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개론 (2012)

나의 첫사랑과 90년대에게 바침



'건축학개론'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린 남자주인공을 맡은 이제훈 때문이었다. '파수꾼'을 통해 깊은 인상을 남긴 그였기에 신작이 기대되었던 것인데, 그래도 볼까말까를 고민하던 차에 들려온 시사회 평들은 더 큰 호기심을 갖게 했다. 그 가운데는 '시라노 : 연애조작단'을 떠올리게 한다 라는 얘기도 있었는데, '시라노..'역시 처음에는 이민정만 믿고 갔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을 훔쳤던 영화임을 감안한다면 '건축학개론' 역시 눈물을 이끌어낼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빼먹을 뻔 했는데 이제훈 만큼이나 이 영화에 관심을 갖게 한 것은 바로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었다. 나의 90년대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전람회를 떠올렸을 때, 만약 이 작품 역시 전람회를 그런 추억의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면 분명히 감동스러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건축학개론'은 '기억의 습작'만으로도 소름 돋게 만든 것은 물론, 나중에 가서는 안경이 뿌옇게 변할 정도로 눈물을 주르륵 주르륵 흘리도록 만든 '감동의 걸작'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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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 사랑


'건축학개론'을 정의하는 첫 번째 단어는 아마도 '첫 사랑' 일 것이다. 첫 사랑을 담아낸 영화들은 대부분 애틋하고 간절하며 그립기 마련인데, '건축학개론'은 그 가운데서도 굉장히 디테일이 살아있는 작품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누구나 자신의 첫 사랑을 떠올려 보았을 때 미묘하지만 잘 나타나지 않았던 행동이나 감정들까지 이 영화는 정말 깨알같이 담고 있었다는 얘기다 (적어도 내 경우엔 그랬다). 하나하나 다 언급하기 어려울 정도로, 내 지난 첫 사랑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을 때 '맞아, 나도 저랬어' 하는 부분이 정말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디테일은 자연스럽게 공감대로 연결되었다.


너무나 내 추억과 겹쳐지는 부분이 많다보니 자연스럽게 극중 어린 승민에게 감정이입이 되었고, 어린 서연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내 것으로 바뀌어버렸다. 그런데 이 영화가 첫 사랑을 그린 다른 작품들에 비해 더 좋았던 점은, 첫 사랑의 상대에 대한 애정을 추억하는 것 보다는 누군가를 처음 사랑했던 '나'를 추억하는 작품이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나'의 행동과 감정 하나하나의 디테일이 깨알 같았기에 영화 속 승민에게 100% 감정이입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예전 누군가를 첫 사랑했던 나의 모습이 그대로 비춰졌다. 그래서 쓸쓸한 동시에 행복함이 들었다. 이런 나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 '건축학개론'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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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90년대


첫 사랑의 추억과 더불어 '건축학개론'이 이끌어낸 또 다른 추억은 90년대에 관한 것이었다. 동시대를 살았다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많은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는 점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1970년대 생인 이용주 감독은 1980년대 생들까지 공감할 수 있는 90년대의 정서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당시의 패션이나 유행하던 브랜드의 활용은 물론이고 유행하던 가요들까지 적절히 배치하고 있어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그 때를 떠올리게 만든다. 아마도 영화가 어린 승민의 입장에서 진행된다는 점 때문에 같은 남자로서 더욱 공감할 수 밖에는 없었던 것 같은데, 브랜드 티셔츠와 청바지 하나에 집착하던 모습이나 잘보이고 싶은 이성을 만날 때는 매번 갖고 있는 옷중에 가장 좋은 옷을 입으려고 했었던 추억이 떠올라 애잔한 감정마저 들었다.


그런데 단순히 '나는 별 것도 아닌 것을 그 때는 왜 그랬을까?'라는 생각이 아니라, '그래, 그 때는 그것이 내게 무엇보다 중요했었어'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더 애틋하고 말 못할 무언가가 뭉클하며 끓어올랐달까. 내게 있어 첫 사랑 그 이상으로 중요한 시기였던, 어쩌면 지금까지 짧게나마 살아온 시절 가운데 가장 소중했던 시절이었던 90년대를, 가감없이 그대로 추억할 수 있어서 행복함과 동시에 말 못할 감정에 울컥했던 것 같다. CDP와 독서실, GUESS와 힙합 바지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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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집'이라는 것


영화 제목이 '건축학개론'이기도 하지만, 제목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이 영화는 상당히 자주 '집'이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반문하고 있다. 어린 서연이 제주도에서 홀로 서울에와서 독립해 살게 되는 공간으로서의 '집', 서연과 승민이 유대감을 형성하게 된 공간으로서의 '집', '압서방'으로 불리는 이른바 강남이라는 상대적 우월감의 지역적 표현으로서의 '집', 어른이 된 서연이 아버지를 위해 고향 제주에 지으려고 하는 '집', 서연에게 고백하려는 승민이 그녀에게 선물해주고 싶어 직접 디자인 한 '집', 어른이 된 승민이 결혼을 위해 준비해야만 하는 '집', 그리고 승민의 어머니가 재개발되어도 쉽게 떠나지 못하는 오래된 정릉의 '집' 등 '건축학개론'은 다양한 의미의 집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국 사회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집'이라는 존재에 대해 영화는 소소한 것부터 현실적인 것까지, 영화는 '건축학개론'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첫 사랑의 추억이라는 주제와 병행하여 은연 중에 '집'에 관한 이야기를 슬며시 들려주고 있다. 사실 이 부분은 좀 더 풀어서 자세하게 해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워낙에 앞선 주제들의 추억에 흠뻑 빠지다보니 분석적으로 달려들 동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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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건축학개론' 속 승민의 이야기에는 나의 90년대가 너무 많이 녹여져있었다. 완전히 영화 속 이야기라고 받아들였더라면 그냥 슬프거나 그냥 즐겁거나 했을 텐데, 이것이 내 이야기로 받아들여지다보니 이렇게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그야말로 오만가지 감정이 돋아나는 느낌이었다. 울고, 웃고, 후회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와중에 어느 덧 영화는 또 한 번 '기억의 습작'과 함께 젖어들고 있었다. 아.....나의 첫 사랑과 90년대를 심하게 떠올리게 했던 애틋하고 아픈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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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이런 한국영화에서 재미를 위해 등장하는 캐릭터는 너무 동떨어져 있거나 너무 오버하는 경향이 있어서 오히려 낯뜨거워질 때가 많았는데, '납뜩이'는 그야말로 존재 자체가 납득되는 매력적인 캐릭터였어요 ㅋ 그 깨알 같은 대사들과 연기는 오랜만에 극장에서 소리내어 웃게 만들었네요 ㅎ

2. 처음 옥상에서 '기억의 습작'이 나왔을 때 정말로 거짓말 안보태고 온몸에 다 소름이 돋았어요 ㅠ 정말 '버틸 수 없더'군요 ㅠㅠ

3. GUESS 티셔츠에 관한 에피소드는 정말 어쩔 수 없이 눈물이 막 터져나오더군요. 어쩔 수 없이요 ㅠㅠ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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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노; 연애조작단
맞아, 이건 '시라노'였어!


'시라노; 연애조작단'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물론 개인적으로 '스카우트' (참고로 내게 있어 '스카우트'는 광주민주항쟁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몇 안되는 작품이기도 했다)를 통해 찡한 감동을 주었던 김현석 감독의 작품이라서 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역시 최근 내게 새로운 여신으로 자리잡은 이민정 양을 대형 스크린을 통해 볼 수 있다는 이유가 더 컸다. 즉 팬심이 더 깊었던 것이다. 본래 영화를 보기 전에 영화정보를 최소한으로 접하려 한 것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작품에는 너무 무심했었다. 그 무심했었던 이유를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 초반이 조금 지났을 때 바로 깨우칠 수 있었는데, 바로 이 영화의 제목 때문이었다. 이 영화는 제목부터 '시라노'임을 밝히고 있었는데, 나는 너무 무심한 나머지 '시라노'라는 생각을 전혀 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제라르 드빠르디유 주연의 '시라노'를 이전에 인상깊게 본 입장에서 이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이 뻔하게 느껴졌냐 하면 또 그렇지 않다. 분명 '시라노'를 본 입장에서 스토리의 신선함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다 아는 이야기를 그리는데에 있어서도 그 감동의 깊이는 줄지 않았으니, 김현석 감독의 '시라노' 역시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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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노 하면 제라르 드빠르디유 주연의 1990년작인 프랑스 영화 '시라노'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제라르 드빠르디유 주연의 작품을 제법 보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하면 가장 먼저 특유의 '코'와 함께 이 작품 '시라노'가 먼저 떠오르곤 했는데, 그래서 인지 다른 사람을 빌려(크리스티앙)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편지를 쓴다는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매우 깊게 각인이 되어 있었다. 김현석 감독의 '시라노'는 바로 이 핵심적인 부분이 프랑스 영화와 거의 겹쳐진다. 김현석 감독의 인터뷰를 보다보니 '지난날의 과오를 영화를 통해 고백하고 싶다'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 고백의 정서가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즉, 굳이 영화 '시라노'를 보지 않았더라도 이 영화의 핵심이 되는 스토리텔링은 매우 익숙한 것이었음에도, 이 영화가 빛이 나는건 인물들의 감정표현에 있어 매우 섬세하기 때문이다. 극중 엄태웅이 연기한 병훈은 병훈대로, 이민정이 연기한 희중은 희중대로, 최다니엘이 연기한 상용은 상용대로 그리고 박신혜가 연기한 민영은 또 그녀대로 각자의 스토리와 감정선이 있는데, 이 네 명 가운데 자신의 과거 혹은 현재와 맞아 떨어지는 인물에게 쉽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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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정은 그 자체로 발광한다. 그녀의 클로즈업 장면에서는 숨이 멎는다)

대부분 로맨스 영화는 남녀가 함께 만드는 하나의 이야기나, 남과 여 각각이 만드는 두 가지의 이야기에 각각 공감을 하거나 할 수 있는데,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병훈과 희중이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사실 따지고보면 상용과 민영까지 4명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그러나 복잡하게 뒤섞이지 않아도 각각의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는 매력을 갖고 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 중 하나는 극중에선 주인공이지만 영화에서는 조연이라 할 수 있는 상용을 그리는 방식이었는데, 그가 크리스티앙을 언급하는 장면에서 영화가 한 발 더 나아가는 느낌이었다. 아, 감독이 상용에게도 누구 못지 않은 애정이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 장면이었는데, 이런 생각은 박신혜가 연기한 민영을 봐도 역시 느낄 수 있었다. 사실 민영은 영화 내내 상용 보다도 더 조연에 머물러 있었다. 병훈을 좋아하는 것 같은 미세한 뉘앙스를 주기는 하지만 이를 본격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은 한 번도 없고, 정말 끝까지 '연애조작단'에만 머무르는 것 같았으나, 김현석 감독은 민영에게 역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 영화가 폭풍같이 몰아치는 감정선으로 마무리되지 않고 유쾌하게 마무리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민영에 대한 배려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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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노; 연애조작단'을 보고서는 마치 '500일의 썸머'를 보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두 작품 모두 심하게 한번은 겪게 되는 사랑이라는 것에 대한 추억을 떠올려 볼 수 있었던 동시에, 단순히 아픈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희망까지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연관이 되는 작품이었다. 아마도 뜨거운 연애의 경험이 있었던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이 작품을 보고나면, '그 때의 자신'을 겹쳐보며 울컥이게 되는 동시에 이 이야기가 다 끝나고나면, '맞아, 나도 그랬었지, 그랬었어' 라고 한 마디 툭 던지며 극장을 나올 수 있는 작품이 바로 '시라노; 연애조작단'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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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현석 작품이라 특별히 야구와 관련된 무엇이 나올까 관심을 쫑긋 세우고 있었는데, 약하긴 하지만 고속터미널 씬에서 옆테이블에 야구부가 등장하더군요 ㅎ

2. 최다니엘의 연기변신은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인 것 같기도 해요. 그리고 이 캐스팅은 비교적 성공적이었다고 생각되구요.

3. 엔딩 크래딧에 고마운 사람들을 보면 맨처음 '이병훈, 김희중'이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것이 실제 모델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전국의 모든 이병훈과 김희중에게 고맙다는 뜻인지 모르겠네요. 뭐 둘다 의미있겠지만요.

4. 오랜만에 참 좋은 연애 영화를 봤네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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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은 먼곳에 (2008)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본 님은 먼곳에


본인은 의도한 바가 없다고 했지만 어쨋든 <라디오스타> <즐거운 인생>에 이어 음악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
되어버린 이준익 감독의 <님은 먼곳에>는 분명 기대작이었다. 지금까지 이준익 감독의 영화들은
엄청난 흥행 성공을 거둔 <왕의 남자>를 굳이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황산벌>부터 <즐거운 인생>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어느 정도의 완성도와 이야기를 들려주었기 때문에 신작에 대해서도 아주 큰 기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준익'이라면 하는 기대감이 분명 있었기에 신작 <님은 먼곳에>도 요즘같이 볼 영화와 영화제로
가득 넘치는 가운데도 개봉일날 관람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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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부터 쭈욱 스포일러 있습니다~)


영화의 대략적인 내용은 3대 독자인 신랑(엄태웅)을 군대에 보낸 시골 아낙내 순이(수애)가 남편이 군대에서
사고를 쳐 월남에 가게 되자, 이에 노한 시어머니의 등살에 떠밀려 할 수 없이 월남까지 가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슬쩍 보면 전쟁마저도 아무런 장애가 될 수 없었던 기적적인 두 남녀의 애뜻한 사랑이야기라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님은 먼곳에>에는 이런 이야기에 가장 기본이 되는 '사랑'이 일단 없다.
상길은 부인 말고도 더 사랑하는 듯한 애인이 있으며, 면회를 온 순이에게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묻지만,
순이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다. 시어머니의 대를 이으라는 명령에 휘둘려 매달 면회를 꼬바꼬박 같지만,
아마도 단 한번도 잠자리를 하지 않은 것 같은 분위기로 미뤄봐도 순이와 상길 사이에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단순히 손자를 낳기 위한 시어머니의 도구로 밖에는 여겨지지 않는 관계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 의문이 생기는데 이 두 남녀가 어쩌다가(별로 좋아하는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다) 결혼까지
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이런 것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는다.
처음부터 원하지 않는 정략 결혼이었는지, 아니면 처음엔 사랑했으나 애인이 생기고 소극적이고 시골처녀인
순이는 그저 이혼하면 집으로도 돌아오지 말라는 친부모의 호령이 무서워, 죽은듯이 살아가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이렇게 되면 가장 큰 의문점이 생긴다. 결론적으로 상길은 물론, 순이 역시 상길에게 특별히 사랑하는 감정이
없는데, 월남까지 상길을 만나기 위해 쫓아간다는 설정 자체의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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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영화를 좀 긍정적으로 보는 편인 내겐 다른 시각으로 영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 영화가 전쟁이라는 시련을 겪는 두 남녀의, 혹은 한 여성이 사랑을 찾아가는 여정을 서사적으로 다뤘다기
보다는, 한 여성의 이야기는 맞지만 분위기에서 느껴지듯 사랑을 위해서가 아니라 억눌리고 강요만 당해왔던
자아를 우연치 않은 기회에(이 역시도 강요에 의한 기회로 인해)찾게 되고, 나중에는 마치 자기 최면에 빠지듯
자신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완전히 잊어버렸을 정도로, 오기가 본래 의도마저(본래 의도라는 것이
있었다면)모두 잠식해버리고 마는, 소외되고 억눌려 있던 순수한 한 여성의 원치않는 극적인 변화를 그린
하나의 무서운 여성영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이는 시어머니 강요에 못이겨 월남으로 갈 방법을 찾던 중에 정만(정진영)의 도움과 꼬임에 넘어가
밴드 멤버로 월남에 가게 되고, 그들과 함께 공연을 하며 실패와 성공을 거두게 되면서 결국 남편이 있는
호이얀으로 갈 기회를 잡게 된다. 순이는 영화의 중반부까지 거의 표정이 없는, 반응도 무척 늦는
건조한 이미지를 보여주는데, 이는 자신의 자의로 월남에 왔다기 보다는 하는 수 없이, 피할 수 없어서
여기까지 끌려오듯 오게 된 자신의 처지를 보여주는 듯 하다. 하지만 노래하는걸 그저 좋아했던 순이는
처음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지만, 팝송이 아닌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할 수 있게 되면서
조금씩 무대에서 노래하는 것 자체에 대한 반감도 사라지게 된다. 이것을 '즐기게 된다'로 볼 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시작이 자의로 온 것이 아니라 오기에 가깝게 시작된 것으로 본다면 '즐긴다'라기 보다는
이 역시 웃는게 웃는게 아닌 '오기'로 보는 편이 더 가깝겠다.

그러던 와중에 베트콩에게 포로로 잡혀 굴속에서 잠시 생활하기도 하고, 다시 미군에게 구출(?)되기도 하는
곡절을 겪으면서 점차 순이의 오기는 강해진다. 그래서 구출된 미군 장교를 위해 과감히 몸을 파는
일까지 서슴치 않게 되는데, 앞서 보았듯이 남편인 상길과도 잠자리를 하지 않았던(물론 이 부분은 상길과 순이의
과거 얘기가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확실치는 않지만)순이가 그 좋아하지도 않는 상길을 만나기 위해
미군 장교와 잠자리를 하게 되는 설정이야 말로, 주객이 전도되고, 왜 이러는지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게 되어버린
순이 자신의 오기가 극에 달한 장면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그런데 이 과정에서 이것보다 더
설명이 되지 않는 이상한 설정은 개인적으로 정만이 베트콩에게 풀려나 미군에게 구출된 뒤, 한 번만
미군들을 위해 공연할 수 있도록 해달라며 정성껏 사정하는 모습이었다. 정만은 그저 돈을 벌러 온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람임이 분명한데, 설사 순이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기 위해 그랬다하더라도
이 설정은 정만이라는 캐릭터가 갑자기 선의를 보인 이상한 장면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바로 이 전 장면에서 '님은 먼곳에'를 예쁘게가 아니라 거칠게 부르던 순이의 모습에서는 확실히 오기가 불러낸
자아의 혼란을 겪는 심리상태를 엿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영화를 보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엔딩장면에도 있었다.
드디어 상길을 만난 순이는 달려가 포옹하거나 하지 않고, 말도 없이 상길을 뺨을 여러번 친다. 그리고
서로 눈물을 흘리며 그것으로 영화는 마무리 된다. 얼핏 보기에 이건 전쟁이라는 지옥같은 상황 속에서
드디어 만난 두 남녀가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하고 흘리는 눈물이라기 보다는, 순이가 드디어 조금이나마
자신의 여기까지 오기의 일들을 떠올리며, '내가 왜 이래야 했나' 혹은 '자 봐라, 내가 이 전쟁통에도 니들이
하라는대로 다 해줬다. 됐냐?'라는 식의 회환에서 오는 자기 연민에 눈물로 느껴졌다.
(그렇다면 상길의 눈물의 의미는 단순히 아파서? --;;)

결국 자신의 의견 한 번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있는 듯 없는 듯 소박하게 살아가던 한 시골 여성이,
시어머니의 강요에 못이겨 시작된 월남의 전쟁통을 겪으며, 억눌린 자아를 오기로 풀어내는
그래서 결국은 사회가 원하는 여성의 모습을 스스로 보여주고,'자 됐냐?'하며 쓸쓸히 눈물 지으며 퇴장하는
씁씁할 한 여성의 슬픈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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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중요한건 나중에 이준익 감독의 인터뷰를 보니, 이런 의도에서 만들어진 영화가 아닌것 같아
아쉬움이 들었다. 내 생각과 달라서 아쉬운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저런 의도가 아니었다면
이 영화의 여러가지 설정들이 억지스러움으로 밖에는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칭찬하는 수애의 연기는 개인적으로는 캐릭터 자체의 미스테리가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으나, 나중에 '님은 먼곳에'를 오기에 받쳐 거칠게 부르는 장면에서는 살짝 소름도 돋을 정도로
인상적인 연기가 아니었나 싶다. 이준익 영화의 가장 전형적인 캐릭터라 할 수 있는 정만 역할의 정진영은
연기 자체가 나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역시나 이것도 캐릭터 자체의 미묘함이 있어서 뭐라 평하기는 힘들듯.
(만약 순이의 의도가 정말 상길을 사랑해서, 사랑하는 남편을 찾기 위해 월남까지 온 것이라면, 이 밴드의
남자 멤버들이 이런 순이의 갸륵함에 동화되어 나중에는 몸을 써 군인들을 막아가며 순이가 호이안으로
가게 끔 하는 행동이 살짝 이해도 가지만, 내 생각처럼 오기에 의한 것이었다면, 이 밴드멤버들도
홀딱 속은 것 밖에는 되지 않겠다 ㅎ)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괜찮은 설정이 있었다면, 월남에 참전한 한국군을 그저 돈벌러 왔다는 것으로
직접적으로 묘사한 대사와, 베트콩을 미지의 악당들이 아니라, 순수하고 착한 사람들로 묘사한 점,
미군들의 잔혹함을 묘사한 점은, 베트남전을 침략한 가해자인 미군 위주로 그린 다른 영화들과는 차별되는
점이라 마음에 들었다.




1. 그런데 3대 독자이면 당시에 군대 면제가 아니었나? 이것도 의문.
2. 헬기타고 프로펠러이 바람에 셔츠가 펄럭이는 남은 사람들의 장면을 보면, 여지없이 <영웅본색 3>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르더라.
3. 아무리 그래도 미군이 한국병사 1명을 찾기 위해 수색대를 특별히 조직하거나, 국군이 민간인 여성을
   작전지역에 그렇게 쉽게 데려가는 것도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졌다.




 
 
글 / ashitaka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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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2007) 
현실이 더 안타까운 이야기

임순례 감독이라 조금 기대를 했었다. 워낙에 홍보를 많이 한 탓에 조금은 지쳐있었고,
문소리, 김정은, 김지영, 엄태웅, 조은지 등 배우들이 등장하는 것은 기대도 되었지만
걱정이 되기도 하는 부분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더도 덜도 아닌(굳이 따지자면 조금 아쉬운) 작품이었다.
시작부터 끝날때까지 조금은 너무 뻔하고 신파스러운 줄거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 같고
제목은 '생애 최고의 순간'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인데, 이 현실에 좀 더 충실하고
중심을 두었으면 더 좋은 드라마가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물론 캐릭터들의 힘든 이야기가 있기는
하지만, 조금은 부족했던 탓에 실제로 올림픽이 끝나면 돌아갈 곳이 없는 선수들의 '현실'이
더 와닿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길게 쓸 정도의 감흥을 느꼈던 작품은 아닌 듯 하다.
이 영화의 최고의 장면은 영화가 모두 끝나고 엔딩 크래딧이 올라가기 전에
실제 선수와 감독의 인터뷰 장면이며, 특히 경기 직후 선수들에 대한 얘기를 하던 중 감정이 북받쳐
말을 잇지 못하던 임영철 감독님의 인터뷰 장면이 가장 울컥했던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이 영화의 미덕이라면(그것이 의도되었던 의도된 것이 아니던 간에),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최고의 순간'을 자신들이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그들의 목소리에 부여한 것이라 하겠다.


 
글 / ashitaka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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