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랑콜리아 (Melancholia, 2011)

우울함은 영혼을 잠식한다



국내에 과연 정식 개봉이나 할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던 라스 폰 트리에의 신작 '멜랑콜리아 (Melancholia, 2011)'를 보았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아니 제목을 보지 않아도 라스 폰 트리에의 신작이라는 것 만으로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던 것처럼, '멜랑콜리아'는 우울함과 불안함에 관한 그의 또 다른 이야기다. 라스 폰 트리에는 이번에도 챕터 형식을 빌어 '저스틴' (키어스틴 던스트)과 '클레어' (샬롯 갱스부르)로 나누어 우울함이라는 것과 이를 받아들이는 각자의 방식 그리고 이를 둘러싼 불안함에 대해 들려준다. 아무도 이 영화를 SF재앙 영화로 기대하지는 않았을 테니 그에 따른 실망도 없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우울증'이라는 이름의 행성으로 인한 재앙의 불안함을 영화의 주요 소재로 사용한 것이 여러가지 측면에서 효과적이었다고 생각된다. 어쩌면 이것이 그 동안 내가 알던 라스 폰 트리에의 방식과는 조금 빗겨나 있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여기에는 최근작 '안티 크라이스트'를 아직 보지 못한 것이 매우 크다), 우울증이라는 주제의 시각화에 있어서 매우 인상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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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저스틴'에서는 대저택에서의 성대한 결혼식을 맞이한 신부 저스틴의 우울한 심리를 주목한다. 사실 저스틴의 심리 상태가 모든 관객에게 동의를 얻기는 쉽지 않다. 정상적인 맥락으로 보자면 오히려 이렇게 여러 사람이 동원되어 준비한 결혼식날 아무 이유없이 계속 망쳐버리는 신부 때문에 사태를 수습해야 하는, 그녀의 언니 클레어나 클레어의 남편 존 (키퍼 서덜랜드) 그리고 인생에 가장 중요한 날을 망쳐버린 신랑 마이클 (알렉산더 스카스가드)의 입장이 오히려 더 와닿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스 폰 트리에는 철저히 저스틴 개인이 처한 우울함에 집중한다. 이 결혼식 자체를 자신을 옭아매는 사슬처럼 고통스럽게 느끼고 있는 저스틴의 심리를 너무나 거창한 식순의 결혼식과 교차하여 더 극대화 시킨다. 이것은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쉽게 공감을 받기 어려운 저스틴의 심리를 좀 더 관객에게 표현하고자 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결혼 예식 속에서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있을 때와 홀로 남았을 때의 저스틴의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녀 내부의 우울함을 더 디테일하게 표현한다. 우울함이라는 존재가 어느 순간부터 서로 간의 관계 속 작용이 통하지 않는 순간까지 치닫는 과정을 저스틴의 하룻밤을 통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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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 폰 트리에는 1부의 저스틴을 그리면서 모두 정상적인 사람들 가운데 홀로 문제를 겪고 있는 한 사람을 이야기할 수도 있었겠지만 (즉, 반드시 주인공 주변의 이상한 상황이 주인공을 조여들고 있다고 하지 않고서도, 주인공이 처한 심정을 - 혼자만 느낄 수도 있는 - 표현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한 발 양보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저스틴의 시각에 근거한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 속 저스틴과 주변 인물들 간의 관계는 이제 문제가 터져나오는 시점이 아니라, 이미 서로 포기한 단계에 있다. 즉, 그것이 우울함에 빠져버린 저스틴의 개인적 시각에서 비롯된 것일지는 몰라도, 이미 개선의 여지보다는 무기력해 놓아버리기 만을 서로 바라고 있는 그런 관계 말이다. 영화는 바로 이렇게 매말라버린, 더이상 좋아질 것 같지 않고 그냥 서로 포기하는 편이 낫겠다 싶은 (하지만 포기를 권할 의지조차 증발해버린) 무기력한 분위기를 그대로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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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클레어'에서는 더 무력해져 버린 저스틴을 감싸 안은 언니 클레어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1부가 저스틴의 우울함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2부는 클레어의 불안함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지구를 향해 다가오는 행성 '우울함 (Melancholia)'을 두고 서서히 커져가는 불안함이 결국 우울함(저스틴)에게 마저 잠식당하게 되는 과정을, 아주 조용히 하지만 극렬하게 표현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평소 자주하는 이야기이지만, '불안함'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영화는 행성이 점점 다가오는 와중에 아무것도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 이들의 매우 현실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실 우리는 수많은 재앙영화를 통해 주인공들이 직접 지구의 위기를 해결한다거나 극적으로 기적 같은 일들을 만들어 내 모두 목숨을 구하는 경우에 익숙해져 있지만, 현실은 아마도 이 영화와 거의 같을 것이다. 2부 '클레어'의 이야기는 1부 '저스틴'과는 달리 스스로 무기력함에 빠져버린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자신의 힘으로는 바꿀 수 없는 무기력한 상황에 놓여버린 인물을 통해, 같지만 다른 두 개의 우울함과 불안함에 대해 들려준다. 그래서 2부에 등장하는 저스틴이 마지막 '멜랑콜리아'를 대면하며 클레어을 감싸는 장면은 말로 형용하기 힘든 인상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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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내면에도 우울함이라는 것이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 '멜랑콜리아'가 전개될 수록 재앙이 다가오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과는 다른 이유로 가슴이 조여오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는 여러가지 방법과 메시지로 깊은 인상들을 주는데 지난해 '트리 오브 라이프' 이후 이 같이 압도되는 느낌을 주는 작품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멜랑콜리아'는 라스 폰 트리에의 다른 작품들처럼 다시 보기는 힘겨운 작품이지만, 그래도 그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가장 다시 보고 싶어지는 (극장을 나오면서 바로 또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가 생길 줄은 몰랐다) 작품이기도 했다. 아...



1. 이 영화를 보고 나서야 '안티 크라이스트'를 볼 용기가 생겼어요.

2. 본래 '저스틴' 역할에는 페넬로페 크루즈가 캐스팅 되었었더군요. 그런데 '캐리비안...' 때문에 하차했다고. 그래서 인지 엔딩 크래딧 스페셜 땡스란에 그녀의 이름이 가장 먼저 등장합니다. 페넬로페 크루즈가 저스틴을 연기했다면 커스틴 던스트의 버전과는 전혀 다른, 또 다른 '멜랑콜리아'가 되었겠네요.

3. 극중 클레어의 저택으로 등장하는 곳의 경우, 핀처 판 '밀레니엄'의 삭제 장면에 등장한 그 곳과 동일한 곳 같은데, 정확히는 모르겠네요;

4. 전 사실 오페라는 잘 모르지만, 이렇게 영화와 연결되었을 때 깊은 인상을 받게 되면 언젠가는 제대로 섭렵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번 영화 사운드트랙에 쓰인 '트리스탄과 이졸데' 처럼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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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죽음과 새로운 인연, 그리고 로드무비.

<엘리자베스타운>은 카메론 크로우 감독의 최신작으로 큰 기대를 불러 모았던 작품이다. 아카데미를 수상한 <올모스트 훼이머스>는 물론이고, 그의 전작인 <클럽 싱글즈> <제리 맥과이어> <바닐라 스카이>등을 통해 평범하지 않은 드라마를 그려내는 연출력은 이미 관객과 평단 모두에게 인정받기도 했던 카메론 크로우였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아직까진 레골라스의 느낌이 다 지워지지 않은 ‘올랜도 블룸’과 스파이더맨의 연인에 이어 <이터널 선샤인>에서도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던 ‘커스틴 던스트’가 주연을 맡는 다는 소식은, 두 청춘 남녀주인공의 색다른 러브 스토리를 기대하게 하는 동시에, SF나 액션이 아닌 장르에서 올랜도 블룸이라는 배우는 어떻게 그려질까 하는 또 다른 궁금증도 유발시켰다.

이전의 카메론 크로우의 영화가 그랬듯이 이 영화 <엘리자베스타운>역시 평범한 로맨스 드라마는 아니다. 영화의 시작부분은 회사(사회)에서 크게 실패와 실연당한 주인공의 인생에 집중되며, 이 후에는 실패에 대한 파장이 다 사라지기도 전에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이라는 또 다른 사건을 통해, 주인공이 가족과 나, 나와 다른 사람들에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계기를 전달하고 있다. 또한 그 사건 사이에 만나게 되는 새로운 인연인 ‘클레어’를 통해 자살까지 생각했었던 주인공이 희망을 되찾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이렇듯 대충만 훑어보아도 흔하지는 않은 스토리는 카메론 크로우답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한 편으론 극장에서의 흥행성적과 평단의 평가가 그리 좋지 않았던 것처럼, 카메론 크로우의 작품 치고는 조금 부족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것이 <엘리자베스타운>이기도 하다.




유머와 감동을 모두 담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크로우의 말처럼, 이 영화에는 슬픔과 웃음의 요소가 적절히 배합되어 있다. 하지만 슬픔의 요소는 조금은 중심을 잃은 이야기 구조 덕에 100% 공감대를 형성하지는 못하고 있으며, 유머러스한 부분도 모두가 공감할 만한(특히 미국 외에 국가에서 충분히 공감하기에는)정도의 것은 아니라 이것 역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올랜도 블룸과 커스틴 던스트를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는 이 영화를 쉽게 놓칠 수 없는 요소 중 하나. 앞에서 잠시 언급하였듯 올랜도 블룸이 본격적으로 드라마와 로맨스 장르에서 연기를 펼친 것은 이 영화에서 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전 작품들에서는 칼과 활을 쓰는 액션 때문에 레골라스의 이미지가 어쩔 수 없이 떠올랐었다면, 이번 영화에서는 <반지의 제왕>의 후광 없이도 충분히 홀로 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커스틴 던스트는 깜찍하면서도 신비롭고 무언가 슬픔을 숨긴 듯한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소화해냈으며, 제시카 비엘, 알렉 볼드윈 등의 조연 연기자들의 연기도 자연스러웠다. 수잔 서랜든의 연기에 대해서도 빼놓을 수 없을 텐데, 추모식 장에서 그녀의 마지막 연설과 탭댄스는 그 자체만으로는 훌륭했지만, 전체적인 시각에서 보았을 때는 그 시퀀스가 의도만큼 감동적으로 전달되기엔 2% 부족했던 것 같다.




카메론 크로우 감독의 작품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하나에 요소, 장점을 꼽으라면 누구나 음악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전작들에서는 그저 괜찮은 곡들을 한 두 곡 선곡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자신이 음악에 상당한 조예가 있는 터라 마니아들에게는 반가움을, 대중들에게는 좋은 곡들을 소개해주는 역할로서도 손색이 없는 최적화된 선곡을 보여줬었다. 이 작품 <엘리자베스타운>에서도 사운드 트랙은 절대적이다. 부인인 낸시 윌슨이 만든 곡들을 비롯하여, 엘튼 존, 라이언 아담스, 톰 패티 앤 하트브레이커스 등의 곡들이 요소요소 삽입되어 있다. 사운트트랙 부분에서 조금 아쉬운 점은 선곡된 곡들이 장면을 한층 부각시켜주는 정도가 아니라, 어쩌면 특별할 것이 없는 장면을 좋은 곡들로 무마시켜버리는 듯한 느낌이 살짝 들만큼, 조금은 이질감이 느껴질 수도 있는 부분들이 있었다. 아마도 선곡의 문제라기보다는 앞에서 언급했던 스토리에 아쉬움이 이곳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영화를 끝까지 감상하면서 마지막 로드 무비 식으로 진행되는 부분이 있는데, 이 역시도 영화가 거의 끝나는 느낌을 주는 장례식 장면 다음이라 약간 쌩뚱 맞은 느낌이 들긴 했지만, 영화를 통틀어 개인적으로는 가장 마음에 들었던 시퀀스였다. 클레어가 만들어준 지도를 통해 음악과 더불어, 의미 있는 여러 곳들을 차례차례 여행하는 형식은, 차라리 영화를 애초부터 이런 스타일의 로드 무비로 끌어갔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게 했다.

DVD는 최근 출시된 작품답게 수준급의 화질과 사운드를 수록하고 있다. 1.78:1 애너모픽 와이드스크린의 화질은 인물들의 클로즈업의 많은 장면과 아름다운 풍경을 그린 장면에서 빛을 발하며, 사운드 역시 여러 가지 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소리들과 아름다운 사운드트랙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스페셜 피처로는 배우들의 오디션 장면과 리허설 장면을 만나볼 수 있는 'Training Weels'와 스탭들을 소개하는 'Meet the Crew', 영화 속 재미있는 소품 영상이었던 ‘아이들 달래기 비디오’를 포함한 두 가지의 확장판 영상을 수록하고 있다.





모두에게 권할 만큼 매력적인 작품이라고는 말하기 어렵겠지만, 카메론 크로우의 팬이라면 쉽게 포기하기에는 아쉬운 작품임에도 분명하다. 자켓 이미지나 홍보 문구들로만 봐서는 단순히 두 남녀주인공의 러브 스토리를 담은 영화로 오인하기 쉬운데, 오히려 그것과는 다른 세계를, 크로우의 시점에서 관찰한 작품이라는 점을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다.

2006.04.10
글 / 아쉬타카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이라는 영화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되었던 건 전적으로 감독 미셸 공드리 (Michel Gondry) 때문이었다. 뷔욕 (Bjork)의 광팬이었던 나는 그녀의 'Human Bahavior', 'Bachelorette',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곡 중 하나인 'Joga'의 뮤직비디오를 접하게 되면서 과연 이 기묘하고도 괴상하기까지 했던, 당시로서는 뷔욕의 음악과 함께 충격적인 영상으로 다가왔던 이 작품들을 한 사람이 감독했다기에 당연히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뮤직비디오라는 매체에서 시도할 수 있는 실험이 극한까지 도달해 이제는 복고적인 성향으로 회귀하고 있는 요즈음에도, 그가 예전에 만들었던 뷔욕, 벡 (Beck), 라디오헤드 (Radiohead), 매시브 어택 (Massive Attack), 레니 크래비츠 (Lenny Kravitz)등 뮤지션의 뮤직비디오는 누구라도 감상한 뒤 감독이 누구인지 궁금증이 들 수밖에 없는 완성도 높고 초감각적인 영상이었다. 또한 뮤직비디오의 감독 외에도 리바이스, 나이키, 코카콜라, 아디다스 등 유명 브랜드의 CF 감독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2001년작 <휴먼 네이쳐>이후, 각본을 담당한 찰리 카우프만과 함께 새롭게 내놓은 영화가 바로 <이터널 선샤인>이다. 이터널 선샤인을 주목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바로 각본을 담당한 찰리 카우프만 (Charlie Kaufman) 때문이었다. 천재 시나리오 작가로 불리우는 카우프만은 이미 전작 <존 말코비치 되기> <어댑테이션> <휴먼 네이쳐> 등을 통해 이전엔 볼 수 없었던 창조적인 시나리오로 천재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었다. 그의 각본은 굉장한 두뇌 회전을 요하면서도 동시에 장난스럽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펼쳐왔는데, 이터널 선샤인에서도 그의 장난끼와 복잡함은 계속되지만, 전작들과 비교해 봤을 때, 러브스토리에 걸 맞는 매우 사랑스럽고 감성적인 면이 더욱 부각되었다.




이터널 선샤인을 지배하는 정서는 대충 이렇다. 사랑하는 사람과 처음 만났을 때, 처음 사랑했을 때 느꼈던 감정이 영원할 수는 없다는 현실적인 정서와 이별에 아픔을 잊기 위해 헤어진 연인과의 추억을 뇌에서 지워 버린다는 비현실적인 정서, 그리고 이 현실과 비현실을 감싸는 따뜻한 감성. 앞선 현실적인 정서가 주를 이뤘다면 영화는 어떤 큰 줄기의 사건을 통해 ‘처음 만날 때와 같은 설레임은 이제 없지만, 그래도 널 영원히 사랑해’라는 식의 결론을 맺는 일반적인 영화가 되었을 테고, 비현실적인 요소가 주를 이뤘다면 영화는 <메멘토>식 시간 퍼즐 놀이와 같이 관객과 두뇌 싸움을 치열하게 벌이는 영화가 되었을 테지만(실제로 많은 주변 사람들이 <메멘토>를 연상했다), 이터널 선샤인에만 있는 따뜻한 감성은 이 영화를 앞선 두 가지 형태의 영화와는 전혀 다른 영화로 만들었다. 만약 이 같은 복합적인 요소 없이 현실적인 러브스토리나 기억과 현실을 어지럽게 배치한 이야기로만 진행되었다면 마지막 장면에서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주고받는 'Okay', 'Okay'라는 대사가 그렇게 가슴 시리도록 와 닿지는 않았을 것이며, 마지막 해변에서 나누던 대화 중 ‘조엘, 이제 이런 기억들이 사라지게 돼 (This is it, Joel. It's gonna be gone soon)’, ‘알아 (I Know)’, ‘어떻하지? (What do we do?)’라는 물음 뒤에 ‘그냥 음미하자 (Enjoy it)’했을 때, 참을 수 없는 전율과 눈물이 쏟아지진 않았을 것이다(여러 번 보아도 이 대사는 정말로 감동적이라 원문을 굳이 참조하였다. 'Enjoy it'을 ‘음미하자’로 해석한 것은 정말 탁월했던 것 같다).




영화의 해석에 대해서는 이 DVD, 정확히 미셸 공드리와 찰리 카우프만이 함께한 음성해설을 듣기 전에는 나조차도 분분했었다. 논란에 중심은 아무래도 해피엔딩이냐 언해피엔딩이냐 하는 것이었는데,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는 마지막 장면에서 ‘또 시간이 지나면 서로 지루해하고, 따분하게 여길텐데?’하는 클레멘타인의 질문에 웃으며 'Okay'로 답한 조엘과 역시 웃으며 'Okay'로 답한 클레멘타인을 보며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후 극장에서 2번째 관람하였을 때에는 여러 가지 의문점이 생겼고, 급기야 영화의 크래딧과 함께 조엘이 차안에서 슬프게 울며 테이프를 차 밖으로 던져 버리는 장면에서 조엘에 눈가에 기억을 지울 때 사용하는 자국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결국 둘은 다시 만났다가 다시 헤어진다는 언해피엔딩이라는 결론을 내게 되었다.

음성해설을 통해 알게 된 사실조차 100% 완벽하지 않은 것이 아쉽지만, 어쨌든 감독과 작가의 말을 통해 알게 된 확실한 사실은 그들은 영화를 결말짓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화의 마지막 눈 덮인 해변 가를 뛰어가는 장면이 현실인지 추억인지의 여지를 남기면서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었다는 것이다(음성해설 중 테이프를 밖으로 던져 버리는 장면에서 카우프만은 ‘저것은 라쿠나 테이프는 아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사실 음성해설에 그 어느 때 보다도 집중했던 것은 이같이 모호한 결말 때문이었는데, 다 감상하고 난 뒤 생각해보니 감독과 작가는 그 자체에 그렇게 큰 비중은 두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석적으로만 달려들었던 자에게 결말은 관객에게 남겨두었다는 작가의 말은 처음에는 조금 허무했지만, 영화를 보면 볼수록 결말의 종류나 시간 퍼즐 맞추기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 이 영화에서 말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그것과는 별개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엘이 클레멘타인과 처음 만난 뒤 헤어지면서 창밖으로 인사를 전해 받은 뒤 살짝 눈 내리는 거리를 뒤로하고 너무나도 행복해하며 차로 돌아가던 장면(그리고 그 때 흐르던 존 브라이언의 그 음악!), 첫 전화 통화를 하며 너무나도 행복해하던 조엘의 얼굴, 기억 속에서 클레멘타인을 놓치지 않기 위해 어린 시절 비 오던 날을 떠올리며 탁자 아래로 비를 피하던 장면(그 때 흐르던 그 감성적 스코어!), ‘몬타우크에서 만나자’라며 속삭였을 때 느꼈던 애잔한 정서, 그리고 이미 앞서 여러 번 언급했던 전율이 흐르던 장면 장면에서 느낄 수 있었던 그 정서가 바로 이 영화 <이터널 선샤인>이 말하고자 하는 따뜻함이 아닐까 한다.

이제 배우들에 연기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사실 ‘이터널 선샤인’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거나 접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이유는 짐 캐리라는 배우의 영향도 컸던 것 같다. 짐 캐리 하면 <마스크>나 <덤 앤 더머>를 떠올리며 코믹 연기에 달인 정도로만(사실 짐 캐리가 펼치는 코믹 연기는 그 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인정받을 만하다) 쉽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가 정극 연기를 한다고 할 때는 그리 큰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 같다(아담 샌들러 주연의 <펀치 드렁크 러브>가 소수에게만 사랑받는 이유도 같은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 맨 온 더 문>, <트루먼 쇼>, <마제스틱> 등에서도 이미 괄목할만한 드라마 연기를 펼쳤으나 아직도 그를 단순히 코미디 연기자로만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가장 아쉽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짐 캐리의 연기는 어느 명배우 못지않은 감동을 전한다. ‘조엘’ 캐릭터는 이전에 그가 연기했던 캐릭터들과 달리 짐 캐리만이 할 수 있는 캐릭터는 아니지만, 짐 캐리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캐릭터임은 분명하다.




클레멘타인 역할에 케이트 윈슬렛은 본인에게도 그러하듯이 조금은 의외에 캐스팅 이였는데, 그동안 주로 영국의 시대극을 주로 연기했던 그녀에게 가장 현대적이고 현실적인 캐릭터를 맡긴 영화의 선택은 어찌 보면 모험일 수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매우 탁월한 선택이 되었다. 케이트 윈슬렛에 말을 빌리자면 ‘조엘’은 케이트 윈슬렛이 그 동안 연기했던 캐릭터들을 닮았고 ‘클레멘타인’은 짐 캐리가 그 동안 연기해왔던 캐릭터를 닮았지만, 이터널 선샤인에서는 다른 배우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개인적으로는 케이트 윈슬렛의 영화를 여러 편 보았지만, 그녀가 이리도 사랑스러운 여자인 줄은 이터널 선샤인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이 밖에 ‘프로도’의 이미지를 벗기 위해 갖가지 다른 역할에 도전하고 있는 일라이자 우드는 영화에 잘 묻어드는 연기를 선보였으며, 마크 러팔로와 커스틴 던스트, 톰 윌킨스 역시 자신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영화 전체를 풍성하게 해주는 캐릭터로서 열연을 펼쳤다. 감독과 작가가 톰 윌킨스와 커스틴 던스트의 연기를 보면서 ‘지도할 필요가 없는 배우다’, ‘너무 잘 해 주었다’라고 말한 것이 단순히 예의상으로 한 말이 아님을 영화를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극장을 나오자마자 DVD는 언제쯤 출시될까 기다리게 되었는데, 사실 내 생애의 영화로 꼽을 만큼 사랑한 영화지만 DVD의 퀄리티는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국내에서 크게 흥행하지도 못하였으며 드라마라는 장르적 특성을 비춰봤을 때 국내 DVD출시 여건상 우수한 스펙을 기대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1장의 디스크에 본편과 예고편만 달랑 수록한 초라한 버전으로 출시될 것 같다는 우려와는 달리 코드 1로 출시된 콜렉터스 에디션을 기본으로 한 2장의 디스크의 스페셜 에디션 DVD는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타이틀이다. 먼저 1.85:1 아나몰픽 와이드스크린의 화질은 신작 DVD로서 손색이 없는 화질을 수록하고 있는데, 영화 자체가 의도적으로 뿌옇거나 흐리거나 어둡거나 하는 등의 기법을 쓴 장면이 많아 100% 화질의 우수함을 체험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사운드는 DTS와 돌비디지털 5.1채널을 수록하고 있는데, DTS 트랙이 특유의 강력함을 뿌리는 장면은 드라마의 특성상 그리 많지 않지만, 감독이 음악에 세심하게 신경을 쓴 만큼, 아기자기한 소품 같은 스코어와 감동적인 배경음악과 함께 대사 또한 또렷하게 전달된다.





이번 스페셜 에디션 DVD의 가장 큰 장점은 뭐니 뭐니 해도 서플먼트에 있다 하겠다. 첫 번째 디스크에는 본편과 함께 미셸 공드리와 찰리 카우프만이 함께한 음성해설이 수록되어 있는데, 음성해설은 기술적인 면이나 스토리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로케이션에 관한 이야기와 배우들의 연기 등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리고 음성해설 도중에 말이 없을 경우 영화 본편의 대사에 대한 자막 처리가 된 점도 특징적이다. 아, 또한 모든 메뉴의 한글화도 눈여겨 볼만하다. ‘이터널 선샤인 영화 속으로’는 별도로 제작된 홍보용 영상으로서 감독과 배우들의 인터뷰가 영화 속 장면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미셸 공드리와 제작진이 들려주는 이터널 선샤인’에서는 좀 더 본격적인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데, 여기서 미셸 공드리 감독의 천재적인 면모가 드러난다. 블루 스크린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미셸 공드리는 대부분의 장면들을 순수하게 아이디어만으로 극복하여 만들어냈는데, 영화를 보면서도 ‘저런 장면은 CG를 썼겠지’했던 장면들이 너무나도 간단하지만 기발한 아이디어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편집으로 인해 만들어진 영상이라고 생각했던 장면들이 배우와 스텝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만들어낸 롱 테이크 원 샷으로 촬영된 장면이라니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짐 캐리와 미셸 공드리 감독과의 대화’와 ‘케이트 윈슬렛과 미셸 공드리 감독과의 대화’에서는 서로 그 동안 말하지 못했던 진솔한 이야기들과 촬영 중 에피소드들을 전해들을 수 있는데, 단순히 웃고 떠드는 내용이 아닌 서로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다는 전재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깊고 소중한 대화가 오간다. ‘Saratoga Avenue 장면이 완성되기 까지’에서는 이 한 장면 속에서 어떠한 컴퓨터 그래픽 등이 사용되었으며 어떠한 아이디어 들이 사용되었는지를 상세하게 그려낸다. 조엘이 창밖으로 클레멘타인에게 너를 지워가고 있다며 말할 때 클레멘타인의 다리가 하나 밖에 없다는 사실은 이 서플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 밖에 ‘메이킹 필름’에서는 촬영장에 모습을 더 가깝게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며, ‘삭제/추가 장면’은 본편에는 수록되지 못한 장면들로 영화의 스토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장면들이 담겨있다(영화 초반 조엘이 클레멘타인의 집에 가게 되어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많은 부분이 삭제되었는데, 이 삭제 장면을 통해 사건에 시간 순서에 대해 확실한 답을 얻을 수 있다). 이밖에 Beck의 'Everybody's Gotta Learn Sometimes'의 뮤직비디오와 그래픽을 통한 짐 캐리의 립싱크가 재미를 주는 'Light & Day'의 뮤직비디오가 수록되었다. 마지막으로 영화 속 라쿠나 회사의 광고가 담겨있어, 뭐하나 놓칠 것이 없는 서플먼트를 마무리한다.




<이터널 선샤인>은 <반지의 제왕>에서 느낄 수 있었던 영화의 위대함과는 또 다른 위대함을 전해주는 작품이다. 영화 한 편으로 인해 얼마나 행복해 질 수 있으며 또한 얼마나 슬퍼질 수 있는지, 삶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알게 해준 작품이다. <이터널 선샤인>으로 인해 받았던 감동과 행복함, 복잡 미묘한 감정들을 포함한 여운은, 영화 속 ‘라쿠나’ 회사와 같이 기억을 지워주는 인위적인 행위 없이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글 / 아쉬타카

2006.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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