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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지나가고 (海よりもまだ深く, 2016)

어제의 나에게 보내는 안녕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신작 '태풍이 지나가고 (海よりもまだ深く, 2016)'를 보았다. 언제부턴가 신작을 가장 기다리게 되는 감독 중 하나인 그의 새로운 영화는, 또 한 번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일상 속에서 삶의 진리를 어김 없이 찾아 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영화를 통해 발견하고 꺼내 드는 삶의 순간, 깨달음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모두의 삶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서고, 다른 하나는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지만 부정하려 애쓰거나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인정하는 과정을 그려내는 것이다. '태풍이 지나가고'는 후자의 경우다. 인생을 살면서 후회하지 않는 이가 과연 있을까. 이 영화는 누구나 한 번쯤 혹은 여러 번 크고 작은 일들로 인해 후회하고 포기하고 자책했던 이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당부 같은 이야기다. 막연하게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또 한 번의 마법 같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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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가 중요하다는 것. 특히 가족의 죽음이나 부부의 이혼 등을 겪은 이후에 '그 때 잘 할걸'하며 그러니까 지금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머리로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중요성과 과거에 대한 후회를 다룬 다른 영화들이 그 후회를 말끔히 씻어 줄 방법과 어디서부터 잘 못되었는지를 돌이켜 그 잘못된 매듭을 풀어 내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에 반해,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어디서부터 잘 못되었는지에 대해 여러 번 되 묻지만 결국 그 답을 찾아내지 못한 주인공들을 그린다. 다시 말해 '태풍이 지나가고'의 이야기는 과거 나태하고 실수를 많이 하던 주인공이 어떤 계기로 인해 정신차리게 되는 이야기나, 과거 오해나 실수로 인해 벌어지는 갈등이 비로소 해결되는 방식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상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고나면 말할 수 없는 삶의 행복이 느껴진다. 아베 히로시가 연기한 료타의 후회는 가족이라는 존재의 힘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것이지만, 바로 그 가족이 어떤 역할을 하는 가가 이 영화의 주된 메시지이기도 하다. 애써 무리하게 억지로 행복하려 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후회를 덮지 않도록 료타(아베 히로시)를 감싸고 돌보는 것 역시 가족이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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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고 나니 문득 전인권의 '걱정 말아요 그대'의 가사가 떠올랐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이 가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전인권의 그 노래가 그러했듯이, 이 영화는 지나간 것을 지나간 대로 두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는 일인가를 잘 알고 있으며, 그렇기에 그 인정의 과정을 묘사하는 것에 영화의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자칫 허무맹랑한 낙천적인 이야기가 되지 않도록 말이다. 약 2시간 동안의 이야기를 통해 만나볼 수 있었던 이 한 가족의 이야기는 그렇게 어른스러운 방식으로 자신 만의 결말을 맺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가족의 이야기를 연달아 그리는 가운데 '어른'이라는 존재에 대해 계속 고심해 왔다. 어른스럽다 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어떤 것이 진정한 어른의 모습인지에 대해 주로 아버지라는 존재를 내세워 그 고민과 답을 이어왔다. 가족이라는 공동체 내에서 어른이 되어야 하는 부모의 역할과 무게는 어떤 것인지를 고민하게 된 것은 감독 자신이 부모가 되면서부터 어쩌면 당연한 고민이었을 것이다. 그 역시 자신이 부모가 되면서 어른이라는 존재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고, 또한 과거의 후회스러웠던 일들에 대해 떠올려 보게 되는 경우가 있었을 것이다. '태풍이 지나가고'를 보고 있으면 그러한 감독의 고민과 지금의 답이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분명 후회되는 일들이 있지만 거기서 머물지 않고, 내일로 나아가는 것. 아마도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그 내일에 먼저 도달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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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나에게 진정으로 안녕하고 안부와 인사를 전할 수 있는 영화는 많지 않았는데, 이 작품은 나에게도 어제의 나를 미소 지으며 떠나보낼 수 있도록 (이건 쿨한 안녕과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 진짜 안녕이다)작은 용기를 불어 넣어준 영화였다. 나도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알 수 있을까. '안녕'하며 인사할 수 있을까. 



1.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자신이 어머니가 홀로 사셨던 연립아파트단지의 기억을 이 영화에 그려냈다고 하는데,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 연립아파트의 모습이나 풍경이 마치 내가 어렸을 때 살았던 주공아파트의 기억과 겹쳐졌어요. 외할머니와 함께 살기도 했었고. 무언가 그 자체가 추억인 주공아파트의 풍경이...


2. 키키 키린의 연기는 볼 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하곤 하는데,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장면을 그러니까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말하고자 하는 일상 속의 진리와 소중함을 관객에게 100% 전달하는데에 그녀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에요. 


3. 극 중 아베 히로시의 아들 '싱고' 역의 배우는 우리 배우 김새론과 몹시 닮았더군요 ㅎ


4. 사실 이번 작품은 전작 이후 텀이 좀 짧기도 했고, 포스터나 시놉에서 '걸어도 걸어도'가 연상되기도 해서 아주 큰 기대까지는 갖지 않았던 작품이었는데, 아..... 또 한 번 완벽한 드라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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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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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そして父になる, 2013)

가족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적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최근 작을 보면 대부분 가족과 관련된 영화들이었다. 2008년 작 '걸어도 걸어도'는 아들로서 부모를 바라보는 시각이었고, 2011년 작 '기적'은 아이들의 눈 높이에서 바라보려고 애쓴 또 다른 가족 영화였으며, 제작을 맡았던 '엔딩노트' 역시 한 가족이 가장과 이별하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의 신작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역시 또 한 번 가족의 관한, 그 가운데서도 제목에서 바로 알 수 있듯이 아버지라는 존재의 탄생 혹은 성장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들은 단 한 번도 자극적이었던 적이 없는데, 이번 작품 역시 결코 관객을 향해 소리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일어난 사건 자체는 수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 만큼의 중대한 사건이지만, 영화는 이를 내적으로 삼켜내는 두 가족의 이야기를 조심스레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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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아버지가 있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기 전까지 후쿠야마 마사히루가 연기한 료타를 아버지로 부를 수 있을 까에 대해서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영화는 철저하게 료타에게 맞춰져 있다. 사실 이 작품은 고레에다의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내게 자리에서 쉽게 일어날 수 없을 만큼의 감흥을 전달한 작품이었지만, 조금의 석연치 않은 부분들도 있었었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 영화는 철저하게 아버지 역할인 료타에게만 맞춰져 있다. 같은 크기의 충격을 맞게 된 두 가정이고, 한 가정으로만 한정 지어도 료타의 아내의 이야기가 있지만 영화는 오로지 료타의 중심으로 진행된다. 그가 극을 이끈다 는 것 보다는 극이 그 만을 주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제목은 너무도 직접적인데, 결국 영화는 료타가 어떻게 아버지가 되는지 바로 그 과정인 '그렇게'를 보여준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석연치 않았던 부분은 바로 그 점이었다. 너무 료타의 이야기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것. 영화 속 인물들과 영화 자체가 러닝 타임 내내 료타가 아버지가 되길 기다려주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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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형태의 다른 이야기와는 달리 '그렇게 아버지가..'에서 료타가 겪게 되는 사건은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다른 인물들도 똑같은 세기로 겪게 되는 사건이었기에, 극 중 인물들 모두가 (심지어 상대가 되는 가족까지도) 료타가 자신을 극복하고 아버지가 되길 도와주고 기다려주는 것이 한 편으론 영화 속에서나 가능할 법한 판타지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희망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료타가 아버지가 되었다고 과연 두 가족이 겪은 이 고통이 해소되었나? 라는 물음에 조금은 우울함 마저 들었다.


참고로 나는 이 영화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이창동 감독이 참여한 GV로 한 번, 그리고 나중에 개봉관에서 한 번 이렇게 두 번을 관람하였는데, 단순 재 관람의 이유 때문 만이 아니라 다시 보고 나서 달리 느낀 부분이 생겼다. 바로 석연치 않게 여겼던 료타와 이를 기다려주는 영화에 대한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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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료타와 영화의 관계가 판타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점점 들어오는 생각은, 어쩌면 그것이 영화가 말하고자 한 가족의 의미가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료타가 아버지가 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했던 건 그 자신의 자각이나 극복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말 없이 기다려주는 가족이었다는 얘기다. 료타가 결정적으로 다시 금 이 잘못된 상황을 재 자리로 돌려야겠다고 마음 먹게 된 (카메라에 찍힌 사진을 우연히 보게 되는 장면) 장면을 봐도 그렇다. 울고 있는 료타를 본, 이제 막 잠에서 깬 그의 아내는 그가 울고 있는 것을 분명히 보았음에도 아무런 이유를 묻지 않고 그저 '아침 먹을까?'라고 웃으며 이야기한다. 마지막 장면 역시 그렇게 돌아온 료타를 아무 말 없이 받아주는 또 다른 가족 역시 그런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즉, 판타지라고 생각했을 정도의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 역시 가족이라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것. 그것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전작 '기적'에서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또 다른 기적이 아닐까 하는 것. 이 영화는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



1. 영화를 본 지는 제법 지났는데 리뷰가 늦었네요;


2. 아래 사진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이창동 감독님이 함께 했던 씨네토크 현장. 서로가 서로에게 자극과 영향을 주는 관계라는 걸 그 분위기만 봐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는데, 참 귀한 시간이었어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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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도 걸어도 (步いても 步いても, Still Walking, 2008)
진리를 다루는 방법


고레에다 히로카즈. 한 때는 일본 영화 감독들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이를 꼽으라면 볼 것도 없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메종 드 히미코> 등을 연출한 이누도 잇신을 꼽곤 했었는데, 어느 새 부턴가 마치 그의 작품들처럼 조금씩 조금씩 깊은 울림으로 다가와 가장 좋아하는 일본 감독 대열에 은근히 자리하고 있는 감독이 바로 그가 아닐까 싶다. <원더풀 라이프>나 <환상의 빛> 같은 작품들은 나중에야 챙겨본 경우고 리얼타임으로 본 영화라면 <아무도 모른다> <하나> 등이 있었다. 그의 작품들은 참 조용하고 차분하면서도 무언가 형용하기 어려운 공기로 가득차 있다고 할 수 있을텐데, 이번 작품 <걸어도 걸어도>는 이미 영화제를 통해 접한 지인들의 극찬들을 재쳐두더라도 꼭 극장에서 보고 싶었던 기대작이었다. 사실 영화를 보기 전에 감독이나 출연 배우 정도의 정보 이상은 얻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기 때문에 포스터를 보고 미뤄 짐작하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걸어도 걸어도'라는 제목에서 연상되는 메시지와 떠오르는 이미지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포스터는, 가족 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고레에다 히로카즈 만의 방식으로 또 조용히 풀어가겠구나 라고 생각했었는데, 영화는 훨씬 더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훨씬 더 깊은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들께서는 맨마지막 단락으로 이동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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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1박 2일 이라는 짧은 시간을 통해 같은 공간에 모이게 된 (넓은 의미의) 한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오래전 소년을 구하려다가 먼저 목숨을 잃게 된 장남 준페이의 기일을 맞아 요코하마에 위치한 부모님 집에 흩어졌던 가족들이 모이게 되는데, 집을 떠난 료타(아베 히로시)는 남편과 사별하여 아들 하나를 두고 있는 여자와 결혼하였고, 출가했던 딸은 다시금 친정으로 돌아오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준페이의 기일을 맞아 모이게 된 이들의 모습에서는 조금 특수한 상황은 있지만 그렇다고 전혀 새롭거나 한 설정들이라기 보다는 우리 사회에서도 흔히 만나볼 수 있는 가족들 간의 미묘한 갈등을 그려내고 있다.

료타는 형인 준페이에게 컴플렉스를 느끼고 있는데, 집안의 모든 관심과 기대를 받던 형과는 달리 지금은 사별한 경험이 있는 여자와 함께 살고 있고 변변한 직업도 없는터라 가족들과의 만남이 그리 달갑게 여겨지지 않는다. 딸인 지나미(유) 역시 여러가지 일들 때문에 다시금 친정집으로 가족이 들어와 살려고 하지만 이를 두고 어머니와의 미묘한 갈등 때문에 역시 그리 편하기만한 만남은 아니다. 부모 역시 자식들에게 못 마땅한 점을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 1박 2일은 분명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모두들 불편함을 마음 한 구석에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 그리 짧게만 느껴지진 않는다.

어머니(키키 키린)는 시종일관 푸근하게 웃는 얼굴로 자식들을 대하지만 툭툭 던지는 유머 섞인 말들엔 자식들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담겨져있으며, 비교적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아버지(하라다 요시오)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겠다. 료타는 자신이 어린 시절 저지른 사소한 일들마저 아버지가 형 준페이가 저지른 일들로 생각하고 있는 것에 다시 한번 컴플렉스를 실감하게 되고, 그저 성격 좋게만 보였던 료타의 안내 역시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을 결국 무의식적으로 가족 외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에 속상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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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족을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한 인물은 바로 료타와 결혼한 아내의 아들인 아츠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아츠시는 따지고보면 이 가족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나 있는(료타와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관찰자의 입장에서 이야기 속에 스며들어 있다. 친척 관계인 다른 두 아이들과도 어느 정도 거리가 느껴지고, 시종일관 이 가족에게서 조금은 거리를 두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아츠시의 엄마는 성인으로서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이 가족에 물들려고 노력하지만, 아직 순수한 아이인 아츠시에게는 이 거리가 있는 그대로 느껴질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걸어도 걸어도>의 영화적 공간은 매우 한정되어 있다. 거의 모든 영화의 대부분을 집 안에서 소비하고 있고 집 밖을 나서서 진행되는 장면 역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한정적 공간일 뿐이다. 공간을 한정적으로 제한한 것은 아무래도 다른 부가적 요소가 아니라 가족 본연의 이야기에 더 집중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었음은 물론, 부모가 오래 살아왔고 가족들이 예전에 다 함께 살았었던 공간이라는 특수한 측면에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설정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집 곳곳에는 끊어져 있는 가족들을 이어줄 추억들과 이야기 거리들이 녹아있는 장소들이 여기저기 있으며, 이런 소소한 거리들로 인해 이 '가족'은 자신들의 가족으로서의 고리를 새삼 깨우칠 수 있게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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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첫 장면은 바다가 멀리 보이는 찻길까지 산책을 나가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영화 중반 이후에 이 길은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손자가 함께 하는 길로 다시 등장한다. 료타의 가족이 오르던 가파른 계단 길은 3부자가 바닷가로 가는 길에도 등장하며 마지막에 자식들이 모두 떠나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부모의 여정에도 다시 등장한다. 또한 한정된 공간은 같은 인물들이 다른 상황에서 혹은 다른 인물들이 같은 공간에서 겪게 되는 것으로 자주 반복된다. 이 영화에서 반복과 함께 쓰이고 있는 것은 또 다른 설정은 바로 일종의 '타이밍'이다.

반복되는 설정이 조금은 은유적이라면 이 타이밍적인 설정은 매우 직접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옥수수 튀김은 바로 먹어야만 맛이 있다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쓰이고 있고, 어머니가 계속 생각해내려던 스모 선수의 이름이 어머니와 헤어지고 나서야 떠오른 것 역시 이런 엇갈림을 의미하고 있으며, 고치겠다고 한 타일을 결국 고치지 않은 것도 태워주겠다던 차를 한 번도 못 태워 준 것도 결국 이 '타이밍'과 '엇갈림'인데 이 것은 곧 이 영화에 가장 큰 정서인 '후회'와도 결부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인터뷰를 보니 이 영화의 많은 부분은 감독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에서 가져왔다고 하는데(특히 어머니의 대사 중 절반 가까이는 실제 감독의 어머니가 했던 말들이라고 한다. 극 중 등장하는 엔카 '걸어도 걸어도' 역시 감독의 어머니가 자주 불렀던 곡이었다고), 그래서인지 이 작품엔 감독 자신이 부모에게 다 하지 못한 '후회'에 대한 측면이 아주 강하게 녹아있다.

여기서 후회란 단순히 '아쉽다'가 아니라 '자책'의 의미가 더 깊다 하겠는데, 아들차를 타고 쇼핑하는 것이 소원이라는 어머니의 말에 언제든 하면 되지 라고 했던 것과는 달리 결국 단 한번도 그러지 못하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바로 연결하여 보여주고, 그와는 정반대로 SUV를 권하던 매부의 제안에 그리 탐탁치 않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묘지를 내려오며 떡하니 SUV에 승차하는 료타 가족의 모습은 이 후회를 더 자책에 가까운 것으로 그리고 있다. 영화 내내 별로 직접적인 묘사를 하지 않다가 료타가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자 부모는 '올해 설에나 보겠군' 하고 말하는 반면 아들은 '올해 설에는 안와도 되겠네'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면서 다시 한 번 이 '후회'와 '자책'의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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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영화 <걸어도 걸어도>는 세트 적인 측면이나 영화 적인 장치들에 대한 것들도 매우 흥미로운 영화가 아닐 수 없겠다. 한정된 공간 내에서 인물들의 동선을 살펴보는 재미나 여러 명이 한 공간에서 어떻게 서로 작용하는지에 대한 것으로 접근 하는 것도 물론 흥미롭지만, 의미적으로 보았을 때 결국은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부모님 계실 때 잘해라' 라는 너무 진부한 명제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매우 인상적인 텍스트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항상 죽음과 죽음 이후에 대해 이야기해왔었는데, 이번 작품 역시 이런 연장선에서 볼 수 있겠지만 어찌보면 죽음 이후를 얘기한다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 '후회'라는 정서가 내면 깊이 깔린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걸어도 걸어도>는 굉장히 직접적이기도 한 작품으로 볼 수 있겠다.

<걸어도 걸어도>를 보면서 앞선 여러가지 다른 이유들 때문에 깊은 인상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나는 후회할 일을 하지 말아야겠다'라는 결심만 하게 되어도 이 영화는 충분히 의미있는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 영화의 여운이 오래 남는 것은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의 나의 역할에 대한 반성은 물론, 무엇보다 '나중에 하면 되겠지'가 결국 실현될 수 없음을 가슴 깊이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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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gontiti의 음악은 이번에도 정말 좋네요. 정말 좋습니다.

2. 전 오프닝에 할아버지가 산책하는 장면이 왠지 울컥했어요. 그 거리거리, 골목골목과 음악이 왜 이리 울컥한지 ㅠ

3. 키키 키린의 연기는 정말 훌륭하더군요.

4. 흔히 장르를 분류할 때 '드라마'라고 많이들 쓰는데, 이 영화야 말로 진정한 '드라마'가 아닐까 싶습니다.

5. 형인 준페이의 물건들 가운데 'Joy Division'의 커다란 판넬이 있는걸 보고 혼자 속으로 '형이 음악 좀 들었는데?'하고
    생각하기도 ㅎㅎ

6. 이 영화 역시 무언가 말로는 형용하기 힘든 작품입니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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