔고 있는
대사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개인적으로 좋았던 건 바로 그 '잡다함' 때문이었는데, 보통 일반적인
캐릭터의 대사에서는 좀 더 일반적이고
논리적으로 보이기 위해 생략하고 절제했던 말들을 최대한
짜르지 않고 확장한 듯한 대사라고 할까요. 시시콜콜 구차한
것을 다 들먹여가며 남들은 신경쓰던 안쓰던
자신만의 이야기를 끝내고야 마는 대사가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물론 여기에 가장 큰 공은 공효진씨의 맛깔스런 대사 연기에 있다 해야겠죠.



(<추격자>에서 하정우가 연기한 '지영민'이 올해 한국영화 상반기의 캐릭터였다면, 후반기를 대표하는 캐릭터는
누가 뭐래도 공효진이 연기한 '양미숙'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양미숙'만으로도 괜찮은 캐릭터 영화가 됐을 법한 <미쓰 홍당무>에는 이 외에도 매력적인 조연 캐릭터들이 몇몇
더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띠는 캐릭터는 신인 배우 서우가 연기한 '서종희'라는 인물입니다.
극중 이종혁이 연기한 서종철의 딸로 등장하는데, 기존 한국영화에서 교복을 입고 등장하는 학생 캐릭터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독특한 아우라를 선보입니다(교복입은 학생의 대부분은 침 뱉는 불량 학생 아니면
뭔가 사연있는
아리따운 학생이었죠. 아, <좋지 아니한가>에서 황보라가 연기한 캐릭터는 열외로 해야겠군요.
하지만 이 경우는 학교
보다는 집이 주배경이 된 영화였기 때문에 정확한 비교군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신인배우 서우의 경우 기존에 몇몇 CF를 통해 코믹함과 세련된 이미지를 동시에 갖고 있었던
배우였는데,
일단은 이렇게 키가 작은 배우인지 이번 영화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고(극중 공효진과 키 차이가
정말 학생과 선생님처럼
나는걸 보고는 처음엔 일종의 카메라 페이크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풀샷을 보니
아니더라구요;), CF 속에서의 진한
화장을 한 모습만 보았던터라 이렇게 화장기 하나 없고 오히려 주근깨와
다크써클까지 있는 얼굴을 보니 같은 사람인가
싶기도 하더라구요.

사실 이런 영화에서 이런 요상한 캐릭터는 그냥 요상함만으로 내세우기만 하는 경우가 많은데, 서우가 연기한
'서종희'캐릭터는 '양미숙' 못지 않게 매력적인 캐릭터로서 신인배우 서우의 연기력도 엿볼 수 있기도 했습니다.
특히 앞서 언급했던것 처럼 CF속의 그 인물과 같은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완전히 중학생스러운 그 표정들,
그리고 우는 장면에서는 정말 여배우임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완전히 표정연기함에 있어 '놔버린' 그 연기가
가장 인상에
남았던 것 같습니다. 사실 첨에 CF에 등장할 때만 해도 그저 요상한 춤을 추는 '무슨 녀'로 잠시
주목 받고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했었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나니 앞으로도 상당히 기대가 되는 신인 배우로
손색이 없을 듯 합니다.




(공효진의 열연이 예상된 수순이었다면, 서우의 발견은 <미쓰 홍당무>의 가장 큰 보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신인배우인 서우의 얘기가 나온 김에 이 영화를 통해 인상깊은 연기를 펼친 또 한명의 신인배우 황우슬혜의 대한
얘기도 마저하고 넘어가야 겠네요. 극중 러시아어 교사 '이유리'역할을 맡은 황우슬혜 역시 강한 캐릭터가
버티고 있는
이 영화에서 빛을 잃지 않는 열연을 펼치고 있습니다(개인적으로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찾아보니 어디서도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네요 ;;). 내숭 가득한 '이유리'역할을 소화하기에 그녀의
청순한 마스크는
확실히 큰 도움이 되고 있는 듯 합니다. 이 외에 상당히 순수함을 넘어서 어리숙해 보이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게 밉지만은 않게 표현된 것은 아마도 그녀의 모습과 연기가 큰 몫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녀는 박찬욱 감독의 신작 <박쥐>에도 출연을 하고 있는데, 독특한 이름과 더불어 앞으로 역시 기대가 되는
신인 배우 중 한 명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아마도 많은 남성 관객분들은 벌써부터 '황우슬혜'라는 이름을 외우셨는지도 모르겠군요 ㅎ)


(영화의 구체적인 내용에 관한 언급은 아니지만, 전체적인 것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전 사실 이 영화가 단순 코미디가 아닐까 하는 선입관이 있었는데,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마냥 웃을 수 만은 없는
씁쓸한 웃음이 동시에 드는 코미디 영화더군요. 그렇다고 본격적인 블랙 코미디는 아니지만요.
일단 영화는 이른바 '왕따'로 오랜 세월을 살아온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안면 홍조증으로 주목받고
주변인들에게
비호감으로 낙인아닌 낙인이 찍혀 학생 시절이나 선생님이 된 지금이나 따돌림을 당하는 양미숙의
캐릭터를 그리는
태도나 주변인들의 시선을 그리는 방식이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지점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일반적으로 루저나 왕따(이 표현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요)가 주인공이 영화에선, 주인공이 이를 극복하고 결국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성공을 거두는 것으로, 즉 루저는 끊임 없는 노력을 통해 자신의 분야에서 1등이 되고,
왕따는 우여곡절 끝에 모든 이들과 친구가 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은데, 개인적으로 이런 전개는
신파극 중의
신파극 보다도 뻔하다고 느껴지기에 별다른 흥미나 재미도 느끼지 못하고, 더나아가
교훈적인 면에서는 더더욱
부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래서인지 <미쓰 홍당무>에서 이들을 그리는
방식은 참 마음에 들더군요.


사실 본래 이 리뷰의 제목도 보통 같으면 '궁상이라 욕하지 마라'라고 했겠지만,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충실히
전달하는 면에서 접근했을 때는 지금처럼 '궁상이라 욕해도 좋다'가 더 맞다고 생각되더군요.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양미숙이 이루고자 하는 바는 하나도 이루어지지도 않고 피부과를 다녔지만 안면 홍조증이 결국 낫는 것도 아니죠.
영화의 마지막에 보면 결국 자신과 비슷한 동료 한 명을 더 얻은 것 외에는 이렇다할 긍정적 변화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죠. '서종희'역시 축제 무대에 올라 공연까지 마쳤지만 그렇다고해서 친구들 사이에서
갑자기 '절친'이
됐을리는 만무하고 계속 찐따나 찐따 애인으로 놀림거리가 됐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맞을 듯 합니다.


이 영화가 좋았던 건 포스터에 있는 '내가 뭐 어때서?!'라는 문구처럼 루저인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네들의 방식으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닌, '내가 뭐 어때서?!'라면서 자신들 만의 방식으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숨기지 않고
끝까지 편견과 오해와 싸워가는 모습이 더 보기 좋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외롭게 지내왔을 그들이 왜 사랑받고
관심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겠느냐만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지지 않겠다' '나는 이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라는 식의 오기가 발동하게
되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이 영화가 씁쓸했던 건 결국 자신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는
사회와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사건으로 마무리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구요.

감독은 의도적으로 외모나 편견들만으로 사회가 소수를 왕따시키는 현상에 대해 비판적인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여러 장면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나 집요하게 이들을 무시하는 학생들의 대사라던가,
본인들은 원하지도
않았는데 '찐따와 찐따애인'이라고 이름까지 붙여서 신청해 놓고는, 시간내에 자리에
나타나지 않자 계속 방송으로
이들을 비꼬듯 반복하는 장면에서는, 이들을 왕따로 만든 다수의 악마적 횡포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단체로 리본 달고 춤을 췄던 여학생들의 미소 띤 얼굴들이 결코 예뻐보이지 않았던 것
또한 이런 면에서 가능한
연출이었죠.



(청각 자료실(?)이라고 해야되나요? 여튼 이 공간에서 이 둘이 등장하는 장면과 후에 모든 인물이 동시에 등장하는
 장면은 한국 영화사에 남을 법한 장면이 아닐까 싶네요)

이 영화가 왜 18세 관람가를 받았는가 의아해 하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는데, 폭력적이나 선정적인 장면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아, 그림으로 등장하기도 하는군요 --;), 마치 영화 <클로저>의 경우처럼 음란한 채팅이나
<카마수트라>에서 인용한듯한 성적인 표현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런 것에 비해 실제로 시각적인 18세 관람가 장면은 없어서 아쉬운(?)분들도 있을 듯 하네요 ㅎ

개인적으로 극중 양미숙+서종희와 이유리가 채팅을 하는 장면에서는 <클로저>도 그렇고, 미란다 줄라이 감독의
<미 앤 유 앤 에브리원>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역시 이 가운데 가장 재미있었던 건 러시아어를 이용한
개그였습니다.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게 참 단순하지만 그 발음 때문에 웃지 않을 수 없더군요.

이 영화가 별 세 개 정도에서 별 개를 넘어 다섯에 가까운 영화가 된 결정적인 이유는 후반부에 등장하는 바로 그
'청각 자료실(?)'에서 벌어지는 시퀀스 때문이었습니다. 극 중 주요 모든 인물들이 드디어 한 자리에 모여 서로
거침없이 의견교환을 나누는 이 시퀀스는 박찬욱 감독이 제작과 시나리오를 맡은 작품이기 때문에 그의 전작인
<친절한 금자씨>에서의 폐교 장면을 떠올리기도 했는데, 이 시퀀스는 정말 대박이더군요.
이 공간만의 특성을 제대로 이용한 소소한 유머도 그렇고, 마치 법정에 선듯 서로가 서로를 변호하고 주장하는
이 장면은 마치 최근 김기덕 감독의 영화 <비몽>에서 갈대밭 씬이 그랬던 것처럼, 단 한 장면에 굉장한 에너지가
담겨있는 멋진 장면이 아니라 할 수 없겠습니다. 특히 이 장면이 더욱 그럴듯 하고 단순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데에는
종철의 아내 역할을 맡은 방은진씨의 포스가 크게 작용한 점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구요. 방은진씨가
묵직하게 무게를
잡고 있던 탓에 이 장면이 왠지 모르게 이상한 아우라를 갖게 된 부분도 분명 무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미쓰 홍당무>는 이 시퀀스 하나 만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기억될 영화가
될 것 같습니다.




(공효진의 섬세한 표정연기는 그야말로 최고입니다. 저 아기자기한 눈코입과 볼이 만들어내는 표정연기는
양미숙이라는
캐릭터를 만나 120% 결과물을 쏟아냅니다)

영화를 보기 전만 해도 '올해의 한국영화다' '상반기에 <추격자>가 있었다면 후반기엔 단연코 <미쓰 홍당무>다'
라던지,
'박찬욱 감독이 밀어주는 신인 감독은 역시 다르다' 등등의 표현들에는 거품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어느 영화나 그렇겠지만 개봉 전 홍보 때는 다들 조금씩 과하게 부풀리기 마련이니까요.
그래서 <미쓰 홍당무>도
너무 박찬욱이라는 이름을 빌려서 거대 포장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영화를 보고나니 이런 표현들이 결코
크게 과장된 것 만은 아니었음을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공효진을 비롯해 신인배우 서우와 황우슬혜, 그리고 짧지만 강한 임팩트를 보여준 방은진씨, 그리고 리뷰에도 거의
노출이 되지 않아 살짝 미안한 마음마저 드는 이종혁씨 등 배우들의 인상적인 연기도 볼만하고, 무엇보다 오랜만에
만나는 정통 캐릭터 영화이자 코미디이며, 그 안에 쓸씁한 뒷 맛과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까지 넣어놓은 훌륭한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분명 마이너한 코드와 개성적인 분위기가 가득담긴 영화라 보는
이에 따
라서는 시종일관 집중할 수 없고 불편하게까지 느껴질지 모르지만, 이 코드에 맞는 이들이라면 보는 내내
킥킥
거리면서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닐까 합니다.

독특한 개성만큼 엄청난 흥행까지는 거두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이런 개성 강한 영화가 좀 더 한국영화계에서
대접받을 수 있는 케이스를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작은 바램을 가져봅니다.



1. 뭐 봉준호 감독이나 박찬욱 감독의 까메오 출연 이야기는 다들 너무 많이 하신터라 ^^;
2. 극중 피부과 병원에 간호원으로 나온 분은 봉준호 감독의 <괴물>에서 마지막에 대모하던 사람 중에
   멀리서 오는
괴물을 한강에서 발견하고 카메라로 촬영하던 그 분이더군요.
3. 엔딩 크래딧에 도움 주신 분들에 '류승범'씨도 있더군요 ^^
4. 음악도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서울전자음악단과 달파란이 참여하기도 했던데 너무 과하지 않은 선에서
   적절히 삽입된 것 같습니다.
5. 아마도 제가 근래 본 영화들 가운데 가장 여성적인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6. 서우씨는 본래 서종희 역할이 아니라 이유리 역 오디션을 보러 갔는데, 당시 다른 촬영때문에 교복을
    입고 오디션장에 가게 되었는데, 이를 보고 아 '서종희'역할에 딱이다 라고 생각되어 급 변경 되었다고
    하네요 ;;



 
 
글 / ashitaka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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