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 (Vicky Cristina Barcelona, 2008)
우디 알렌이 쓰는 트뤼포의 '쥴 앤 짐'
우디 알렌의 새로운 작품만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는데, 갑작스런 국내 개봉의 요상한 제목 탓에 '문제작'이 되어버린 이 영화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 영화를 보고 나니 국내 개봉 제목인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가 새삼 이상하게 느껴진 것은 물론이고, 원제인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라는 제목이 반드시 필요한 영화임을 또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국내 개봉시에는 마치 '아내의 유혹'을 연상시키려는 제목과 더불어 포스터 속 스칼렛 요한슨의 상의를 포샵으로 더 야하게 조정하는 수고까지 한 것으로 봐서, 이 영화의 주된 타겟팅을 우디 알렌의 팬들이라기 보다는 4~50대 관객들에게 맞출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뭐랄까 불륜과 권태가 주가 된 영화랄까. 이런 식으로 홍보되어도 그럭저럭 이해할 만한 영화들도 있지만, 적어도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에게 이런 대우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우디 알렌의 세계 내에서 벌어지는 그의 또 다른 이야기이며, 수다가 동반되는 동시에 그 와중에 문득문득 생각하게 하는 그 만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단번에 연상되었던 것은 프랑소와 트뤼포 감독의 1961년작 <쥴 앤 짐>이었다. 우디 알렌이 원래부터 고전적인 스타일이나 (특히 오프닝이나 엔딩 크레딧 같은 경우) 방식의 사용을 즐겼다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이 영화는 제목 부터 전체적인 구성까지 트뤼포의 <쥴 앤 짐>을 그대로 떠올리게 하는 영화다. 일단 그렇기 때문에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라는 제목이 용납 안되는 점이기도 하다. <쥴 앤 짐>이라는 제목이 그러했듯 이 영화 역시 '비키' '크리스티나'라는 인물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고 여기에 '바르셀로나'라는 배경을 노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제목은 우디 알렌 본인 스스로도 분명 <줄 앤 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하나의 표식이기도 하거니와 트뤼포가 만든 1961년작의 이야기를 21세기에 맞게 다시금 각색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사실 제작년과 작년에 영화제와 상영회를 통해 <쥴 앤 짐>을 극장에서 보게 되었을 때, 아니 보기 전에는 영화에 대한 큰 기대감이 있었다. 영화는 미처 보지 못했지만 '쥴 앤 짐'이라는 그 제목과 그 포스터는 외울 정도로 익숙한 터였기 때문에 드디어 보게 되는 영화에 대해 기대감이 클 수 밖에는 없었는데, 막상 보고 나니 기대감이 컸던 탓인지 그다지 와닿지는 않았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1961년 작이라는 세월의 텀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모든 옛날 영화들이 이런 간극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대에 기대거나 시대상을 그린 영화들 가운데는 요즘에 와서 보았을 때 그 간극을 뛰어넘기가 쉽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었다. <쥴 앤 짐>의 경우는 당시로서는 굉장히 파격적이었던 여성 캐릭터를 등장시키며 남녀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2008년에 보기에는 100% 공감하기 어려운 공기가 있었다. 영화가 별로라기 보다는 공감하기 어렵다에 가까운 느낌이었는데, 그런 면에서 마치 <쥴 앤 짐>을 21세기 버전으로 각색한 듯한 느낌의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는 각 캐릭터들에게 (적어도 줄과 짐 보다는) 더 공감할 수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 자체에 더 깊게 빠져들 수 있었다.
<쥴 앤 짐> 얘기를 꺼낸 김에 좀 더 해보자면,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는 누구인지 모를 제 3자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되는 점이나 그 내레이션의 어투나 화법 모두 <쥴 앤 짐>을 연상시키게 한다. 휴양지가 등장한다는 점도 그렇고 관계설정이 조금 틀리기는 하지만 한 남자를(여자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복잡한 남녀관계라는 점도 그렇고, 무엇보다 자전거 타는 장면도 그대로 나온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또 다른점은 러닝타임내내 거의 잠시도 쉬지 않고 배경음악이 깔린 다는 점이다. 재미있는건 거의 내내 깔려있음에도 어느 때는 음악이 인식되었다가 또 어느 때에는 잊혀졌다가를 반복한다는 점이다.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의 기본 구조는 아무래도 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굉장히 성격이 분명하다. 내레이션을 통해 직관적으로 설명하는 것처럼 각 캐릭터는 말그래도 완전히 '캐릭터'화 된 인물들로서 구분이 쉽고 각각의 개성을 갖는다. 그렇게 배경을 깔아놓고는 이 인물들 간에 어떤 관계들이 형성되고 얽히는지를 영화는 서서히 풀어나간다. 이들의 관계를 쉽게 설명하자면 '삼각 혹은 사각관계' 정도로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이들이 맺고 있는 관계는 이런 개념보다는 오히려 '굴레'같은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다. 크리스티나는 굉장히 남녀 관계에 있어 자유스러운 것처럼 보이지만 한 편으론 본인 스스로 본인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굴레에 갇혀있어 오히려 자유롭지 못한 일들을 겪게 되며, 하비에르 바르뎀이 연기한 안토니오 역시 예술가라는 캐릭터답게 굉장히 자유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그가 이로 인해 겪게 되는 일들이 마냥 자유롭게만 보이지는 않으며, 반대로 가장 일반적인 캐릭터라고 할 수 있는 비키의 경우 역시 '이러면 안된다는' 또 다른 굴레에 얽매여서 자신의 감정에 조심 또 조심을 하게 된다.
예술가라는 직업은 이런 그들의 자유로움을 좀 더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도록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바르셀로나라는 지역적 배경 역시 이들의 자유로운 관계들을 가능토록 하는 광대한 베이스로 작용하고 있기도 하다. 관객들은 보는 내내 바르셀로나에서 하비에르 바르뎀 같은 남자를 만난다면 혹은 페넬로페 크루즈 같은 여자를 만난다면 저럴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되니 말이다.
개인적으로 포스터에 제목처럼 비키 역을 맡은 레베카 홀도 포함되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데, 그 만큼 이 영화에서 (더군다나 다른 세 배우들 틈에서도!) 빛을 발했던 배우는 레베카 홀이었다. 나머지 세 배우를 평소에 워낙에 좋아하는 터라 상대적으로 레베카 홀에 대한 기대치가 적어서 였는지 몰라도, 그녀가 연기한 '비키'를 사실상의 주인공으로 인식해서 인지는 몰라도 레베카 홀의 연기는 매우 현실적이여서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이 영화를 지구 반대편 어디에서든 있을 법한 얘기로 만들어주는데 큰 몫을 하고 있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했더니 크리스토퍼 놀란의 <프레스티지>에서 크리스찬 베일의 아내 역할로 출연했었다.
하비에르 바르뎀은 언제 그가 '안톤 쉬거'였느냐고 외치기라도 하는 듯 어쩌면 본연의 느끼하면서도 매력적인 남자를 능글맞게 연기하고 있다. 그가 이 영화에서 연기하는 '안토니오'의 모습에서는 마치 '라틴계 조지 클루니'가 느껴진달까? ㅎ 전 세계의 모든 남성팬들의 시기를 한 몸에 받을 만한 캐릭터를 연기한 그가 남자로서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일듯. 참고로 하비에르 바르뎀과 페넬로페 크루즈는 1992년작 <하몽하몽>에 함께 출연했던 적이 있다. 페넬로페 크루즈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는데, 개인적으로 그녀의 오랜 팬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에 연기였는지에 대해서는(특히나 다른 수상 후보들에 비해)조금 부정적이긴 하다. 스페인어를 속사포처럼 쏘아부치는 그녀의 모습에서 오랜만에 '무서움'이 느껴지기도 했으며, 그 아름다움은 여전했다. 스칼렛 요한슨은 우디 알렌의 페르소나로 자리 잡으면서 부터 확실히 더 성장하고 있는 느낌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스콜세지와 함께 작업하며 그러했듯, 스칼렛 요한슨은 우디 알렌의 작품들을 통해 자신의 다양한 매력과 연기력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있다 하겠다. 그리고 다른 영화에서보다 훨씬 더 편하게 연기하는 느낌도 들고.
개인적으론 최근 미드 <식스 핏 언더>를 막 엔딩을 본 터라 이 영화에 출연한 두 배우가 남다르게 반가울 수 밖에는 없었는데, 주디 역할을 맡은 패트리시아 클락슨과 비키의 남편 역할을 맡은 크리스 메시나는 스크린을 통해 다시 만나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더라(이 둘이 이 정도인데 만약 네이트라도 나왔더라면 그 반가움의 크기는 어떠했을까. 재미있는건 크리스 메시나가 영화 속에서 연기하는 캐릭터의 모습도 '식스 핏 언더'속 인물과 많은 부분 비슷하다는 것).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는 영화의 중요한 부분을 앗아가버린 재앙과도 같은 국내 개봉 제목으로 아쉬움이 많은 채 개봉한 작품이긴 하지만, 본래 제목에 근거한 영화는 역시나 우디 알렌의 유머러스함과 고풍스러움 그리고 배우들의 열연을 만나볼 수 있었던 그 다운 작품이었다. 국내 개봉 제목에 낚인 이들도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를 기다렸던 영화 팬들, 우디 알렌의 팬들에게는 다시 한번 그의 매력에 흠뻑 빠질 수 있는 작품이 아닐 수 없겠다.
1. 바르셀로나. 모든 곳이 영화가 되고 로맨스가 될 듯한 그 곳!
2. 스패니쉬 기타 선율도 그렇고, 사운드 트랙이 나온다면 부담없이 구매할 수 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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