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간다 (A Hard Day, 2014)

충실해서 군더더기 없는 장르 영화



사실 최근 한국 영화들은 제목과 배우, 포스터만 보면 그리 변별력을 갖기 힘든 작품들이 많은 편이다. 액션이나, 느와르, 스릴러 등의 장르를 내세운 영화일 수록 특히 그런 경향이 심했는데, 배우만 바뀌었을 뿐 다들 영화 속 이야기라는 걸 감안해도 너무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되는 비슷비슷한 영화들이 특히 많았다. 이선균과 조진웅 주연의 영화 '끝까지간다' 역시 그런 영화 중 하나인 줄로만 알았다. 두 배우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냥 포스터 등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앞서 이야기한 영화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었다. 하지만 결과는 전혀 달랐다. 111분 간의 러닝 타임 동안 단 1분도 지루하지 않았을 정도로 참 재미있는 장르 영화였다. 무엇보다 장르 영화라는 것에 충실했고, 과한 욕심을 부리지 않는 군더더기 없는 영화라 더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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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훈 감독의 '끝까지간다'는 전형적인 장르 영화다. 이런 종류의 장르 영화의 클리셰들을 그대로 발견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장르 영화를 많이 접한 이들이라면 다음 장면을 예상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정도다. 다시 말해 영화 속 이야기에서 충격적인 죽음이나 반전이 등장하는 장면은 거의 예상이 가능했다는 얘긴데, 그럼에도 영화가 시시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그 반전이나 충격이 핵심인 영화가 아니었기 때문이고, 전반적인 리듬과 속도가 매끄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를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주인공이 짧은 시간 동안 엎친데 덮친 격으로 여러 가지 악제들을 겹겹히 겪게 되면서 벌어지는 곤란함과 피로함, 여기에 추격과 추리가 더해져 일정하게 빠른 속도로 끝으로 달려가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끝까지간다'는 군더더기를 최소화 하는 데 집중한 듯 보인다. 가끔 이런 장르를 선택한 영화들 (특히 한국영화에서)이 실수하는 것이, 영화 스스로도 감당할 자신이 없어 보이는 듯한 너무 거대한 담론을 끌어오려 한다던지, 너무 반전과 충격에 집중한 나머지 그 과정이 결국 재미를 잃게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끝까지간다'는 큰 욕심 부리지 않고 딱 주인공의 겪는 그 사건에만 집중한 것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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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본 이들은 알겠지만 이 영화에도 서브 텍스트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서브 텍스트가 수면 위로 부상할 때 쯤, 영화는 다시금 주인공의 이야기로 돌아와 집중하는 것을 택했다. 또 하나 이 영화가 흥미로운 점은 어쩌면 영화적일 수 밖에 없는 설정과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에도 상당히 한정적인 현실 사건으로 범위를 좁게 가져 감으로 인해 리얼리티를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즉,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벌어지는 일들도 '야, 이건 좀 너무한다'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잘 연출되어 있고, 조진중이 연기한 '박창민'이라는 캐릭터 역시 활약상만 놓고 보면 거의 판타지에 가까운 캐릭터라 할 수 있음에도, 영화 속에서 현실적으로 적절하게 녹여내고 있어 관객들이 시종일관 긴장감을 늦추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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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공포와 긴장감이 지속되는 동시에 유머를 잃지 않은 것도 매력 포인트 중 하나였다. 의외로 전혀 다른 포인트에서 관객들이 많이 웃기도 했지만, 어쨋든 전반적으로 주인공의 시점에 100% 몰입하게 만든 동시에 중간 중간 어색하지 않은 선에서 유머를 녹여낸 것은, 어쩌면 이 영화의 가장 큰 성취 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또한 사회 및 공권력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는 분명 담고 있으나, 딱 그 정도로만 멈춘 것도 좋았다. 만약 여기서 더 나아갔더라면 전체적인 긴장감의 리듬이 속도를 잃게 되는 것은 물론, 전체적인 분위기를 해치는 역효과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농담처럼, 에필로그처럼 스쳐가도록 비판의 메시지를 표현한 것은 오히려 이렇게 한 번 더 회자할 수 있는 계기가 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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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현재 극장에서 상영 중인 영화 가운데 열혈 영화 팬이 아닌 일반 관객들에게 하나의 영화를 추천해야 한다면, 주저 없이 '끝까지간다'를 추천할 것 같다. 누구든 영화가 상영된 111분 동안 몰입해서 볼 수 있는 영화이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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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희 (Our Sunhi, 2013)

우리는 누군가를 알고 있는가



홍상수 감독의 신작 '우리 선희'는 그의 전작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이나 '다른 나라에서' '북촌방향' 등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또 다른 작품이다. 흔히 어떤 좋은 것을 평가할 때 정반대의 개념을 들며, '이러면서도 이러하다'라는 평가를 하곤 하는데, 홍상수의 최근 작품들만큼 이러한 경향을 그대로 보여주는 예는 아마 없을 것이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선희'는 살짝 기대를 덜하기도 했었다. 홍상수 월드에 이미 녹아든 정유미, 이선균, 김상중과 새롭게 합류한 정재영이라는 조합, 그리고 대략의 시놉시스는 '아, 또 대충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겠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우리 선희'는 정말 또 한 번 큰 재미와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작품이었다. 최근 몇 년 간 본 영화들을 통틀어 봤을 때, 개인적으로 '재미있다'라는 표현을 이렇게 매번 사용한 감독은 아마 홍상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정말 재미있다. 사실 보는 내내 그 재미에 흠뻑 빠져서 흥분이 될 정도다. 어쩌면 이렇게 단촐해 보이는 구성으로도 무궁무진한 재미를 계속해서 만들어 내는지, 놀라움과 부러움이 아니 들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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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의 최근 작은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이야기와 구성을 담고 있었는데, 같은 이야기를 두고 다른 시각의 버전을 포개어 논다거나, 시공간의 모호함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 한다거나, 같은 인물을 두고 서로 모르는 다른 인물들이 벌이는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한 편으론 단순하지만 사실 굉장히 복잡하면서도 흥미로운 구성을 만들어 냈었다. '우리 선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번엔 선희(정유미)라는 같은 인물을 두고 세 남자가 각각의 관계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과연 누군 가를 정말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홍상수는 최근 작들을 통해 자신이 의문을 갖고 있는 어떠한 개념들(너무 일반적이라 우리가 잘 생각해보지 않는 것들에 대해)에 대해 하나 씩 작품을 만들어 왔다. 그의 최근 작들을 보면 반드시 등장하는 대사들이 있는데, '이뻐' '착해' 등이 그렇다. 홍상수 감독은 이 일반적인 표현들을 담기 위해 반대로 복잡한 이야기 구성과 깊이를 들고 있다. 이쁘다고 할 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떤 사람을 보고 이쁘다고 할 수 있는지. 착하다는 것은 진정 무엇인지. 누군 가에게 착하다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등 그는 이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주제를 최근 탐구해 왔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우리 선희'는 이런 맥락에서 누군가를 안다고 했을 때 우리는 과연 정말 안다고 할 수 있는 지에 대해 스스로 자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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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그의 작품들에서 특히 도드라졌던 또 다른 점은, 이야기의 소재나 방식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에게 있었다는 점인데, 즉 자신이 실제로 겪었던 사소한 일들에서 시작한 아주 개인적인 것들이 많았다.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영화 감독이거나 영화과 학생들, 교수들 인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주 단순하게 얘기하자면 홍상수는 자신이 실제 겪었던 일들을 토대로 조금의 상상력을 더해 관객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계속 비슷한 이야기처럼 보이는 측면도 있는데, 우리 내 하루하루가 매일 똑같지 않듯이, 그의 이야기도 항상 새로움을 들려준다. '우리 선희'를 보면서 특히 더 본인 스스로에게 하는 이야기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단 극 중 인물들 가운데 하나를 자신으로 설정하지 않고 선희를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의 남자에게 자신의 캐릭터를 각각 분배하여 결국은 자신이 살면서 후회스러웠던 행동이나 말, 그러니까 한 번 내뱉거나 실행해 버려서 두 번째 기회를 갖지 못했던 순간들에 대해, 세 명의 캐릭터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듯 했다. 즉, 김상중과 이선균, 정재영이 연기한 각각의 인물들은 두 번째 기회를 갖지 못하지만, 이 셋을 한꺼번에 보면 서로에게 두 번째 기회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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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 셋이 선희를 둘러싸고 관계를 맺어 가는 방식이 이 영화의 포인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군 가에게 선생님이나 선배가 되어 이야기를 해줄 때가 생기게 되는데, 그 말들이 나중에 생각하면 잘못된 이야기인 경우도 있고, 더 나아가 말하는 순간에도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자존심이나 여러가지 이유들 때문에, 그냥 지나치고 마는 일들이 종종 있다. 영화는 이 세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관객만이 볼 수 있는 이들의 두 번째 기회, 그러니까 직접적이진 않지만 다른 상황, 다른 인물을 통해 기회를 얻게 되는 두 번째 순간을 잘 보여준다. '우리 선희'라는 제목도 그런 측면에서 참 흥미롭다. 남자 셋은 각각 선희를 '우리 선희'로 생각하고 있지만, 과연 선희는 이들에게 '우리 선희'였는지 아니면 누군 가에게만 그러했는지, 영화는 참 덤덤하게 이 과정을 묘사한다.


누군 가를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가라는 질문과 더불어 우리는 과연 누군 가를 평가할 수 있는 가에 대한 질문도 함께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 두 질문은 같은 질문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과연 잘 알지도 못하면서 누군 가를 평가할 수 있느냐는 얘기가 된다 (이러고 보니 홍상수의 전작들은 다 같은 맥락이었음을 또 한 번 깨닫는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누구의 딸도 아닌 선희를, 우리 선희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싶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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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희'는 홍상수 감독의 최근 작 가운데서도 가장 명확하고 대중적인 구성을 갖추고 있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무언가 깊은 슬픔이나 화두를 떠안기 보다는, 오히려 '피식'하는 미소와 함께 '그래 맞아..' 라며 혼자 중얼거리게 만든다. 아... 정말 홍상수 월드의 끝은 어디일까. 금방 끝이 보일 것만 같았던 이 세계가 어쩌면 영원히 끝나지 않는 세계라는 걸 이제는 인정해야 할 것만 같다.



1. 무엇보다 정말 재미있어요. 보는 내내 너무 재미있어서 안달 날 정도. 그의 팬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아직도 뭔지 잘 모르겠는 분들은 '우리 선희'를 보세요.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홍상수 영화의 정수는 그대로 인 흥미로운 작품이었어요.


2. 이제 이선균과 김상중은 얼굴만 봐도, 목소리만 들어도 큭큭 거림이 ㅋㅋㅋ


3. 이민우씨는 이번 작품으로 거듭나려나 했는데 비중이 거의 없더군요. 은근히 잘 어울릴 것 같았는데 아쉬웠어요.


4. 영화를 본 분들이라면 이 곡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겠죠. 정말 신의 한수!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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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Nobody's Daughter Haewon, 2012)

솔직할 수록 슬픈 홍상수 영화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대해 느낀 바를 글로 옮기는 것이 점점 어려워 진다. 개인적인 역량 때문인 탓이 크겠지만, 그와는 별개로 더 이상 설명하거나 글로 표현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요 근래 몸집은 더 작아지고 이야기는 더 시공간을 오가는 방식으로 촬영된 작품들은 그나마 그 형식에 대해서라도 조금 글로 옮겨볼 여지가 있었는데, 이 작품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은 그런 형식적인 측면도 있지만 그 보다는 더 감정적인 영화이기에 글로 표현할 여지가 현저히 제한적인 영화라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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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 영화를 보며 느낀 단순한 점이라면, 이전 그의 작품 속 인물들도 그러했지만 이 영화 속 인물들은 다른 영화 속 인물들 보다, 더 나아가 현실 속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자신을 표현하는 데에 솔직하다는 점이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들을 꼽아보자면 대부분이 '정말 예뻐' '정말 맛있겠다' '정말 좋아' 등 감정을 표현하는 대사들이다. 그것도 '정말'이라는 표현이 더해진 강렬하고 극대화된 표현들이다. 글쎄 잘 모르겠다. 예전에는 혹은 아직도 홍상수 영화 속 등장하는 남자 캐릭터들을 보고 단순히 '찌질하다'라고 표현하곤 하는데, 나는 예전 영화들에서도 그렇고 특히 최근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남자 캐릭터들에게서 이러한 '찌질함'은 전혀 발견하지 못했었다. 오히려 순수에 가까운 솔직함을 엿볼 수 있었는데,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저렇듯 자신의 감정을 과장하듯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반대로 얘기하자면 이들의 표현이 과장하듯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평소 현실에서 그리 솔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속으로는 저렇듯 극대화된 감정을 느끼지만 겉으로 표현하는 것에는 서툴거나 자신을 숨기는 데에 더 익숙하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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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요 근래 홍상수 영화를 보며 이런 인물들의 솔직함에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다. 현실 속에는 간혹 판타지처럼 느껴질 정도로 솔직한 인물들의 감정 표현은, 그 어떤 액션 영화의 클래이맥스보다도 통쾌하고 시원한 감정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이전 영화들의 인물들이 비교적 '좋아하는 것'에 대한 감정을 표현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그 감정은 동일하나 그 감정으로 서로 상처받고 아파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슬픔도 더 깊게 느껴졌다.


관객은 여전히 제 3자일 수 밖에는 없겠지만 홍상수 영화는 그 제 3자를 그들의 방식에 맞춰 이해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더 극중 인물의 심리를 (설령 그것이 제 3자가 받아들이기 힘든 방식이라도) 이기적이리만큼 더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서,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손짓하고 있는 듯 하다. 최근들어 홍상수 영화에는 꼭 홍상수 자신의 이야기라 할 수 있는 질문과 대답들이 등장하는데 (왜 영화를 만드세요? 같은), 이 작품 역시 영화 감독인 성준(이선균)이 술집에서 학생들과 만나 이야기하던 중 비슷한 대화가 오간다. 이런 대화 시퀀스에서 느껴지는 것은 홍상수 감독의 일종의 짜증이랄까. 앞서 한 이야기로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왜 자신을 이해 못하는지 그들의 방식으로 설득하려 하기 보다는, 오히려 더 자신의 방식대로 이야기하면서 이제는 '굳이 이해하지 않아도 돼'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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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쨋든 이 영화는 이미 제목에서부터 뭔가 쓸쓸함과 슬픔이 묻어나는 영화였다. 아마 다른 감독의 영화였다면 '독립적인 여성 주인공의 이야기인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어느덧 솔직함이 무기가 된 홍상수 영화에서 이러한 제목은, 결국 해원은 진짜 해원이 되지 못하겠구나 라는 예상을 하게 되었다. 다른 홍상수 영화처럼 중간 중간 키득이게 되는 장면들도 있었고, 같은 장소와 시간을 홍상수 식으로 활용하는 장면들에 깊은 인상을 받기도 했지만, 잘은 모르지만 이 영화는 솔직할 수록 더 슬픈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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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극중 유준상과 예지원 커플은 '하하하'의 연속으로 느껴져서 묘한 느낌이.


2. 홍상수 영화는 언제부턴가 가보고 싶은 영화가 되어가고 있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는 서촌과 남한산성이 자연스럽게 가고 싶어지더군요. 조만간 남한산성 한 번 가야겠네요 (좋은 날 말이죠 ㅎ)


3. 정은채는 참 매력적이더군요. 이국적이라는 말로는 표현이 다 안될 정도로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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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火車, 2012)

삭막한 사회 속 잊혀져 가는 존재에 대한 연민



변영주 감독의 신작 '화차'를 보았다. 이 작품은 버블 경제 붕괴라는 사회적 문제를 겪고 있던 일본의 1990년대를 배경으로 신조 교코라는 여성의 삶을 미스테리한 방식으로 풀어낸 미야베 미유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미야베 미유키는 여러 작품들을 통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 그 원인을 주로 사회로부터 찾는 작가라는 얘기를 듣게 되었고, 그런 측면에서 변영주 감독의 작품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내가 느낀 변영주 감독의 '화차'는 미스테리와 그 속의 인간성 그리고 이를 만든 사회의 문제에 대한 직간접 은유까지 적절한 조화를 이룬 무게감 있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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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결혼은 앞둔 문호(이선균)와 선영(김민희)이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집으로 내려가던 중 들린 휴게소에서 선영이 갑작스레 실종되면서 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 실종의 미스테리를 풀어가기 위해 전직 형사인 사촌 형 종근(조성하)까지 합류하면서 조금씩 실마리가 잡혀가지만, 알아가면 갈 수록 미스테리의 깊이도 마음의 상처도 더 깊어만 간다.


단순히 형식적으로만 보자면 갑작스레 사라진 선영을 추적하고 그 과정에서 밝혀지는 선영의 존재에 대한 미스테리를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화차'를 본격적인 미스테리 스릴러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왜냐하면 '화차'는 미스테리가 포인트인 작품이 아니라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풀어가는 일종의 도구 정도로만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원작에서는 형사인 사촌 형이 사건을 풀어가는 시점에서, 문호와 선영, 종근의 삼자 구도로 각색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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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시종일관 차갑고 어두운 색감과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인물들은 거의 웃을 겨를이 없을 정도로 상처가 깊어만 가는 얼굴을 하고 있다. 문호가 선영을 쫓는 과정 속에는 기본적으로 선영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 있다. 자신이 결혼을 결심했을 정도로 사랑했던 연인으로서의 애정은 물론이고, 점점 미스테리가 풀릴 때마다 인간적인 실망과 분노가 일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더 나아가 그럴 수 밖에는 없었던 인간적 연민의 마음까지 도달한다 (특히 마지막 용산역 에스컬레이터 에서의 그 대사는, 애정으로 기인했을지 몰라도 분명 인간적 연민이 나타난 대사였다). 이렇듯 단순한 로맨스의 감정에서 그치지 않고 인간적 연민까지 도달하는 과정이 좋았다.


이렇게만 보면 김민희가 연기한 극중 선영이라는 캐릭터가 이 사회가 만든 어쩔 수 없는 피해자임만을 강조하여 연민이 들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만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꼭 그렇지 만은 않다. 관객이 선영에게 연민의 감정을 갖을 수 있도록 한 것은 맞지만, 그녀로 인해 또 다른 피해를 받은 인물들 (여기에는 문호도 포함)과 혹은 선영에게 연민의 감정을 갖는 중에 간과될 수 있었던 인물들에 대한 묘사들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있기 때문에 관객에게 선영에 대한 연민 외에도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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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주 감독은 '화차'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삭막한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직접적으로는 김민희가 연기한 선영이 자신으로 살아오지 못한 현실을 묘사하면서, 사람하나 죽거나 어찌되어도 아무도 관심조차 없는, 무관심과 단숨에 무너져 버리기 쉬운 낱알들로 이루어진 사회의 모습을 그린다. 즉, 더이상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없도록 내몰린 사람과 내몰고 있는 사회, 또 그 사람이 자신이 아닌 사람으로 살아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각박한 사회와 어쩌면 그런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 살기에 바뻐서 역시 내가 당하기 전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이들로 구성된 사회에 대한 씁쓸한 자화상이자, 그 사회를 살고 있는 인물들에 대한 연민을 담으려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서인지 용산역, 용산 이라는 장소를 선택한 것은 더욱 의미 깊게 느껴졌다. 하루에도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용산역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세 주인공들의 교차는 영화의 메시지를 더욱 선명하게 했고, 마지막 용산역 옥상 위에 선 선영의 모습에서는 자연스럽게 같은 장소인 용산에서 철거민으로 내몰려 망루 위에 올라야만 했던 이들을 떠올리게 했다. 변영주 감독의 작품이라 더더욱 연관 지을 수 밖에는 없었던 점도 부인할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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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영화를 보면 누구나 발견하게 되는 동물병원 간호사 역할의 배우 김별 님. 좋았습니다.

2. 누가 이 영화가 16억 예산의 영화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가격대비 매우 훌륭한 때깔이었습니다.

3. 영화 음악도 은근히 좋았어요.

4. 이 영화를 용산 CGV에서 봤으면 어쩔 뻔 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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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희의 영화 (Oki's Movie, 2010)
모호함으로 완성되는 논리


홍상수 감독의 신작 '옥희의 영화'는 참 특별한 영화다. 최근작 '잘 알지도 못하면서'와 '하하하'가 묘한 연장선상에 있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신작 '옥희의 영화'는 이 연장선상에서 살짝 벗어나 있으면서 홍상수 감독의 작품에서 항상 볼 수 있었던 우연을 통한 긴장감과 인물들간의 관계의 대한 논리 역시 기대하는 바를 벗어나는 것으로 오히려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낸 특별한 작품이다. '옥희의 영화'는 홍상수의 예전 영화들과 비슷하게 '주문을 외울 날' '키스왕' 폭설 후' '옥희의 영화' 이렇게 4개로 나뉘어져 있지만, 이는 옴니버스는 물론 아닐 뿐더러 단순하 '장'의 개념으로 보기도 힘든 묘한 독립성을 지닌 '편'으로 나뉘어져 있다. '옥희의 영화'는 이런 모호함의 논리도 가득찬 작품이다. 각 편의 인물들은 같은 인물인 동시에 다른 인물이며, 배우들은 하나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동시에 사실은 1인 다역에 가깝게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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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각 '편'은 완전히 연결되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벽하게 독립적이지도 않다. 즉 각 편마다 이야기와 캐릭터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은근히 주고 있기는 한데 (실제로 주느냐 마느냐와는 별개로 관객들에게는 확실히 영향을 주고 있다), 이것이 일반적인 영화들의 인과관계와는 달리 서로의 이야기를 맺어주고 인물들의 연결 고리를 이어주는 것에 영화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 나중에 읽게 된 홍상수 감독의 인터뷰를 보니 일부러 이런 고리를 연결하지 않는 것을 통해 이질감을 주려고 했다는데, 확실히 이 부분에서는 묘한 이질감이 느껴진다. 특히 이미 이런 인과관계나 복선 등에 익숙해진 관객들로서는 이런 이질감을 더더욱 느끼게 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첫 번째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진 작가 여성의 경우 묘한 여운을 주고 마는데, 관객은 '아, 이 인물이 나중에 어떻게라도 이야기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게 되고, 또한 자신의 영화의 GV에서 여성관객에게 예전 여자친구에 대한 질타를 받게 되는 진구의 이야기는 나중에 등장하는 송교수의 이야기 혹은 송감독, 아니면 진구의 다른 이야기와 겹쳐지진 않을까 엮어보게 되지만 사실 이들 간의 직접적인 연결고리는 주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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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호함의 연결 고리는 각 편에 등장하는 같지만 다른, 아니 다르지만 같은 인물들로 인해 더 깊어진다. '주문을 외울 날'의 등장하는 결혼한 진구의 집은 이후 '키스 왕'에서 등장하는 옥희의 집과 동일한 곳이다. 하지만 진구는 이 집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이것은 관객만이 느끼는 이질감일 수 있다. 그러면서 이 네 편의 이야기를 시간 상으로 분류해보고 그 속에서 이들의 관계를 다시금 정리해보게 되는데, 뭐 하나 명확한 것이 없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셉션'과 비교해서 이야기해보자면, '인셉션'은 치밀한 설계를 통해 관객이 여러가지 정답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고안한 경우라면, '옥희의 영화'는 처음에는 이와 비슷하게 답을 찾도록 유도하는 (이는 감독이 의도했다기 보다는 일반적인 영화에 익숙해진 관객들이 스스로 학습한 결과로 인한 것이라 봐야겠다) 것 같지만, 막상 답을 찾으려 연구하다보면 결국 애초부터 답을 정해두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경우다. 다시 말하자면 '인셉션'은 여러가지 정답을 정해둔 경우고, '옥희의 영화'는 정답을 아예 만들어두지 않은 경우라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 속 모호함은 곧 이 영화의 논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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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마지막 편인 '옥희의 영화'에 가서 본격적으로 이 모호함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말그대로 이 네 번째 편은 옥희가 만든 '영화'에 대한 이야기다. 젊은 남자 (진구), 늙은 남자 (송교수)와 각각 동일한 아차산에 갔던 경험을 하나의 그림으로 연결해 놓은 (그렇게 해보고 싶었다는) 이 '옥희의 영화'는 이 모호함에 대한 작은 단서가 된다. 씨네 21의 정한석 기자가 글을 통해 이야기했던 것처럼, 네 번째 편인 '옥희의 영화'를 통해 결국 진구와 송교수는 극중 배우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배우가 되어버린 다는 것은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선균, 문성근 등이 연기한 캐릭터가 1명이 아닐 수 있다는, 1인 다역일 수 있다는 좀 더 확실한 이유가 된다. 

더불어 '옥희의 영화'는 좀 더 홍상수 개인의 영화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는데, 극중 주인공이 영화 감독 및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점도 그렇고, 자신이 일하고 있는 건국대를 배경으로 한 것도 그렇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극중 유준상에게 질문을 하던 학생이나 이번 진구의 GV의 장면을 보면서도 역시 홍상수 감독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엿볼 수 있었는데, 감독에게 친절을 강요하는 관객들에 대한 작가로서의 자존심이랄까. 가끔은 바램 정도가 아니라 작가에게 자신이 원하는 메시지나 방향을 강요하듯 요구하는 관객들에게, '니가 뭘 알아' '당신이 뭔데 나한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고 말하는 듯 해 오히려 시원한 부분도 있다. 감독이 원해서 18세이상 관람가가 된 것도 그런 맥락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맘 같아서는 30금 정도로 하고 싶지 않았을까 싶은데,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한 강한 자존심과 가치관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것 만으로도 인정해야할 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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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여러 장면이 인상 깊었지만 본능적으로 가장 호기심이 넘쳤던 장면이라면 '폭설 후'에 등장한 강의실 장면을 들 수 있겠다. 폭설로 인해 수업에 진구와 옥희만 오게 되자 송교수는 이들에게 아무거나 궁금한 것을 물어보라고 하여 이 문답은 시작되게 되는데, 그 질문들이 그야말로 아주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물음들에 가깝다. '저는 현명한가요? '제가 영화에 재능이 있나요?' '성욕은 어떻게 이기시나요?' '사랑은 꼭 해야하나요' 등의 질문에 송교수는 비교적 주저하지 않고 답들을 한다. 물론 이 답은 정답도 아니고 완벽하지 않은 것들도 대부분이지만, 내게 이 문답 장면은 일종의 판타지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누군가에게 이렇듯 아무것도 꺼릴 것 없고, 과연 답을 들을 수 있을까 라는 의심 없이 물어볼 수 있을까 라는 의심과 부러움은 물론, 저런 상황과 관계를 가져보지 못한 아쉬움 때문이랄까. 이 장면은 그래서 더욱 개인적으로 인상 깊고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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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이야기는 우연의 법칙을 일부러 피해가려 하고 있지만, 홍상수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은 여전히 우연과 순간의 감정에 충실하고 있다. 실제로 홍상수 감독의 인터뷰를 보면 영화의 많은 부분들이 그 날의 느낌 혹은 당시의 상황 등에 충실한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실제로 103년 만에 폭설이 내린 그 날, 영화 속에서 보았던 식의 이야기를 썼으면 좋겠다 생각한 홍상수 감독은 배우들에게 전화를 걸어 '오후에 나올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고 한다. 대본이 당일 나오는 것이야 이미 유명한 사실이지만, 그 것 외에도 더 많은 것들을 현장과 그 때의 감정에 충실한 홍상수 감독의 영화 만들기를 보면 놀라움과 더불어 몹시 흥미로울 수 밖에는 없다. 특히 정유미와 이선균이 웃으며 포즈를 취한 메인 포스터의 경우, 사실 '포즈를 취한' 것 같은 느낌이라면 조금 특이하다는 생각은 했었는데, 이것이 정말로 촬영장에 왔던 일반 분이 배우들을 알아보고 사진 촬영을 요청해 촬영된 사진이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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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미 수 많은 영화와 매체에 등장했던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이 이렇게 사용될 수 있음을 몰랐다. 앞으로는 '위풍당당 행진곡'을 들으면 '옥희의 영화'가 떠오를 것만 같다.

2. 아차산 시퀀스에서는 예상하지 않았던 몇몇 아름다운 영화적 장면을 만나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자연광을 받아 더욱 빛나는 정유미의 자태랄까.

3. 사실 영화를 보고나서 아래 씨네21 정한석 기자의 글을 읽었는데, 이 글 보고 많이 힘이 빠졌어요. 이미 전력을 다 쏟아낸 글을 보고나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들곤 하죠;

'아무것도 아닌 그러나 신비하기 이를 데 없는' 정한석.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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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안개와 굴레에 관한 담론


<질투는 나의 힘>을 연출했던 박찬옥 감독의 7년 만의 신작입니다. 신작을 만나기 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개인적으로는 전작보다 <파주>가 더 취향에 맞았던 것 같습니다(어떤 인터뷰를 보니 전작보다 더 대중적인 요소에 신경을 썼다고 했는데, 사실 그건 어느 정도 수긍이 되기도 하지만 애매한 부분도 있구요 ;;;). <파주>는 이선균과 서우라는 배우들 때문에도 기대를 갖게 되었던 영화였습니다. 특히 서우의 경우 <미쓰 홍당무>를 통해 주목할 만한 연기를 선보였던터라 더욱 기대가 되었는데, 전작과는 전혀 다른 캐릭터라 과연 이런 어두운 캐릭터는 어떻게 소화해 낼지가 궁금하기도 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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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는 안개 자욱한 파주를 배경으로 시작됩니다. 이 영화는 제목을 '파주'가 아니라 '안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파주와 안개는 비슷한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파주'는 '밀양'처럼 미지의 공간은 아니에요. 어찌되었든 아주 멀지는 않은 곳에서 오랜 시간을 살았던터라 그 지명이 낯설지 않은 것도 있고 대략의 동네 분위기도 알고 있었으니까요. 영화에서 이 파주란 공간은 하나의 굴레처럼 작용합니다. 극중 주인공들은 이 파주에 자의든 타의든 오게 된 뒤, 역시 자의로 혹은 타의로 떠나게 되지만 그 이별이 영원하지는 못합니다. 눈에는 보이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안개처럼, 떠나려고 하지만 결국엔 떠날 수 없는 커다란 굴레 같은 것이지요. 은모(서우)가 파주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쉽게 생각하면 단순히 그 곳에 부모님이 남겨준 집이 있어서, 혹은 친구가 거기 있어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상 떠나지 '못'하고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건 바로 어쩔 수 없음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됩니다.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어서 무작정 인도로 여행을 떠났을 만큼 남아있고 싶지 않은 곳이었지만 돌아와서 왜 갑자기 떠났는지를 설명해야 된다는 부담감을 무릎쓰고라도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데에는 분명, 형부 중식(이선균)에 대한 미묘한 감정 만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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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를 얘기하면서 이 영화의 홍보 방식에 대해 문제를 삼은 적이 있는데, 왜냐하면 이 영화를 형부와 처제의 불륜으로 인한 격정멜로로 포장하여 홍보했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이 홍보방식은 분명 받아들이는 이들을 생각해보았을 땐 문제가 있는 방법이었지만, 말자체를 따지고보면 전혀 틀린 말은 아니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여러가지 굴레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어쨋든 '멜로'영화라고 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형부와 처제에게 묘한 감정이 생긴다 하더라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불륜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고(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과는 다른 의미로요), 이 미묘한 감정 사이에는 각 인물들마다 개별적으로 생각해볼 만한 큰 사건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확실히 단순 멜로로 보기 어려운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멜로적인 스토리 외에 영화에는 철거민의 이야기가 비중있게 그려지는데, 이 부분의 비중에 대해 감독과 스텝들도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네요. 확실히 이 부분의 비중이 커지면서 큰 멜로의 줄기에서 보았을 때 이야기가 분산되는 경향이 생긴 한편(이에 따라 호불호가 생길 수도 있겠구요), 최근 벌어졌던 용산참사를 떠올리게 하면서 정치 사회적인 생각들도 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거든요. 그런데 이 영화는 분명히 얘기하지만 하나의 배경과 캐릭터를 설정하기 위한 소스로 철거민 이야기가 존재할 따름이지 이것이 주가 되는 스토리는 아닙니다. 이런 뉘앙스는 철대위 대책위원장을 맞고 있는 극중 중식의 태도에서 드러나는데, 중식은 젊었을 때 대모를 시작하게 된 것도 정치적 의도가 강해서라기 보다는 여자 선배의 모습에 반해 시작하게 된 점이 분명 있었고, 철거민이 아니면서 철대위를 맞게 된 것도 생존을 위한 사투의 측면보다는 자기 위안적인 성격이 강한 편이거든요. 그래서 영화 후반 은모가 '왜 이런 일들을 하세요?'라고 했을 때 중식의 대답은 흥미로웠습니다. 결국 중식에게 철대위는 또 하나의 파주처럼 위안이자 상처인 굴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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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옥 감독의 전작 <질투는 나의 힘>이 대사와 관계에서 오는 미묘한 갈등으로 풀어갔던 작품이라면, <파주>는 의외로 많은 대사보다는 이미지로 풀어가는 작품이었습니다(그래서 몇몇 장면에선 많은 분들이 이름 때문에 해깔리시곤 하는 박찬욱 감독의 작품이 연상되기도 했네요). 안개 자욱한 첫 장면도 그렇고 방안에 누운 중식을 바라보는 카메라 앵글도 움찔할 정도였으며(이런 장르에서는 잘 쓰지 않는 조금 다른 앵글이었거든요), 안개처럼 표현된 거친 화면의 입자들까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이미지로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영화였고, 대사가 있을 때 보다는 오히려 없을 때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장면은 영화 후반부 철거현장으로 돌아온 은모가 마치 유령처럼 대치 건물로 들어가는 컷트였는데, 약간의 슬로우 모션과 진짜 유령처럼 주변의 상황과는 아랑곳 하지 않고 유유히 건물로 향하는 은모의 모습은 흡사 알폰소 쿠아론의 <칠드런 오브 맨>의 그 유명한 롱테이크 장면을 떠올릴 정도로(허름한 건물로 걸어들어가는 장면이 하나의 테이크로 이루어져서 더욱 그렇게 느꼈던 것 같네요)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었습니다(이 장면을 다시 보기 위해서라도 한 번쯤 극장에서 다시 보고 싶을 정도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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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에서 중식 역할을 맡은 이선균을 보면서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의 한석규가 떠올랐습니다. 무언가 본심을 말하지 못하고 그냥 혼자서 웅크리고 터트리지 못하는 것 때문인지도 모르겠고 다른 한 편으론 이제 이선균이라는 배우에게서 특별함이 느껴지기 시작해서 인지도 모르겠네요. 확실히 중식이라는 인물은 이선균이 연기하면서 좀 더 멋진 캐릭터라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파주>에서 여전히 돋보이는 배우는 역시 서우입니다. <미쓰 홍당무>를 보며 '야, 저렇게 잘 우는 연기를 하는 여배우가 또 있을까?'싶었었는데, <파주>에서도 그녀의 우는 연기는 역시나 독보적입니다. 무언가 서러움이 붇받치면서도 연기가 아니라 진짜 우는 것 같은 착각에 막 어깨를 토닥여 주고 싶을 정도랄까요. 국내에서 중고생부터 성인까지 모두 어색하지 않게 소화할 수 있는 여배우를 꼽으라면 다시 한번 서우를 주저없이 꼽을 수 있을 것 같네요.

이선균, 서우의 경우 어느 정도 기대를 하고 갔던 경우라면 은모의 언니이자 중식의 아내인 은수 역할을 맡은 심이영의 연기는 기대하지 않았던터라 더 인상적인 경우였는데, 굉장히 낯설지 않은 얼굴이면서도 막상 따져보니 제대로 작품을 본 적은 없었던 그녀의 연기는, <파주>의 작은 발견 중 하나였습니다. 그녀의 후속 작품을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1. 철거민 동료들 가운데 <똥파리>에 출연했었던 정만식씨의 모습도 반가웠습니다.
2. 이경영씨 역시 특별출연하고 있는데 거의 대사 없는 캐릭터였음에도 그 날카로운 눈빛 만큼은 기억에 남네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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