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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자 (Okja, 2017)

부조화의 조화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아쉬움


넷플릭스를 통해 제작되어 더 큰 화제, 아니 영화 외적인 요소로 더 많은 말들이 먼저 오갔던 봉준호 감독의 신작 ‘옥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옥자’는 봉준호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종합하는 성격이 강한 동시에, 전작 ‘설국열차’가 그러했듯이 근본적으로 해외 시장을 기반으로 만든 한국영화라 할 수 있겠다. 어떤 감독의 세계관을 집대성한 성격의 작품들의 경우 아주 분명하게 장단점이 드러나곤 하는데 ‘옥자’ 역시 그러하다. 전체적으로 스토리와 구성 측면에서 ‘괴물’, ‘플란다스의 개’와 겹쳐지는 부분이 상당히 많은데, 아무래도 장점들만 (꼭 장점들만 가져왔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뽑아 하나로 다시 합쳐지는 과정을 겪다 보니 각각의 깊이는 떨어질 수 밖에는 없고, 순간순간의 매력은 여전하지만 큰 그림으로 보았을 때 헐거워지는 측면이 발생한다. 재료가 너무 다양한 탓에. 그리고 그 재료들이 너무 매력적이었던 탓일까. 그 재료 하나하나는 다른 완제품의 맛과 대등할 정도로 매혹적이었지만, 모두를 버무린 ‘옥자’라는 요리의 맛은 오히려 조금 싱거운 맛이었다. 차라리 섞어 먹지 말고 따로 하나 씩 먹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본인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봉테일’이라는 그의 별명은 그의 팬들과 관객들로 하여금 그의 영화를 볼 때 무의식적으로 디테일을 찾는 것에 집중하게 만들었고, 이점 역시 초반에는 봉준호라는 감독의 세계관에 매력을 느끼게 하고 더 관심을 갖게 하는 장점으로 작용했지만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그의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는 것을 막는 걸림돌로 작용하는 듯하다. ‘옥자’라는 제목과 슈퍼돼지 그리고 글로벌한 세계관은 그 자체로 이질감을 주는데, 이건 봉준호 영화가 항상 선호하는 방식이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것들의 조화를 억지로 만들어 내기보다는 부조화 그 자체를 아슬아슬하게 버무려내는 기술, 그리고 크기로만 따지자면 비교가 되지 않는 거대한 음모 혹은 이야기 속에 원치 않게 놓여 버린 소시민 주인공. 마지막으로 그 주인공이 거대한 이야기 속에서 선택 혹은 마주하게 되는 극도로 현실적인 결말. 이러한 봉준호 세계관의 익숙함은 ‘옥자’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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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봉준호의 영화적 구조가 반복되었음에도 매번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이 가능했던 것은 그 커다란 구조적 세계관과 디테일한 설정들의 유기적인 연결 고리와 조화 때문이었다. 봉준호의 이야기들은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될까?’를 궁금하게 만드는 영화라기보다는 순간순간에 흥미를 느끼는 중에 나도 모르게 결론에 달해 있을 정도로 그 과정의 리듬과 긴장감을 즐길 수 있었다. 관객의 대부분이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 ‘살인의 추억’과 같은 영화가 대표적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미제사건을 주제로 했지만 관객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거 혹시 범인이 잡혔었나?’라고 착각을 하게 될 정도로 과정의 치밀함과 영화 만의 스토리텔링에 완전히 빠져들게 된다. 


‘옥자’ 역시 영화가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이야기의 구조를 파악하게 되면 어렵지 않게 전개 과정을 예상할 수 있게 된다. 더군다나 ‘옥자’는 가축이 아닌 가족으로서 등장하는 ‘옥자’라는 슈퍼돼지 캐릭터를 통해 아주 직접적으로 자본주의 시스템과 이를 소비하는 방식에 대한 메시지를 드러내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에, 숨은 메시지를 어렵게 찾아낼 여지도 많지 않다. 그렇다면 결국 봉준호의 영화들이 매번 그래 왔던 것처럼 그 과정에서 다시 한번 다 알고 있는 얘기라고 생각하고 있는 관객들을, 알지만 사실 모르는 미지의 세계로 끌어당겨야 하는데 이 영화는 그 유혹의 강도가 솔직히 그리 강하지 못하다. 익숙한 이야기들은 익숙한 대로 마무리되고 그 과정의 리듬 감도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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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 크레디트를 보며 유명한 배우들의 이름과 스텝들의 이름들 가운데서 개인적으로 더 주목했던 이름은 음악을 맡은 정재일이었는데, 본래 그의 팬이었기에 그가 맡은 영화 음악에 대해서도 기대가 컸다 (크레디트 상으로는 정재일 외에 젬마 번즈가 함께 참여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옥자’의 음악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너무도 분명해 보였으나, 그래서 너무 직접적이고 오히려 장면 자체를 설명하려 드는 아쉬운 부분이었다. 흔히 장면의 감성과 정반대 되는 음악을 선곡해 그 감정을 더 극대화시키곤 하는데, ‘옥자’의 음악 역시 그러한 시도를 하고 있으나 결과는 ‘그런 시도를 하려 했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에 그칠 뿐이었다. 


앞서 봉준호의 영화들이 어울리지 않는 인물들, 세계관들을 동시에 가져와 균열에 가까운 부조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 매력이라고 했는데, ‘옥자’의 몇몇 장면들과 음악은 아쉽지만 그저 균열과 이질감에서 멈춰버린 경우가 많았다. 이건 아마도 더 많은 관객, 그러니까 더 다양한 나라의 관객들을 상대하고 있다는 걸 감독은 물론 모든 스텝들이 인지한 상태에서 제작되었기 때문에 발생하게 된 일종의 부담감의 산물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부담감(기대감)이 없을 땐 오히려 본인이 원하는 100%의 색깔을 내는 것에 더 집중하게 되는데, 좀 더 대중적인 색깔, 더 많은 색깔을 포용해야 된다는 의도가 오히려 한 두 가지 색을 분명히 낼 때보다 여러 측면에서 흐려진 결과물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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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자’에는 몇 번의 빠른 전개 시퀀스가 등장한다. 수평으로 수직으로 인물들이 추격의 형태로 이동하는 장면들은 이 장면 이전까지 끌고 오던 이야기의 긴장감을 배가 시키며 그대로 속도감을 더해 단 번에 다음 단계로 이동시키는 기능을 해야 하는데, ‘옥자’의 경우는 그 이전에도 확실한 매력을 보여주지 못한 탓도 컸지만 결정적으로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추격의 장면들이 그리 인상적이지 못했다. 그 사이사이에 들어 있는 빛나는 유머들이 오히려 안타까울 정도로, 그 시퀀스가 끝나고 난장판이 된 채 남겨진 배경을 보면 ‘휴~’하며 잠시 가슴을 쓸어내리며 숨을 돌리기보다는 조금 허무한 감정이 들뿐이었다. 캐릭터들의 경우도 만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연상될 정도로 전형적으로 과장된 인물들이 많았는데, 본래 좋아하던 배우들이어서 더 아쉬움이 느껴졌다. 배우들의 연기가 아쉬웠던 것도 아니고, 그 과장됨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도 이해되었지만, 서두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 의도가 영화 전체와 자연스럽게 녹아들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아쉬운 마음에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째 느끼는 것보다 더 별로라고 하는 것 같은 글이 되어버렸지만, 그건 진심으로 별로여서라기보다는 더 좋을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옥자’에서도 여전히 장면의 디테일, 설정의 디테일 하나하나는 매력적이다. 그리고 봉준호가 이 이야기를 통해 영화에서 결론을 낸 방식 역시 여전히 의미 심장하고 앞으로의 고민과 옅은 희망을 동시에 느끼게 만든다. 모두를 계몽하려고 노력하다가 실패하는 것은 오히려 쉽다. 하지만 긍정적인 변화를 위해 현실적인 (그것이 절반 이상의 실패 혹은 극소수의 승리라 할지라도)한 걸음 걷는 것을 택하는 봉준호 세계관의 결말은 이번에도 많은 것을 생각해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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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영화를 봤던 이 날, 삼겹살을 저녁으로 먹자는 말에 단호히 거절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옥자’ 때문이었다. 적어도 한 동안은 어쩔 수 없이 먹지 못하지 않을까. 바로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한동안은 고기를 먹지 않는(못하는) 것이, 이 영화와 마찬가지로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가장 현실적인 선택일 것 같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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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즈너스 (Prisoners, 2013)

누가 죄인인가



휴 잭맨과 제이크 질렌할 주연의 영화 '프리즈너스'를 보았다. 개봉 전에는 두 배우의 출연 사실만 알고 있었는데, 뒤늦게 알고 보니 '그을린 사랑'을 연출했던 드니 빌뇌브의 작품이었으며 두 배우 외에도 폴 다노, 마리아 벨로, 테렌스 하워드, 비올라 데이비스, 멜리사 레오 등 좋은 배우들이 여럿 출연하고 있는 작품이었다. '프리즈너스'는 2시간 반이라는 긴 러닝 타임을 시종일관 무거운 분위기로 가득 채운, 꽉 찬 스릴러 물이다. 몇 가지 기술적인 면이나 장르 적인 면에 대해 이야기할 것들은 있지만, 메시지 적으로는 생각보다는 이야기할 것이 그리 풍성하지는 않은 (직관적인) 작품이기도 했다. 오히려 그 부분이 스릴러에 더 집중할 수 있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도 있겠다. 2시간 반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러닝 타임이 조금은 지리 하게 느껴졌던 건, 재미가 없거나 느슨해서 라기 보다 이 영화가 선택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의도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감독은 관객이 극 중 아이를 유괴 당한 부모와 이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와 마찬가지로 진이 빠지길 원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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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장르 영화적인 면에서 긴 러닝 타임과 쉽사리 풀리지 않는 사건, 그리고 범인에 대한 궁금증은 역시 제이크 질렌할이 출연했던 '조디악'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범죄 스릴러 측면에서 '프리즈너스'는 '조디악'에 한 참 못 미치기는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2시간 반이 넘는 러닝 타임 동안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끌고 왔다는 점에서 충분히 매력적인 스릴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프리즈너스'는 '누가 범인인가?'라는 가장 기본적인 테마를 기반으로, 범인을 찾는 과정 중에 각각의 주요 인물들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더 직접적으로 어떤 죄를 짓게 되는 지를 주목한다. 그리고는 관객에게 묻는다. 당신이 주인공이었다면 어떠했을까. 어린 내 아이를 유괴 당했고, 범인으로 의심되는 이가 내 눈 앞에 있다면 과연 어떻게 했을까.


영화는 이 두 시각을 이야기 속에서도 모두 드러낸다. 심하다 고는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는 연민은 물론, 그래도 이 방법은 잘못되었다는 시선도 함께 존재한다. 그리고 인물들이 엮이게 된 이 유괴 사건이 어떤 의도치 않은 사건에서 말미암았는지도 가볍게 다루지 않는다. 그 자체가 반전일 수도 있지만 이건 반전으로 사용되고 있다기 보다는, '왜 그럴 수 밖에는 없었는지'에 대한 질문이자 답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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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이 양면성을 갖고 있는 이야기에 쉽게 몰입할 수 있었던 건 각본 외에 배우들의 연기가 크게 한 몫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그 가운데 휴 잭맨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을 듯 하다. 사실 휴 잭맨에 대해서 한 동안은 그저 '휴 잭맨 = 울버린'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레 미제라블'을 보고 나서는,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는 장발장의 이야기에 다시 한 번 새삼 빠져들 수 있었을 정도로 그의 연기력에 매료되었었다. '프리즈너스'에서도 그의 연기가 큰 몫을 했다. 여기에는 실제로 어린 딸을 두고 있는 그의 영화 외 적인 이미지도 크게 작용했는데, 극 중 인물인 도버와 영화 외 인물인 휴 잭맨이 겹쳐지며 이 영화에서 가장 필요한 요소인 '진정성'이 자연스럽게 발생했다. 그로 인해 도버의 행동들은 제 3자의 시선이 아니라 1인칭 시점으로 공감할 수 있어, 결국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죄와 죄인에 대해 깊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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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을 나오면 크게 남는 것은 없는 영화였지만, 정반대의 의미로 관람을 하는 동안에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던 좋은 몰입 감을 선사한 작품이었다. 배우들의 명 연기와 고립되고 긴장되는 가운데 시종일관 무거운 분위기는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



1. 로저 디킨스의 촬영은 정말 대단하네요. '스카이 폴'에 버금가는 멋진 장면들이 등장합니다. 특히 후반부 클라이맥스에 제이크 질렌할이 빗속을 뚫고 운전하는 장면은, 마치 다른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압도적인 영상미를 선사하더군요.


2. 제이크 질렌할이 설정한 '로키'라는 캐릭터도 흥미로웠어요. 연기로 표현되는 성격 외에 의상이나 움직임 등에서도 확실히 캐릭터를 잡았다는 걸 인식할 수 있어서 좋더군요.


3. 폴 다노는 이제 이런 역할만 하는 듯;; 뭔가 천재 아니면 외톨이 혹은 정신이상자 -_-;;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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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나는 그 장면 #1
미스 리틀 선샤인 (Little Miss Sunshine)


아직도 누군가가 내게 가장 인상깊게 본 영화를 물을 때면, '한 작품을 꼽을 수는 없죠' 라면서 '최고의 가족 영화'로 매번 꼽는 작품이 바로 발레리 파리스, 조나단 데이톤 감독의 2006년 작 '미스 리틀 선샤인'이다. 단순히 루저 혹은 주류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벌이는 그들만의 이야기로 규정짓기엔 좀 더 복잡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기본적으로 가족 영화라는 점에서 누구에게나 추천하고픈 작품이다. 토니 콜레트, 그렉 키니어, 앨런 아킨, 스티브 카렐, 폴 다노, 아비게일 브레슬린이 만들어내는 가족이라는 이름의 앙상블 연기는 이 영화의 백미이며, 노란 색의 차에 한 명씩 뛰어들어 타는 장면은 길이 남을 명장면이다. 하지만 이 새로운 코너(?)에 선택된 장면은 이 유명한 장면이 아니라 바로 아래의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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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우여곡절이라는 표현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없다!) 일종의 예쁜 어린이 선발대회인 '미스 리틀 선샤인' 대회에 참여하게 된 올리브 (아비게일 브레슬린)는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할아버지와 함께 오랫동안 호흡을 맞췄던 충격적인 안무를 무대 위에서 선보이게 된다. 하지만 이런 보수적인 대회에 어울리지 않는 파격적인 올리브의 무대는 일부 관객이 자리를 뜨는 등 곧 관계자에게 제제를 받게 된다. 하지만 이때까지 이 대회 자체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가족들은 하나 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로 올리브를 응원하는 한편, 올리브의 무대가 끝까지 계속 될 수 있도록 이를 막는 이들을 몸으로 막아낸다.

어서 무대 아래로 올리브를 대리고 내려오라는 관계자의 말에, 알아듣게 처리할 것처럼 보이던 아빠 (그렉 키니어)는 갑자기 올리브처럼 음악에 맞춰 어설픈 춤을 추기 시작하고 이내, 모든 가족이 무대 위에 올라와 올리브와 함께 격한 춤사위를 펼치게 된다. 

지금까지도 이 장면만 생각하면 그냥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본래 희극의 정점에 있는 장면은 어지간한 비극보다 슬프기 마련인데, 이 장면 역시 유쾌한 동시에 몹시도 눈물나는 장면이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가족이었던 적이 없던 이들이, 서로 말 한마디 없이 올리브를 위한 무대 위의 춤으로 진정한 '가족'이 되는 순간이었으며, 남들이 뭐라던 그들끼리는 너무 행복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이 눈물 짓게 했던 것 같다. 다들 자신 만의 가치관에 갇혀 살던 이들이 가족이라는 존재를 위해 스스로를 버린 동시에, 그럼으로서 진정한 자신을 찾게 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에도 누가 뭐라던 남들에게 큰 해만 끼치지 않는다면 본인들만 행복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면에서 위의 장면은 약간의 해가 있긴 했지만 이 가족이 너무나도 행복해 하는 모습에 눈물이 절로 났다. 

내게 있어 아직까지도 최고의 가족영화이자 눈물나는 춤사위는 바로 이 장면이다. 더군다나 행복에 겨운 눈물이니 이건 무엇과도 바꾸기 어렵겠다. 



* 갑작스레 블로그에 시리즈를 하나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시도했던 몇 번의 시리즈는 금새 사라지거나 지속적으로 연재하지 못하곤 했는데, 어찌되었든 이번에는 해보렵니다. 제목처럼 영화 속 눈물 나는 장면,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을 가볍게 추억하는 시리즈가 될 것 같네요. 아, 그리고 남들과 좀 다른 포인트에서도 잘 울곤 하는 제 개인적인 기록이기도 하구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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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어 윌 비 블러드 (There Will Be Blood, 2007)
자본주의와 종교에 관한 무서운 예언서


(스포일러 있음)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작품은 몇 작품 되지 않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 중의 한 명이다.
그의 전작 <매그놀리아>와 <펀치 드렁크 러브>는 가장 인상적으로 남는 영화들 중 하나로,
폴 토마스 앤더슨이라는 감독의 작품을 지금까지도 계속 기다리게 하는 원인이 된 영화들이었다.
그가 2002년 <펀치 드렁크 러브>를 연출한 뒤, 5년이라는 제법 긴 텀을 두고 지난해 선보인 영화가
바로 다니엘 데이 루이스 주연의 <데어 윌 비 블러드>이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로 이미 많은 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작품상, 작곡상, 촬영상 등을 수상하며 화제를 불러모았던 작품으로, 국내에서도 드디어
3월에 이르러서야 소규모 단위의 개봉관에서 만나볼 수가 있었다.
사실 좋아하는 배우나 감독의 작품들은 흔히 기대 만큼이나 걱정도 하게 마련인데,
폴 토마스 앤더슨 만은 걱정하지 않았었다. 많은 작품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분명 '장인'의 분위기를
갖고 있음을 적은 연출작에서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역시! 폴 토마스 앤더슨 이야!'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무거운 주제를 깊은 성찰과 통찰력으로 풀어낸 또 하나의 수작이었다.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의 미국. 석유 개발이 아메리칸 드림으로 자리잡던 이 시기를
배경으로, 폴 토마스 앤더슨은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와 종교의 폭력성과 모순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일단 석유개발자인 주인공 다니엘 플레인뷰 라는 캐릭터는 당시의 사회적 배경과 그 사회의 모순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캐릭터라 할 수 있겠다. 그는 말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사막 한 가운데서 유전을 발견한 뒤
특유의 사업수단으로 이 유전사업을 무섭게 번창해 나간다.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로 다가가길 원하는데, 유전 개발 중 목숨을 잃은 동료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처럼 키우면서,
사람들에게 가족이 중심이 되는 경영전략을 이해시키는 도구로 사용한다. 하지만 아들 H.W가 불의의 사고로
청력을 잃게 되면서 다니엘은 H.W를 버리듯이 다른 곳에 보내고 만다. 이후 자신의 이복 동생이라는 헨리가
등장하는데, 그 동안 자신 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던 다니엘은, 헨리를 자신의 가족으로 여기고
중요한 일들을 함께 하게 된다. 초반에는 완벽하게 헨리를 믿는 듯 하지만, 나중에 헨리가 결국 거짓말을
한 것을 실토하기 전에도, 다니엘은 헨리의 존재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된다. 결국은 아무도 믿을 수 없고,
성공을 공유할 수 없고, 나 외에는 모두 적이라는 그의 논리에 있어서는 가족조차(이복 동생이긴 하지만)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니엘은 자신을 속인 헨리를 결국 자신의 손으로 살해하기에 이르고, 자신의 일을 계속 방해하는
선교사 일라이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지만, 그의 이런 행동에는 기본적으로 경제논리, 즉
자본주의의 이념이 깔려있다. 그는 결론적으로 돈을 벌고, 성공하기 위해서 그 성공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제거한다는 의미의 행동들이지, 이것이 그가 본래 나쁜 사람이라던가 폭력적인 성향을 갖은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그려지지는 않는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가장 큰 모순점이라 할 수 있는데, 모든 것을 경제 논리로만 풀어가고,
과정보다는 결과가 중요시되며, 경쟁에서 성공하는 소수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든 수단이 인정이 되는, 자본주의의 폭력성을 이 영화는 무섭게 묘사하고 있다.



사실 그저 석유개발이 성행했던 시대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아메리칸 드림과 자본주의의 모순만을 그렸다면
(뭐 그래도 그것만으로도 멋진 작품이 되었을 듯 싶지만), 아마도 이 영화가 이 정도로 무섭고 처절한
인간의 군상을 보여준 영화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감독인 폴 토마스 앤더슨은 이 자본주의의 폭력성과
더불어 종교의 모순을 함께 포함시키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다니엘 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이 바로
선교사 일라이의 역할이다. 개척교의 예언자이자 선교사로 등장하는 일라이 선데이는, 처음부터 다니엘에게
매우 호전적이다. 왜냐하면 점점 세를 불려나가길 원하는 그의 교회에는 자본이 필요하고, 그 자본은
바로 다니엘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중반까지 일라이의 모습은 그저 광신도 정도로만 그려진다.
퇴마의식을 갖고 사람들을 현혹하는 모습이 믿음이 가지는 않지만,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그에게서
다니엘 만큼의 폭력성을 찾아보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중반으로 갈 수록, 일라이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댓가를 치르지 않는(금전적으로) 다니엘에게 계속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돈을
요구하게 된다. 이 두 사람의 직접, 간접적인 대결 구도는 매우 흥미롭다. 흔히 등장하는 선악 구도가 아니라,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얻기 위해 고개를 숙이기도, 혹은 소리를 지르기도 하는
경쟁관계로서 두 모순된 가치관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둘의 대결구도는 세월이 많이 흐른 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절정에 이르는데,
오래전 석유 개발을 위해 마을 사람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교회에 가서 일라이에게 무릎을 꿇고,
뺨을 맞아가며 자신의 죄를 소리 높여 크게 외쳤던 다니엘은, 자본이 궁해 자신을 찾아온 일라이에게
자신이 예전 당했던 그 모욕을 그대로 돌려줄 기회를 맞는다. 다니엘이 교회에서 '나는 죄인이다'라고
목청 높여 소리지르기를 강요당하던 장면이 자본주의의 무섭고도 처절한 면을 보여주었다면,
반대로 일라이가 '나는 거짓 예언자다'라고 크게 말하길 강요당하는 장면에서는, 자본주의의 논리에
퇴색되어 버린 종교의 처절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래서 이 두 장면은 이 영화에서는 물론이고,
최근 본 영화를 통틀어서도 가장 무서운 장면이 아니었나 싶다. 이 영화의 제목을 우리말로 해석해보자면
'피를 부를 것이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텐데, 이 제목은 이 영화의 의도를 명확하게 해주고 있다.
순수함과 정의를 잃은 폭력적인 자본주의와 종교는 결국 피를 부르는 파국으로 치닫을 수 밖에는 없다는
것을 원작자와 감독은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연기는 <나의 왼발>도 그렇고, <갱스 오브 뉴욕>에서도 그랬고, 특히 이 영화에서
보여준 것처럼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연기를 보여준다. 흔히들 배우들이 연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캐릭터가 되어 버린다'라는 표현을 쓰곤 하는데, 아마도 이런
표현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를 꼽으라면 단연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아닐까 싶다.
얼핏 보면 감정이 고조된 장면에서 단순히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가 하는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그 연기를 보면서 느끼는 공포감이 단순히 윽박지르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다. 콧수염 만큼이나 진한 눈섭과 그보다 더 깊은 눈에서 쏘아내는
검은 광선은 웃으면서 얘기할 때에도 폭력성이 느껴질 정도로 '다니엘 플레인뷰'라는 캐릭터를
완벽하게 묘사하고 있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개인적으로 다니엘 데이 루이스 만큼이나 인상깊었던 연기를 보여준 배우는
바로 일라이 선데이와 폴 선데이 역할을 맡은 폴 다노 였다. 개인적으로 2006년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리틀 미스 선샤인>에서 침묵 수행을 하는 역할로 등장했던 폴 다노는(아이러니하게도 두 배우 모두
자신의 본명과 같은 이름의 캐릭터로 등장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그 무서운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겨뤄도 주눅들지 않을 만큼 신인으로서는 해내기 힘든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내고 있다.
가지런히 빗어 넘긴 머리와 평화로운 표정 속에 퇴색된 인간성을 드러내야 하는 일라이 역할을
소화해낸 것도 대단하지만, 그 무서운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같은 수준의 에너지를 내며,
연기를 주고 받은 것 만으로도 그로서는 대단한 경험과 필모그래피에 있어서도 중요한 영화가 될 듯 싶다
(이런 것에 비해서 상에 있어서는 너무 외면을 당한 것이 개인적으론 아쉽다).



이 영화에서 또 하나 주목 받는 것은 바로 음악인데, 밴드 라디오헤드(Radiohead)의 기타리스트 조니 그린우드가
맡은 음악은, 굉장히 이질적이고 날카로움을 들려주며 관객에게 지속적으로 불안함과
불편함을 조성하게 한다. 극적인 부분에서도 보통 우리가 들어왔던 방식으로 감정을 고조시키기 보다는,
약간은 어긋나는 음들과 강한 악기의 사용으로 불안감을 고조시키는 방법을 사용하면서,
무거운 주제의 영화를 좀 더 부각시키고 있다.

사실 영화를 딱 보고나서는 이 영화가 쉽게 피부로 느껴지지 않았었다.
배우들의 무서운 열연과 무거운 이야기가 인상적으로 느껴지긴 했었지만,
단번에 느껴지는 걸작은 아니었는데, 감상기를 쓰며 영화를 되돌이켜보고, 곱씹어 볼수록
참 무섭도록 깊은 통찰력과 연출력이 만들어낸 걸작이 아니었나 싶다.



* / 영화의 마지막 부분, 엔딩 크레딧이 다 끝나고 말미에
'이 영화를 로버트 알트만에게 바칩니다'라는 문구가 등장하는데,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이 로버트 알트만 감독에게 얼마나 영향을 받았고,
그 존경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마지막 문구였다.



 

 
글 / ashitaka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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