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P.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배우라는 이름이 가장 잘 어울렸던 이

선과 악, 강함과 부드러움을 모두 가졌던 배우



설 연휴가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의 복귀를 막 준비하던 이른 아침, 폴 워커를 잃은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이 때에 또 다른 비보가 들려왔다. 바로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사망 소식이었다. 뉴욕의 자신 소유 아파트에서 죽은 채 발견 된 그의 사망 이유는 약물과다인 것으로 현재 추정되고 있다. 이제 그의 나이는 겨우 46이었다.


그의 존재를 처음 제대로 인식한 것은 폴 토마스 앤더슨의 1997년 작 '부기 나이트 (Boogie Nights)' 부터 였던 것 같다. 그 이전 영화들에서도 자주 얼굴을 만날 기회는 종종 있었는데, 얼굴과 이름을 처음으로 매치시킨 작품은 '부기 나이트'였다. 이후 그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페르소나로 그의 작품에서 자주 만나볼 수 있었다.




화려한 캐스팅과 폴 토마스 앤더슨이라는 감독을 더 많은 영화 팬들에게 깊게 각인시켰던 작품인 '매그놀리아 Magnolia, 1999)'에서의 그의 연기는, 톰 크루즈가 연기한 캐릭터처럼 돋보이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그 공간과 하나가 된 것처럼 느껴지는 연기였으나, 확실히 '부기 나이트' 이후 '매그놀리아'를 인상 깊게 보게 되면서 그의 얼굴을 더 자주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후 2000년 카메론 크로우의 '올모스트 페이머스 (Almost Famous)'와 2002년 또 한 번 폴 토마스 앤더슨과 호흡을 맞춘 '펀치 드렁크 러브 (Punch-Drunk Love)'를 거치며, 그의 얼굴과 이름은 영화 팬들 사이에서 점점 더 익숙하고 안정감을 주기 시작했다.




다우트 _ 신앙과도 같은 의심의 나약함

http://realfolkblues.co.kr/878


어찌보면 이 때까지만 해도 항상 조연으로 머물러 있던 그가 단숨에 더 큰 주목을 받게 된 작품은 누가 뭐래도 2005년작 '카포티 (Capote)' 일 것이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모두 석권하면서 명실공히 명배우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의 연기를 계속 보아왔던 영화 팬들 입장에서는 특별히 놀랄 일은 아니었을 정도로, 그는 이미 준비된 배우였다. 실존 인물 트루먼 카포티를 연기한 필립 시모어 호프만은 메소드 연기의 정점을 보여주며, 영화 자체보다도 이를 연기한 배우인 그가 더 주목 받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_ 외로운 시대, 외로운 가족의 초상

http://realfolkblues.co.kr/961


이후 헐리웃의 주목 받는 연기파 배우로 당당히 이름을 올린 그는 시드니 루멧 감독의 유작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Before the Devil Knows You're Dead, 2007)'에서 또 한 번 무게감 있는 캐릭터를 연기하였으며, 2008년 메릴 스트립, 에이미 아담스와 함께 연기한 '다우트 (Doubt)'를 통해 다시 한 번 그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특히 '다우트'는 캐스팅 소식이 알려진 순간부터 엄청난 기대를 모았던 작품이었는데, 메소드 연기에 둘째가라면 서러울 메릴 스트립과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함께 출연한다면 어떤 연기를 펼칠지 두려움이 들 정도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우트'를 보고 나서 썼던 글을 보면 이 두 배우가 함께 등장해 연기를 펼치는 장면을 두고 액션 영화의 '결투 (Duel)' 장면 못지 않은 긴장감과 치열함, 압도됨을 느낄 수 있었다는 표현을 하기도 했었는데, '다우트'는 연기라는 것의 맛을 최대한으로 느낄 수 있는, 그여서 가능한 작품이었다.




시네도키, 뉴욕 _ 외로운, 위로의 일기

http://realfolkblues.co.kr/1181


찰리 카우프만의 감독작 '시네도키, 뉴욕 (Synecdoche, New York, 2008)'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그 해 가장 좋은 작품 중 하나였던 이 작품에서 호프만은 노인 역까지 소화해 내는 등 카우프만의 복잡한 각본을 연기력을 통해 비교적 자연스럽게 소화해 냈다. 이 후 한 동안 그의 작품을 보지 못하다가 2011년 브래드 피트의 주연작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던 '머니볼 (Moneyball)'에서 비교적 적은 분량인 오클랜드 팀 감독 역할을 맡았는데, 사실 생각보다 분량이 적어 놀라기도 했었다. 솔직히 '머니볼'에서 그가 연기한 캐릭터는 반드시 그여야 할 만한 이유가 있는 캐릭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팬으로서 오랜만에 그의 모습을 짧게 나마 볼 수 있어 반가웠던 작품이었다. 그리고 2006년 작 '미션 임파서블 3'를 비롯해 '헝거게임 : 캐칭파이어'에도 출연 하는 등 액션 블록버스터에도 출연하는 조금은 의외의 모습도 만나볼 수 있었다. 이번 그의 사망 기사에도 많은 대중들이 그를 '헝거게임'으로 기억하는 것도 개인적으론 조금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개인적으로 그의 작품을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본 건 폴 토마스 앤더슨의 무시무시한 영화 '마스터 (The Master, 2013)'였다. 메릴 스트립과 호흡을 맞췄던 '다우트'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호아킨 피닉스와 함께 연기한 '마스터'는 영화도 배우도 연기도 실로 무서운 작품이었다. 역시 표면적으로 강렬하고 압도하는 것은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캐릭터였지만, 이를 받쳐주는 것 이상으로 더 큰 아우라를 발산한 것은 다름아닌 호프만이 연기한 마스터였다.




편히 잠들길...



너무 급작스러운 죽음이고 이별이라 아직 잘 실감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의 죽음이 가장 슬픈 사람 중 한 명은 폴 토마스 앤더슨이 아닐까 싶다. 아직도 보고 싶은 그의 연기와 영화들이 많은데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나버렸다.


Rest in Peace.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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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미지의 권리는 각 영화사 에 있습니다.


 





킹메이커 (The Ides of March, 2011)

최선의 선택이란 무엇인가?



조지 클루니가 출연에 연출까지 맡고, 라이언 고슬링, 폴 지아마티,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 마리사 토메이, 에반 레이첼 우드 등 화려한 캐스팅이 눈길을 끄는 영화 '킹메이커 (The Ides of March, 2011)'를 뒤늦게 보았다. 평소 정치에 관심은 물론 적극적으로 활동을 펼치기도 하는 조지 클루니의 작품이라 정치적인 소재를 다뤄도 크게 이상할 것은 없었지만, 영화는 적극적으로 정치적 입장을 펼치기 보다는 오히려 이를 소재로 활용하는 영리한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오히려 정치에 관심도 생각도 많은 조지 클루니이기에 가능한 여유가 아닐까도 싶은데, 조지 클루니는 민주당내 선거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주인공 스티븐 (라이언 고슬링)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살면서 여러번 맞닥들이게 되는 '최선의 선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또 한 번 던지고 있다.



ⓒ Cross Creek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스티븐은 민주당내 차기 대선 후보를 뽑는 것이나 다름 없는 선거에서 모리스 (조지 클루니)를 당선시키기 위해 일하는 선거 캠프의 팀장이다. 젊은 나이에 뛰어난 재능으로 정치계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던 스티븐은, 선거 운동 중 상대 후보 캠프의 모략에 걸려들어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이 믿고 지지하던 모리스의 치명적인 스캔들을 알게 되고 만다.


사실 조지 클루니의 그간 정치적 활동이라던가 '킹메이커'라는 국내 개봉 제목으로 미뤄봤을 때, 예전 비슷한 영화들처럼 선거 캠프의 인물들을 통해 선거와 그 뒷 이야기 그리고 미국내 여러가지 정치적 이야기들을 다룬 영화가 아닐까 했었는데,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킹메이커'의 포커스는 분명 그 곳에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앞서 이야기한 현실적 소재들이 모두 등장하고 실제 사례 (클린턴의 스캔들)들을 인용한 부분들도 등장할 만큼 실제 정치판의 뒷이야기가 살아 있지만, 이것들을 통해 미국내 정치판을 비판하거나 다큐멘터리처럼 재조명하려는 것이라기 보다는 이 사건에 놓인 주인공 스티븐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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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스티븐의 선택이 그러한 점을 더 돋보이게 하는데, 스티븐은 말그대로 영화 속 주인공처럼 정의의 편에 서기 보다는 선택에 선택을 거듭하기는 했지만 씁쓸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결론도 물론 중요하지만 스티븐이 자신이 믿고 따르던 모리스의 스캔들을 알게 된 후 벌이는 갈등과 그로 인한 몇 번의 선택들을 통해 영화는 끊임없이 '최선의 선택'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킹메이커'의 이러한 질문은 개인적으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나에게 아주 깊게 다가왔는데, 최고의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 과정의 정의는 포기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과정의 정의가 없는 최고의 결과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인지를 또 한 번 생각해보게 했다. 실제로 영화가 말하는 것처럼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최고의 결과를 위해 과정의 정의는 무시해도 된다가 아니라, 부득이한 경우 결과를 위해 포기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이며, 과정의 정의 없는 최고의 결과는 무조건 잘못 되었다 가 아니라, 과정의 정의를 위해 최고의 결과를 포기하여 결국 상대의 승리 혹은 최악의 결과를 낳도록 하는 것을 잘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에 문제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러한 문제는 삶의 여러 과정 속에서 겪게 되는 쉽지 않은 선택의 기로인데, 그것이 신념과 맞물렸을 때 개인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또 한 번 깊게 생각해 보게 하는 영화였다 (아, 이 영화에서 역시 답은 없다. 이 문제에 공통된 답이란 것이 과연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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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짜임새 있는 이야기와는 별개로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배부른 영화가 바로 '킹메이커'이다. 최근 보았던 '디센던트'를 통해 더더욱 사랑하게 된 조지 클루니의 경우 정말 못하는게 무엇인지 묻고 싶을 정도로 훌륭한 연출력을 보여주었으며, 등장만으로 무게감을 주는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과 폴 지아마티의 캐스팅은 양 캠프의 무게감을 동등하게 부여하는 가장 쉽고 확실한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큰 역할이 아닌 듯 하지만 마리사 토메이가 연기한 타임지 기자 역할도 가볍지 않았고, 에반 레이첼 우드 역시 자신의 순수한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소비한 캐릭터가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주인공을 연기한 라이언 고슬링의 경우, '드라이브' 이후 최고의 주가를 기록하고 있는 남자 배우답게 연기와 이미지가 완전히 결합된 또 한 번의 결과물을 보여주었으며, 점점 동년배의 헐리웃 다른 남자 배우들과는 차별되는 특별한 이미지를 만들어가고 있는 듯 했다. 이런 이유로 곧 개봉예정인 '블루 발렌타인'이 기대되는 바이다 (미셸 윌리엄스까지 출연하니 이 영화에 대한 기대치가 높을 수 밖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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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전에 극장 상영버전이 화면비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를 보고 패스했다가 이번에 IPTV로 보았는데, 대충 비교해보니 이 버전은 잘린 것 같지는 않더군요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2. 저는 라이언 고슬링과 동갑입니다 -_-;;;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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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도키, 뉴욕 (Synecdoche, New York, 2008)
외로운, 위로의 일기


내 인생의 영화인 <이터널 선샤인>은 감독을 맡은 미셸 공드리만의 것이라보긴 어려운 작품이었다. 사실 찰리 카우프만은 <이터널 선샤인> 개봉 당시에도 워낙에 유명한 각본가였기 때문에 미셸 공드리의 작품이라는 것 외에 그가 각본을 썼다는 이유만으로도 영화 팬들 사이에서는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었는데(이렇게만 써놓으면 은근히 공드리를 무시하는 듯도 하지만, 나는 공드리를 카우 프만 보다 더 좋아하면 좋아했지....), 카우프만의 각본과 공드리의 마술이 더해진 <이터널 선샤인>은 정말 수많은 시네필들을 감동에 빠지게 한 걸작이었다. 찰리 카우프만의 각본은 항상 독특했다. <존 말코비치 되기>를 본 사람들은 '이 영화가 정확히 어떤 이야기를 했었지?' 라는 것은 기억하지 못할 지언정 그 기이한 세계관과 .5층의 이미지는 잊지 못한다. <휴먼 네이처 (Human Nature, 2001)>와 <어댑테이션 (Adaptation, 2002)>을 기억하는 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찰리 카우프만은 '천재 각본가'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창의적이고 놀라운 이야기를 매번 들려주었지만, 그의 연출 데뷔작은 카우프만 없는 공드리의 작품보다 어쩌면 더 걱정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기대와 걱정이 공존했던 찰리 카우프만이 첫 번째 연출작은, 참으로 복잡하고 많은 분석할 거리가 있고 무엇보다 너무 나를 들켜버린 것만 같은 깊디깊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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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연출자 케이든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은 항상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아간다. 불안한 듯 했지만 겉으 로는 표현하지 않으려고 했던 그의 삶은, 어느 날 화가인 아내 아델(캐서린 키너)이 어린 딸을 데리고 떠나버리면서 본격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내가 떠난 뒤 그 동안 자신을 사모해 오던 극장 매표원 헤이즐(사만다 모튼)과 관계를 이어가려고 하는 한편, 거금의 기금을 받게 되면서 평생 꿈꿔오던 연극 작품을 무대에 올릴 수 있게 된다.

<시네도키, 뉴욕>은 카우프만의 야심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전까지는, 공드리와 함께 했던 작품의 분위기를 풍긴다. 이야기보다는 소품같은 단편적 이미지들을 여기저기 배치하는 한 편, Jon Brion의 음악과 함께 몽상적이고 회화적인 이미지를 뮤직비디오처럼 펼쳐놓는다. 이 단편적인 몇 가지 것들은 얼핏 보아서는, 아니 집중해서 보아도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쉽게 유추하기 어렵다. 계속 노인이 주인공의 뒤를 따라오는 것 (혹은 귀신처럼 장면 장면에 등장하는 것)을 어렵게 발견했지만 이것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감을 잡기 어렵고, 변의 색깔을 두고 벌어지는 대화들이 어떤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단번에 분석이 되기 보단 무언가 소스를 늘어놓는 듯한 느낌이 강한 서두다.

연극 연출가인 주인공 케이든을 통해 새로운 작품에 대한 창작의 고통 (<8과 1/2>과 같은)을 이야기하려는 것인가, 혹은 개인적인 고뇌를 좀 더 확장시키려는 것인가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러닝타임이 지속될 수록 찰리 카우프만의 이 거대한 야심에 조금은 두려움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카우프만은 지금까지 전작들에서 항상 개인의 심리상태를 기본으로한 다양한 이야기를 해왔었지만, 어쨋든 소박한 그릇에 담겨 펼쳐진 경우가 많았었는데, 이번 작품은 본인이 연출을 맡은 첫 작품이라는 것에 용기를 얻은 것인지 두려움 없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아마도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닐까 싶은) 거대한 담론을(하지만 결국은 개인의 심리묘사인 이야기를) 주저하지 않고 풀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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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든이라는 캐릭터를 중심으로 제유법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펼치고 있는 카우프만의 이 놀라운 이야기는, 그 세계를 다층적으로 확장시키는 것을 반복했다가 다시 모든 거풀을 벗어내고 처음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케이든은 맥아더 제단으로부터 기금을 지원 받아 연극을 제작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간단하게 시작했던 이야기가 점점 확장되고 진실된 것을 투영하려는 의지가 뒷받침되며 본격적으로 자신 본연의 이야기를 무대 위에 그대로 올리게 된다. 이 자체가 제유법이라 할 수 있지만 카우프만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어느 날 나타난 남자는 케이든을 쭈욱 지켜보았고 자신이 케이든보다도 케이든을 더욱 잘 이해하고 있다며 그의 역할을 하기를 자청한다(이 남자는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기 이전부터 영화 시작부터 계속 화면 어딘가에 등장했었다). 이 남자 새미 (톰 누난)가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점점 더 제유법의 세계로 깊게 빠져든다.


새미는 단순히 연극에서 케이든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케이든 보다도 더 케이든 임을 믿고 있는(이건 분명 믿음이다) 존재라 가끔씩 케이든과 부딪히기도 한다. 케이든은 극중 자신을 연기하는 새미가 무대라는 공간을 넘어 현실에서 자신의 행세를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크게 제지하지도 않는다. 새미 말고도 케이든 주변의 모든 인물들이 연극 속에서 다른 인물들을 통해 복층 구조로 등장한다. 나중에는 케이든과 연극 속에서 케이든을 연기하는 새미, 그리고 극 속에서 연출을 하는 케이든까지.. 한 명의 캐릭터를 여러 개의 모습으로(신체로) 쪼개어 놓는다. 이런 카우프만의 세계는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의 기본 이론이 되었던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을 연상케 한다. 점점 제유법의 세계가 깊어지면서 이 극을 연출하고 있는 케이든도 그 속에서 케이든을 연기하는 새미도, 그리고 그 캐릭터의 본 주인들과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모든 캐릭터들은 정체성과 그 세계의 공간적 정체성에 혼란을 겪게 된다. 관객 역시 어디까지가 연극의 범주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의 범주인지 쉽게 구별되지 않아 혼란을 겪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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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복잡한 방법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긴 하지만, 제유법이라는 것이 부분으로 전체를 전체로 부분을 이야기하는 표현법이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카우프만의 이야기는 항상 부분 그러니까 케이든의 심리상태를 통해 인간 본연의 대한 깊은 심연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카우프만의 이야기를 항상 귀담아 듣게 되는 것은 사실 영상 예술의 화려함과 독특함 때문이 아니라, 그가 갖고 있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위로 때문이었다. 사실 영화가 초반에 이르러 중반으로 진행될 때 까지만 해도, 점점 거대해 지는 세계관을 보며 첫 단독 연출작이라서 그런지 너무 욕심'만'을 내는 것이 아닌가 부담스럽기도 했었는데, 나중에 가서는 다시 본연의 이야기로 돌아올 때 눈가가 저절로 뜨거워져 버리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카우프만이 케이든을 풀어내는 방식에는 앞서 말했던 것 처럼 위로가 기본이 된다. 복잡한 제유법이니, 공드리 같은 마술같은 기법이니, 분석하고 싶은 욕구가 드는 다양한 장치들이니 해도, 이것들은 모두 위로와 자기반영이라는 메시지를 꾸며주는 기법들일 뿐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바로 여기에 있다. 카우프만은 본인 첫 번째 연출작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이 작품은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영화적인 이야기가 되어버린 측면도 있다. <시네도키, 뉴욕>에서 제유법을 다루는 방식은 확실히 영화적인 요소에 도움이 된다. 물론 이 복잡한 구성 때문에 본질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생긴 것도 사실이지만, 어쨌든 카우프만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었다. 아마 본인도 작품을 완성하고나서 굉장히 뿌듯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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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위로의 메시지로 돌아와서. <시네도키, 뉴욕>이 개인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갖는 이유를 골똘히 생각해보았다. 그리곤 그 이유가 상당히 개인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매번 영화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이라고 얘기하는 나이지만, 이번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였던 것 같다. 개인적인 것이기에 영화는 더 많은 공감대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예술이기도 한데, 이 작품은 공감대를 얻으려는 노력 측면에 있어서 확실히 다른 작품에 비해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실 중반까지는 카우프만이 만든 이 세계에서 몹시도 혼란스러웠었다. 그런데 오히려 인물의 세분화되고 그 세분화된 인물들이 서로의 자리를 찾아가면서 (진심의 목소리를 들려주면서) 공감대는 한 순간에 폭발했다. 인간은 누구나 외로운 존재라고들 이야기한다. 곁에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가 있는 것과는 별개의 이야기다. 인간은 늘 내면의 나와 싸운다. 아니 누군가가 나를 내가 아는 것처럼 이해해주길 몹시도 바란다. 극중 케이든이 겪는 고뇌는 창작의 고통이라기 보다는 위로와 이해에 가깝다. 그래서 그는 여러 인물들에게 기대어도 보고,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기도 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극으로 만들어 보기도 하는 것이다.

말미에 케이든에게 또 다른 케이든인 새미가 진심으로 그를 이해하고 안쓰러워하며 메시지를 전할 때, 정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나왔다. 그 순간은 분명 이 영화에 클라이맥스였다. 내가 남들에게서 듣고 싶은 말을 나의 분신(결국 나)에게서 듣게 되는 이 순간, 즉 누군가가 (하지만 타인이라고 보긴 어려운 존재에게) 나를 100% 이해한다는 것을 믿게 되었을 때의 찰나는 어떤 기분일지 잘 상상이 되질 않았었는데, 비록 영화 속 새미는 타인이라기보단 내 마음 속 외침에 더 가까운 존재였고, 영화 속에서 벌어진 간접 경험이긴 했지만 매우 소중한, 그리고 감격적인 찰나였다. 찰리 카우프만과 나는 한 번 만난적도 없을 뿐더러 내가 그를 아는 것은 그가 쓴 몇 편의 작품일 뿐인데, 누군가가 나를 이렇게 뼈속까지 공감하게 만들었다니, 슬픔과 위로가 동시에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누구에게나, 아니 적어도 나에게는 아무리 가까운 이에게도 쉽게 말하지 못한 나만의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결핍일 수도 있고, 부끄러움일 수도 있으며 사랑일 수도 있다. 이런 말 못할 이야기를 위로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영화에 가장 큰 미덕이 아닐까. 그래서 찰리 카우프만의 <시네도키, 뉴욕>은 적어도 나에게는 <이터널 선샤인>과 더불어 가장 소중한 작품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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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연한 배우들의 연기가 모두 너무 만족스러웠습니다.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이야 더 말할 것도 없고, 아델 역할을 맡은 캐서린 키너도 그 이미지가 참 좋았으며, 새미 역을 맡은 톰 누난과 여전히 빛나는 미셸 윌리엄스 등 너무 많은 좋은 배우들이 나와 그들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흐뭇했던 작품이었습니다. 특히 에밀리 왓슨이나 제니퍼 제이슨 리, 다이안 위스트 등은 출연사실 조차 몰랐기 때문에 더욱 반가웠구요.

2.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배우를 꼽으라면 헤이즐 역할을 맡은 사만다 모튼이었어요. 사실 <마이너리티 리포트> 당시만 해도 이 배우가 이렇게 연기로서 성장할 줄은 몰랐었죠. <컨트롤>을 통해 그녀를 다시 보게 되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더욱 노련한 연기의 그녀를 만나볼 수 있어요.

3. Jon Brion의 음악은 확실히 좋습니다.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그의 음악 때문에 공드리의 작품 냄새가 좀 더 짙어진다는 것 정도일 것 같네요. 국내에도 OST가 발매될 수 있을까요.

4. 본래는 각본만 카우프만이 쓰고 연출은 스파이크 존즈가 하려했던 작품이었는데, 그의 버전도 나쁘지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카우프만의 연출작에 100% 만족하게 되었네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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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Before The Devil Knows You, 2007)
외로운 시대, 외로운 가족의 초상


2007년 작이긴 하지만 이번에 국내에는 처음 정식으로 선보이게 된 시드니 루멧 감독의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는 <12인의 성난 사람들>, 알 파치노가 열연했던 <뜨거운 오후>, 범죄/미스테리 영화의 대표작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 등을 연출했던 거장 시드니 루멧의 작품이라는 점만으로도 일단 관심을 갖게 되었던 작품이었다. 감독의 이름을 보고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여기에 출연한 배우들의 면면을 보니 이건 더 대단한 것이 아닌가. <카포티>와 <다우트>를 통해 새삼스럽게 연기력을 평가받고 있는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과 오랜만에 스크린에서 연기하는 모습을 만나게 된(적어도 개인적으론) 에단 호크, 그리고 최근 <더 레슬러>를 통해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던 마리사 토메이와 대배우 알버트 피니까지. 이런 배우들과 시드니 루멧이라는 감독이 만들어낸 작품은 과연 어떨지 영화 팬으로서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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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범죄 현장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들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지는 일단 생략한채 살인이 발생하게 되는 범죄 현장을 보여주고는 천천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게 된다. 그런데 이 범죄 현장에 얽힌 이들과 사연이 예사롭지가 않다. 아니 오히려 너무 일반적이고 현실적이라 예사로움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형제인 에디(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와 행크(에단 호크)는 각자의 경제적 사정 때문에 보석상을 털기로 계획을 세운다. 아, 계획은 형인 에디가 한 것이며 행크는 단지 실행할 뿐이다. 그런데 이 보석가게는 다름 아닌 형제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가게다. 이 계획에 흥미로운 점은 결과적으로 피해자가 없는 범죄라는 것이다. 자신들은 보석상을 털어서 돈을 챙기고 부모님은 보험을 들어 놓았기 때문에 피해는 커녕 오히려 득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더군다나 범행 예상시간에는 가게 내에 노인 한 명만 지키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별다른 몸싸움이나 인명 피해 없이 저지를 수 있는 상황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훔치려는(얻으려는) 돈이 일확천금이 아니라 단순히 현재 자신들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할 만한 정도라는 것이다.

보통 범죄 영화와 이 영화가 가장 차별되는 점은 바로 이 목적에 있다 하겠는데, 이 계획은 에디와 행크에게는 각자 사소하다면 사소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일 뿐이고, 그들의 계획대로 된다면 아무도 피해받지 않고 서로의 이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들은 표면적으로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 정도만을 목적으로 한 범행이었으며, 더 이상은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들의 이런 계획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전개가 된다. 에디의 계획에는 없었던 인물이 행크의 뜻에 따라 합류하게 되었고, 목숨을 잃은 사람이 2명이나 발생하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형제의 어머니가 가게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죽음을 맞이 하게 된다. 계획대로 일이 되지 않자 이들 형제는 몹시 당황하게 된다. 평소 우유부단하고 독립성이 부족했던 동생 행크는 이 현실에 어쩔 줄을 몰라하고, 모든 일을 계획대로 이뤄 처리하던 형 에디도 자신이 예상치 못했던 변수들로 인해 틀어져 버린 이 현실 때문에 공황상태에 빠져버린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롭게 보았던 점은 바로 이런 점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발생했을 때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인물들이 모습, 더 나아가 결국 이들이(이럴 필요도, 그럴만한 목적이나 악의를 애초부터 갖지 않았던 이들이) 얼마나 급격하게 무너져 내리는 가에 대한 묘사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 영화는 기법 측면에서 사건이 진행되고 나서 그 사이에 각 인물들이 어떤 과정을 겪어왔는가 일종의 플래쉬백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데, 이를 단순히 기법 측면만으로 해석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을 듯 하다. 제목인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전에'에서도 알 수 있듯이, '~ 뭐 하기 전에' 라는 뉘앙스와 계속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 그 전으로 돌아가는 구성 방식은, 이런 일을 겪지 않을 수도 있었던 나약한 인간들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이 담겨있으며, 항상 이런 불안 요소를 잠재한 채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외로운 이들과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의도에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된다.

바로 이 불안감에 대해 영화는 또 깊게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겉보기에는 크게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인물들, 그리고 별로 문제가 될 것 같아 보이지 않았던 일들이 결국 모두 표면 밖으로 터져나오는 걸 보여주면서, 이런 불안감을 항상 잠재하고 있는 현실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듯 했다. 범죄 현장에 무엇을 남기지는 않았는지, 목격자는 없었는지 행크에게 닥달하듯 계속 되묻는 에디의 모습에서는 멀쩡해 보이는 겉모습 뒤에 어떤 불안의 잠재요소가 있는지 되묻는 것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불안 요소를 더 증폭시키기 위해 영화 음악이 의도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이 영화의 영화 음악은 마치 사운드 시스템에 오류가 난 것이 아닌가 흠짓 착각했을 정도로 계속 불안하게 음이 끊긴 채로 전달된다. 이렇듯 관객의 심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영화 속 인물들의 불안한 심리를 더 극대화 시키려는 영화적 장치로 사용되고 있다.




또 하나 생각해볼 수 있었던 건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통한 인물들의 해석이었는데, 아버지로 부터 이어진 가족의 불안요소와 불화가 결국 어떤 결말로 이어지는지를 보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 각 인물들의 상황을 겪으면서 이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어떻게 작용되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 더욱 흥미로웠다. 에디와 행크는 예상치 못했던 일들을 겪으면서 본인도 의도 하지 않았던 일들을 더 저지르며 상황을 악화시키게 된다. 특히 본래는 아무도 죽이지 않으려던(그래서 총도 장난감 총만 준비하고자 했던) 계획을 세웠던 에디는 사태가 급변하면서 이 사건에 관련된 이들을 거침없이 죽음에 이르게 한다. 내러티브 측면에서 왜 에디가 필요없는 사람까지 죽여야 했는가라고 묻는 다면, 이 상황에 놓인 에디는 이미 그런 맥락을 다 따져가며 살인을 저지르는 심리 상태가 절대 아니었다고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 스스로도 공포스러울 정도로 일을 최악으로 몰고 가버리게 되는데, 이건 일종의 불안에 잠식되어버린 연약한 인간상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가족으로 다시 돌아와서. 흥미로운 점은 에디나 행크의 모습이 너무도 외로워 보였다는 것이다. 일단 애초에 문제가 되었던 경제적인 문제를 나누고 들어줄 만한 친구나 동료가 이들에게는 없었으며, 사태가 최악으로 치닫았을 때도 고민을 들어줄 존재라고는 결국 자신들 밖에는 없었다. 특히 에디의 경우는 돈을 주고 마약을 거래하는 마약상에게 자신의 이런 고민을 털어놓게 되는데, 마약상은 딱 잘라 관심없음을 표현한다. 정말 자신을 잘 표현하지 않는 에디가 참다참다 못해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을 사람이 이런 남과도 같은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는 점은, 가정 내에서 문제를 겪은 이들이 얼마나 다른 사람들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데 실패했는지를 통해 이들이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 속에서 에디와 행크가 끊임 없이 서로에게 전화하는 것은(특히 에디가) 단순히 이 사건에 둘이 공모했다기 보다는 이런 고민을 나눌만한 이가 서로 밖에는 없기 때문인 점도 들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외로운 시대에 외로운 존재였던 이들이 어떤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닥쳤을 때 얼마나 쉽게 무너져 내리는지, 이들이 이렇게 까지 되어버린 데에는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얼마나 큰 책임이 있었는지를 이야기하는 텍스트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정작 감독은 이 영화를 멜로 드라마로 규정하기도 했는데, 그런 측면도 발견할 수는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지금까지 얘기했던 것과 같은 것으로 더 받아들이게 되었다.




<다우트>를 보며 '와, 연기만으로도 이렇게 공포감을 느낄 수 있구나'하는 것을 실감하곤 참 대단하다고 느꼈었는데, 이 영화에서 배우들이 보여주는 연기는 또 다른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을 듯 하다.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은 이 영화 내에서 거의 감정이 폭발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는데, 별로 폭발시키지 않고 내색을 하지 않는 듯 하면서도 이렇게 캐릭터에 무게감을 전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이 영화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전작들을 통해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의 여러 종류 연기를 만나볼 수 있었는데, 이 영화에서 그가 보여준 연기는 그의 또 다른 면목을 새삼 느끼게 하는 고수의 연기였다 하겠다.

에단 호크는 자신 본인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의 이미지를 이 영화에서 잘 표현해 내고 있다 하겠다. 단순히 이미지를 소비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기반으로 영화 속에 잘 녹여낸 경우로서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정도를 보여주고 있다. 마리사 토메이는 최근 작품들에서 연이어 노출 장면이 많아 한편으론 '괜찮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그 독특한 말투는 과연 이 사람이 <더 레슬러>에 나왔던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이기도 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은 연기를 펼친 배우는 아버지 역할을 연기한 알버트 피니였다. 복잡하게 얽혀버린 가족사를 점점 알게 되는 인물을 연기하는 알버트 피니의 모습은 현실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과는 다른 측면에서 압도당하는 느낌을 관객에게 전한다. 표정 하나하나에서 그야말로 '열연'을 느낄 수 있었고, 이 영화가 좀 더 풍부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는데에 크게 한 몫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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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나고 이어진 진중권 교수님과의 씨네토크 사진들. 클릭하면 좀 더 큰사이즈로 보실 수 있어요)

이 날은 영화가 끝나고 진중권 교수님이 함께하는 씨네토크가 이어졌다. 기존 영화 관계자나 평론가가 참가하는 씨네토크와는 달리 진교수님이 자신의 정리해온 내용을 발표형식으로 진행한 이후 토크를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아무래도 영화 평론가라던가 관계자와 함께하는 방식이 아니다보니 일반적인 씨네토크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진행이 되었던 것 같다. 좀 색다른 분위기의 씨네토크여서 흥미롭기도 했고, 영화 내용에 관한 토론보다는 철학적 텍스트에 관한 (아무래도 씨네토크 진행자와 참가자들의 성향에 따라 이런 방식으로 흐르게 되었던 것 같다)  이야기로 이어져 신선하기도 했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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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우트 (Doubt, 2008)
신앙과도 같은 의심의 나약함


메릴 스트립과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 그리고 에이미 아담스까지.이 작품 <다우트>는 정말로 오로지 이 배우들의 이름들만으로 선택을 하게 되었던 영화였다. 최근 <맘마 미아!>를 통해 수준급의 노래실력과 색다른 연기변신을 통해 역시 헐리웃 최고의 명배우임을 새삼 확인시켰던 메릴 스트립과 <카포티>로 비로소 더 큰 인정을 받게 된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카포티>이전에도 그의 연기는 항상 최고였다), 그리고 <준벅>과 <마법에 걸린 사랑>등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던 에이미 아담스까지. 이 영화 <다우트>는 원작인 연극을 전혀 모르더라도 이들만 믿고 선택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영화였고, 결과적으로도 그랬다. 그리고 이 영화가 이야기하려는 바로 '의심'과 '믿음'에 관한 이야기는 이들을 통해 매우 효과적이고 극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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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성니콜라스'라는 한 학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교구에서 운영하는 학교이며,
알로이시스(메릴 스트립)수녀가 교장을 맡고 있으며, 플린 신부(필립 세이무어 호프먼)는 이 곳의 주임신부이며, 에이미 아담스가 연기한 제임스 수녀 역시 이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이다. 알로이시스 수녀는 엄격한 규율과 통제를 교훈으로 삼는 무서운 교장이자 의심이 많은 수녀이고 이에 반해 플린 신부는 술을 즐기고 아이들과도 격없이 지내는 것들에서 알 수 있듯 상당히 진보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제임스 수녀는 말그대로 주께 모든것을 바치기로 종신서원을 한지 그리 오래되지 않는 듯한 순수함을 갖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어느날 플린 신부는 '의심'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강론을 하게 되는데, 모든 일에 날이 서 있는 듯한 알로이시스 수녀는 왜 '의심'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플린 신부가 강론을 했을지, 무슨 의도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 의심하게 되고, 이에 대해서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제임스 수녀조차 플린 신부가 학교에 새로 전학온 유일한 흑인학생인 도널드와의 관계를 서서히 의심하기에 이른다.

이 영화의 대부분의 러닝타임은 이 세 인물의 갈등구조에 있다. 그리고 간접적인 방법으로 또는 직접적인 방법으로 표현되는 인물들 간의 세력다툼과 갈등에 대한 묘사가 몹시도 매력적이다. 원칙과 규율을 중시하는 알로이시스 수녀에게 진보적 성향의 플린 신부는 어찌보면 눈에 가시 같은 존재다. 정확한 상하관계는 아니지만 신부와 수녀의 관계이면서도 한편으론 학교의 교장으로서 더 높은 지위임을 확인시키려는 알로이시스 수녀와 이에 은근히 신부로서 수녀에게 지지 않으려는 플린 신부의 미묘한 밀고 당기기는 교장실을 배경으로한 장면에서 흥미롭게 묘사되고 있다. 설탕 같이 단 것은 죄악시 하는 알로이시스 수녀와 설탕을 무려 3개나 타서 먹는 플린 신부, 연필을 고수하는 수녀와 볼펜을 선호하는 신부, 교장실에 들어오자마자 자연스럽게 교장의 자리인(그러니까 알로이시스 수녀의 자리인) 곳에 앉는 신부와 이를 처음부터 불편하게 생각하다가 플린 신부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마자 냉큼 자리에 앉는 수녀의 모습까지. 이 작은 공간 안에서 소소한 표현들만 봐도 이 두 인물이 얼마나 다른 캐릭터인가를 직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자신 만의 세계가 확고한 이 두 인물 사이에 놓인 순수한 제임스 수녀라는 캐릭터도 매우 흥미롭다. 순수함을 상징하는  제임스 수녀답게 그는 이 두 인물 사이에서 몹시도 갈팡질팡 한다. 알로이시스 수녀의 강압적인 분위기에 휩쓸려 플린 신부를 함께 의심했다가 플린 신부의 진실된 이야기를 듣고서는 다시 알로이시스 수녀를 의심하게 된다. 제임스 수녀라는 캐릭터는 본인 스스로의 능동적인 부분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플린 신부와 알로이시스 수녀 간의 힘겨루기에 있어 중요한 캐스팅보트로 작용되고 있기도 하다. 둘의 의견 중 어느 한 쪽이 완벽하게 다른 한쪽을 압도하지 못하기 때문에 중간자적 입장인 제임스  수녀를 자신의 편으로 영입하려 드는 것이다. 결국 제임스 수녀는 플린 신부의 진심에 서게 되지만, 그렇다고 플린 신부가 일종의 승리를 거두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영화 <다우트>가 가장 흥미로운 점은 바로 제목인 '의심'에만 집중할 뿐 '진실' 자체에는 그리 주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스릴러가 아니다. 스릴러였다면 바로 그 진실에 집중해서 플린 신부가 정말 도널드를 비롯해 예전 교구에서도 그렇고 무슨 문제를 일으켰던 것인지, 아니면 이 모든 것이 단순히 알로이시스 수녀에 의심으로 인한 오해였던 것인지에 대해 분명히 마무리했겠지만, <다우트>는 진실 자체보다는 제목처럼 '의심'이라는 것에 더 큰 흥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진실보다는 의심 자체에 집중하고 있는 것은 도널드의 어머니인 밀러 부인(비올라 데이비스)과 알로이시스 수녀의 대화에서 매우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플린 신부를 의심하는 수녀의 말에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반적인 대답으로 대응하던 밀러 부인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플린 신부의 잘못을 얘기하는 알로이시스 수녀에게 결국 본심을 이야기하고 만다. 그 본심인 즉슨 플린 신부가 실제로 아이를 유혹했던 그렇지 않았던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도널드의 동성애적 성향 때문에 이미 여러 학교들을 전학다녔었고, 성 니콜라스 학교를 졸업하면 더 좋은 학교로 진학할 수  있기 때문에 어찌되었든 조금만 더 서로 눈감고 지내기만 한다면 된다는 것, 그리고 플린 신부가 아이를 유혹했다 하더라도 도널드가 신부에게 지금처럼 의지한다면 크게 문제가 될 것 없다고 얘기하는 이 장면은, 실체보다는 그저 자신이 믿는 그대로 이루어만 지면 상관없다는 나약한 인간들의 군상을 보여주는 단적인 시퀀스였다.

영화의 마지막 플린 신부는 더 좋은 곳으로 일종의 승진이 되어 부임하게 되었고, 잠시 아픈 오빠를 간호하기 위해 고향에 갔다가 돌아온 제임스 수녀에게 알로이시스 수녀는 울면서 고백을 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자신에게 확고한 믿음이 있었던 것으로만 알았던 알로이시스 수녀에 의심과 믿음에는 결국 아무런 실체도 없었던 것이다.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막연한 확신과 선입견을 통해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을 넘어서서 스스로도 완벽히 옳다고 확신할 만큼 강한 자기 최면을 걸어온 것이다. 영화 내내 그 어떤 공포영화의 캐릭터 못지 않는 강한 포스를 내 뿜던 알로이시스 수녀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이 마지막 장면을 보니, 결국 가장 나약한 캐릭터는 알로이시스 수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언가가 자꾸 의심되서 어쩔 수가 없다는 그녀의 눈물의 고백은, 특별한 케이스라기보다는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컴플렉스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는 것, 더 나아가 자신과 여러가지로 맞지 않는 이의 행동과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등은 어찌보면 가장 태생적인 컴플렉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알로이시스 수녀는 어쩔 수 없는 의심스러움을 결국 인정하지 못하고 있지도 않은 구실들을 만들어가면서 자기 최면을 걸어왔던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그녀가 수녀가 된 것은 어쩌면 이런 컴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도피 행동으로 인식될 수도 있겠다. 실체없는 의심에 가득차 있는 그녀에게 절대자인 '종교적 믿음'은 분명히 편안한 도피처가 되었을테니 말이다.




연극을 원작으로 한 만큼 <다우트>의 강점은 연기력에 근거한 전개 방식에 있다. 그런 이유로 배우들의 연기력이 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다른 작품에 비해 더 크다고 할 수 있는데, 주조연 배우들의 연기는 그야말로 '명불허전'.  메릴 스트립과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이 언성을 높여가며 열연을 펼치는 장면은, 마치 액션영화의 '듀얼'신을 보는 듯한  치열함과 임팩트가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으며, 아무런 영화적 장치없이 배우의 연기만으로 압도당하는 느낌마저 받을 수 있었다. 극중 알로이시스 수녀 역할을 맡은 메릴 스트립을 보면, 지금까지 수많은 영화에서 수많은 캐릭터를 연기해온 배우이지만 마치 알로이시스 수녀 역할을 처음부터 맡기위해 정해진 배우처럼 또 한번 완벽한 연기를 펼치고 있다. 그녀가 연기한 캐릭터를 보면서 객석 여기저기서 너무도 동요된 나머지 혀를 차거나 탄성을 내질렀을 정도로 (마치 아주머니들이 일일연속극 속 나쁜 역할로 출연하는 배우를 실제 나쁜 사람인걸로 오해하는 것처럼),  어찌보면 그저 이상하게만 보일 수 있었던 캐릭터에 영혼을 불어넣은 깊은 연기 내공을 그야말로 '시전'하고 있다.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은 서두에 얘기했듯이 대중들에게 늦게 인정받았을 뿐이지, 이미 최고의 연기를 여러 번 보여주었었다. 이 영화에서도 역시 능글맞게 신부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내고 있는 것이 역시 그 답다.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도 선과 악을 동시에 담고 있는 마스크와 연기력을 갖고 있는 몇 안되는 배우라고 생각되는데, 의심을 받고 있어 관객조차 이것이 의심인지 진실인지 알지 못하도록 하는 플린 신부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내고 있다.

워낙에 쟁쟁한 두 배우 덕에 조금 소외된 듯한 경향도 있지만, <다우트>에서 에이미 아담스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녀가 영화 속 제임스 수녀를 통해 다 보여주었다고 생각된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그녀의 순수한 표정 연기와  두 거대한 주장들 속에서 갈등하고 흔들리는 캐릭터를 떨리는 눈동자와 소극적인 움직임으로 잘 표현해 내고 있다. 포스터 이미지나 영화의 내용적인 면들에서도 은유적을 표현되듯이 <다우트>는 삼각관계 혹은 삼위일체의 구성을 담고 있는 영화이고, 그 축의 당당한 하나는 바로 에이미 아담스가 연기한 제임스 수녀라 할 수 있겠다.

혹자는 '마법의 10분'이라고도 표현했듯이 극중 도널드의 엄마 역할 출연한 비올라 데이비스가 메릴 스트립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비올라의 연기는 이 영화의 최고의 순간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다(그녀는 이 영화를 통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에 에이미 아담스와 함께 노미네이트 되기도 했다).

<다우트>는 군더더기 없이 훌륭한 연기를 통한 생각해 볼 거리에 극도로 집중하고 있는 영화라 할 수 있겠다.
중견 배우들의 최고 수준의 연기를 만나볼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볼만한 가치가 있고도 넘치며,  무엇보다 관계와 갈등, 과정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해볼 수 있었던 영화이기도 했다.


한줄평 : 최고 연기 내공의 고수들이 펼치는 의심과 확신의 나홀로 줄다리기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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