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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고질라 (シン・ゴジラ, 2016)

현 일본 정치/사회에 대한 메시지의 한계


에반게리온의 후속 편을 고대하고 있었으나 안노 히데아키는 고질라가 등장하는 실사 영화를 먼저 선택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안노는 '신 고질라'를 마치 야시마 작전의 실사 버전처럼 그려냈다. 실제 에바에 등장했던 배경음악까지 그대로 삽입되었기에 이러한 싱크로율은 더했는데, 고질라의 활약상(?)을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안노의 '신 고질라'는 상당히 정치적이고 또 현재의 일본 사회가 처한 여러 가지 문제를 전면에 내세운 조금 의외의 영화였다. 그리고 이러한 영화의 시각은 일본 사회의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동시에 상당히 우려할 만한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기도 해 실망스러움이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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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신 고질라'는 미지의 존재인 고질라가 일본 대륙에 상륙하면서 벌어지는 그 자체의 사건보다는 이 일을 통해 드러나는 일본 사회의 문제점과 해결책을 훨씬 더 비중 있게 그려낸 영화다. 조금의 과장을 보태자면 고질라는 그저 몇 걸음 걷는 것을 반복할 뿐이고 대부분의 시간은 정부의 각 부처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회의하고 또 회의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문제점은 일본의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과 국제 사회 속에서 일본이 처한 현실에 대한 답답함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정치와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의 시선은 꼭 일본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기에 좀 더 보편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지만 (물론 여기도 더 깊게 일본에 한정 지어 따져볼 만한 부분은 존재한다), 국제 사회 속 일본이 처한 상황에 대한 영화의 시선은 제3자의 입장 (굳이 침략당했던 당사국으로서의 입장을 꺼내기 전에도)에서 보았을 때 분명 불편하고, 시기상조의 느낌을 지우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핵공격을 두고 여전히 피해자의 입장에만 서고자 하는 그들의 시선과 자위대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 자신들의 현실을 최대한 고립과 무능으로 밀어 넣는 방식은, 결국 이제는 미국이나 국제 사회의 허용 없이도 스스로 군사력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자위권 발동의 논리로 이어지는데, 이것이 일본 내에서는 어느 정도 인정받고 지지받을 수 있는 주장일지는 몰라도 제3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땐 분명 시기상조와 편협한 논리일 수 밖에는 없었다. 


영화는 고질라가 도쿄 한 복판에 등장해 도시를 잠식해 나가는 상황과 이 가운데 정부 스스로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답답한 현실을 보여주며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결국 아무것도 없잖아'라는 식의 한탄과 불만을 터뜨리는데, 처한 현실 인식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 이전에 왜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런 원인을 감안했을 때 어떤 부분들을 감수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동반되지 않은 점이 바로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자국 내에서만 머물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결국 '신 고질라'는 괴수 영화로서도 많은 것들을 시도해 보지 못한 채, 메시지의 문제와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낸 아쉬운 영화였다. 


안노, 이제 에반게리온을 내놓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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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 마지막으로. 매번 마스킹을 잘해주던 극장에서 마스킹이 되지 않아 나중에 알아보니, 수입된 원본 소스 자체에 레터박스가 있었던 것 같은데, 이건 정말 문제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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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風立ちぬ, 2013)

이기적 순수함의 안타까움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 스튜디오의 오랜 팬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내가 한 손에 꼽을 만한 감독으로, 그의 작품들은 내 닉네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런 그의 신작이자 마지막 작품(아마도) '바람이 분다 (風立ちぬ, 2013)'를 기다리는 마음은 내내 편치 않았다. 잘 알려졌다시피 이 작품이 담고 있는 역사 의식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떤 말들이 쏟아져 나오든, 내 입장은 직접 보기 전에는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 어느 때보다 가슴 졸이며 보게 된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은, 아쉽지만 보는 내내 불편한 작품이었다. 혐오스러운 장면이나 잔인한 장면이 나와도 '영화니까' 불편함은 없었던 나였는데, 이 작품은 '영화기 때문에' 불편한 경우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간 성향이나 가치관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바람이 분다'를 보면서도 이 작품에 대한 논란에 대해 방어할 수 있는 논리를 본능적으로 찾게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더 아쉬움이 남는다. 결국 그 논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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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는 근본적으로 반전을 끊임없이 작품을 통해 말해왔으며,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는 등 그가 '바람이 분다'를 통해 군국주의를 옹호했다거나 일본의 침략 전쟁을 옳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들은 맞지 않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들은 그의 작품들을 제대로 보지 않았거나 그냥 이슈를 위한 제 3자들의 어쩔 수 없는 시선일 것이라는 건 이미 예상했었다. 따지고 보면 미야자키의 이전 작품들에서도 본인이 좋아하는 것과 가치관에 대한 모순과 갈등은 계속 존재했었다. 그는 일관적으로 반전을 외치며 '살아라'라는 메시지를 전달해 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날 것과 탈 것,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서 비행기이자 전투기였다. 이전 작품에서도 이러한 성향은 계속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이 작품과 가장 비교될 만한 작품은 그의 전작 '붉은 돼지'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붉은 돼지'는 하늘을 나는 것과 전투기에 대한 그의 애정이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 된 작품이자, 그 스스로도 모순이라고 생각하는 전쟁이라는 것에 대해 최대한 빗겨가려고 애 쓴 작품이기도 할 것이다.


'붉은 돼지'는 개인적으로도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서, 어른의 드라마, 낭만과 아름다움을 멋지게 표현해 낸 수작이었다. 그렇다면 '붉은 돼지'도 문제인가 라고 물을 수 있는데, 이 경우는 조금 다르다. 일단 아름다움에 집중한 것은 맞지만, 포르코는 전쟁 자체에 대해 회의를 갖고 이를 행동으로 표현한 인물이었고, '바람이 분다'의 지로는 회의 감은 갖고 있다고 봐야 겠지만 행동과는 거리가 있었던 이었기 때문이다. 이 별 것 아닌 차이점이 '바람이 분다'의 역사 의식을 말해주는데, 이것은 결국 미야자키 하야오가 갖고 있던 모순과 갈등이 적어도 일본인들을 제외한 (특히 아시아인들이) 이들이 기대하던 바로는 표현되지 않은 몹시 안타까운 경우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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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미야자키 하야오가 제로센을 설계한 지로의 이야기를 통해, 일본의 침략 전쟁을 정당화 하고 군국주의를 옹호하려 했다면 차라리 나았을 런지도 모르겠다. 그냥 최근 아베 정권처럼 역사를 잊은 민족에 터무니 없는 주장이라고 받아들이면 고민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의 경우는 '바람이 분다'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상당히 고민스럽다. 고민스럽다는 것이 이 영화가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고민스럽다는 것이 아니라, 영화 자체가 모순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이 동경해 오던 아름다운 비행기를 만든 설계자의 이야기를 언젠 가는 꼭 한 번 하고 싶었을 것이다. 앞서 여러 번의 은퇴 번복이 있기는 했지만, 평가를 떠나서 이 작품 만큼 그의 마지막 영화로 어울리는 주제도 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로의 이야기를 풀어내려고 보니 그가 설계한 제로센은 결국 전쟁에 동원되어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고, 그 것은 일본이 피해자로서가 아닌 가해자로서 범한 전쟁이었다. 그것을 미야자키 하야오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을 것이다. 바로 모르지 않기 때문에 영화는 의도적으로 전쟁에 관한 장면들을 피하는 한 편, 지로라는 캐릭터도 상당히 건조하고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작품 속에서 갈등을 드러내고 있는 요소는 몇 가지가 있는데, 전쟁 장면을 전혀 등장 시키지 않고 있는 점과 지로의 꿈을 지속적으로 교차하고 있는 것, 그 꿈에 등장하는 이가 아름다운 비행기를 설계하려 했던 카프로니 백작이라는 것, 독일인이지만 히틀러 정권에게 쫓기고 있는 융커스의 이야기가 바로 그 것이다. 사실 난 이 영화가 논란의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뤘다고 하더라도 '일본'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하야오가 전쟁을 피한 것처럼, 최대한 피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예상했었다. 하지만 정반대로 그는 지로의 꿈 장면에서 여러 번 언급되는 것처럼 '일본 소년'이라는 걸 특별히 강조하고 있고, 이후에도 관동대지진과 이후의 고통 받는 사람들의 삶을 장면과 대사로 표현하면서, '일본'이라는 실질적 존재를 유난히 도드라지게 언급하고 있다.


앞서 일본이라는 존재 역시 전쟁처럼 피해갈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은 그렇게 해서 모순이 되는 요소에 대해 최대한 언급하는 것을 자제했을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즉, 하야오가 일본이라는 현실을 전면에 내세우게 되면 반드시 이 모순에 대해 답을 해야 했기 때문에 이를 굳이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고, 이를 제외한 방식으로 자신이 추구하려는 순수한 아름다움에 대해 풀어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건 예상이라기 보다 그랬으면 하는 바램에 가까웠던 것 같은데, 결국 그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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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미야자키 하야오의 순수함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엄청난 계산과 의도를 가지고 이 영화를 일부러 만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날 것에 대한 동경은 그를 직접 만나보지 않아도 알 정도로 여러 작품들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표현되어 왔으며, 그의 전작들은 노인이 되어도 잃지 않은 순수한 동심이 있어서 가능한 순간들이 여럿 있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람이 분다'는 그럼에도 순수함으로 평가할 수 없는 순진함이 여실히 드러난 작품이었다. 순수한 것과 순진한 것은 하늘과 땅 차이인데, 특히 이번 경우처럼 민감한 주제를 다룰 때 순진한 것은 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순수함이 어떤 결과를 만들지를 반드시 예상했어야 했다. 아니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이 만든 이야기가 어떤 결과를, 특히 다수의 일본인들 외에 한국을 비롯한 전쟁 피해 국가의 관객들에게 어떤 반응으로 받아들여질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 고민의 결과는 작품에 분명 드러나 있다. 하지만 역지사지가 정말 그렇게 어려웠던 것일까? 간과라고 하기엔 그 무게가 심히 무겁고, 순수함의 발로라고 하기엔 너무 이기적인 처사였다.


하야오의 논리는 이랬던 것 같다. 지로는 제로센을 설계하기는 했지만 전쟁을 옹호하는 이는 아니며, 지로가 겪는 삶의 일화들을 통해 정의롭고 인정이 많은 면모를 부각하여 그가 결코 나쁜 의도를 가지고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지로 스스로도 고뇌가 없지 않았다는 것 역시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은근 슬쩍 독일(나치)과 일본의 차별점 역시 이야기한다. 만약 지로가 자신이 순수한 의도를 갖고 만든 비행기가 침략 전쟁에 사용되었다는 것을 몰랐다면 이 얘기는 수긍이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이게 아니면 처음에는 몰랐으나 후에 어떻게 쓰이게 되는 지 알게 된 후 행동으로 표현하는 이야기였다면 역시 수긍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것은 무관심이나 회피 정도가 아니라 공범에 가까운 행위이라는 점에서, 그냥 의도치 않던 결과로 그도 계속 고뇌하고 후회했다 라는 것 정도로는 면죄부를 얻기 힘들다. 더더군다나 지로는 자신이 만든 것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분명히 알고 있지 않았던가. 그의 동료에 말처럼 '우린 그냥 비행기만 만들면 돼'라는 건 결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논리가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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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그것이 아름다웠던 그렇지 않던, 순수함의 발로이던 그렇지 않던, 지로가 만든 비행기는 본인도 알고 역사도 알 듯, 일본의 침략 전쟁에 도구로 사용된 것이 사실이라면 지로라는 인물을 다룰 땐 특별히 조심, 아니 지금 시점에 이런 이야기가 가능한 것인지 더 면밀히 조사와 책임을 따져봤어야 했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이 지로의 이야기를 개인의 순수한 삶의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점일까? 독일 국민들과 비교하면 분명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독일은 패전 이후 분명한 전범처리와 국제 사회에 대한 사과가 있었고, 최근에야 비로소 독일인 가운데서도 나치에 반대했던 이들의 이야기라던가, 전범국이 되어버린 이후 태어날 때 부터 원죄를 갖게 된 세대들의 고민과 고통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씩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는 어떠한가. 전범에 대한 처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국제 사회에 명확한 사과보다는 자위대를 조금씩 다시 정당화 하려는 움직임이나, 대한민국의 침략에 대해 정당화 하려는 우익의 움직임이 정부차원에서 그 어느 때 보다 강하게 주장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미야자키 하야오의 순수함은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순진해도 이건 너무 순진한 거다. 본인 스스로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아베 정권에 대해 비판적이라면 '바람이 분다'의 이야기는 발표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라는게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것이 정말 순진한 생각이었던 것이다. 한쪽에서 아직도 가해자가 잘못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 통에, 잘못한 건 맞는데 사실 그 안에도 이렇게 순수한 꿈을 쫓는 이의 이야기도 있었는데 오해 없이 봐주었으면 좋겠다 라는게 가능하다고 생각한 그 생각이.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이 작품이 어떤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를 더 배려있게 생각했어야 하는게 도리였다. 그가 진정 반전주의자라면 이건 옵션이 아니라 필수여야 했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순수한 마음을 객관적으로 봐주지 않을까 생각하고 밀어 붙였던 것 같다. 아무리 좋은 쪽으로 평가한다고 해도 시기상조 였다는 것 밖에는 말할 수 없겠다. 그래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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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바람이 분다'에 짙게 깔린 역사 의식만 걷어낸다면, 난 이 작품을 그의 작품 중 한 손에 꼽았을 것이다. 영화적으로도 아쉬웠다는 많은 이들에 평가와는 다르게, 난 불편한 가운데도 지로의 이야기가 객관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마다, 이 작품에 깊게 빠져들기도 했다. 어쩌면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거장의 필모그래피를 마무리 하는 작품으로서 최고의 선택이 되었을 수도 있었기에 그 안타까움은 더했고,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이 작품은 내게는 오점으로 남게 되었다.


사실 마지막까지 그가 기자회견에서 '직접 보면 알 것이다'라는 말 때문에 일말의 믿음을 끝까지 갖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위와 같았다. 아.. 내가 지브리 작품, 그것도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 이런 부정적인 글을 쓰게 되다니... 글의 부제를 '안타까움' 정도로 순화한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호의라는게, 이 작품에 대한 내 감상을 단정적으로 말해준다.



1. 오늘따라 '붉은 돼지'가 보고 싶네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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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게리온 : Q (ヱヴァンゲリヲン新劇場版:Q Evangelion: 3.0 You Can (Not) Redo, 2012)

종극을 앞두고 다시 처음에 선 신지



지난 해 국내 개봉을 못 참고 먼저 일본에 가서 보고 온 '에반게리온 : Q'를 국내 개봉 전에 두 번 더 보게 되었다. '에반게리온 : 파 (破)'의 충격을 안고 살아오기를 약 3년. 과연 그 이후 이들은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는 그 이야기만 꺼내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엄청난 전율을 안겨준 작품이었는데, 드디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나기사 카오루의 이야기와 그 다음을 가늠하기 어려운 신지와 레이의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 될 지를 기다릴 수 없어 일본으로 먼저 갈 수 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 국내 개봉으로 100%의 내용을 확인하게 된 'Q'는 뭐랄까, 신극장판의 첫 작품인 '에반게리온 : 서 (序)'와 조금 닮아 있었다. 구성 상으로 말이다. '서'는 '파'를 위한 좋은 준비 과정이었고 신극장판의 시작으로 나쁘지 않은 작품이었으며, 그 어떤 작품보다 싱크로율을 주의 깊게 다룰 수 밖에는 없는 성격의 작품이었다. 이번 'Q'를 보며 '서'를 떠올린 것은 그 때문이다. 'Q'는 신극장판의 마지막 작품인 ':ll '를 준비하는 과정의 작품이자 또 한 번 싱크로율, 즉 마음과 마음을 맞춰가는 과정에 집중하고 있는 작품이었다. 하긴 따지고 보면 에바는 항상 그랬다. 가장 중요한 건 언제나 '마음' 이었다.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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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의 마지막 장면은 신지가 드디어 자신을 끝까지 밀어 붙여서 레이를 구해내는 데에 전력을 쏟아, 그 결과 서드 임팩트가 발생하는 것이었다. 'Q'는 그 이후 14년의 시간이 지난 뒤 다시 깨어난 신지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즉, 관객은 그 14년 동안의 이야기를 신지와 마찬가지로 주변 인물들에 의해 전해 들을 수 밖에는 없다. 여기서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아이러니 (혹은 갈등 구조)가 시작되는데, 그 동안 항상 두렵고 용기가 없어서 한 발 물러서기만 했던 신지가 처음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데로, 자신이 좋은 그대로 실행한 것이 레이를 끝까지 구해내려 한 것이었는데, 바로 이 행동이 많은 사람들이 막고자 했던 서드 임팩트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야기 내내 문제(?)로 지적되었던 (난 신지를 두고 찌질 하다고 하는 것에 단 한 번도 동의한 적이 없기에) 신지의 우유부단함과 용기 부족이 해결되는 순간, 가장 큰 인류의 재앙이 발생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런 대립하는 관계는 후에도 등장하는데, 이것은 이전 TV시리즈에서는 없었던 새로운 갈등 구조로서 어쩌면 이미 스스로를 이겨내는 정말 힘겨운 과정을 겪었던 이카리 신지에게는 더 큰 시련이 아닐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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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에 등장하는 신지는 분명 각성한 신지다. 즉, '파' 이전에 신지와는 확연히 다른 신지라는 얘기다. 만약 이전의 신지였다면 'Q'에는 신지가 멘붕에 빠져 러닝 타임 내내 자신의 마음을 안으로 안으로 갉아 먹을 만한 사건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서드 임팩트와 동시에 스스로 각성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제 3의 소년 신지는, 이런 일들로 이전처럼 한 없는 림보에 빠지지 않는다. 잠시 충격을 받을 뿐이다. 그리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 좋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비교적 빠르게 실행에 옮긴다. 이런 신지에게 이번 이야기에서 가장 큰 도움이자 위로가 되는 존재는 바로 카오루다.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이러한 역할(신지를 위한)로 규정하고 있는 카오루 답게, 이번 작품에서 카오루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만약 신지가 14년이 지난 뒤 네르프가 아닌 미사토와 아스카가 있는 뷜레에 남았더라면 이 보다 더 큰 정신적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지는 또 다른 레이라 불리 우는 이로 인해 네르프로 오게 되었고, 그를 기다리던 카오루와 만나게 된다.


신지와 카오루의 만남에서 '에반게리온'의 가장 큰 테마이자 사실상 단 하나의 테마인 마음과 마음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신극장판 '서'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카오루와 신지의 피아노 연습 장면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연습 이라기 보단 그냥 연주 정도겠지만) 흡사 신지와 아스카의 싱크로율 테스트 과정을 보는 듯 하다. 그리고 여기서 'Q'는 마치 기존 TV시리즈에서 보여주었던 스타일의 편집과 영상을 보여준다. 마치 실사와 이미지가 교차되는 듯한 분위기의 장면 말이다. 그리고 이 과정 중의 카오루와 신지의 대사는 그야말로 핵심을 꿰뚫고 있다. 이는 TV시리즈에서 내내 다루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연주를 한다는 것, 연주를 잘 한다는 것에 빗대어 카오루는 다시 한 번 각성한 신지를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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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앞서 언급한 갈등 지점이 다시 등장한다. 모든 것이 잘 될 것만 같았던, 그러니까 나만 잘하면 나도 좋고 세상도 구하고 다 좋을 것만 같았던 행동이 문제가 되고 만다. 그 과정 속에서 아스카와 미사토로 대표 되는 뷜레와 원치 않는 싸움을 해야 하고, 신지와 마음을 나눈 유일한 친구인 카오루는 신지가 보는 앞에서 죽음에 이르고 만다. 신지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보다 더 큰 충격과 고난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 동안 스스로도 답답했던 자아를 이겨내고 드디어 레이를 구해냈다고 생각했는데 레이는 있지만 구해낸 것 같지는 않고, 14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자신이 알던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 되어 여기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동료들을 냉정한 적으로 만나야 했으며, 그 사이 유일하게 마음을 터 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인 카오루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마저도 자신이 보는 앞에서 죽음을 맞게 되었으니 이 보다 더 가혹한 운명이 어디 있으랴. 신지 입장에서만 보면 포스 임팩트의 발발보다도 카오루의 죽음이 더 큰 사건일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충격은 고스란히 이후의 얼빠진 표정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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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그러했지만 'Q'에서 레이는 존재하지 않고 아스카 역시 비중이 줄게 되면서 온전히 신지 중심의 이야기가 되었다. 각각의 갈등과 스토리가 있었던 TV시리즈와는 확연히 다른 구조다. 이전에는 신지는 물론이고, 레이, 아스카, 카오루, 미사토, 겐도 심지어 카지까지 자신 만의 이야기를 갖고 있었는데, 신극장판에서는 특히 'Q'에서는 완전한 신지 중심의 이야기만 남게 되었다. 이것은 여러가지로 해석해 볼 수 있을 텐데, 이미 TV시리즈를 감상한 팬들에게는 더 이상 각자의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캐릭터의 성립이 충분하기 때문이며, 기존 팬들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과도 함께하고자 했던 신극장판의 목적 성에 부합하는 구조이자, 극장판이라는 포맷의 한계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이 모든 요소들을 재쳐 두더라도 결국 신극장판으로 에반게리온이라는 이야기를 마무리하려는 것이라면 신지의 이야기로 집중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사골게리온이 다음 편 극장판을 마지막으로 끝난다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게 'Q'에서의 신지는 또 한 번 가혹한 롤러코스터에 놓이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이 장면은 완벽하게 루프설을 떠올리게 만든다) 다시 한 번 아스카의 손에 이끌려 길을 떠나게 되는 신지의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모든 것을 잃은 상태에서도 다시 몸을 일으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신지의 운명이 말이다. 그저 행복하기만 하면 되었던 (하지만 그것이 너무 나도 힘겨웠던) 이전과 신극장판의 신지의 운명은 이렇게 다르다. 신극장판에서 신지의 운명은 좀 더 자신의 운명 그 이상의 것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즉, '에반게리온'의 중요한 테마인 '관계'를 맺는다는 것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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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편에 가서 신지의 운명을 어떻게 가져갈지 혹은 어떤 방식으로 행복이라는 가치를 선사할 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에 앞서 아무리 생각해도 신지의 운명은 너무 도 가혹하다. 결국 안노 히데아키가 신지라는 자아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이 모든 소년, 소녀들이 어른이 되어 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면 정말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을 정도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신극장판에서도 어른이 될 수 없는 혹은 되지 않는 소년, 소녀들을 등장 시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14년 동안 잠들어 있어 세월을 빗겨나간 신지, 에바의 저주에 걸려 역시 나이를 먹지 않은 아스카, 복제를 통해 영원한 소녀로만 존재하는 레이, 그리고 역시 소년으로만 존재하는 카오루와 소년, 소녀 이후의 모습은 등장하지 않는 토우지를 비롯한 같은 반 친구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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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인류보완계획'을 비롯해 수많은 이른바 떡밥을 풀어놓았던 '에반게리온'은 이번 'Q'에서도 어느 정도 그런 여지를 남겨 두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신극장판의 존재 자체가 떡밥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루프설 등) 신극장판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좀 더 단순하고 기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떡밥에 대한 풀이를 전혀 하지 않더라도 충분한 의미가 있도록 그 본질에 더 집중하고 있는 것이 신극장판이고, 이는 신작이 거듭될 수록 그렇다는 생각이다. 혹자들은 TV시리즈에서 잔뜩 풀어놓았던 떡밥들을 신극장판이 해소 시켜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오히려 의혹만 가중 시키거나 이에 대한 명쾌한 답이 없어 아쉬워하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 신극장판에서 안노 히데아키는 여기에 별로 관심이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리고 그 점이 전혀 아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아쉽기 보다는 마음에 드는 쪽에 가깝다.


'에반게리온' TV시리즈와 극장판, 신극장판을 여러 번 보았지만 볼 때마다 느끼는 건 결국 이 이야기는 미스테리나, 복잡한 설정과 떡밥들의 풀이 (물론 그것으로 유명해졌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가 중요한 작품이 아니라 AT필드로 표현되기도 하는 마음과 마음, 타인과의 관계 맺기에 대한 깊은 성찰이 중요한 작품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흔히 들 말하는 신지의 '찌질함'은 어디서 오는가? 왜 수도 없이 본인에게 질문하고 답하기를 반복하고, 혹은 답을 찾지 못해 괴로워 하는가? 내가 타인과의 관계를 맺으면서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인가? 그렇다면 행복이란 무엇인가?


이렇듯 '에반게리온'을 두고 누군가 정신 착란이라고 했던 것처럼 이러한 질문을 멈추지 않고 그 끝까지 가보려는 시도에서 시작된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과정은 깊어질 수록 가혹하고 아프기 마련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과연 안노가 이 이야기를 어떻게 마무리 지으려고 하는지 기대와 걱정이 동시에 든다. 이미 안노 히데아키 만의 것이라고 할 수 없게 되어버린 '에반게리온'의 이야기를 다음 작품에서 어떻게 마무리 지을지. '에반게리온 : Q'는 '에반게리온 :ll '를 준비하는 하나의 과정 같은 영화였다. 어쩌면 '에반게리온 :ll '는 맨 처음으로 돌아갈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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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게리온 : Q'는 아무래도 신극장판 마지막 편이 나온 뒤에야 좀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기다림이 있다는 것 자체를 그리워 할 수년 뒤를 미리 떠올려 보며 천천히 기다려 보련다.



1. 처음 'Q'를 보면 '파'가 보고 싶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서'가 더 보고 싶어지더군요. 아예 '서'부터 쭉 다시 봐야겠어요.


2. 전 카오루와 신지의 므흣한 관계가 남남이라는 성별로만 규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다 고는 생각하지만 (그냥 존재와 존재로서), 그렇다 하더라도 카오루의 표정과 말투, 몸짓 하나 하나는 움찔 움찔 하게 만들더군요. 인정!


3. 다시 말하지만 '에반게리온 : Q'는 극장 상영에 최적화 된 작품입니다. 시네마스코프의 영상은 집에서는 그 만족감을 재현하기 어려워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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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게리온 : 파 (破) (Evangelion: 2.0 You Can (Not) Advance, 2009)
전율의 미완성


아....에반게리온.
일찍이 TV시리즈는 남들보다 조금 늦게 접한 탓에 오히려 더 열심히 그리고 깊이 빠져들어, 그 속에 담겨 있는 안노 히데아키의 그 수많은 떡밥들을 죄다 물어늘어지며 인류보완계획에 대해 알아내려 했었고, 극중 신지의 절규와 해체로 이어지는 갈등과 고민은 나로 하여금 '그래 누구나 이런 고민들은 가슴 속에 하나씩 안고 있는 거였어'라며 그 심오함에 찌질함을 더해 신지의 독백, 나아가 레이와 아스카, 미사토의 독백에 이르기까지 모두 120% 흠뻑 받아들인 나머지 어느 덧 <에반게리온>이란 작품은 수많은 명작들이 존재하는 아니메들 사이에서도 독보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안노 히데아키의 <에반게리온>은 비단 위와 같은 내 경우가 아니더라도, 오타쿠와 일반인을 나누는 척도로 사용될 만큼 하나의 커다란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최근들어 미드에서 주로 자주 언급되곤 하는 '떡밥'이란 것에 대표적인 케이스인 동시에 작품 그 이상의 토론과 해석을 자아낸 일종의 '퍼스트 임팩트(First Impact)'였다하겠다.

수 많은 화제를 불러 왔던 TV시리즈와 이를 보완하려 등장한 두 편의 극장판 <앤드 오브 에반게리온 (The End of Evangelion, 1997)>와 <데스 앤 리버스 (Death & Rebirth, 1997)>가 공개된지 10년 만에 새롭게 공개된 <에반게리온 : 서 (序)>는 기존 TV시리즈의 줄거리를 그대로 따라가 되 디자인 적인 측면이나 기술적인 면에서 많은 부분 보강된 '리빌드(Rebuild)'의 개념이었다. <서>는 TV시리즈를 충실히 즐기지 않은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도 크게 부담감을 주지 않을 정도로 극의 흐름이나 캐릭터의 설명이나, 새로운 하나의 시작으로 손색이 없는 작품이었다. 기존 TV시리즈의 이야기를 압축하되 장면은 더욱 극장판스러워졌고, 이야기의 흐름은 더욱 매끄러워진 편이었다. 이런 <서>는 이렇듯 새롭게 시작하는 극장판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서 괜찮은 스타트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새롭게 선보일 극장판 시리즈가 그저 기존 TV판을 보완하고 다듬는 정도의 작업이 되는건 아닐까 하는 우려를 낳기도 했다(물론 그렇다고 '서'가 그저 리빌드만 한 것은 아니었다. 에바의 팬들이라면 무언가 이상 징후를 느낄 만한 몇가지 장면들이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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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두 번째 극장판 <파>를 기다리는 마음은 오히려 담담했었다. 시간상으로 <서>이후의 TV시리즈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어떻게 그려질까를 슬쩍 예상하며 감상하기만 하면 되었었기 때문이다(물론 여기에는 '루프설'이라는 강력한 떡밥이 있다!!!). 그런데 <파>는 시작부터 이런 예상을 완전히 뒤엎어 버린다. 새로운 캐릭터 '마리'의 등장 씬부터 무언가 이상한 점이 감지된다. 그것은 단순히 마리라는 정체 모를 캐릭터 때문도 그녀가 입고 있는 새로운 디자인의 플러그 슈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파>의 대부분의 장면은 분명 에바 팬들이 기존에 보았었던 장면이지만, 동시에 전혀 새로운 장면이기도 한데, 이것이 이번 극장판의 가장 큰 장점이자 흥미로운 점이다.

<서>가 기존 줄거리를 보완하고 다듬는 리빌드였다면 <파>는 마치 타임머신이 등장하는 <백 투더 퓨처>의 지워지는 마티의 사진마냥, 존재하는 과거가 지워지고 새로 쓰여지는 느낌이다. 이런 징조는 아스카의 첫 등장 시퀀스의 다른 구성부터 시작하여, 신지의 나체를 교묘하게 가리는 코믹 씬을 더욱 코믹하게 아스카로 바꾸어 보여주는 것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낸다. 이 장면을 처음 보았을 때는 그 속타는 빨대의 몹쓸 위치 때문에 재미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어랏, 이것보게, 무언가 계속 바뀌기 시작하잖아' 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그 이후로 이런 장면들은 예고도 없이 쉴세 없이 등장한다. 분명 센트럴 도그마에 있어야할 롱기누스의 창은 달 표면 위 우주에 고이 싸서 모셔져 있으며, 플러그 슈트를 입고 있는 카오루는 이카리와 조우하여 '아버지'라고 부르질 않나, 카지가 가져온 가방 속엔 아담 대신 '느부갓네살의 열쇠'라는 것이 들어있고 사도의 모습들도 처음 보는 낯선 모습들이다.

<에반게리온 : 파>가 <서>와는 달리 기존 TV시리즈를 보지 않은 이들에게 더 높은 싱크로율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기존 내용에 익숙한 팬들이라면 위와 같은 바뀐 장면들에서 이상함과 의아함을 느낄 수 있지만, <서>를 보고 바로 <파>를 감상한 이들이라면 이런 장면들이 어색하게 느껴질리 없기 때문이다. <파>는 철저히 에바 팬들을 위한 작품이다. 에바 TV시리즈와 극장판들을 모두 섭렵한 이들에게만 허락한 세계랄까.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 관람 전에는 반드시 TV시리즈를 봐야만 한다. 그래서 무엇이 바뀌었는지를 확인해야만 '왜?'라는 물음을 던질 수 있고, 그 '왜?'라는 물음이 <파>를 넘어서서 다음 극장판에서 어떤 대답으로 돌아올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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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부터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팬들을 궁금케한 떡밥들을 분석하자면 사실 보통일이 아닌데, 영화를 처음 다 보고 난 첫 느낌은 '아, 이거 내가 만만히 다룰 수 있는 정도의 것이 아니구나'하는 것이었다. 예전에 써두었던 에바 관련 시리즈 글들이 갑자기 초라하게 느껴질 만큼, 아니 어쩌면 전부 틀린 말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번 <파>의 충격은 대단했다. 영화가 다 끝나고 자리에서 쉽게 일어나지 못한 것은 정말로 일어나기 힘들 정도로 영화를 보는 내내 온몸에 힘을 쏟은 탓이었다. 아, 떡밥 얘기를 하려다가 말았는데, 그리하여 떡밥 이야기를 지금 이 시점에서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아, 그렇다고 해서 떡밥을 열심히 분석하신 분들의 글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런 분석 글들이 저를 또 한 걸음 에바의 세계로 다가서게 하니까요 ^^;).

사실 팬들이 <에반게리온>에 열광하는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앞서 여러 번 언급한 이른바 '떡밥'에 관한 흥미가 그 대표적인 이유 중 하나일 것이고, 메카닉에 열광하는 것도 있을 것이며 아스카나 레이, 미사토 등 여성 캐릭터들에게서 느껴지는 강한 매력과 애착도 있을 것이다(다음 극장판인 'Q'의 예고편이 극장에 공개되었을 때 애꾸눈이 된 아스카를 바라보며 항의 섞인 탄성을 내뱉던 아스카 팬들의 마음을 해아려보라!). 이것들 외에 (혹은 보다도) 개인적으로 에반게리온에 흠뻑 빠지게 된 이유는 캐릭터들이 독백으로 풀어내는 수 많은 고민들과 관계 맺음의 어려움에서 오는 갈등에 있었다. 예전 이카리 신지의 관한 글에도 썼던 표현이지만, 신지의 독백은 곧 에반게리온의 주제라고 봐야할 정도로 핵심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많은 이들이 이를 두고 '찌질하다'라고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사실 이런 신지를 보고 단 한번도 진심으로 찌질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내가 찌질해서인가 -_-;;). 신지의 독백은 당시 내가 겪던 고민들과 상황은 같지 않지만 충분히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는 것으로서, 나 또한 쉽게 이겨내지 못했던 것들과 싸우는 과정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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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가 파괴하고 건축하는 것은 비단 사도와 에바, 제3동경시 만은 아닐 것이다. 기존의 신지, 기존의 레이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모습을 매우 자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적극성'이다. 먼저 레이의 변화는 놀라움을 넘어서 어색하기까지 할 정도다. 시리즈를 통틀어 딱 한 번 웃었나? 싶을 정도로 표현에 인색했던 레이는, 이번 작품에서는 자신의 마음을 수줍게 표현하는 것은 물론 그 감정을 신지에게 전하기 위해 굉장히 적극적인 행동들마저 보여주게 되는데, 사실 이런 레이의 변화는 기존 TV시리즈의 팬들이라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다(기존 팬들의 반응은 극중 토우지의 대사인 '저 레이가 인사를 했어'와 딱 맞아 떨어진다고 할 수 있겠다). 레이가 변하면서 아스카 마저 캐릭터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됬다. 레이가 신지에게 자신의 마음을 적극적으로(이건 분명 적극적이다) 표현하게 되면서 은근히 신지에게 마음이 있었던 아스카 역시 레이에게 지지 않기 위해 일부러라도 자신을 표현하게 되어버린다(신지에게 줄 도시락을 요리하며 다친 손가락의 반창고 숫자에서 레이에게 뒤진 아스카의 심정은 사도를 혼자 무찌르지 못한 것과 거의 동일한 것일거다).

신지의 변화 역시 여러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레이에게 직접 도시락을 싸주거나 된장국을 건내는 것도 그렇고, 아스카가 밤중에 불쑥 자신의 방에 들어와 옆에 등을 맞대고 누웠을 때에도, 놀라기는 하지만 예전보다는 훨씬 자신을 컨트롤 하는 모습이다(TV판에서 신지가 비슷한 장면에서 자신을 이보다 컨트롤 하지 못한 건 다들 잘 아실듯 ;;). 이런 것들 외에도 신지의 목소리에는 확실히 힘이 실렸다. 네르프를 떠나기로 결정한 뒤 이카리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도, 기존에는 그저 피곤하고 비꼬는 듯한 뉘앙스가 더 컸었다면, 이번에는 비꼬는 투는 여전하지만 분명 자신의 의지를 좀 더 확고히 밝히는, 목소리에 힘이 제대로 담겨있었다. 이런 신지의 작다면 작다고 할 수 있는 변화들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렇게 신지가 흔히 말하는 '찌질 신지'를 벗어나 각성하면서 <에반게리온 : 파>의 주제가 본격적으로 드러났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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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판 인트로에 항상 귀를 즐겁게 해주던 삽입곡을 기억할 것이다. '잔혹한 천사의 테제 (残酷な天使のテーゼ )'의 주제는 역시 '소년이여 신화가 되어라'였다고 할 수 있는데, TV시리즈를 감싸고 있는 전체적인 분위기는 '신화가 되어라'라기 보다는 그 이전에 '너 스스로를 너무 미워하지 마라' '너는 칭찬 받아 마땅한 존재야'라는 위로와 토닥임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 <파>는 분명히 '신화가 되어라'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폭주를 넘어서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신지를 바라보며 미사토는 '그래, 신지 나아가라!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기존의 신지였다면 이 같은 상황에서 신화가 되기 보다는 그저 잠식되어버릴 확률이 높지만 <파>에서의 신지는 그야말로 신화다.

이번 작품이 그 어느 영화보다 절절하고 온몸에 힘을 쏟아 내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신지의 절실함 때문이었다. 신지가 사도에게 흡수되어버린 레이를 구해내려 인간의 한계를 넘나들며 사투를 벌이는 장면에서는, 신지의 절실함에 눈물마저 주르륵 흐를 정도였다(작품이 끝나고 쉽사리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도, 이 장면에서 신지와 함께 거의 동일한 에너지를 극장에서 써버렸기 때문이었다;;). 당연하지만 여기서 신지가 레이를 이렇게까지 구해내려고 하는 것은, 단순히 레이라는 존재를 좋아해서도 아니고, 레이에게서 어머니가 느껴져서만도 아니다. 이것은 대상이 레이여서인 동시에 무엇보다 (진부하지만) 나 자신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신지가 여기서 레이를 그냥 놓아주게 된다면 신지는 또 다시 기존의 신지로 남게 된다.

이것은 TV판의 마지막에 모두에게 둘러쌓여 박수를 받으며 축하 받던 신지와는 또 다르다. 그 신지는 자신 내면의 고민과 갈등을 주변 사람들의 위로를 통해 내면에서 극복해낸 경우였다면, 이번 신지는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스스로가 하고 싶은 것을 능동적으로 이뤄내는 새로운 신지이기 때문이다. 이번 극장판을 본 이들이라면 누구도 신지를 더 이상 찌질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어떤 영화의 주인공이 이런 절절한 절실함이 보여준 적이 있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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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연장선 상에서 보았을 때 단지 버전을 어쿠스틱으로 달리하여 다시 한번 엔딩곡으로 등장한 우타다 히카루의 'Beautiful World'는 <서>에서와는 달리 상당히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이 곡의 가사를 보자면 앞서 언급한 미사토의 그 외침과 동일한 성격을 띄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서>의 엔딩에서는 그저 '자신의 아름다움을 모르는거니?'라는 가사만이 와닿았었는데, 이번 <파>의 엔딩에서는 이보다는 오히려 '나의 세계가 끝날 때까지 만날 수 없다면, 너의 곁에 잠들게 해줘, 어디라도 상관없어'라는 가사가 더욱 와닿는다. 전자가 신지의 주변에서 신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라면 후자는, 신지 자신이 본인에게 하고 있는 다짐에 가깝다. 극의 후반에 정말 치열하게 자신을 표현한 신지에게 너무나도 동화되었던 탓인지, 엔딩 크래딧에서 흐르던 'Beautiful World'의 가사 한 소절, 한 소절은 정말 절실하게 다가왔다.

음악 얘기가 나온 김에 이번 작품에 쓰인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만 해보자면, 사실 조금은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파>에 쓰인 음악의 포인트라면 가장 강렬한 순간에 가장 반대되는 서정적인 음악을 배치함으로서 오히려 장면의 파급력을 극대화시키려던 것이었는데, 이런 안노의 의도는 100% 이해되었지만 그 이질감이 조금은 지나친 감도 없지 않았다. 물론 후반부로 갈수록 그 이질감은 덜해져 '날개를 주세요 (
翼をください)'가 나올 때에는 완벽히 동화될 수 있었다. 하지만 서두의 동요에 가까운 음악이 사용된 것은 좋은 점도 있지만 한편으론 반비례가 아닌 비례하는 음악이 사용되었더라도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겼다(에바의 음악 얘기가 나올 때마다 하는 이야기지만 언젠가는 에바 팬들만이 모인 프리미엄 시사회 같은 곳에서, TV판의 오프닝인 '잔혹한 천사의 테제'를 다같이 합창하는 순간을 꿈꿔본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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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맨 처음으로 돌아가서, 사실 <에반게리온 : 파>를 처음 보았을 때 '과연 내가 이 영화에 대한 글을 내가 만족할 수 있는 만큼 쓸 수 있을까'라는 생각과 '어떤 의미가 있을까'라고 생각하게 된 이유는 이 작품이 아직은 하려는 이야기를 다 꺼내어 놓지 조차 않은 '미완성' 작품이기 때문이었다. 신 극장판에서는 등장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쨋든 미사토의 이야기, 그리고 신지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고, 마기와 리츠코의 이야기, 이카리 사령관과 유이의 이야기, 아스카의 개인적인 이야기 등은 아직 제대로 설을 풀지도 않았다. 그리고 에바 최고의 떡밥 캐릭터(아니 아니메 최고의 떡밥 캐릭터)라고 할 수 있을 카오루는 이번 <파>에도 무언가 보여줄 듯 했지만 그 이야기를 'Q'로 미뤄둔 상태이다.

<파>는 이야기의 임팩트만 보자면 거의 보통 시리즈 물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가공할 만한 먹먹함과 무력함을 안겨준다(글 속에서 여러번 언급한 듯 하지만 굳이 한 번 더 언급하고 싶을 정도로, Q의 예고편까지 감상하고 난 다음의 몸상태는 정말 '무력함' 그 자체였다). 그런데 새삼스럽지만 이 작품은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일 뿐(?)이다. 과연 나머지 시리즈에서는 어떤 얘기를 또 어떻게 풀어가려고 <파>에서 이미 이런 무력함을 주는지 걱정이 될 정도다. 과연 이 이야기가 완전하게 종결이 될지도 의문이다. 또 다른 숙제만을 남긴 채 떠나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 시점에서 이런 고민은 사실 하나도 중요스런 것이 아닐 것이다. 우린 그저 안노 히데아키가 앞으로도 더 선사할 이 시대 최고의 이야기와 세계관에 그저 빠져들기만 하면 된다. 기다림은 그 어느 때보다 고되겠지만, 어쩌면 아니 반드시 훗날 내 아이들에게 '난 에반게리온 극장판을 모두 극장에서 보았단다'하며 자랑하게 될터이니 이 정도는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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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전엔 에바 관련 글엔 예전에 써두었던 관련 글들을 링크 걸었었는데 이젠 부끄러워서 못 걸겠네요 ^^;
그나마 함께 소개할 수 있는 글이라면 신지에 관한 글 정도일듯 (http://www.realfolkblues.co.kr/48)
2. <파>에 등장한 이야기를 가지고 TV판과 비교를 해본다던가 다음 극장판을 유추해 보는 것은 아마도 <파> DVD나 블루레이를 보고나서야 가능할 것 같네요;;
3. 사실 개인적으로 수록곡을 블로그 주소로 사용했을 만큼 <카우보이 비밥>을 에바와 거의 동급으로 좋아했었는데, 이미 <파>로서 정해졌네요. 에바가 진리입니다 --v
4. 보통은 오타쿠가 아니라고 하려는 것이 보통인데 (오해가 있을실지 몰라 말씀드리자면 전 오타쿠라는 단어에 반감은 커녕 좋아하는 것에 몰두하는 자라는 점에서 호감을 갖고 있는 편입니다), 에반게리온은 없는 오덕력을 죄다 모아서라도 '나 오타쿠야!'라고 외치고 싶은 작품입니다 ㅠ
5. 과연 이 이야기는 어떻게 끝이 날까요. 신지는 또 다시 박수를 받게 될까요. 아니면 박수는 이미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린 뒤일까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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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 국내 발매된 책을 이제서야 읽어보게 되었으니 많이 늦은 편이네요.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그 가운데서도 <에반게리온>을 특히 좋아하는데(몇달 전 회사에서 TV판 전편을 매우 하루 한편씩 DVD로 감상하기도 했었죠), 에반게리온을 좋아하다보니 감독인 안노 히데아키에 대해서도 관련 검색을 해보는 일이 자주 있었고, 그 가운데 바로 이 책에 대한 정보를 얻고서는 언젠가 한번 사봐야 하던 중, 얼마전에야 드디어 질러서 보게 되었습니다(가격도 저렴해요, 5000원!).

이 책은 안노 히데아키의 부인이자 만화가인 안노 모요코의 작품인데, 내용만 보자면 138p 짜리 단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안노 모요코가 남편인 안노 히데아키와 만나고 결혼하고 살아가면서 겪은, 그러니까 오타쿠의 부인으로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재미있는 그림과 이야기들로 가득 담아내고 있는 책입니다.

오타쿠라는 말이 언제부턴가 '헨타이'와 결합하여 좀 부정적인 의미로 자주 사용되고 있는 듯 하지만, 사실 따지고보면 남한테 해끼치는 것도 없고, 단지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보통 사람들보다 좀 더 애착을 갖고 집중한다는 것 정도죠. 물론 우리가 흔히 오타쿠라고 부르는 이들은 그 분야가 '애니메이션'이나 '망가'로 주로 집중되어 있는 편이긴 하지만, 어쨋든 개인적인 생각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무한한 애정을 쏟는 것보다 아름다운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오타쿠'라는 단어에 전혀 부정적인 느낌은 없는 편이에요.

오타쿠 하니까 하나 에피소드가 떠오르는데, 지난해 초였던가 어느 영화 잡지사 면접자리였던 것 같은데 제 블로그와 제가 쓴 글들을 찬찬히 둘러보던 한 직원분이 이렇게 여쭤보시더군요. '혹시 오타쿠세요?'
그러길래, 약 1초 당황한 다음에(정확히 1초였음) 전혀 흔들림 없는 말투로 얘기했죠. '리얼 오타쿠들 사이에서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의 소소한 팬이지만,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간혹 오타쿠로 보일 수도 있겠네요. 아직 부족함이 많습니다(이 말은 왜했지 -_-;;)'
확실히 요즘은 문화 컨텐츠를 돈주고 즐기는 이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적다보니, CD나 DVD를 사는 것만으로도 조금 별난 사람이 되어버린 세상이죠. 그런데 좋아하는 애니의 피규어를 해외 경매사이트에서 구매하거나, 치히로가 울면서 먹었던 주먹밥 모양의 피규어를 구매했다며 좋아하거나, 뉴타입 잡지에 아스카 티셔츠가 부록으로 나온 걸 보고 입을 수 있을까 와는 별개로 살까 말까를 고민하는 이라면 오타쿠로 보일 수도 있겠네요. 여튼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안노 히데아키가 어느 정도 매니악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책을 보기 전까지, 이 정도로 오타쿠인줄은 몰랐네요 ㅎ 정말 에바가 그냥 나온게 아니구나 할 정도로(오히려 이 책을 보고나면 에바가 너무 얌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폭주하는 초호기처럼 몰려옵니다!) 엄청난 베스트 오브 더 오타쿠더군요. 이 책이 재미있는건 단순히 안노 감독의 오타쿠 적인 삶을 조명한 것 뿐 아니라 이를 바라보는 화자가 그의 아내라는 점, 그리고 오타쿠가 아닌 사람이 오타쿠와 살아가면서 겪는 변화랄까? 그런 부분이 아주 섬세하면서도 자연스럽게 표현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타쿠가 주인공인 만화라 그런지, 관련 지식이 많으면 많을 수록 더 웃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저도 일반인 보다는 한 걸음 앞서있는 미약한 오타쿠라고 할 수 있을텐데 이 만화에 등장하는 관련 작품들 가운데 약 20% 정도 밖에는 소화하지 못하겠더라구요. 역시 본토의 오타쿠는 그 스케일이 다르더군요. 아, 하지만 이 작품들을 100% 모른다고 해도 크게 감상에 지장은 없는 편입니다. 그 작품 속 캐릭터를 알고 있다면 더 재밌긴 하겠지만 모른다고 하더라도 분위기로 짐작하며 넘어갈 수 있을 정도니까요. 그런데 만약 이 내용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면 장담하건데 이 책은 300%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만화가 아닐 수 없을 듯 합니다. 왜냐면 저도 그 20%만을 공감했음에도 그 순간에 무언가 짜릿한 희열이 있었거든요 ㅎㅎ 아, 그리고 도서 뒷 편에 본편에서 언급된 작품들의 간단한 설명을 추가로 해주고 있어서 나중에라도 한 번 찾아볼 수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책을 보고 있노라면 전혀 예상치 않았던 의외의 생각도 하게 되더군요. '결혼하고 싶다'랄까?
오타쿠인 안노 히데아키를 다 받아주고 이해해주며 알콩달콩 살아가는 안노 모요코의 존재는, 히데아키를 에바 감독으로서 부러운게 아니라 모요코의 남편이라는 이유로 더 부럽도록 만듭니다. 개인적으로 저도 제 마음대로 완전 오타쿠 같은 전문 분야의 말들을 하루 종일 미친듯이 쏟아내도 다 알아들을 이가 있다면 그것도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더라구요. 여튼 애니메이션에 설사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이 부부의 이야기를 제3자 입장에서 보는 재미도 참 흐뭇한 일입니다. 책 말미에는 안노 히데아키가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인터뷰도 실려있어요. 실제 만화속 캐릭터의 동작을 손수 시연해 주시는 히데아키의 사진들도 인상적이구요 ㅎㅎ

그래도 나도 나름 오타쿠지 하는 분들이 이 책을 보게 된다면 아마 절로 고개를 끄덕이며 겸손의 미덕을 배우게 되지 않을까 싶네요. 한편 '그래 나는 아직 덜 미쳤어' 라고 다행(?)스럽게 생각하거나 아니면 '그래 좀 더 수련에 정진해야겠다!'라고 각오를 다지게 될지도 모르겠구요. 여튼 안노 모요코의 '감독 不적격' 적극 추천입니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 본문에 사용된 이미지는 본인이 직접 촬영하였으며 인용을 위해서만 사용되었고, 그의 대한 권리는 대원씨아이에 있습니다.




에반게리온: 서(序) (Evangelion:1.0 - You Are (Not) Alone)

에반게리온을 드디어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었던 감격의 순간!
지난 부산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되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아쉽게 기회를 놓쳐 제발 개봉만을
바라고 있었는데, 28일 정식 개봉에 앞서 프리미엄 시사회를 통해 약 열흘 정도 먼저 만나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원래 보고자 하는 영화는 가능한하면 최소한의 정보만을 가지고 영화를 접하는 편인데,
이번 <에반게리온 : 서> 역시 에바의 새로운 극장판이라는 최소한의 정보만 가지고 관람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인지 처음부터 제법 러닝타임이 흐르기까지는 사뭇 당황을 했었는데,
새로운 극장판이라 하여 이전에 발표했던 <에반게리온 데스 & 리버스>와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처럼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의 극장판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이번 극장판은 쉽게 말하자면 리메이크요(Remake),
이번 작품에 특성에 기인하여 자주 쓰이는 표현을 쓰자면 리빌드 (Rebuild) 형식을 갖춘 작품이었다.
즉 이번 작품에는 TV시리즈로 치차면 1~6화 정도의 내용을 수록한 것으로서 약 85% 이상이 기존에
TV시리즈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그대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완전히 그대로
쓰였다는 것이 아니라 내용적으로 그대로 쓰였다는 말이다.
그래서 포스터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우리의 빨간수트 아스카도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에바의 경우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는 이미지들의 수로만 보자면 단연 레이의 인기가 압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지만, 에바 팬들과 얘기를 나눠보다보면 아스카의 팬도 그 못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존 TV시리즈의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가져온 <에반게리온 : 서>이지만, 이를 모르고 갔던 나도 흠뻑
빠질 수 있었던 가장 원초적인 이유는 아마도 단순히 에바를 대형 극장 스크린에서 볼 수 있었다는 그 사실만으로
였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처음 신지의 대사가 나왔을 때, 속으로 '아, 저 목소리를 극장에서도 듣게 되다니!'하며
혼자 감동했을까;;; 확실히 TV시리즈로 더욱 익숙한 이 추억 속의 작품을 10년도 넘게 지난 지금에 와서 극장에서
다시 보게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매우 황홀한 경험이었다. 이 황홀한 경험을 더욱 황홀하게 해 준것은 앞서
설명한 '리빌드'작업을 들 수 있겠다. 1995년 작품인 에반게리온을 2008년으로 가져오면서
총감독 안노 히데아키는 당시에는 기술적으로 가능하지 않았던 3D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적극 도입하였고
와이드 화면에 맞게 프레임을 재구성하고 재배치함은 물론, 이 밖에도 여러가지 세세한 부분에 있어서
디테일한 수정작업을 거쳐 많이 본 듯한 느낌을 받지만 사실상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와이드 비율의 에바는
사실상 본적이 없는 것이 아닌가)영상을 만들어냈다.

3D로 새롭게 구성된 지오프론트의 모습이라던가 제3신동경시의 건물들이 꺼지고 솟을 때의 영상은
확실히 극장판에 어울리는 압도적인 스케일이었으며, 마지막 야시마 전투 신은 그야말로 컨티뉴를 남기는
이 영화에서도 확실한 클라이막스를 장식하고 있다.




수 많은 이른바 '오타쿠'를 만들어낸 장본인인 에반게리온의 가장 큰 특성은 '세컨드 임팩트' '인류보완계획' 등과
같은 미스테리한 설정 들과 신지의 독백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자아의 관한 끊임없는 성찰과 대화이다.
사실 <에반게리온 : 서>에서는 이러한 에바의 특성에 관해서는 맛만 보여주는 정도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기존의 TV시리즈가 그러하였듯, 아마도 4부작이 진행될 수록 점점 고조될 것이며, 마지막 극장판에 가서는
극한으로 치닫을 것이다.
안노 히데아키는 기존 TV시리즈의 팬들은 물론 에바를 처음 접하는 이들도 어렵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했는데, 확실히 TV시리즈에서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의 이야기를 꽤나 빠른 전개로
수록하고 있어, TV시리즈를 보지 않은 이들이라면 조금 뭐가 뭔지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겠으나
잘 알다시피 TV시리즈 역시 그 다지 설명이 친절한 작품은 아니지 않았는가.

아스카가 등장하지 않는 것은 많은 아쉬움으로 남기도 하는데, 예전에 에반게리온 관련 연재글을 쓸 때도
똑같은 멘트를 썼지만, 아마도 애니메이션 역사상 가장 짧은 러닝 타임을 등장하고도 가장 많은 팬들과
인상을 남긴 캐릭터 중 하나일 '카오루'의 경우는 이번 작품에서도 짧게 나마 등장하여 그나마 아쉬움을
덜어주고 있다(극장에서 내 옆에 앉았던 여성 분들은 카오루의 광팬이었는지 그가 잠깐 스쳤을 뿐인데도
마치 욘사마가 등장한 것처럼 어쩔 줄을 모르시더라--;. 하긴 나도 카오루의 광팬이긴 하다만 --;).
알려진 바로는 이미 작업중인 <에반게리온 : 파>에서는 <서>와는 달리 기존 TV시리즈와는 다른 이야기 전개와
구성, 그리고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하는 등 좀 더 볼거리와 기대할 거리가 많은 작품이 될 것 같다.

처음 예고편을 통해 들었었던 우타다 히카루의 주제가 'Beautiful World'는 처음 들었을 때에는 조금
임팩트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역시나 반복 청취효과와 극장에서의 감동의 효과를 얻은
탓인지, 지금으로서는 이 작품에 잘 어울리는 주제곡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리빌드를 한 마당에 이럴거였으면, 초반에 오프닝으로 TV판의 오프닝 곡인
'잔혹한 천사의 테제 (소년이여 신화가 되어라)'를 한 번 넣어줬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아마도 이 날 같은 에바 팬들만이 모인 자리에서 이 장면이 연출되었다면 다들 박수치면서 오프닝을
신나게 맞이 했을 것이다!

<에반게리온 :서>는 새롭게 시작되는 극장판 4부작의 첫 번째 작품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하고 있는
작품이면서, 팬들에게 오랜 기다림의 고단함과 염원을 한꺼번에 풀어줄 작품이 될 것 같다.

지금와 돌아보면, 나도 그 때 그 때 느끼지는 못했지만,
에반게리온이 알려준 것처럼 이를 되새기며 힘든 일을 겪고 시기를 겪을 때마다
하루하루를 극복해왔던 것 같다.
이제 한 동안은 3번의 극장판을 기다릴 수 있을테니 그 걸로 또 이겨낼 수 있을 듯.


보태기 1. 엔딩 크레딧 끝나고 에바 특유의 미사토가 진행하는 <에반게리온 : 파>의 예고편이 있으니
꼭 감상하실 길!!! 서비스! 서비스!!!


 

 
글 / ashitaka (www.realfolkblues.co.kr)




* 본문에 포함된 모든 이미지의 저작권은 태원엔터테인먼트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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