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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자 (Okja, 2017)

부조화의 조화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아쉬움


넷플릭스를 통해 제작되어 더 큰 화제, 아니 영화 외적인 요소로 더 많은 말들이 먼저 오갔던 봉준호 감독의 신작 ‘옥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옥자’는 봉준호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종합하는 성격이 강한 동시에, 전작 ‘설국열차’가 그러했듯이 근본적으로 해외 시장을 기반으로 만든 한국영화라 할 수 있겠다. 어떤 감독의 세계관을 집대성한 성격의 작품들의 경우 아주 분명하게 장단점이 드러나곤 하는데 ‘옥자’ 역시 그러하다. 전체적으로 스토리와 구성 측면에서 ‘괴물’, ‘플란다스의 개’와 겹쳐지는 부분이 상당히 많은데, 아무래도 장점들만 (꼭 장점들만 가져왔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뽑아 하나로 다시 합쳐지는 과정을 겪다 보니 각각의 깊이는 떨어질 수 밖에는 없고, 순간순간의 매력은 여전하지만 큰 그림으로 보았을 때 헐거워지는 측면이 발생한다. 재료가 너무 다양한 탓에. 그리고 그 재료들이 너무 매력적이었던 탓일까. 그 재료 하나하나는 다른 완제품의 맛과 대등할 정도로 매혹적이었지만, 모두를 버무린 ‘옥자’라는 요리의 맛은 오히려 조금 싱거운 맛이었다. 차라리 섞어 먹지 말고 따로 하나 씩 먹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본인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봉테일’이라는 그의 별명은 그의 팬들과 관객들로 하여금 그의 영화를 볼 때 무의식적으로 디테일을 찾는 것에 집중하게 만들었고, 이점 역시 초반에는 봉준호라는 감독의 세계관에 매력을 느끼게 하고 더 관심을 갖게 하는 장점으로 작용했지만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그의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는 것을 막는 걸림돌로 작용하는 듯하다. ‘옥자’라는 제목과 슈퍼돼지 그리고 글로벌한 세계관은 그 자체로 이질감을 주는데, 이건 봉준호 영화가 항상 선호하는 방식이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것들의 조화를 억지로 만들어 내기보다는 부조화 그 자체를 아슬아슬하게 버무려내는 기술, 그리고 크기로만 따지자면 비교가 되지 않는 거대한 음모 혹은 이야기 속에 원치 않게 놓여 버린 소시민 주인공. 마지막으로 그 주인공이 거대한 이야기 속에서 선택 혹은 마주하게 되는 극도로 현실적인 결말. 이러한 봉준호 세계관의 익숙함은 ‘옥자’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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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봉준호의 영화적 구조가 반복되었음에도 매번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이 가능했던 것은 그 커다란 구조적 세계관과 디테일한 설정들의 유기적인 연결 고리와 조화 때문이었다. 봉준호의 이야기들은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될까?’를 궁금하게 만드는 영화라기보다는 순간순간에 흥미를 느끼는 중에 나도 모르게 결론에 달해 있을 정도로 그 과정의 리듬과 긴장감을 즐길 수 있었다. 관객의 대부분이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 ‘살인의 추억’과 같은 영화가 대표적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미제사건을 주제로 했지만 관객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거 혹시 범인이 잡혔었나?’라고 착각을 하게 될 정도로 과정의 치밀함과 영화 만의 스토리텔링에 완전히 빠져들게 된다. 


‘옥자’ 역시 영화가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이야기의 구조를 파악하게 되면 어렵지 않게 전개 과정을 예상할 수 있게 된다. 더군다나 ‘옥자’는 가축이 아닌 가족으로서 등장하는 ‘옥자’라는 슈퍼돼지 캐릭터를 통해 아주 직접적으로 자본주의 시스템과 이를 소비하는 방식에 대한 메시지를 드러내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에, 숨은 메시지를 어렵게 찾아낼 여지도 많지 않다. 그렇다면 결국 봉준호의 영화들이 매번 그래 왔던 것처럼 그 과정에서 다시 한번 다 알고 있는 얘기라고 생각하고 있는 관객들을, 알지만 사실 모르는 미지의 세계로 끌어당겨야 하는데 이 영화는 그 유혹의 강도가 솔직히 그리 강하지 못하다. 익숙한 이야기들은 익숙한 대로 마무리되고 그 과정의 리듬 감도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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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 크레디트를 보며 유명한 배우들의 이름과 스텝들의 이름들 가운데서 개인적으로 더 주목했던 이름은 음악을 맡은 정재일이었는데, 본래 그의 팬이었기에 그가 맡은 영화 음악에 대해서도 기대가 컸다 (크레디트 상으로는 정재일 외에 젬마 번즈가 함께 참여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옥자’의 음악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너무도 분명해 보였으나, 그래서 너무 직접적이고 오히려 장면 자체를 설명하려 드는 아쉬운 부분이었다. 흔히 장면의 감성과 정반대 되는 음악을 선곡해 그 감정을 더 극대화시키곤 하는데, ‘옥자’의 음악 역시 그러한 시도를 하고 있으나 결과는 ‘그런 시도를 하려 했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에 그칠 뿐이었다. 


앞서 봉준호의 영화들이 어울리지 않는 인물들, 세계관들을 동시에 가져와 균열에 가까운 부조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 매력이라고 했는데, ‘옥자’의 몇몇 장면들과 음악은 아쉽지만 그저 균열과 이질감에서 멈춰버린 경우가 많았다. 이건 아마도 더 많은 관객, 그러니까 더 다양한 나라의 관객들을 상대하고 있다는 걸 감독은 물론 모든 스텝들이 인지한 상태에서 제작되었기 때문에 발생하게 된 일종의 부담감의 산물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부담감(기대감)이 없을 땐 오히려 본인이 원하는 100%의 색깔을 내는 것에 더 집중하게 되는데, 좀 더 대중적인 색깔, 더 많은 색깔을 포용해야 된다는 의도가 오히려 한 두 가지 색을 분명히 낼 때보다 여러 측면에서 흐려진 결과물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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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자’에는 몇 번의 빠른 전개 시퀀스가 등장한다. 수평으로 수직으로 인물들이 추격의 형태로 이동하는 장면들은 이 장면 이전까지 끌고 오던 이야기의 긴장감을 배가 시키며 그대로 속도감을 더해 단 번에 다음 단계로 이동시키는 기능을 해야 하는데, ‘옥자’의 경우는 그 이전에도 확실한 매력을 보여주지 못한 탓도 컸지만 결정적으로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추격의 장면들이 그리 인상적이지 못했다. 그 사이사이에 들어 있는 빛나는 유머들이 오히려 안타까울 정도로, 그 시퀀스가 끝나고 난장판이 된 채 남겨진 배경을 보면 ‘휴~’하며 잠시 가슴을 쓸어내리며 숨을 돌리기보다는 조금 허무한 감정이 들뿐이었다. 캐릭터들의 경우도 만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연상될 정도로 전형적으로 과장된 인물들이 많았는데, 본래 좋아하던 배우들이어서 더 아쉬움이 느껴졌다. 배우들의 연기가 아쉬웠던 것도 아니고, 그 과장됨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도 이해되었지만, 서두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 의도가 영화 전체와 자연스럽게 녹아들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아쉬운 마음에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째 느끼는 것보다 더 별로라고 하는 것 같은 글이 되어버렸지만, 그건 진심으로 별로여서라기보다는 더 좋을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옥자’에서도 여전히 장면의 디테일, 설정의 디테일 하나하나는 매력적이다. 그리고 봉준호가 이 이야기를 통해 영화에서 결론을 낸 방식 역시 여전히 의미 심장하고 앞으로의 고민과 옅은 희망을 동시에 느끼게 만든다. 모두를 계몽하려고 노력하다가 실패하는 것은 오히려 쉽다. 하지만 긍정적인 변화를 위해 현실적인 (그것이 절반 이상의 실패 혹은 극소수의 승리라 할지라도)한 걸음 걷는 것을 택하는 봉준호 세계관의 결말은 이번에도 많은 것을 생각해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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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영화를 봤던 이 날, 삼겹살을 저녁으로 먹자는 말에 단호히 거절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옥자’ 때문이었다. 적어도 한 동안은 어쩔 수 없이 먹지 못하지 않을까. 바로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한동안은 고기를 먹지 않는(못하는) 것이, 이 영화와 마찬가지로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가장 현실적인 선택일 것 같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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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즈너스 (Prisoners, 2013)

누가 죄인인가



휴 잭맨과 제이크 질렌할 주연의 영화 '프리즈너스'를 보았다. 개봉 전에는 두 배우의 출연 사실만 알고 있었는데, 뒤늦게 알고 보니 '그을린 사랑'을 연출했던 드니 빌뇌브의 작품이었으며 두 배우 외에도 폴 다노, 마리아 벨로, 테렌스 하워드, 비올라 데이비스, 멜리사 레오 등 좋은 배우들이 여럿 출연하고 있는 작품이었다. '프리즈너스'는 2시간 반이라는 긴 러닝 타임을 시종일관 무거운 분위기로 가득 채운, 꽉 찬 스릴러 물이다. 몇 가지 기술적인 면이나 장르 적인 면에 대해 이야기할 것들은 있지만, 메시지 적으로는 생각보다는 이야기할 것이 그리 풍성하지는 않은 (직관적인) 작품이기도 했다. 오히려 그 부분이 스릴러에 더 집중할 수 있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도 있겠다. 2시간 반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러닝 타임이 조금은 지리 하게 느껴졌던 건, 재미가 없거나 느슨해서 라기 보다 이 영화가 선택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의도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감독은 관객이 극 중 아이를 유괴 당한 부모와 이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와 마찬가지로 진이 빠지길 원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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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장르 영화적인 면에서 긴 러닝 타임과 쉽사리 풀리지 않는 사건, 그리고 범인에 대한 궁금증은 역시 제이크 질렌할이 출연했던 '조디악'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범죄 스릴러 측면에서 '프리즈너스'는 '조디악'에 한 참 못 미치기는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2시간 반이 넘는 러닝 타임 동안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끌고 왔다는 점에서 충분히 매력적인 스릴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프리즈너스'는 '누가 범인인가?'라는 가장 기본적인 테마를 기반으로, 범인을 찾는 과정 중에 각각의 주요 인물들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더 직접적으로 어떤 죄를 짓게 되는 지를 주목한다. 그리고는 관객에게 묻는다. 당신이 주인공이었다면 어떠했을까. 어린 내 아이를 유괴 당했고, 범인으로 의심되는 이가 내 눈 앞에 있다면 과연 어떻게 했을까.


영화는 이 두 시각을 이야기 속에서도 모두 드러낸다. 심하다 고는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는 연민은 물론, 그래도 이 방법은 잘못되었다는 시선도 함께 존재한다. 그리고 인물들이 엮이게 된 이 유괴 사건이 어떤 의도치 않은 사건에서 말미암았는지도 가볍게 다루지 않는다. 그 자체가 반전일 수도 있지만 이건 반전으로 사용되고 있다기 보다는, '왜 그럴 수 밖에는 없었는지'에 대한 질문이자 답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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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이 양면성을 갖고 있는 이야기에 쉽게 몰입할 수 있었던 건 각본 외에 배우들의 연기가 크게 한 몫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그 가운데 휴 잭맨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을 듯 하다. 사실 휴 잭맨에 대해서 한 동안은 그저 '휴 잭맨 = 울버린'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레 미제라블'을 보고 나서는,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는 장발장의 이야기에 다시 한 번 새삼 빠져들 수 있었을 정도로 그의 연기력에 매료되었었다. '프리즈너스'에서도 그의 연기가 큰 몫을 했다. 여기에는 실제로 어린 딸을 두고 있는 그의 영화 외 적인 이미지도 크게 작용했는데, 극 중 인물인 도버와 영화 외 인물인 휴 잭맨이 겹쳐지며 이 영화에서 가장 필요한 요소인 '진정성'이 자연스럽게 발생했다. 그로 인해 도버의 행동들은 제 3자의 시선이 아니라 1인칭 시점으로 공감할 수 있어, 결국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죄와 죄인에 대해 깊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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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을 나오면 크게 남는 것은 없는 영화였지만, 정반대의 의미로 관람을 하는 동안에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던 좋은 몰입 감을 선사한 작품이었다. 배우들의 명 연기와 고립되고 긴장되는 가운데 시종일관 무거운 분위기는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



1. 로저 디킨스의 촬영은 정말 대단하네요. '스카이 폴'에 버금가는 멋진 장면들이 등장합니다. 특히 후반부 클라이맥스에 제이크 질렌할이 빗속을 뚫고 운전하는 장면은, 마치 다른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압도적인 영상미를 선사하더군요.


2. 제이크 질렌할이 설정한 '로키'라는 캐릭터도 흥미로웠어요. 연기로 표현되는 성격 외에 의상이나 움직임 등에서도 확실히 캐릭터를 잡았다는 걸 인식할 수 있어서 좋더군요.


3. 폴 다노는 이제 이런 역할만 하는 듯;; 뭔가 천재 아니면 외톨이 혹은 정신이상자 -_-;;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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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스 코드 (Source Code, 2011)

제목이 8분이 아니라 소스코드인 이유



'더 문 (The Moon, 2009)'을 연출했던 던칸 존스의 신작 '소스 코드'를 보았다. 확실히 이 영화를 보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제이크 질렌할이나 베라 파미가가 아니라 던칸 존스였다. '더 문'을 통해 보여준 그의 재능과 SF적인 아이디어를 감성적으로 영화에 녹여내는 그의 방식은, '소스 코드 (Source Code)'라는 제목과 함께 또 한 번 비슷한 경험을 선사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이 영화를 홍보하는 방식에는 '인셉션 (Inception)'이 항상 함께 했었는데, 그 의도는 달랐지만 결과적으로는 '인셉션'을 거론해도 될 만한 작품이었다. 개인적으로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셉션'은 꿈 속의 꿈이라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해 그 꿈의 끝까지 가보자는 마음으로 확장시켰지만 결국 그 안에는 주인공 코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매우 감성적인 러브 스토리이자 드라마였다는 점으로 미뤄봤을 때, '소스 코드' 역시 평행우주론이라는 세계관을 활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SF적인 접근 방식보다는 드라마에 가까운 접근법으로 풀어낸 같은 방법론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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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시카고행 기차안에서 시작되고 마무리된다. 주인공 콜터 (제이크 질렌할)는 열차 안에 있지만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심지어 누구인지 조차 모르는 상태, 그리고 곧 열차는 폭발하고 또 한 번 영문을 알 수 없는 공간에서 한 여성의 음성을 듣게 된다. 그리고는 열차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를 막기 위해 다시 열차로 돌아가야 하며, 8분의 시간이 주어진다는 알 수 없는 말을 들은 채 다시 열차 속 시공간으로 돌아가게 된다.


'소스 코드'의 설정은 사실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시간여행이나 평행우주에 관해 그렸던 영화들에서 볼 수 있었던 익숙한 설정들이 자주 등장하며, 꼭 이 설정만이 아니더라도 큐브에 갇혀 만져지지 않는 다른 이의 메시지에 의지하게 된다는 점 역시 새로운 것은 아니다. 특히 같은 시작점의 8분이 계속 반복된다는 점은 빌 머레이 주연의 '사랑의 블랙홀 (Groundhog Day, 1993)'을 연상시키게 하는데, 놓인 구체적인 상황만 다를 뿐 극중 제이크 질렌할이 처한 전체적인 상황은 빌 머레이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익숙한 재료들과 설정들을 가지고 요리했지만, 던칸 존스의 이 완성된 요리는 다른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이유를 굳이 생각해보자면 균형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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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스 코드'에는 더 강한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줄기가 여럿 존재한다. 영문도 모른 채 소스 코드 속에서 '션'으로서 세상을 구해야만 하는 콜터의 이야기, 아프칸에서 헬기 조종을 했던 군인으로서 콜터의 이야기, 소스 코드라는 새로운 시스템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그 8분의 시간 속에 존재하는 크리스티나 (미셸 모나한)를 비롯한 사람들의 이야기 등.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소스 코드'는 이들 이야기 중 하나를 선택해 끝까지가는 방법 대신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어정쩡하고 미지근한 것보다는 차라리 한 가지 이야기에 (설령 그것이 오버스럽더라도) 몰두해서 극한까지 몰아가는 편을 더 선호하는데, 그 이유는 이렇게 몰고 가는 것이 조화를 이루는 것보다 조금 더 쉬운 방법론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많은 요소를 전부 껴안으려고 하다가 결국 이도저도 아니게 되어버린 경우와 비교하였을 때, 던칸 존스의 '소스 코드'는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성공한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에는 아쉬움 보다는 가능성으로 남아있는 부분들이 제법 있다. 상황에 바로 놓여져버린 주인공 콜터의 개인사는 아버지와의 짧은 인연 (정말 짧은) 정도만 묘사되고 있는데, 이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짧은 아버지와의 연관관계 만으로도 후반부 콜터라는 캐릭터를 설명하는데에 아주 큰 효과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그와 아버지 간에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고, 콜터가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전화 한통으로 이런 여백을 모두 담아냈다는 것은 분명 이 작품의 숨은 매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다른 SF영화였다면 아마도 가장 큰 이슈가 되었을 소스 코드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는 정말 소재 정도로만 등장하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장황한 설명이나 상황 묘사 없이 '평행우주론'을 자연스럽게 녹여낸 것 역시 이 영화에 장점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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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군의 주도로 진행되는 소스 코드 프로젝트의 배경에 깔린 음모라던지, 이 프로젝트를 유지하고 성공시키기 위해 암암리에 진행되는 일들, 더 나아가 이 시스템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아졌다면 D.J.카루소 감독의 '이글 아이 (Eagle Eye, 2008)' 같은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런 시스템과 배경에 관한 이야기의 개입은 소극적으로 하면서도 영화를 보는 이로 하여금 이런 상상을 하게 할 수 있을 만큼의, 딱 그 정도의 여지는 남겨두었다. 그 여지와 소스 코드 프로젝트를 대변하는 것은 베라 파미가가 연기한 '굿 윈' 역할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이 캐릭터의 묘한 비중이 '소스 코드'를 더욱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만들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굿 윈은 제프리 라이트가 연기한 '닥터 러틀리지'와 주인공 콜터 사이에 위치한 인물로서 두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고리 역할이라고 볼 수 있을텐데, 이 연결고리의 훌륭함이 (캐릭터나 베라 파미가의 연기 모두) 이 영화가 더 매력적이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갖게 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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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는 내내 이 영화의 제목은 '소스 코드'보다는 오히려 '8분'이라고 하는게 더 어울리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감독인 던칸 존스가 왜 '소스 코드'라고 제목을 가져갔을지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의 전작 '더 문'을 떠올려 봤을 때, 이 작품이 진정한 SF영화로 인정 받는 이유는 SF적 설정이나 세계관을 부각시켜 드러내지 않고 완벽하게 녹여낸 채, 그 토대에서 자유롭게 다른 얘기를 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소스 코드'는 평행우주라는 세계관을 그 중심에 대놓고 부각시키지는 않았지만, 그 기반 위에 완전히 녹아든 캐릭터와 이야기를 통해 드라마 같은 SF영화를 만들어 냈기에 '더 문'과 동일한 효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평행우주가 도대체 뭐야?' '그게 가능한가?' 라는 의문을 갖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과연 다른 평행우주에 존재하는 나는 어떤 모습일까?'라는 것을 떠올려보게 된다는 점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SF영화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아닐까? 물론 이 영화가 과학적으로 완벽한 영화였는가에 대해서는 작은 의문들이 있지만, 과학적으로 설명하거나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않고도 세계관을 완벽하게 녹여냈다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SF영화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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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 영화의 제목이 '8분'이었다면 아마도 그 마지막 키스 장면에서 영화는 끝이 났어야 했을 것이다 (사실 이 장면을 보는 순간 마지막이라고 느꼈었다). 여기서 만약 영화가 끝났다면 감동과 여운은 더 했겠지만,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평행우주에 대해서는 조금 미흡한 부분이 남았을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는 여기서 끝났더라도 평행우주에 관한 좋은 영화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던칸 존스는 자신이 결국 얘기하고 싶었던 주제를 위해 감동적인 엔딩을 과감히 포기했고, 또 다른 감동의 엔딩을 선사했다. 말초적으로는 앞선 장면이 훨씬 더 감동적이긴 하지만, 영화가 선택한 엔딩도 평행우주론을 또 한 번 새길 수 있었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은 결말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다시 말해, 이 두 가지 엔딩을 다 갖을 수 있었다는 점이 이 영화가 매력적이라는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1. 미리 알고 가긴 했지만, 영화가 끝나자마자 평행우주론에 대해 친절한 주석을 달아주신 홍주희씨 덕분에 아쉬움이 들더군요. 의역이야 그렇다치더라도 창작자가 의도하지 않은 주석을 번역자가 인장처럼 남기는 것은 과한 친절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미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의 전례가 있었죠). 설령 이 영화가 말하고자하는 '평행우주론'에 대해 몰랐다고해도 모르는 채로 보고 이해한 것이 잘못이 아닐텐데, 마치 '자 이런거였어'라고 가르치는 듯한 주석은 앞으로도 없는게 더 나을 것 같네요.

2. 저는 왜 닥터 러틀리지 역할을 맡은 제프리 라이트를 영화를 보는 내내 아이스 큐브로 생각했던 걸까요. 심지어 제프리 라이트가 이전에 출연한 작품들 가운데서도 아이스 큐브라고 생각하며 봤던 작품이 많네요 -_-;;

3. 결국 가장 불쌍한건 '숀'. 숀은 누가 챙겨주나요 ㅠ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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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앤 드럭스 (Love and Other Drugs, 2010)
치유하고 견디는 것이 사랑이어라


오랜만에 달달한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급격하게 떨어진 기온 탓도 있겠고, 한 동안 영화를 통해 피부림과 각종 음모 등을 상대하다보니 그냥 남녀주인공의 알콩달콩 사랑이야기에 대한 갈증이 생겼고, 여기에 제이크 질렌할과 앤 해서웨이가 주연한 '러브 앤 드럭스'는 잘 어울릴 영화 같았다. 사실 이 영화의 감독이 에드워드 즈윅 이라는 점은 조금 의외였는데, 예전 그의 작품들은 그렇다쳐도 '블러드 다이아몬드' '라스트 사무라이' 디파이언스' 등 최근 작만 보면, 이런 달달한 로맨스 영화와는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게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기대하는 바도 있었다. 에드워드 즈윅이 만드는 로맨스라면 아주 평범한 이야기는 아닐 것 같은 기대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두 배우를 보는 것만으로도 실망할 일은 없겠다는 개인적 기대도 더해졌고. 그렇게 보게 된 '러브 앤 드럭스'는 아주 평범하고 진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지만, 그래도 그 안에 가슴을 울릴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었던 괜찮은 '달달하고 따스한'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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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실제 제약회사 직원의 경험담을 토대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극중 등장하는 회사 이름과 약품의 이름들이 낯설지만은 않다 (pfizer, viagra 같은 이름들이 그대로 등장한다). 영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남자 주인공 제이미 랜들 (제이크 질렌할)의 직업인 '약품 (Drugs)' 영업사원의 영업적인 이야기들이 비중있게 다뤄지긴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사랑 (Love)'을 강조하기 위한 그리고 빗대어 말하기 위한 효과적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랑과 약의 관계를 영화는 괜찮은 대비로 풀어내고 있다. 직접적으로 보았을 때 화이자 사의 영업사원인 제이미의 성공 스토리와 그의 연애담은 별개로 진행되는 듯 하지만 (그리고 사실상 직접적 연관없이 진행되지만), 한 발 물러나서 보게 되면 약을 판매하는 주인공과 그 반대에 놓인 여자 주인공 매기 (앤 해서웨이)의 이야기는 묘한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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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러브 앤 드럭스'를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깊은 이성과의 만남이 아닌 쿨한 섹스 파트너를 원했던 젊은 두 남녀가 결국은 서로를 그 이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 속에서 처음 겪게 되는 감정의 변화들과 동시에, 여자 주인공이 겪는 병으로 인해 생기게 되는 아픔과 치유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흔한 국내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병에 걸린 여주인공'이 여기도 등장하는 셈인데, 이거 또 뻔한 얘기 아닌가 생각한다면 사실이 그렇다. '러브 앤 드럭스'는 많은 이들에게 '뻔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질 바로 그 익숙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런 류의 익숙한 줄거리를 갖고 있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하는 말이지만,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이야기를 그리는 것은 결코 틀리거나 잘못된 방향이 아니다. 즉, 익숙한 이야기를 관객에게 어떻게 또 빠져들도록 전달하는냐가 관건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그런 점에서 이 영화 만의 숨겨진 장점이 발휘된다고 볼 수 있겠다.

특히 상처 받은 이들의 이야기를 그릴 때는 얼마만큼 그 상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가가 전체의 이야기를 판가름하는 포인트라고 할 수 있을텐데, '러브 앤 드럭스'는 그 지점을 간과하지 않고 있다. 병에 걸린 주인공을 단순히 환자로만 여기지 않고 동정이 아닌 감정으로 감싸고 있으며, 당사자가 느끼는 수 많은 갈등 역시 담백하지만 진솔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건 겪어 본 자만이 아는 부분일 수도 있겠는데, 영화가 병에 거린 매기의 심리를 묘사하는 것이나 이를 바라보는 그의 연인 제이미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은 분명 허구의 극적인 효과를 노렸다기 보다는, 실제 그들의 섬세한 감정에 충실한, 그들은 따뜻하게 감싸 앉는 시선이었다. 그래서 연인 가운데 한 사람이 아픈 이 뻔한 이야기가 또 한 번 감정적으로 눈물을 만들어 냈고, 극 중 유머와 위트들도 웃으며 즐길 수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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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엔 또 울긴 했지만 오랜만에 극장에서 달달한 로맨스와 훈훈한 두 남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경험이었다. '러브 앤 드럭스'가 오래오래 기억하고 챙겨보는 작품이 되지는 않겠지만 사람들이 계속 사랑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한, 이런 작품은 가끔씩 꼭 필요한 영화가 아닐까 싶다.

1. 앤 해서웨이도 물론이지만, 제이크 질렌할의 매력이 절정에 달했더군요! 많은 여성분들 눈이 정화되실 듯.
2. 물론 남성분들의 눈이 정화되는 장면도 아주 많습니다. 앤 해서웨이의 과감함에 사뭇 놀라기도;;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본문에 사용된 모든 스틸컷/포스터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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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의 왕자: 시간의 모래 (Prince Of Persia: The Sands Of Time, 2010)
게임과 정치, 만족스러운 재미



마이크 뉴웰의 '페르시아의 왕자 : 시간의 모래'는 어린 시절 재미있게 했던 PC게임 '페르시아의 왕자'를 시작으로 리뷰를 하려고 했었는데, 막상 영화를 보고나니 이 PC게임을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될 만큼, 영화는 이것보다는 오히려 이 PC게임을 원작으로 지난해 XBOX360/PS3를 통해 발매되었던 게임 '페르시아의 왕자'만 언급해도 될 만큼 원작인 PC게임보다는 최근 발매된 게임과 분위기나 컨셉 면에서 더 유사점이 많은 작품이었다. 제리 브룩하이머 제작의 작품이라 블록버스터다운 재미는 주겠구나 싶은 것이 기대의 전부였는데, 막상 보고 나니 예전 게임과 최근 게임을 모두 해본 입장에서 (추후에 언급하겠지만 다른 게임 하나 더를 해본 이유로) 많은 장면들이 보이는 영화였고, 의외로 정치적이기도하고 스케일이나 재미 측면에서도 크게 부족함이 없는 괜찮은 액션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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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PC게임인 '페르시아의 왕자'가 워낙에 유명한 작품이어서 이 영화를 보는 이들은 다들 이 PC게임을 떠올리게 될텐데,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마이크 뉴웰의 이 영화는 '페르시아의 거지'로 더 유명한 최근작 게임에 더 가까운 작품이다. 물론 이 게임의 세계관은 영화 속 세계관과는 조금 비슷하면서도 다른데, 영화는 거친 페르시아의 왕자 '다스탄'의 이미지와 로케이션의 이미지 등을 참고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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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의 거지' 아니 '페르시아의 왕자' 게임)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게임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어쌔신 크리드'인데, 영화 '페르시아의 왕자'는 PC원작 게임, 그리고 지난해 발매된 리메이크 게임과 모두 비교해봐도 '어쌔신 크리드'에 가장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주 배경이 되는 성과 마을의 모습도 '어쌔신 크리드'의 배경이 되는 모습과 매우 닮아있고, 주요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지붕위나 장애물을 딛고 건너 뛰는 설정들은 어쌔신 크리드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모습이다. 특히 영화 초반 성스러운 성을 공격하던 중 다스탄이 망루 비슷한 곳에 올라 점프하기 직전 성내를 주욱 돌아보며 카메라 앵글이 주변을 스윽 훑어내리는 장면은 '어쌔신 크리드'에 대한 오마주 장면이라고 해도 절대 틀리지 않을 것이다 (만약 마이크 뉴웰이 '어쌔신 크리드가 뭐에요?' 한다면 그건 정말 말이 안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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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어쌔신 크리드'를 해본 사람이라면 유사점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시나리오에 있어서도 나쁘지 않은 이야기 구조였다. 영화를 수미쌍관으로 구성한 것도 괜찮았고, 블록버스터 답게 스케일을 보여주는 장면도 나쁘지 않았다(이런 느낌에는 THX관의 사운드가 한몫 하기도 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주인공인 제이크 질렌할을 비롯해 벤 킹슬리, 알프레드 몰리나 등 수준있는 연기자들의 공도 컸다. 특히 제이크 질렌할의 경우 처음 캐스팅 소식을 들었을 때는 안어울릴 것 같은 생각이 지배적이었는데, '페르시아의 거지'에 가까운 컨셉이라 그런 면도 있지만(ㅋ), 일부러 몸도 키운 것도 어색하지 않게 느껴질 만큼 다스탄과 잘 어울렸던 것 같다. 벤 킹슬리야 선과 악을 모두 오갈 수 있는 헐리웃의 가장 유명한 배우 중 한 명이니 더 말할 필요 없겠고, 알프레드 몰리나는 첨엔 못알아볼 정도로 분장이 짙던데, 어쩌면 그 치고는 참 심심한 캐릭터가 아니었나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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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의 왕자'가 좋았던 또 다른 이유는 이 영화가 의외로 깔고 있는 정치적인 메시지 때문이었다. 영화 줄거리의 주된 설정 중 하나는 페르시아가 성스러운 성을 공격하면서 자신들의 야욕을 위한 침공의 이유로 자신들의 적국의 무기를 대고 있다는 의혹을 들고 있고, 결국 이 의혹이 있지도 않은 의혹이었음을 이야기하는 부분인데, 이건 너무 노골적인 미국의 이라크 전에 대한 비유가 아니던가. (스포 있음) 그래서 인지 영화의 마지막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하고 침공 사실을 정중히 왕으로서 사과하는 장면은 현실과 빗대어 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오바마도 대통령이 된 이후에 이렇게 사과했더라면 얼마나 멋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정치적 비유로 생각해볼 수 도 있지만 어쨋든 이건 제리 브룩하이머의 영화다. 이런 비유를 해볼 수 있는 여지는 있지만, 어쨋든 액션 블록버스터이고 그냥 몸을 맡기고 2시간동안 즐기면 되는 유희의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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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본 작품들은 전부 먹먹해지거나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들이었는데, 전혀 다른 의미에서 만족스러웠던 작품이었다. 참고로 게임은 후속편이 나올 예정인데, 영화는 어찌될지 모르겠다.


1. 참고로 영화의 뒷 이야기를 다룬 게임 '페르시아의 왕자: 망각의 모래'가 곧 발매될 예정입니다. 전작과 영화를 재미있게 본 입장에서 이 게임 역시 안해볼 수 없겠네요.

2. '캐리비안의 해적' 만큼 강력한 캐릭터는 없음으로 그 만한 인기를 끌긴 어렵겠지만, 게임 원작 작품들이 대부분 실망스러웠던 것에 비하면 매우 만족스러운 작품이었어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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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미지의 권리는 Walt Disney Pictures 에 있습니다.





조디악 (Zodiac, 2007)

데이빗 핀처.
그는 그 네임 벨류에 비하면 다작을 하는 감독은 아니지만,
그의 전작들은 모두 다 보는 이로 하여금, 흠뻑 빠져들게 할 만한 무언가 마니아틱한 요소가
강한 작품들이었다.

기존 액션이 강조되었던 1,2편과는 달리, SF적인 요소를 배경으로 아주 심오한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던 <에일리언 3>편. (이런 이유 때문에 한 편에선 에일리언 3가 대우 받기도 하지만,
일부에선 가장 재미없는 시리즈로 여겨지기도 한다.)

뭐 지금까지도 최고의 스릴러 영화 중 하나로 꼽히는 <세븐>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조디 포스터의 출연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던 <패닉룸>은 '데이빗 핀처'를 오랫동안 기다렸던
팬들에게 적잖은 당황과 아쉬움을 남기긴 했지만, 그래도 그의 이름은 여전히 가장 기대되는
감독 그 이상이었다.

그런 그가 제이크 질렌할, 마크 러팔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브라이언 콕스 등 명배우들과 함께
연쇄 살인범에 관한 영화를 만든 다 하니
이건 뭐 아니 기대할 수 없었다.



이 영화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1960년대와 70년대 미국 샌프란시스코 일대에서 무려 37명을 살해한 것으로 알려진 뒤 자취를 감춘
미국역사상 최악의 연쇄살인범이라 불리는 '조디악 킬러'에 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내가 처음 이 영화를 접하고 누군가에게 가장 단순하게 설명을 해줄 때도 그렇고,
영화의 홍보전략에도 있는 것이 바로 '미국판 살인의 추억'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야 연쇄 살인사건이라는 것과 범인을 잡지 못한 미완의 종결수사라는 점일텐데,
소재는 비슷하지만 분위기나 느낌은 참 다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살인이 추억>이 좀 더 극적인 긴장감과 분위기를 조성하는 가운데, 적절한 유머를 섞어가는
작품이었다면 <조디악>은 굉장히 침착하면서도 건조하고 관조하는 가운데, 시종일관 차분하고
어쩌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면서도 2시간 36분에 달하는 러닝 타임이 전혀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긴장감을 잃지 않고 있다. 혹자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긴 러닝타임도 그렇거니와 비교되는 <살인의 추억>에 비해
중간중간 커다란 굴곡이 없고 심하게 집중하지 않으면 놓칠 수 있는 분위기 때문에
지루함을 느끼기도 하였으나, 개인적으로는 그 어느 수사극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몰입감이 있었다.

씨네 21을 보니 '머리로 생각하는 수사'가 아닌 '발로 뛰는 수사'라는 표현을 썼던데,
표면적으로 극중 로버트는 발로 뛰는 수사로 인해 자료를 수집하고 결론을 유추해내게 된다.
<조디악>이 뛰어난 수사 스릴러라는 점은, 바로 이 부분에서 시작된다. 아무래도 수사가 주가 되는 영화에 가장 몰입하는 방법은 관객이 스스로 수사에 더 직접적으로
빠져드는 것이 가장 우선일텐데, 이 영화는 그런 면에서 영화가 취하고 있는 태도가
직접적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 풀어가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보는 이들로 하여금, 단서들을 천천히 제공해주고 함께 풀어갈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 다는 것이다.
아니 여지를 남겨둔다기 보단, 한 발짝 물러서서 차분한 시선으로 사건을 바라보면서
직접적인 감정이나 방향을 제시하지 않는 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극 중 로버트와 거의 동일한 입장과 위치에서
이 사건에 개입할 수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긴 러닝타임이 지루하지 않게 몰입할 수 있었다.

즉 누군가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는 것도 좋지만,
내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직접 읽는 경우라고 하면 어울리는 비교일듯 싶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곤 데이빗 핀처가 많이 변했다. 혹은 그 동안의 인상적인 스타일이 부족하다 등등의
평을 하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첫 장면부터 끝날 때까지(달라지긴 하였지만), 독특한 스타일을 느낄 수 있었다.

단순히 6,70년대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오는 철저한 재연과 고증의 아름다움 뿐 아니라,
감각적인 카메라 웍 이라던가, 스타일을 과하게 표현하지 않은 절제된 스타일은, 그 하나로도 스타일로
여겨질만큼 멋스러웠다. 첨부된 영화 속 스틸 컷들처럼, 무언가 선명하기보다는 부족한 색감들과
차분한 색들은, 결국 미완으로 끝나버린 이 수사를 대변하는 분위기이기도 하다.

(특히 살인사건의 장소가 된 택시가 처음 등장하던 장면에서, 택시의 바로 위에서 택시의 움직임을 따라
이동하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역시 핀처의 영화에서 이런 컷은 꼭 하나씩 나오는구나 하는 반가움도 들었다)



(영화 속 로버트 그레이스미스 역할을 맡은 제이크 질렌할과 실제 당사자이자 이 영화의 각본을 지필하기도 한 로버트 그레이스미스)

핀처의 영화라는 것을 알게 되고, 주연 배우들의 캐스팅 소식을 들었을 때 아니 기대할 수가 없었다.
질렌할이라는 기대하는 배우에, 갈수록 좋은 영화에서 좋은 연기를 펼쳐가고 있는 마크 러팔로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함께 연기한다니 무척이나 기대되는 일이었다.

주연을 맡은 질렌할의 연기는 더도 덜도 아닌 딱 정도였다.
그의 시종일관 무미건조한 표정과 구부정한 몸동작이 인상적이었으며, 가끔 보이는 눈빛은 <도니 다코>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마크 러팔로는 확실히 이제 단순히 기대되는 배우가 아니라 기다려지는 배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원래 그의 발성과 보이스가 그랬나 싶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던 목소리 연기는 물론,
다우니 주니어와 함께 이 영화가 훌륭한 수사 영화가 되도록 분위기를 잡은 가장 큰 공헌자는 바로, 마크 러팔로였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역시, 영화가 거듭될 수록 좀 더 중후하면서도 인상적인 배우로 차곡차곡 자리잡는 느낌이다.

후반부에 그의 비중이 조금 줄어든 것이 살짝 아쉽기도 했지만,
그는 이제 안경과 수염만으로도 무언가 느끼게 하는 배우가 된 것 같다.



긴 러닝타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을 정도로,
몰입도로만 따지자면 최근 본 영화가운데 가장 손꼽혔으며,
무언가 같이 느끼고 호흡할 수 있었던 수사극이었다.
그 시대를 느끼게 해준 음악도 참 좋았다.

패닉룸에서 어느 정도 실망했던 데이빗 핀처.
<조디악>으로 다시금 가장 좋아하는 감독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글 / ashita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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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keback Mountain, 2005
 
이안 감독의 최신작이며, 이미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 등
여러 단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던 작품이라 잔뜩 기대했던 영화.
 
9시반이 넘은 시각, 그리 많지 않은 관객만이 함께한 채 관람했던 영화.
 
뭐, 처음에 알려진대로 '브로크백 마운틴'은 동성애를 소제로 한 영화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동성애'는 그저 '소제'일 뿐이지
결코 '주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동성애를 다룬 것이라 처음 접할때 다른 작품보다 좀 더 특별하게 다가온 것은
사실이었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는 말 그대로 소제였을뿐,
남자와 여자와의 사랑이야기가, 남자와 남자와의 사랑이야기로
그려졌을 뿐, 어차피 똑같은 러브 스토리이다.
 
Brokeback Mountain에서 두 주인공은
대자연 속에서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고,
영혼의 안식을 마음껏 누리지만,
산을 내려온 뒤의 삶은 에니스와 잭 모두에게
그저 잔혹한 현실일 뿐이었다.
 
잭은 세상에 틀을 깨고 이상향으로 나아가려는 용기를 냈지만,
결국 에니스는 현실에 붙들려 용기를 내지 못했다.
잭이 떠난뒤 그의 흔적들을 찾아낸 에니스가
슬퍼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잭에 대한 그리움과 동시에
이상향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용기를 내지 못했던 후회가 컸기 때문이었을터.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잭의 시골집 방에서 피묻은 셔츠가 고이 간직된 것을 보았을때
어쩔 수 없이 슬퍼질 수 밖에 없었다.
 
이안 감독의 능력은 사실 <와호장룡>때 보다 이 영화에서 더욱
잘 드러나고 있다. <와호장룡>은 중국인으로서 자문화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자신있게 풀어감으로서 플러스 요인이 있었지만,
<브로크백 마운틴>은 6,7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완전 미국식 배경과 가치관등을 그려내고 있음에도
전혀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이다. 이안이 감독인 줄 몰랐던 관객들이라면
동양인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사실 이안 감독은 이미 <센스 앤 센스빌리티>를 통해 이러한 편견을
무마해버린지 오래이긴 하다.
<기사 윌리엄>을 볼 때만 하더라도 아무도 이 남자가 이런 배우가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잘하면 이런 류에 비슷한 틴에이지 팝콘영화를 몇 편 더
찍을 지도 모르겠구나...정도로 생각했었는데, <그림 형제>같은 작품에
출연한 것을 보고는 조금씩 견해를 달리하게 되었으나 이번 작품을 통해
확고하게 이 남자, 히스 레저가 분명 배우라는 인식을 갖게 했다.
 
제이크 질렌할은 내가 제대로 본 영화라고는 <투모로우>밖에는 없었지만,
그래도 왠지 기대가 되는 배우중에 한명이었다.
역시나 그 기대는 이번 영화를 통해 확실히 입증되었으며,
히스 레저와 함께 단숨에 배우로 인정받게 되었다.
(역시 배우는 작품을 잘 만나야 한다는 게 지론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또 하나의 손꼽히는 러브 스토리이자
현실과 이상향 속에서 갈등하고 결국 그 속에서 용기를 내지 못하고
포기해버렸던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안타까운 두 남자의 이야기는 엔딩 크래딧을 다보고
극장에 불이 켜지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 뒤에도
지워지지 않는 여운을 남겼다.
 
 
 
글 / ashitaka

p.s/1. 의도는 아니었으나 <메종 드 히미코>이후에 바로 또 이 영화를 보게 되어
누군가에게 내 성향이 의심되지 않을까 살짝 걱정을...윽...--;
 
2. 엔딩 크래딧에 윌리 넬슨의 곡 뒤에 흐르던 곡은 바로 내가 좋아하는
Rufus Wainwright의 곡이었다. 동성애를 소제로 한 영화에 그가 곡 작업을
했다는 사실도 재미있는 일인듯;
 
3. 로린 역의 앤 헤서웨이의 연기도 헤어스타일과 더불어
꽤 멋졌다 ㅋ,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알마 역할을 맡은 미쉘 윌리엄스라는
배우가 더욱 마음에 든다...(근데 프로필을 확인해보니 나와 동갑..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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