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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소 고지 (Hacksaw Ridge, 2016)

신념을 갖는다는 것, 그 고통의 의미


멜 깁슨이 '아포칼립토 (Apocalypto, 2006)' 이후 10년 만에 연출을 맡은 영화 '핵소 고지 (Hacksaw Ridge, 2016)'는 2차 세계대전 중 양심적 병역거부자임에도 참전하여 많은 생명들을 구해냈던 실존 인물 데스몬드 도스의 실화를 담고 있다. 종교적인 신념으로 인해 총을 드는 것(살인을 하는 것)을 거부했던 데스몬드가 지옥같이 참혹한 전장 속에서 수많은 생명들을 구해낸 이야기는 멜 깁슨이 평소 증오하던 히어로물의 대한 반증이자 대답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핵소 고지'가 전쟁 영웅에 대한 이야기인가 하면 물론 그렇지 않다. 오히려 영웅적일 수 밖에는 없는 인물의 이야기를 그려내면서 최대한 영웅적 면모를 걷어 내고자 하는 동시에 그의 내면의 신념에 관한 갈등을 전쟁의 포화 속 보다도 더 큰 전장으로 그려낸다. 바로 그것이 멜 깁슨이 말하고 싶었던 진짜 히어로물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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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트라우마이자 종교적 이유로 인해 총기를 드는 것을 거부한 데스몬드는, 그럼에도 자신의 가족과 주변 인물들이 모두 나라를 위해 참전하고 목숨을 바치는 현실에 홀로 참전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으로, 참전을 결심하게 된다. 물론 총기를 들고 일본 군을 향해 공격하는 것 대신 동료들을 구하는 의무병으로서 말이다. 하지만 훈련소에서부터 그의 이러한 신념은 지휘관과 동료들의 벽에 부딪히고 만다.


사실 군에서 데스몬드에게 강조하는 논리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또 합리적이다. 일본군이 너에게 총을 겨눌 때, 더 나아가 자신의 가족을 해치려 할 때에도 총기를 들지 않겠다는 신념 때문에 공격을 하지 않고 죽음을 맞을 것이냐 라는 질문에, 데스몬드는 쉽게 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데스몬드의 신념은 합리적 계산이나 논리에 따른 결과물이 아니라 말 그대로 양심에 따른 믿는 바이기 때문이다. 그저 살인을 할 수는 없다는, 설령 그것이 모두가 죽고 죽이는 것이 암묵적으로 동의되는 지옥의 전쟁터라 하더라도 그럴 수는 없다는 그의 신념은, 결국 우여곡절 끝에 실제 전투가 벌어지는 전쟁터로까지 이어진다. 


데스몬드가 핵소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전투에 참여하게 되는 이후부터는 좀 더 전형적이고 그야말로 영웅적인 전쟁 영화의 전개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가 참전을 허락받기까지의 과정이 있었기에 이 참혹한 전장 속에서의 그의 영웅적 면모가 더 특별하게 다가오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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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이라는 지휘 체계의 예외가 되는 순간부터 데스몬드는 모든 이와 자신의 신념을 두고 싸워야 했는데, 영화는 이 과정을 어쩌면 후반 부의 전쟁 보다도 더 큰 전쟁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데스몬드의 반대편에서 그를 내몰고자 했던 이들을 그저 신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억압하는 나쁜 이들 정도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처음에는 데스몬드를 그저 정신 나간 놈 정도로 여겼던 지휘관과 동료들은 그의 영웅적 활약이 있기 전에도, 그의 신념을 이해는 하지 못해도 인정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진심으로 그가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선에서 모두가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되는 그의 제대를 권하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 데스몬드도 정확한 답을 하지 못했던 것처럼 관객 역시 쉽게 답할 수 없는, 더 나아가 데스몬드의 신념을 과연 현실에서도 받아들일 수 있는 가 하는 선뜻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너의 신념 때문에 네 동료와 가족의 목숨을 지킬 수 없다고 해도 끝까지 신념을 지키겠는가 혹은 고집하겠는가 하는 질문 말이다.


영화나 드라마, 혹은 실화로 존재해 세상에 알려지는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거의 다 그러한 신념을 끝까지 지켜내 일종의 증명을 해낸 인물들일 것이다. 그들 역시 대부분은 스스로 자신의 신념을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무엇인가로 증명해 내기 전에는 (대부분은 죽음으로 증명하는 안타까운 일들이 많았다)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고통받고 본인 스스로도 내적으로 엄청난 갈등으로 더 큰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핵소 고지'의 주인공인 데스몬드의 이야기를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가 전장에서 보여준 기적 같은 활약상이 없었더라면 과연 그의 동료들은 물론 후세에 이들이 그가 가졌던 신념에 대해 지금처럼 진심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하는 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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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적으로 말해 모든 억압하는 것들을 이겨내 기적 같은 일을 해내는 것으로 스스로 증명해야만 자신의 신념을 존중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참담한 현실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마치 예수가 제자들에게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행복하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예수조차 증명이 필요했던 신념이라는 가치가, 얼마나 갖기 어려운 것인지 또 지켜내기 어려운 것인지를, 반대로 신념을 끝까지 지켜내 세상에 증명해 낸 데스몬드의 이야기를 보며 곱씹어 보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멜 깁슨의 '핵소 고지'는 전쟁 영화로서의 미덕도 충분히 갖고 있는 영화다. 핵소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벌어지는 전장의 묘사는 그 어떤 전쟁 영화에도 뒤처지지 않는 공포감과 현실감 그리고 참혹함을 전달한다. 고지 위에서 쉴세 없이 빗발치는 적군의 총알들이 주인공과 동료 사이를 관통하고 또 빗겨 나가는 장면들의 몰입감은 적당한 핸드 헬드와 압도적인 사운드 디자인을 통해 완성된다. 새삼스럽지만 '핵소 고지'는 극장에서 꼭 봐야만 하는 영화다. 그것도 사운드 환경이 우수한 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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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 핵소 고지의 높이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것보다는 3분의 1 정도의 높이더군요. 영화적 효과를 위해 일부러 3배 정도 높이를 높였다고. 그리고 실제 데스몬드 도스의 이야기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더군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오히려 영화 속 데스몬드가 극적 현실감을 위해 더 덜어낸 느낌.


2. 메가박스 M2관을 일부러 찾아가서 본 보람이 있었어요. 전장의 표현에 있어서 사운드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이 영화는 꼭 사운드가 좋은 극장에서 봐야만 하는 작품입니다.


3. 앤드류 가필드가 연기 곳곳에서 젊은 멜 깁슨이 보이더군요. 특히 그가 바보처럼 환하게 웃을 땐 멜 깁슨의 그 환한 미소가 겹쳐지더군요. 사실 이 캐릭터에 앤드류 가필드가 과연 어울릴까 싶은 생각이 있었는데, 우려를 말끔히 씻어내는 좋은 연기였어요.


4. 아, 그리고 간혹 2차 세계대전을 그린 미국 영화들이 범하는 실수에는 일본군을 그저 짐승이나 악마로 그려내는 경향이 있는데, 이 영화는 전반적으로 신념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영화로서, 일본군 역시 그들이 믿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참전한 이들이라는 점을 말미에 보여줌으로써, 그러한 우려를 잘 피해 가고 있어요. 너무 균형을 잡으려고 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이 정도로 신념의 개념으로 각각 묘사해 내는 것이 더 좋은 방향이었다고 생각되네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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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 (The Amazing Spiders-Man 2, 2014)

철저한 오락 영화로서의 발전



마크 웹과 앤드류 가필드의 리부트 된 스파이더맨 시리즈인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은 확실히 기존 샘 레이미와 토비 맥과이어의 그것과는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은 좀 더 히어로 물의 플롯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한 편, 마크 웹의 '스파이더맨'은 좀 더 오락적인 측면이 강화 된 대중 친화적인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 얘긴 즉슨, 각 인물들의 겪는 고뇌에 대해 깊은 탐구를 긴 러닝 타임을 할애하여 설명하기 보다는 액션과 (특히) 로맨스를 부각시켜 대중들로 하여금 더 쉽게 즐길 수 있도록 한다는 얘기다. 이 이유 때문에 마크 웹의 '스파이더맨'은 팬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강하게 갈리고 샘 레이미 삼부작과의 비교에 있어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는데, 결과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전 편에 비해 속편은 확실히 나았다. 실제로 나아지기도 했고, 아마도 마크 웹의 히어로 영화 작법에 좀 더 익숙해져서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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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를 보면 마크 웹은 마치 스파이디 슈트를 입은 청년이 주인공인 또 다른 '500일의 썸머'를 찍은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든다. 그가 꼭 '500일의 썸머'를 연출한 감독이어서가 아니라, 이 작품 속 피터와 그웬의 관계를 묘사하는 방식에서 '500일의 썸머'의 톰과 썸머의 관계를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 로맨스는 실제 연인이기도 한 앤드류 가필드와 엠마 스톤을 통해 좀 더 달달하고 극적인 요소를 만들어 냈다. 이 영화를 셋으로 나누어 보자면 하나는 피터와 그웬의 로맨스이고 또 다른 하나는 스파이더맨과 일렉트로의 대립관계일 것이며 마지막은 피터와 해리의 애증의 관계일 것이다. 이 셋의 비중은 거의 동일하다고 볼 수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좀 애매해진 부분도 없지 않다. 만족하는 입장에서는 세 가지 모두의 재미를 느꼈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입장에서는 셋 다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느낌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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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처음 러닝 타임을 확인했을 때 142분이라는 시간에 놀라기도 했었는데, 의외로 영화는 그리 지루하지 않았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세 가지의 이야기를 각각 동등하게 늘어 놓느라 시간이 길어질 수 밖에는 없었는데, 2시간 20분이 가는 걸 거의 못 느꼈을 정도로 연출은 무리가 없었던 것 같다. 내가 더 좋아하는 취향은 이 세 가지를 두 가지로 압축 시켜서 좀 더 각각의 내실을 더 하는 편이긴 한데, 그래서인가 외톨이였던 맥스의 슬픔과 분노도 공감하기엔 조금 부족했고, 또 다른 스토리를 갖고 있는 해리의 간절함도 조금은 부족해 보였다 (하지만 해리의 이야기는 데인 드한이라는 배우로 인해 200%의 공감 효과를 불러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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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마크 웹의 전작은 만족보다는 실망에 더 가까웠었는데, 이번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는 만족에 더 가까웠다. 2시간 20분이 넘는 러닝 타임이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앤드류 가필드가 연기하는 새로운 스파이더맨의 유머와 가벼움에 어느 정도 적응 되어 불편함이 없었으며, 새로운 해리를 연기한 데인 드한 덕에 그리 많지 않은 비중이었지만 후반부 해리라는 캐릭터를 계속 주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로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의 테마였던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가 더 마음에 들고 취향이기는 하지만, 좀 더 소년의 입장에서 바라본 마크 웹의 스파이더맨도 그럭저럭 흥미롭고 갈 수록 기대되는 부분이 있었다. 최근 영화화 된 히어로들 가운데 청춘물로 그려낼 수 있는 캐릭터는 아마 스파이더맨 뿐 일 것이다. 마크 웹은 그 지점을 주목했고, 나쁘지 않은 결과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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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데인 드한에게 빠져버린지 벌써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는데, 그가 만든 해리 오스본은 또 다른 슬픔이 느껴지더군요. 분명 통쾌해야 하는 지점에서도 그의 아픔이 느껴져 (어쩌면 피터 파커보다 더 공감되서) 영화를 다른 시각에서 볼 수 밖에는 없었을 정도. 데인 드한은 확실히 현재 헐리웃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배우입니다.


2. 그래도 마지막 장면은 찡했어요. 아마도 3편에 가면 이 테마를 좀 더 메인으로 가져오지 않을까 싶네요.


3. 쿠키는 없지만 크레딧 중간에 엑스맨 예고편이 등장합니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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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메이징 스파이더맨 (The Amazing Spider-Man, 2012)

조금은 성급한 리부트



토비 맥과이어와 커스딘 던스트 그리고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뒤로하고 새롭게 리부트 되어 선보인 앤드류 가필드, 엠마 스톤 그리고 마크 웹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을 보았다. 일종의 '비긴즈'의 개념으로 제작되고 있는 리부트 (Reboot) 영화들이 요 몇 년간 특히 더 붐을 이루고 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는 이 붐이 오래 지속되는 듯 하다. 어쨋든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은 감독도 배우도 마음에 들었지만 과연 이들이 새롭게 선보이는 '스파이더맨'은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할까? 라는 생각에 기대만큼이나 걱정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참고로 연출을 맡은 마크 웹은 나에게 '500일의 썸머' 하나 만으로도 앞으로 계속 주목하게 될 감독이 된 경우). 결론적으로 마크 웹의 스파이더맨은 샘 레이미의 3부작을 조금씩 함축적으로 버무려 놓은 듯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 함축적이라는 것이, 이미 샘 레이미의 3부작을 그리 오래 되지 않은 때에 경험했던 나로서는 매력적이기 보다는 단순한 반복으로 느껴졌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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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은 기존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시리즈와의 연속성을 무시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는 작품이다. 간단하게 다시 말하자면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에는 피터 파커가 어떻게 스파이더맨이 되었는지는 물론, 그의 아버지와도 같은 벤 삼촌이 비극적인 죽음을 겪게 되는 지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등장하게 된다는 얘기다. 일단 이미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3부작을 모두 보았던 입장에서는 이러한 과정들이 그저 배우만 바뀌어서 다시 반복되는 것 이상의 재미를 발견하기는 힘들었는데,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은 리부트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생략할 수는 없었다면 좀 더 샘 레이미의 작품과는 차별되는 개성이나 메시지가 필요했는데, 이 점에서는 이 작품 만의 매력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이번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이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그저 다른 배우들이 기존의 이야기를 반복해서가 아니라 (이건 성향에 따라 오히려 마음에 드는 관객들도 많았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커스틴 던스트의 엠제이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던 이들의 경우, 엠마 스톤으로 바뀐 것에 호감을 표했던 것 처럼), '스파이더맨'이라는 영웅(이웃의 친절한)의 깊이가 현저히 낮아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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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이 시종일관 갖고 있던 고민과 메시지는, '큰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히어로로서의 고뇌와 함께 현실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이른바 '찌질이' 피터 파커가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 그리고 스파이더맨으로 살아가기 위해 피터 파커로서의 삶을 잃게 되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과 이를 포기하고 놓아버렸을 때 깨닫게 되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마크 웹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에서는 이 모든 과정들이 담겨 있기는 하지만 함축적으로 담긴 나머지 그 깊이를 모두 담아내기엔 시간도 노력도 부족해보였다.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에서 피터 파커는 자신이 사랑하는 엠제이에게 자신의 존재를 이야기하기까지 굉장한 고민과 시간이 소요되는데 (알게 된 이후에도 이 문제로 가장 많이 고민하고),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의 피터 파커는 첫 데이트에서 단 번에 자신의 정체를 고백해 버린다. 또한 이전에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계속 조심조심하고 노출을 감수할 만큼 중요한 순간에만 부득이하게 마스크를 벗었던 것에 반에, 이번에는 마스크를 쓰고 있는 시간 만큼이나 마스크를 벗고 있는 시간이 많을 만큼(복장은 갖추고) 자신의 정체에 대해 고민하는 스파이디의 모습은 아니었다. 물론 이렇게 캐쥬얼하고 빠른 전개나 영웅으로서 책임이나 정체에 대해 고민을 덜하는 모습의 '다른' 스파이더맨으로만 볼 수도 있겠지만, 그냥 그렇게 넘기기에 스파이더맨이라는 작품에서 이러한 주제가 갖는 중요함의 깊이는 거의 절대적인 것이라 이 부분의 함축은 전체적인 공감대 형성의 부족함의 결과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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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스파이더맨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피터 파커와 스파이더맨 사이의 고뇌의 공감대가 부족하다보니, 오히려 코너스 박사의 이야기가 더 절실하게 와닿았다. 사실 코너스 박사의 이야기 역시 '스파이더맨 2'의 옥타비우스 박사의 경우와 많은 부분이 겹친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코너스 박사의 이야기가 더 개인적인 경우라 좀 더 절실함이 느껴졌다. 아마도 좀 더 인상깊은 작품이 되려면 코너스 박사 개인의 절실한 사연이 피터 파커의 이야기와 접점을 이루면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와중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을 극복해 가는 이야기가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두 이야기 모두 조금씩 아쉬운 노선을 각자 걸어간 듯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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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놓고 보니 아쉽다는 얘기들로만 가득하지만 오락영화로서, 특히 만약 기존 샘 레이미의 3부작을 못봤거나 맘에 들지 않았던 관객에게는 나쁘지 않은 새로운 '스파이더맨'의 서막을 알리는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사실 리부트를 하기엔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2'가 너무 완벽한 작품이었다는 점이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의 가장 큰 어려움이었을 것이다. 아, 그리고 피터 파커는 좀 모자라 보이고 어수룩해 보여야 하는데, 토비 맥과이어에 비해 앤드류 가필드는 너무 쿨한 미남이었던 것도 어쩔 수 없는 어려움이 아니었나 싶다.



1. '500일이 썸머'를 연출했던 마크 웹이라 로맨스 부분은 좀 더 기대를 했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도 샘 레이미의 작품보다 공감이 덜했네요. 피터가 느끼는 고뇌의 깊이가 잘 표현되지 못하다보니 그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로맨스 부분도 덜 살아난 것 같네요;;


2. 개인적으로 성급한 리부트라고 느꼈던 건 새로운 이야기를 그리는 것이 아니었기에 샘 레이미의 전작들과 그대로 겹쳐지는 부분이 너무 많았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뚜렷한 개성도 찾아보기 힘들어서였어요. 3부작의 면면들을 조금씩 다 가져오다 보니 더더욱 그러했는데, 차라리 완벽한 리부트로서 새로운 시리즈의 첫 편의 이야기에만 집중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네요;


3. 스탠 리 옹은 출연한 작품 중에 이번 작품이 가장 임팩트 있었던 것 같네요 ㅋ


4. 개인적으로는 샐리 필드가 연기한 숙모 역이 너무 좋았어요. 뭐랄까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그냥 '나는 다 알고 있어 피터, 괜찮아'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과 포옹 ㅠㅠ 저도 모르게 울컥하더군요 ㅠ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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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 렛 미고 (Never Let Me Go, 2010)

외로운 영혼의 나직한 노래



가즈오 이시구의 베스트 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마크 로마넥의 '네버 렛 미고 (Never Let Me Go)'는, 인간 복제나 장기 기증 등에 대한 배경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블레이드 러너'나 'A.I' 등 과는 조금 다른 차원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네버 렛 미고'는 이 설정을 제외한다면 거의 SF라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인간미가 짙게 깔린 작품인 동시에, 반대로 그래서 더 SF라는 장르가 갖고 있는 또 다른 진면목을 아름답게 승화시킨 작품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네버 렛 미고'가 관객에게 던지는 화두는 비슷한 주제를 다룬 다른 SF 작품들과는 조금 다른데, 인간을 위해 희생하는 이들의 존엄성이나 정체성 등에 대해 옳은가 그른가를 묻는 것보다는, 장기 기증을 위해 태어나고 길러지고 '종결 (Completion)'되어지는 운명에 힘겹게 순응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비교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온전히 인간성에 대해 그리고 영혼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게 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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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 렛 미고'에 전반적으로 드리워져 있는 정서는 체념과 순응 그리고 나직한 슬픔이다. 극 중 주인공들은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알고 나서 정체성에 대한 방황을 겪기도 하지만, 이들의 여정은 정체성에 대한 의구심과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경계를 넘는 사투를 벌이는 것 보다는, 그저 어쩔 수 없는 순응의 범주 안에서 그 누구도 강하게 탓하지 못하는 쓸쓸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 작품이 인상적인 것은 이런 주인공들의 여정이 답답하거나 지루하게 느껴지기 보다는 (공감대를 형성할 만한 구성적 측면이 조금 부족하게 느껴졌음에도), 담담하게 자신의 삶을 읽어내려가는 캐시 (캐리 멀리건)에게 애잔함이 드는 동시에 동정이 아닌 같은 존재로서의 슬픔마저 느껴졌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어쩔 수 없이 소멸되어 가는 이들의 운명에 빗대어 '그러면 나는 어떠한가?'를 생각하게 끔 하는게 아니라 더 큰 범주에서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라는 질문과 슬픔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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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은 읽어보지 못해 영화와 비교는 할 수 없지만, 이들의 존재론 적인 화두보다는 오히려 세 남녀의 미묘한 삼각관계와 그 관계 속에서 어느 누구도 자유롭지 못했던, 그래서 오랜 시간 동안 마음의 짐을 안고 살았던 그들의 이야기에 더 많은 비중을 할애한 것은 결과적으로 더 큰 인상을 주었다. 결국 방법론의 차이 정도일 수도 있지만, 마크 로마넥이 선택한 이 방식은 이 작품을 SF라는 장르에서 자유롭게 해주었고, 인간과 인간을 위한 존재에 대한 영화가 아닌 그냥 '우리'에 관한 영화로 받아들일 수 있게 했다. 앞서 운명에 순응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했었는데, 이 순응이 극복이나 반항보다 인상적인 이유에는 여러가지를 들 수 있겠다. 첫 번째는 개인적으로 결핍과 장애 혹은 경계 아래에 있는 인물들을 바라보는 시선 때문인데, 이런 것들을 반드시 극복해야할 대상으로 보기 보다는 견디는 과정에 더 포커스를 둔 방향성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만드는 타자의 입장에서는 이런 환경에 놓인 인물들의 이야기를 너무 쉽게 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결국에는 극복하도록 강요하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는 점에서, 캐시의 1인칭 입장에 가깝게 그리려고 한 영화의 과정이 더욱 인상적이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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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이유는 첫 번째에서 언급했던 그 과정, 바로 견디는 것에 대한 깊은 성찰과 시선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극 중 캐시의 대사를 보면 이런 점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데, 영화와 캐시가 말하고자 했던 점은 '우리는 결국 너희와 같다'라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너희보다 더 인간적이다'라는 것도 아니었으며 그냥 담담히 '우리는 결국 삶을 끝까지 살아냈다'라는 것이었다. 정확히 알지 못했고 모두를 이해할 수도 없지만 '삶을 끝까지 살아냈다'라는 캐시의 이 말은 인간들을 한탄하는 메시지보다도, 한계를 넘어 새로운 존재가 되는 이야기보다도 더 강한 인상과 무게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참고로 표현상 구분했을 뿐이지, 저에게 이들의 이야기는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인간 아닌 존재가 아니라 그냥 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였어요;). 결국 이런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여정은 단순히 답답한 순응이라기 보다는 내적인 치열함의 또 다른 방향이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캐시의 말처럼 그 누구도 이해했다 쉽게 말하기는 어려운 하나의 소중한 '삶'이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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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로 표현하기는 어려운데 무언가 먹먹함과 쓸쓸함 그리고 자기연민까지 느껴지는 작품이었어요. 그리고 나중에는 영화로 기억되기보다는 음악이나 한 폭의 그림으로 기억될 것 같기도 하구요.

2. 캐시 역할의 캐리 멀리건은 정말 캐릭터와 잘 어울리더군요. 아역을 맡은 배우도 멀리건과 많이 닮아있어서 보는 순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구요. 전 '언 애듀케이션'보다 '네버 렛 미고'의 캐리 멀리건이 더 좋았네요.

3. 짧은 출연이지만 샐리 호킨스와 샬롯 램플링도 워낙에 좋아하는 배우들이라 인상 깊었네요. 샐리 호킨스는 '해피 고 럭키' 이후로 계속 이렇게 조연으로 등장하는 작품들만 보게 되는 것 같네요;

4. 기회가 된다면 가즈오 이시구의 원작 소설도 꼭 읽어보고 싶네요. 영화 속에 나오는 저런 바닷가에 앉아서 보면 더 확확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네요 ^^;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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