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Spotlight, 2015)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미국의 3대 일간지 중 하나인 보스턴 글로브 내 ‘스포트라이트’팀은 가톨릭 보스턴 교구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을 취재한다. 하지만 사건을 파헤치려 할수록 더욱 굳건히 닫히는 진실의 장벽. 결코 좌절할 수 없었던 끈질긴 ‘스포트라이트’팀은 추적을 멈추지 않고, 마침내 성스러운 이름 속에 감춰졌던 사제들의 얼굴이 드러나는데… (출처 : 다음영화)


2002년 미국 일간지 보스턴 글로브지 내 스포트라이트 팀을 통해 폭로된 가톨릭 사제들의 충격적인 아동 성추행 스캔들 실화를 다룬 토마스 맥카시 감독의 '스포트라이트 (Spotlight, 2015)'는, 충격적일 수 밖에는 없었던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을 다시 한 번 고발하려는 것에 목적이 있는 영화가 아니라, 영화의 제목처럼 이 스캔들을 세상에 폭로하기 위해 스포트라이트 팀이 겪어야 했던 과정을 통해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영화다. 단순하게 성직자들이 어린 아이들을 성추행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충격적이지만, 영화는 이 충격적 사실이 세상에 나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를 조명하는 것에 더 많은 공을 들인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보스턴이라는 오래되고 견고한 도시의 특성을 배경으로 보스턴에서 가톨릭이라는 종교가 단순한 종교 이상의 지배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지, 즉 이 가톨릭 커뮤니티가 가족, 동료, 학교, 회사 등 모든 영역에 근본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배경 가운데 오로지 진실 만을 위해 사실을 세상에 알려야 했던 스포트라이트 팀의 활동을 건조하지만 치밀하게, 비교적 감상적이지 않는 입장을 취하며 전개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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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사명감을 강조한다. 꼭 언론과 기자라는 직업군을 이유로 들지 않더라도 여러 일 가운데는 반드시 내가 해야만 하는 일과 굳이 하지 않아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일이 있는데, 이 영화는 후자의 일을 전자의 일로 감수해 낸 용감한 자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바로 내 가족과 동료, 그리고 내가 다닌 학교 등 나를 구성하는 많은 커뮤니티들이 묵인했던 진실, 아니 그보다는 내가 믿고 있고 나를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너무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버릴 수 있기 때문에 묵인하고 부정할 수 밖에는 없었던 현실 속에서, 그 모든 것을 무릅쓰고 반드시 '내'가 해야만 했던 일을 해낸 이들에 관한 이야기다. 일차적으로 요금 같이 꼭 기자가 아니더라도 (기자라면 더욱)자신이 하는 일과 직업에 대해 사명감과 장인정신을 찾아 보기 힘든 세상에서, 기사를 내 자식처럼, 온전히 내 것이라는 인물들의 열정과 신념은 그 자체로 주는 감동이 있었다. 굳이 취재라는 것이 거의 실종되어 버린 국내 언론의 현실을 비춰보지 않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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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영화는 사명감의 이유나 목적을 추상적인 것으로 그리지 않는다. 어쩌면 앞서 언급한 상황을 무릅쓰기엔 너무 먼 개념인 추상적 정의로움이나 선의 등의 이유가 아닌, 그 아동성추행의 대상이 바로 내가 될 수도 있었다는 아주 현실적인 질문을 통해, 누군가가 이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이 조직적이고 거대한 범죄와 고통은 결코 끝나지 않음은 물론이요, 다음 피해자는 나나 내 가족이 될 수 있다는 현실적 조언을 한다. 실제로도 현실에서 보면 뉴스에 나오는 어떤 끔찍한 사건 등을 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타까워 하면서도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하곤 하는데, '스포트라이트'에서는 단순히 '내가 될 수도 있었어' 수준이 아니라 '내가 선택되지 않은 것이 운이 좋은 것 뿐이야'라고 더 센 강도로 이야기한다 (놀라운 건 실제 이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 수를 본다면 정말로 운이 좋아서 피해자가 되지 않았다고 충분히 볼 수 있을 정도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가서 만약 이들이 이 기사를 내지 않았더라면, 그들 역시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처럼 아무 일 없이 덮으려고 했다면 얼마나 더 많은 피해자들이 그 이후로도 발생되었을 지를 단적인 자료들로 보여준다. 그 엄청난 수의 리스트는 이 스캔들의 규모를 보여주는 데이터라기 보다는 이들이 살려 낸 생존자 리스트로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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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크 러팔로는 이번에도 참 좋은 연기를 보여줍니다. 그를 비롯해 이 스포트라이트 팀은 정말 다 진짜 같아요.

2. 리브 슈라이버의 저런 지적인 연기는 처음 본 것 같아요 ㅎ

3. 전혀 다른 얘기로 요새 (주)더쿱 에서 수입한 영화들을 자주 극장에서 보게 되네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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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타카의 레드필]
인생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개봉 10주년을 맞아


미셸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4)'이 국내 개봉 10주년을 기념하여 오는 11월 5일 재개봉을 한다고 한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게 되면 자연스럽게 어떤 영화를 가장 좋아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종종 받게 되는데, 내 대답은 그 때 그 때 조금씩 달라지기는 했지만 항상 빠지지 않았던 영화 한 편이 바로 '이터널 선샤인' 이었던 것 같다. 이 작품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미셸 공드리라는 아티스트 때문이었는데, 영화 감독이기 이전에 bjork, massive attack, beck 등의 뮤지션의 뮤직비디오 감독으로서 워낙 유명했었고 특히나 당시 이 뮤지션들에 아주 깊게 빠져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공드리에게도 관심을 갖고 있던 터였는데 그가 연출한 영화라고 하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건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10주년을 기념하여 재개봉하는 영화에 대한 것이다. 일단 이 영화가 벌써 10년이 되었다니 놀랍기만 했다. 요근래 한국영상자료원을 통해 자주 한국영화 10주년 기념 상영회 기획을 만나볼 수 있는데, 그 때 마다 드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와, 벌써 10년이 되었다니...'


누군가 영화는 시간을 다루는 예술이라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어떤 영화를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보게 되면 그 이야기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전 비디오 테입으로 영화를 소장하던 시절에 비해 블루레이나 특히 케이블 채널 등을 통해 예전에 봤던 영화를 다시 보게 되는 기회가 잦아진 요즘은 이러한 경험을 더 자주하게 되곤 한다. 근 시일내에 영화를 다시 보게 되는 경우, 극장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장면이나 순간을 만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면, 몇 년이 지난 뒤 다시 보게 되는 영화 속에서는 분명히 여러 번 본 장면에서 전혀 새로운 감정을 발견하게 되곤 한다. 이러한 경험을 가장 크게 했던 작품은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빌리 엘리어트 (Billy Elliot, 2000)'를 다시 보게 되었을 때였는데, 이 영화를 처음 볼 땐 주인공 빌리에 공감하며 영화를 따라갔었지만 한 참 뒤에 다시 보게 된 영화는 빌리가 아닌 빌리 아버지의 행동에 더 깊게 공감, 아니 공감까지는 못 되더라도 처음 볼 땐 전혀 보이지 않았던 빌리의 아버지의 현실과 가치관의 대립을 통한 갈등이 너무도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경험은 내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는데, 그 전까지는 블로그에 영화 글을 쓰면서 별점을 통해 나름의 평점을 주고 있었으나 이 이후 부터는 영화에 점수를 준다는 것이 예술 작품에 점수를 매길 수 없다는 의미 이전에, 지금의 점수가 이 영화에 대한 나의 최종적 판단이 아닐 확률이 매우 높다는 점에서 의미 없는 행위라는 것을 알게 된 뒤 별점 주기를 지금까지 하지 않고 있고, 이 생각은 아마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듯 하다.


이렇듯 영화라는 매직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 시간을 두고 보게 되거나, 그 시간 속에 개인이 어떤 삶을 겪었는 지에 따라 이미 본 영화를 통해서도 전혀 다른 감정과 순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예전에는 어떤 영화의 몇 주년, 몇 10주년 기념이라는 얘기를 들으면 그저 '와, 이 영화가 벌써 이렇게 오래 되었구나..'라는 생각에 그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면, 근래에는 '그렇다면 이 영화를 지금 다시 보면 또 어떤 영화일까?'라는 호기심이 더 발동한다. 거의 처음 영화를 보게 될 때의 버금가는 설레임이다.


내 방에는 이미 '이터널 선샤인' DVD와 블루레이가 모두 존재하지만 스크린에서 다시 볼 기회를 절대 놓칠 수는 없을 것이다.

찰리 카우프만이 설계하고 미셸 공드리가 표현한 '이터널 선샤인'은 또 어떤 영화가 되어 있을까.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이야기는 또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아쉬타카의 레드필]

네오가 빨간 약을 선택했듯이, 영화 속 이야기에 비춰진 진짜 현실을 직시해보고자 하는 최소한의 노력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에브리바디 올라잇 (The Kids Are All Right, 2010)
괜찮아, 우린 모두 괜찮아요


줄리안 무어와 마크 러팔로, 그리고 아네트 베닝이 출연한다는 이유만으로도 큰 고민 없이 선택할 수 있었던 '에브리바디 올라잇 (The Kids Are All Right)'은, 어떤 기사의 제목처럼 '특별한 가족의 평범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면, 결국 이 특별해 보이는 가족조차 '평범한' 가족이라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 대한 최소한의 소스라면 주인공인 닉 (아네트 베닝)과 쥴스 (줄리안 무어)가 레즈비언 부부로 등장한다는 점일텐데, 이런 점에 불편한 점만 없다면 아마도 '에브리바디 올라잇'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게이나 레즈비언을 그린 영화들 가운데서도 이 작품은 아주 부담없이 즐길 만한 작품이기도 하다. 확실히 이런 것들이 사회적으로 엄청나게 타부시 될 때에는 좀 더 자극적이고, 이렇게 타부시하는 사회와 싸우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주를 이뤘지만, 그래도 사회적으로 조금씩 받아들여지고 자연스러워진 지금에는, 이 작품처럼 레즈비언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한들 꼭 특별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다시 말해 관객들이 더 이상 주인공의 성정체성에 흔들리지 않는 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작품들이 주를 이루게 된 것 같다. 그런면에서 '에브리바디 올라잇'은 특별한 듯 하지만, 참 평범해서 더 깊이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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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비언 부모를 둔 이복 남매인 조니와 레이저. 이들은 자신의 부모에게 정자를 기증한, 친부를 찾고 싶은 궁금증에 친부인 폴 (마크 러팔로)을 만나게 되고, 폴과 이 가족은 점점 다양한 방법으로 교류를 이어간다. 이 가족과 폴이 만나는 과정을 통해 영화는 여러가지 삶의 다양한 의미들을 짚어 간다.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닉은 갑자기 나타난 폴의 존재 자체가 자신의 가족을 송두리채 흔들까 두려워 그를 심하게 경계하는 한편, 닉과의 관계에서 점점 권태기를 느껴가던 쥴스는 새롭게 등장한 폴과의 만남이 나쁘지 않은 편이다. 폴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두 아이에게도 다르게 나타난다. 

조니는 폴과의 만남을 통해 그 동안 집에서는 억눌려 있었던 자아를 찾는 데에 속도를 내게 되지만, 레이저는 닉과 마찬가지로 궁금하긴 했지만 폴의 등장이 아무래도 갑작스러운 반응이다. 그렇게 이 네 명의 가족 구성원은 자신들 만의 방식으로 폴과의 관계를 이어간다. 그리고 화목한 듯 보였지만 속으로는 복잡한 갈등을 겪고 있던 이 가족은, 폴이라는 또 다른 가족을 통해 다시금 자신들(가족)을 되돌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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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의 이야기만 보아도 이 이야기는 정말 평범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데, 그럼에도 각각이 겪는 갈등이 충분히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가부장적인 닉이 겪는 갈등, 사랑과 더 많은 관심을 필요로 했던 쥴스의 갈등, 이제 막 어른이 되는 과정 속에서 가족과 떨어지는 연습을 해야하는 조니의 갈등 그리고 아직은 자신이 속한 이 가족을 받아들이는 과정 속에 있는 레이저의 갈등까지. 영화는 별다른 큰 에피소드를 넣지 않았음에도 폴이라는 생물학적 아버지의 등장을 통해 이 모든 갈등을 부각시키고 치유하는 것까지 성공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연히 부각이 아니라 치유다. '에브리바디 올라잇'은 그저 하나의 가족이 어떻게 탄생하는지에 대한 또 다른 '가족이 탄생'에 관한 이야기다. 가족은 마냥 좋은 것들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관계 못지 않게 서로 견뎌야만 하는 것이며, 끊임없이 상처받고 갈등하지만 결국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용서하고 치유할 수 있는 유일무이의 집단이라는 점을 영화는 자연스럽게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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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원제인 'The Kids Are All Right'에서 알 수 있듯이, 많은 사람들 혹은 잘 모르는 외부에 있는 사람들이 겉만 보고 판단하는 우려 섞인 일들이나 관계들이 사실은 그런 우려만큼 문제가 아니라는, 그래서 '우린 다 괜찮아요'라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과연 레즈비언을 부모로 두고 있는 이복 남매인 아이들이 잘 성장해 나갈 수 있을까? 혹은 그들 스스로조차 내가 레즈비언인데 우리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처럼 똑같이 잘 커갈 수 있을까를 걱정하게 되는데, 실제로는 이들은 조금 다를 뿐이지 그렇게 특별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통해, 이제는 더 이상 이런 것들이 편견이나 선입견이 대상이 될 시대는 지났다는 것을 이 영화는 직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다른 성정체성을 갖고 있는 이들에 대해 특별한 선입견이나 편견을 갖고 있지만, 실제로 그들을 가깝게 겪어보고 난 뒤에는 이러한 편견을 갖기 않게 되곤 하는데, 이런 영화의 순기능이라면 직접 겪어보지 않아도 이런 잘못된 편견을 조금이나마 지워내는 것을 들 수 있겠다. 확실히 더 극적이고 간절한 이야기를 할 때보다 이렇게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해나가는 편이 오히려 더 효과가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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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바디 올라잇'을 보고 나면 확실히 내가 속한 가족을 한 번쯤 돌아보게 된다. 내 부모, 내 자식들을 떠올리게 되면서 다시 한번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일들, 하지 못했던 말들을 해볼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 마치 극중 쥴스의 그 뜨거운 고백처럼 말이다.


1. 아네트 베닝의 가부장적인 캐릭터 연기는 정말 놀랍더군요. 한 때 '러브 어페어'등에 출연하며 아름다운 여배우 중에 하나로 꼽혔던 그녀가, 이렇게 남성적인 연기를 펼치는 것 만으로도 흥미롭더라구요.

2. 팀 버튼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출연했던 미아 바쉬이코브스카는 확실히 이런 영화에서의 모습이 훨씬 잘 어울리는 편이더군요. 앨리스 이후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네요.

3. 마크 러팔로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본래도 그를 참 좋아하긴 하지만 이 작품에서의 그는 뭐랄까, 매력을 막 줄줄 흘리고 다닌달까. 여튼 그렇습니다. 그는 분명 섹시스타에요!

4. 영화를 보고나니, 극중 마크 러팔로처럼 유기농 농장을 하나 운영하면 좋겠다 라는 생각과, 극중 아네트 베닝처럼 와인 한 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뭐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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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터 아일랜드 (Shutter Island)
알고나서 다시보기


마틴 스콜세지의 '셔터 아일랜드'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매혹적인 작품이었다. 데니스 르헤인의 원작소설을 스콜세지는 깊이 있는 질감과 시각적인 효과, 그리고 무엇보다 주인공에게 공감하도록 만드는 연출력과 배우들의 연기로 인해 원작 못지 않은 훌륭한 영화화를 이루었다. '셔터 아일랜드' 개봉 당시 흥미로웠던 점은 이 이야기의 반전을 두고 양측이 제법 대등하게 의견을 겨루었다는 점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당연히 완벽하게 정해지고 짜여진 한 쪽의 이야기, 그러니까 너무 명확한 일방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했었지만, 그와 반대의 의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설을 들어보아도 '제법 이야기가 되는'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당시 영화 평에도 썼듯이, 당시에 보았던 영화들 가운데 극장을 나오며 가장 뜨거웠던 작품 중 하나였으며, 누가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영화를 본 사람에게 자신이 궁금한 점을 묻게 되고, 또 자신이 믿고 있는 바를 설득하고픈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셉션'과 유사한 측면이 있는데, '인셉션'은 모두가 정답이 되도록 치밀하게 설계된 이야기라면, '셔터 아일랜드'는 정답은 분명 한가지이지만 오답 역시 설득력을 갖을 수 있도록 연기와 연출이 섬세하게 다룬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아, 그리고 이 작품은 '인셉션'과 여러모로 비교할 만한 구석이 많은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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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영화 개봉 당시 글에서는 이 작품이 갖고 있는 메시지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었지만, 이번 글에서는 그런 점보다는 다시 보면 더욱 분명해지는 영화의 이야기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을 해보려고 한다. 극장에서도 두 번을 관람하였었는데, 이런 영화의 특성상 두 번 이상 보게 될 경우, 보이지 않던 부분이 보일 수 밖에는 없으며, 그저 스쳐 지나쳤던 장면들이나 인물들의 행동들이 철저히 계산된 것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게 된다. 이 글은 그런 의미에서 '다시 보기'의 방식으로 끄적여 보았다.


(이 글은 스포일러 투성이인 글입니다.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께서는 모쪼록 내용이 전부 들어 있는 이 글을 읽지 마시고, 영화를 감사하시길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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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터 아일랜드'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스릴러 라는 장르적 측면에서 두 가지를 특별히 고려하고 있다. 하나는 영화는 알고 있는 진실을 나중에 관객에게 알렸을 때 모든 것이 수긍가도록 그 과정을 세밀하게 설계해야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런 단서를 여기저기 흩어놓으면서도 관객들이 영화의 이야기와는 반대의 길을 가는 주인공의 심정에 완전히 공감하도록 (그래서 심지어는 영화가 나중에 반전을 알려주어도 쉽게 인정하지 못할 정도로) 만드는 것이다. '셔터 아일랜드'는 이런 두 가지를 모두 훌륭히 소화해내고 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주인공 앤드류, 아니 테디 다니엘스의 환상을 현실이라고 믿고 이에 대한 자신만의 공식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아예 확실한 결론을 다시 한번 이야기하자면, 이것은 너무나 명확히 극중 앤드류 레디스, 그러니까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캐릭터가 테디가 아니라 앤드류이며, 영화의 마지막 닥터 코리가 이야기해준 것이 모두 사실이라고 볼 수 있겠다. 본 블루레이에 수록된 부가영상을 보면 이것저것 고민할 것도 없이 '정신병자를 연기하는 것이 힘들었다' 라는 식으로 확정지어 얘기하고 있으니 사실 여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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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셔터 아일랜드'는 극중 디카프리오가 앤드류 레디스라는 것을 알고 한 번 더 보게 되면 또 다른 흥미로운 작품이 된다. 그리고 앤드류 레디스라고 인정할 때만 더 확연히 보이는 디테일이나 연출, 연기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바로 그런 점들, 테디 다니엘스라고 믿었던 때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앤드류 레디스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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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시작, 셔터 아일랜드에 테디 다니엘스와 그의 동료 척이 (일단 이렇게 지칭해두자) 도착하자 굉장히 삼엄한 경관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때는 현재 위험한 환자가 탈출한 상황이고 이 연방요원들이 그냥 탐탁치 않아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여겼었지만 사실은 테디가 아니라 앤드류 레디스이기 때문이다. 앤드류는 폭력적인 성향의 환자이고 경관들에게도 폭력을 행사할 만큼 위험한 환자였기 때문에, 그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병원 밖을 활보하는 이 상황이 경관들로서는 몹시 긴장된 상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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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에 설치된 전기선을 보고는 '전에도 본 적이 있어'라고 얘기하는데, 이 대사는 나중에 나치의 수용소에 갔었던 기억 (이 기억조차 거짓이라고 보는 편이 맞겠다)에서 그 때봤던 것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알았었지만, 사실은 저 말 그대로 바로 그 것을 본 적이 있는 것이다. 그는 앤드류 레디스고, 이곳의 환자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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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소설에서도 이런 이상한 점을(테디의 이야기로 알고 있는 관객들이 이상함을 느끼게 되는) 표현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테디와 척이 애쉬클리프에 입장하기 위해 총기를 반납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총기를 반납하려는데 연방 보안관으로 4년이나 근무했다는 척은 어찌된 일인지 허리춤에 있는 총 조차 제대로 벗어내질 못한다. 이 장면에서는 위 스크린 샷 속 테디의 시선처럼 관객 역시 척 (마크 러팔로)을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이 이후에도 척을 의심케 하는 몇가지 연막 작전이 등장하기도 한다. 척을 의심하는 것은 맞지만, 테디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척은 바로 닥터 시한이기 때문에 이런 연방 보안관의 행동에는 익숙하지 않을 수 밖에는 없었을 터. 하지만 영화는 아직까지는 좀 더 직접적인 단서는 제공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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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보니 더욱 그렇지만, 척은 유난히 테디에게 '괜찮아요?'라고 걱정스런 질문을 자주 던지곤 한다. 이는 물론 그가 척이 아니라 앤드류의 주치의인 닥터 시한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또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만 시한은 코리와 더불어 이런 방식의 치료가 성공할 것이라고 믿는 진보적인 의사이기 때문에 아마도 테디의 파트너인 척 역할을 자청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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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연기에 관심없는 배우들을 시한 박사가 열심히 이끌고 있는 한 연극의 장면과도 같다)

이 병원 내에는 앤드류 레디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모두가 동원된 거대한 연극을 하는 것에 있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이들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긍정적인 이라면 역시 코리와 시한 박사를 들 수 있겠고, 부정적인 이들이라면 막스 본 시도우가 연기한 내링 박사를 비롯해 소장과 대부분의 이곳 사람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코리 박사와 주치의인 시한은 이런 치료방법이 통할 것이라고 믿는 이들이지만, 내링 박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래봤자 소용없어'라는 식의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거추장스러운 연극에 그리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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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을 보면 유난히 앤드류 혼자서 열심히 빠져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렇다)

위와 같은 장면에서는 아예 앤드류가 돌아서자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이 연극 놀음이 그저 재밌기만 한 한 남자 간호사의 웃는 장면마저 확인할 수 있다. 그를 비롯한 이 곳 직원들에게는 자신들이 계속 돌보던 한 환자가 연방 보안관 행세를 하며 자신들을 심문하고, 그의 주치의 역시 보안관 행세를 하는 것이 한편으론 재미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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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들은 대부분 이 상황에 비협조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예 대놓고 테디를 우습게 깔보며 대하기까지 한다. 항상 반대로 자신들이 환자에게 이야기하곤 했었는데, 그랬던 환자가 보안관이라며 자신들을 심문하는 것 자체가 우습고 불편한 것이다. 위의 두 간호사의 표정을 보면 이 같은 사실이 그대로 드러난다. 왼편의 간호사는 못마땅의 강도가 더한 경우라 계속해서 테디에게 까칠하게 대하는 것이고, 오른편의 간호사는 그저 이 상황이 전혀 심각하게 느껴지지(그렇게 연기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것)않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실제 상황이었다면 지금의 간호사들처럼 이 같은 반응을 보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중요한 환자가 실종되었고, 연방 보안관이라는 자가 자신들을 심문하는 떨리는 상황이었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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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들을 심문하는 곳에 닥터 코리가 자리잡고 이 상황을 주시하는 것을 처음 봤을 땐, 혹시 어떤 직원이 이 사건에 연루되었는지 캐내기 위해 집중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 이 비협조적인 직원들이 혹시라도 실수를 할까봐 혹은 앤드류가 계속 원하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갈 수 있도록 방향이 틀어질 경우 그 길을 조정해주기 위한 안내자이자 감시자로 참여하고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 영화를 잘보면 앤드류가 직접 방향이나 행동을 결정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척이나 주변 사람들이 은근 슬쩍 앤드류의 경로를 정해주는 장면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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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색해서 뭐라도 나오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

위의 장면도 이런 비협조적인 이들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장면이다. 해안가에 실종사 수색을 하러 나왔는데, 실제로 수색하는 인력들은 보이지 않고 여기저기 그냥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테디는 뭔가 불편함을 느낀다. 이 경관들은 이 모든 것이 그저 연극일 뿐인 것을 알기 때문에, 즉 아무리 찾아봐도 시체나 환자따위 나올리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이 연극에 열심히 참여할 동기조차 부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저렇게 비협조적인 모습을 숨기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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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영화가 흥미로워지는 것은 바로 환자들을 테디가 심문하는 장면부터다. 이 심문 장면이 시작하기 전 아까 그 까칠한 반응을 보였던 간호사가 위와 같은 주사를 준비하고 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처음에는 심문을 받게 되는 환자들이 발작이나 이상 반응을 보일 때를 대비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이 장면 역시 다시보게 되면 이 주사가 환자들이 아니라 또 다른 환자, 가장 위험한 환자인 앤드류 레디스를 위해 준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1:1로 다른 환자들과 맞닥들였을 때 이상 행동이나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낼 수도 있는 앤드류였기 때문에, 아까 직원들을 심문하던 때와는 다르게 상당히 긴장한 모습으로 환자들과의 심문을 주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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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떡하니 앉아있으니 말하기가 쑥스럽네요;;;")

이 심문 장면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바로 시한 박사에 대한 묘사다. 이 장면 전에도 슬쩍 그런 분위기를 보였던 영화는 이 장면에 와서는 아주 직접적으로 척이 닥터 시한임을 연기와 컷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앤드류가 시한에 대해 묻자 여자 환자는 오른편에 앉은 시한을 흘깃 쳐다보며 이야기한다. 일반인이었다하더라도 바로 앞에 그 사람을 두고 다른 사람인척 연기하는 것이 쉽지 않을텐데, 정실질환을 겪고 있는 이들 같은 경우는 이런 연기에 아무래도 좀 더 미숙할 수 밖에는 없다. 그래서 잘 생겼다는 얘기를 할 때는 쑥스러움을 그대로 표정에 드러내기도 하고, 위의 스크린 샷처럼 저렇게 바로 앞에 시한을 쳐다보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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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영화는 아주 노골적으로 그 반대편에 앉은 척을 보여준다. 잘생겼다는 이야기를 쑥스럽게 할 때 바로 시한의 표정과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외에도 영화 속에서 시한의 이름이 언급될 때는 거의 모든 장면이 척에게로 이동한다. 즉 영화는 이때부터 척이 닥터 시한이다 라는 암시를 주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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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치의에게 휴가를 허락해요? 근데 나는 왜 여기서 일하고 있는거임? -_-;;")

그렇기 때문에 위와 같은 재미있는 장면도 등장한다. 이 같은 위급 상황에 닥터 시한에게 휴가를 주고 섬을 나가게 했다는 이야기에 바로 본인인 척이 '주치의에게 휴가를 허락해요?'라며 되묻는 장면은, 이 연극의 작은 하이라이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연극에 익숙치 않은 사람들이라 이런 대화들이 오갈 때의 반응을 보면, 조금씩 머뭇거리거나 쑥스러워하는 장면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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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링 박사의 위와 같은 질문도 이 연극의 측면에서 보면 흥미로운 점이다. '그 바닥 사람들은 술을 즐기지 않나요?'라고 물어보는 와중에는 약간 비꼬는 투가 섞여있는데, 환자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래, 니가 보스턴에서 온 보안관이라며?'라는 식으로 약간 비꼬면서 또 한편으로는, 얼마나 이 환자가 자신의 환상에 깊이 빠져있는지 일종의 테스트를 겸하고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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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레이첼'을 앤드류가 만나게 되는 이 장면은 구성자체가 너무 연극스러운 장면이기도 하다. 각 인물들의 배치자체도 마치 무대 연극을 보는 듯한 위치를 보여주고 있고, 아래에서 위로 비추는 조명은 이런 연극같은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앤드류를 제외하고는 모두들 레이첼의 불꽃 연기에 감탄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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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돌변한 레이첼을 맞닥들이는 앤드류의 표정도 흥미롭다. 이 장면만 본다면 극중 앤드류는 명백한 정신병동의 환자이고 레이첼은 간호사 임이 명확히 드러난다. 저 표정은 갑자기 변한 상대에 대한 놀라움이라기 보다는, 정신적인 불안을 겪는 환자로서 공포를 느끼는 표정이라고 해야 맞겠다. 이 장면은 그래서 테디가 이 곳에 와서 이상한 일들을 겪으며 혼란을 겪게 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정신질환을 갖고 있는 이었다는 점을 그의 반응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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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척이 테디를 눈치보는 장면은, 둘이 등장하는 거의 모든 장면에 등장한다고 할 정도로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앤드류를 철썩 같이 테디로 믿고 있을 때에는 이런 시선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이 이런 종류의 영화의 묘미다. 그리고 다시 보는 '셔터 아일랜드'의 묘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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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조금씩 소스를 제공하던 영화는 조지 노이스 (잭키 얼 헤일리)와의 만남 장면을 통해 매우 노골적으로 영화의 본래 이야기를 드러낸다 (여기서 본래 이야기란 영화가 이야기하려는 메시지가 아니라, 사실관계상 본래 이야기를 말한다). 조지 노이스는 앤드류 레디스와 테디 다니엘스를 모두 잘 알고 이해하는 인물로서, 빨리 아내를 잊으라고 진심으로 부탁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테디를 만난 다른 인물들과는 다르게 그를 테디가 아닌 앤드류 레디스로서 대한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이 테디 다니엘스라고 믿는 앤드류는 이 이야기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관객은 점점 더 주인공에 대해 의혹을 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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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영화가 이야기하고 있는 주인공의 트라우마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있지만,  그래도 짧게 한가지만 언급하자면 세 아이를 부둥켜 안고 오열하는 저 장면은, 이 모든 이야기의 단서이자 시작이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앤드류 레디스는 평범한 사람이었으나 우울증을 겪던 아내가 아이들을 모두 익사시킨 이 사건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았고, 자신의 손으로 이런 아내를 죽인 것에도 충격을 받아 결국, 자신안에 또 다른 자아를 갖게 되는 정신질한마저 갖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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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인 척을 잃고, 동굴에서는 실제 레이첼이라는 여성과의 만남을 갖은 뒤 앤드류는 소장에게 발견되어 차를 타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오게 된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 소장은, 코리 박사가 주장하는 이 거대한 연극에 결코 협조적인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소장은 앤드류에게 매우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건낸다. 앤드류를 완전한 환자 취급하며 그의 폭력성이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여기서 흥미로운건 앤드류, 아니 현재는 테디 다니엘스인 디카프리오가 소장의 이런 억압에 전혀 꼼짝을 못한다는 것이다. 이미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테디는 더 이상 연방보안관이 아니라 이곳의 환자인 앤드류의 모습으로 변모해왔으며, 자신을 완전히 환자 취급하는 소장의 말에도 제대로 한 마디 받아치지도 못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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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코리 박사에게 모든 사실을 전해 듣고 자신이 테디 다니엘스가 아니라 앤드류 레디스라는 사실을 알게 된 앤드류는 코리 박사에게 또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는 바로 과거에도 이렇게 치료됐던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앤드류의 마지막 선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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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스콜세지의 '셔터 아일랜드'의 마지막 장면은 원작인 소설에는 없었던 것이다. 이 대사는 이 영화를 통틀어 가장 의미심장한 것이었는데,

'괴물로 평생을 살겠나? 선량한 사람으로 죽겠나?'

바로 이 것이다. 시한 박사를 다시 한번 척으로 부르고 이곳을 탈출해야 겠다고 한 뒤 남긴 말이 바로 위와 같은 이야기였다. 그러고는 제 발로 자신을 수술하려 준비하고 있는 이들에게로 걸어간다. 이것은 분명 테디 다니엘스로서의 선택이 아니라 앤드류 레디스로서의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과거에도 이런 식으로 여러번 치료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앤드류는, 또 한번 환상에 빠지기 전 오롯한 앤드류 인 지금 선택해야 한다고 결심을 하게 된다. 그리고는 극복하지 못할 트라우마 때문에 계속 정신이상과 현실을 반복하는 괴물로 평생을 살기 보다는, 그냥 앤드류 레디스로서의 죽음을 택한다. 영화는 이렇게 걸어가는 앤드류의 뒷 모습으로 끝나지 않고, 수술이 행해질 등대를 마지막 행선지로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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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마틴 스콜세지의 '셔터 아일랜드'는 반전을 숨기고 있는 영화로서 이야기의 양면성을 영화화로서 잘 표현해 낸 작품이었다. 영화가 이끄는 대로 테디 다니엘스의 이야기로 보는 것도 물론 흥미롭고, 그 반대로 앤드류 레디스의 이야기로 보는 것도 흥미롭지만, 앤드류 레디스라는 것을 알고 테디 다니엘스를 보는 것도 몹시 흥미로운 감상이 아닐까 싶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본문에 사용된 모든 스틸컷/블루레이 캡쳐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모든 이미지의 권리는 Paramount Pictures 에 있습니다.






셔터 아일랜드 (Shutter Island, 2009)
시대의 불안과 트라우마


마틴 스콜세지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콤비의 신작 <셔터 아일랜드>는, 스콜세지 - 로버트 드니로 이후 최고의 감독과 페르소나 콤비로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는 이들의 신작이라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관심을 갖게 하는 작품이었다. 더군다나 <미스틱 리버>, <곤 베이비 곤>의 원작자 데니스 르헤인이 쓴 유명한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점이었는데, 원작을 읽지 않은 입장에서 스크린으로 먼저 만나게 된 <셔터 아일랜드>는 이미 많은 이들이 언급한 것처럼 히치콕식 스릴러 연출과 큐브릭을 연상시키는 미장센으로 담아낸, 거장 마틴 스콜세지의 수작이었다(개인적으로는 걸작이라 불러도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한다). 요 근래 극장에서 본 작품들 가운데 가장 몰입도 있고, 가장 영화 본연의 미덕에 충실한 작품이었으며, 근래 본 연기 가운데 또 하나의 절정의 연기를 만나볼 수 있었던 매우 만족스런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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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연방 보안관인 테디 다니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이날 처음 만난 자신의 파트너 척(마크 러팔로)과 함께, 셔터 아일랜드에 위치한 '애쉬클리프' 정신병원에 환자 실종사건을 조사하러 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탈출구라고는 선착장에서 배를 타는 것 외에는 없는 이 외딴 섬에서 어떻게 환자가 도망치게 혹은 실종되었는지 의문이 많은 가운데, 테디는 이 정신병원 시설과 관계자들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며, 그 안에 자신의 개인적인 조사 역시 진행하게 된다.

영화의 오프닝의 타이틀 텍스트라던지 애쉬클리프를 조명하는 카메라의 움직임이라던지, 'The Band'의 기타리스트 출신인 음악감독 로비 로버슨의 음산하고 무거운 음악 등은,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1950년대 미국의 보스턴 셔터 아일랜드로 이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미장센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해보자면, <셔터 아일랜드>의 의상과 미장센은 너무도 영화적이라 매혹적이다. 당시의 코트와 의상이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배우 중 하나인 마크 러팔로의 코스츔은 그 자체로 고증을 넘어선 매혹이 되버리고, 아내가 골라준 촌스러운 넥타이를 코트에 어울리지 않게 매치한 디카프리오의 모습 역시 영화 초반 연대를 알리는 텍스트 없이도 이 작품이 어느 시대를 그리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게 한다(사실 몰입 잘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나는, 코트에 모자를 눌러 쓴 마크 러팔로를 보는 순간 이미 몰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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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과 미장센이 시대의 공기를 담으려고 애썼다면, 시종일관 긴장감을 전하는 스코어는 장르 영화로서의 장점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시대의 불안과 트라우마라는 영화 뒷 편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어 든다. 개인적으로는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마크 러팔로의 등장만으로 몰입했던 터라 그 이후에도 심하게 몰입해 영화가 반전을 제공했을 때에도, 그 이후를 이야기했을 때에도 모두 다 함께 할 수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스코세지가 풀어낸 <셔터 아일랜드>의 구성은 혼란스럽고 불부명한 구조를 보여주는 듯 하다.

관객들은 죽었다던 테디의 아내가 등장할 때 꿈이나 환상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지만, 그녀가 환상 속에서 보여주는 장면과 대사, 미장센 들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쉽게 알아채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테디가 보는 아내의 환상 들은 마치 최근 보았던
찰리 카우프먼의 <시네도키 뉴욕>을 연상시킬 정도로, 어쩌면 이 작품을 더욱 모호하게(하지만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더 좋았던)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영화의 결말로 되돌아 보았을 때 다시 한번 장면 하나하나의 의미를 떠올리게 하는 좋은 영화적 장치들이었다(재미있는 건 <시네도키 뉴욕>과 마찬가지로 여기에도 미셸 윌리엄스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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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단락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들께서는 아래 단락으로 이동해주세요~)


아주 깊게 몰입했던 터라 결말에 보여준 반전과 그 이후에 영화가 택한 설정도 마음에 들었지만, 사실 이 영화는 반전에만 목숨건 정통 스릴러는 아니라고 볼 수 있겠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중간에 혼란스런 설정들도 매우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정통 스릴러의 범주로만 따져보아도 만족스러운 작품이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캐릭터가 결국 테디 다니엘스 인지 앤드류 레디스 인지를 따져보는 것도 흥미롭고, 맨 마지막에 선택한 삶(혹은 죽음)이 테디로서의 그것인지 앤드류 로서의 것인지를 생각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다.

스포일러를 표시한 김에 이 영화의 반전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면, 결국 마지막 등대 위에서 들려주는 박사의 이야기처럼 앤드류는 자신의 아이들을 우울증으로 익사시켜 살해한 아내를 자신의 손으로 죽인 것과 나치 수용소의 기억 등이 트라우마가 되어 결국, 테디 다니엘스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냈고 수술이 아닌 진보적인 치료를 추구하던 코리 박사는 이 거대한 연극을 통해 앤드류를 치료하길 시도했으나, 결국 다시 한번 돌아오는 것에 실패한 앤드류에게 포기하고 외적인 수술을 시도할 수 밖에는 없게 된다.

원작에는 없다는 영화 만의 마지막 대사는 이 영화의 반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단초가 되는데, '괴물로 살아가거나 선량한 사람으로 죽거나'라는 대사 뒤에 스스로 수술을 당하는 것을 인지하고 행동하는 앤드류(테디)의 모습은, 이런 극복할 수 없는 트라우마를 안고 앤드류(괴물)로서 살아가느니, 가상의 인물인 테디가 되어 모든 것을 잊은 채 사는 것을 (수술)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사실 결국 앤드류의 환상이었다는 이야기가 가장 수긍이 가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이 이야기를 테디 다니엘스의 이야기로 보아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조목조목 논리적인 이유를 들어가며 결국 이 모든 것이 음모를 파해치려는 연방 보안관 테디 다니엘스를 막기 위해 병원가 박사가 몰아간 것이라고 보는 설도 완전히 무시하긴 어려운 부분이다. 그 만큼 스콜세지는 각각의 이야기에 논리가 될 만한 설정들을 영화 중간 중간에 직간접적으로 뿌려 놓았다. 이것들은 <셔터 아일랜드>가 재 관람 할 때마다 다른 영화가 될 수 있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테디 다니엘스의 이야기로 믿으며 따라가느냐 아니면 앤드류 레디스의 이야기로 따라가느냐에 따라 영화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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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것이 진실인가에 대한 논란은 그 자체로 너무도 흥미로운 이야기거리 이긴 하지만, <셔터 아일랜드>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진실이 무언인가?'에 대한 것은 아니다. 만약 진실에 관해 이야기하려 했다면 이 작품은 혼란스럽게 단서를 풀어놓 되 결말이 알려지고 나서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 있어야 했고, 깊이 파고들면 들 수록 더 확고한 영화가 되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진정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트라우마' 그 자체다. 영화는 반전에 관련된 여러 단초들을 심어 놓은 것과 마찬가지로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를 시종일관 하고 있다. 테디가 이 일에 자처한 것도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른 앤드류가 이곳에 있다는 정보 때문이며, 꿈만 꾸면 보이는 환상들(나치 수용소에 쌓여 있는 시체들을 구하지 못한 죄책감과 자신의 아이들을 빨리 구하지 못한 트라우마까지) 역시 모두 테디 내면의 트라우마 들이다. 영화는 한 개인이 트라우마로 인해 어떻게 잠식되어 가고 고통을 겪는지의 과정을 스릴러라는 그럴 듯한 장르에 빗대어 들려준다.

이렇게 개인적인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로 볼 수도 있지만, <셔터 아일랜드>의 트라우마는 개인적인 것 외에 당시 미국 사회의 레드 컴플렉스와 트라우마를 담고 있다. 극중 테디가 겪었던 나치 수용소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때 뿐이며, 공산주의자를 색출해 내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던 당시 미국 사회내의 문제는 영화가 담고 있는 불안으로 바꿔 이야기할 수 있다. 50년대 핵과 냉전 시대의 공포와 의심은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시대의 트라우마를 개인의 트라우마에 빗대어 직간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극중 조지 노이스(잭키 얼 헤일리)와의 대화 중에 '수소 폭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비유는 사실 매우 직접적인 당시 미국사회에 대한 묘사이기도 하다. 내부에서부터 폭발한다는 수소 폭탄의 비유는, 냉전 시대 소련이나 다른 세계로 부터의 공포보다는 메카시즘으로 대표되는 당시 미국 사회 내의 불안과 공포가 더욱 스스로를 잠식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떠올렸던 또 다른 영화는 바로 밀로스 포먼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였는데, 이 작품에도 <셔터 아일랜드>와 비슷한 시대 배경과 정신병원(뇌수술)이라는 설정이 등장한다. 실제 이런 어두운 역사를 갖고 있는 미국 사회를 되돌아 보았을 때, 마치 독일이라는 나라가 '나치'라는 트라우마를 지울 수 없는 것처럼 현재의 미국 사회에서 역시 50년대 메카시즘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나치와 공산주의의 정반대에서서 자유를 부르짖었던 자신들에게 나치와 똑같은 어두운 과거는 분명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였을테니 말이다. 그래서 결국 이 영화는 시대의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를 개인에 빗대어 이야기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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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연기는 갈수록 매혹적이다. 1950년대에 빠져든 디카프리오는 당시 고전 헐리웃 영화 속 남자 배우들 처럼, 연극적인 연기를 펼친다. 스콜세지와의 호흡은 한계를 모르고 나아가고 있으며, 이젠 더이상 연기력에 대해 왈가왈부 하는 것 자체가 커다란 실례일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마크 러팔로 라는 배우는 시대극에서 특히 장점을 발휘하는 것 같다. 그 자체가 미장센이 되는 연기에 있어서 마크 러팔로는 참으로 탁월한 재주가 있다. 그 밖에 벤 킹슬리와 막스 본 시도우 같은 베테랑 연기자들이 함께한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의 무게는 깊어지며, 미쉘 윌리엄스와 잭키 얼 헤일리(아시다시피 <왓치맨>의 '로어셰크'가 바로 그다), 그리고 에밀리 모티머와 패트리시아 클락슨의 연기도 좋았다. 디카프리오가 월등한 롤을 맡고 있는 작품이기는 하지만, 조연급 연기자들의 연기를 맛보는 것도 이 작품의 또 다른 재미다.

여러가지 이유로 마틴 스콜세지의 <셔터 아일랜드>는 다시 보고 싶은 작품이다.

1. 벌써부터 얼른 블루레이가 출시되었으면 좋겠네요. 디지털 상영으로 보았는데 영상의 입자 자체가 거친 편이라 칼 같은 선예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좋았어요. 어서 블루레이나 DVD가 출시되어 음성해설 트랙이라도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2. 마크 러팔로의 의상을 보며 자연스럽게 <조디악>을 떠올렸는데, 흥미로운건 <조디악>에서 범인으로 의심되었던 배역을 연기했던 존 캐롤 린치가 이 작품에도 소장(부소장?)으로 등장한다는 점이죠.

3. IMDB의 트라비아를 보니 파라마운트에서는 이 프로젝트를 데이빗 핀처와 브래드 피트, 마크 월버그로 진행하려고 했었다는데, 그렇다면 더더욱 <조디악>스러워졌을지도 모르겠군요 ㅎ

4. 오랜만에 스코어에 감동 받았습니다. 감정적 감동이 아닌 영화적 감동이요. 사운드 트랙도 구매해야 겠네요.

5. 글을 다 쓰고 오랜만에 관련 글들을 읽어보며 정말 희열을 느꼈습니다. 영화의 반전을 가지고 각자의 논리들로 풀어놓은 글들을 보는 재미를 이렇게 느낀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어요.

6. 아, 또 보고 싶어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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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이라는 영화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되었던 건 전적으로 감독 미셸 공드리 (Michel Gondry) 때문이었다. 뷔욕 (Bjork)의 광팬이었던 나는 그녀의 'Human Bahavior', 'Bachelorette',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곡 중 하나인 'Joga'의 뮤직비디오를 접하게 되면서 과연 이 기묘하고도 괴상하기까지 했던, 당시로서는 뷔욕의 음악과 함께 충격적인 영상으로 다가왔던 이 작품들을 한 사람이 감독했다기에 당연히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뮤직비디오라는 매체에서 시도할 수 있는 실험이 극한까지 도달해 이제는 복고적인 성향으로 회귀하고 있는 요즈음에도, 그가 예전에 만들었던 뷔욕, 벡 (Beck), 라디오헤드 (Radiohead), 매시브 어택 (Massive Attack), 레니 크래비츠 (Lenny Kravitz)등 뮤지션의 뮤직비디오는 누구라도 감상한 뒤 감독이 누구인지 궁금증이 들 수밖에 없는 완성도 높고 초감각적인 영상이었다. 또한 뮤직비디오의 감독 외에도 리바이스, 나이키, 코카콜라, 아디다스 등 유명 브랜드의 CF 감독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2001년작 <휴먼 네이쳐>이후, 각본을 담당한 찰리 카우프만과 함께 새롭게 내놓은 영화가 바로 <이터널 선샤인>이다. 이터널 선샤인을 주목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바로 각본을 담당한 찰리 카우프만 (Charlie Kaufman) 때문이었다. 천재 시나리오 작가로 불리우는 카우프만은 이미 전작 <존 말코비치 되기> <어댑테이션> <휴먼 네이쳐> 등을 통해 이전엔 볼 수 없었던 창조적인 시나리오로 천재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었다. 그의 각본은 굉장한 두뇌 회전을 요하면서도 동시에 장난스럽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펼쳐왔는데, 이터널 선샤인에서도 그의 장난끼와 복잡함은 계속되지만, 전작들과 비교해 봤을 때, 러브스토리에 걸 맞는 매우 사랑스럽고 감성적인 면이 더욱 부각되었다.




이터널 선샤인을 지배하는 정서는 대충 이렇다. 사랑하는 사람과 처음 만났을 때, 처음 사랑했을 때 느꼈던 감정이 영원할 수는 없다는 현실적인 정서와 이별에 아픔을 잊기 위해 헤어진 연인과의 추억을 뇌에서 지워 버린다는 비현실적인 정서, 그리고 이 현실과 비현실을 감싸는 따뜻한 감성. 앞선 현실적인 정서가 주를 이뤘다면 영화는 어떤 큰 줄기의 사건을 통해 ‘처음 만날 때와 같은 설레임은 이제 없지만, 그래도 널 영원히 사랑해’라는 식의 결론을 맺는 일반적인 영화가 되었을 테고, 비현실적인 요소가 주를 이뤘다면 영화는 <메멘토>식 시간 퍼즐 놀이와 같이 관객과 두뇌 싸움을 치열하게 벌이는 영화가 되었을 테지만(실제로 많은 주변 사람들이 <메멘토>를 연상했다), 이터널 선샤인에만 있는 따뜻한 감성은 이 영화를 앞선 두 가지 형태의 영화와는 전혀 다른 영화로 만들었다. 만약 이 같은 복합적인 요소 없이 현실적인 러브스토리나 기억과 현실을 어지럽게 배치한 이야기로만 진행되었다면 마지막 장면에서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주고받는 'Okay', 'Okay'라는 대사가 그렇게 가슴 시리도록 와 닿지는 않았을 것이며, 마지막 해변에서 나누던 대화 중 ‘조엘, 이제 이런 기억들이 사라지게 돼 (This is it, Joel. It's gonna be gone soon)’, ‘알아 (I Know)’, ‘어떻하지? (What do we do?)’라는 물음 뒤에 ‘그냥 음미하자 (Enjoy it)’했을 때, 참을 수 없는 전율과 눈물이 쏟아지진 않았을 것이다(여러 번 보아도 이 대사는 정말로 감동적이라 원문을 굳이 참조하였다. 'Enjoy it'을 ‘음미하자’로 해석한 것은 정말 탁월했던 것 같다).




영화의 해석에 대해서는 이 DVD, 정확히 미셸 공드리와 찰리 카우프만이 함께한 음성해설을 듣기 전에는 나조차도 분분했었다. 논란에 중심은 아무래도 해피엔딩이냐 언해피엔딩이냐 하는 것이었는데,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는 마지막 장면에서 ‘또 시간이 지나면 서로 지루해하고, 따분하게 여길텐데?’하는 클레멘타인의 질문에 웃으며 'Okay'로 답한 조엘과 역시 웃으며 'Okay'로 답한 클레멘타인을 보며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후 극장에서 2번째 관람하였을 때에는 여러 가지 의문점이 생겼고, 급기야 영화의 크래딧과 함께 조엘이 차안에서 슬프게 울며 테이프를 차 밖으로 던져 버리는 장면에서 조엘에 눈가에 기억을 지울 때 사용하는 자국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결국 둘은 다시 만났다가 다시 헤어진다는 언해피엔딩이라는 결론을 내게 되었다.

음성해설을 통해 알게 된 사실조차 100% 완벽하지 않은 것이 아쉽지만, 어쨌든 감독과 작가의 말을 통해 알게 된 확실한 사실은 그들은 영화를 결말짓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화의 마지막 눈 덮인 해변 가를 뛰어가는 장면이 현실인지 추억인지의 여지를 남기면서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었다는 것이다(음성해설 중 테이프를 밖으로 던져 버리는 장면에서 카우프만은 ‘저것은 라쿠나 테이프는 아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사실 음성해설에 그 어느 때 보다도 집중했던 것은 이같이 모호한 결말 때문이었는데, 다 감상하고 난 뒤 생각해보니 감독과 작가는 그 자체에 그렇게 큰 비중은 두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석적으로만 달려들었던 자에게 결말은 관객에게 남겨두었다는 작가의 말은 처음에는 조금 허무했지만, 영화를 보면 볼수록 결말의 종류나 시간 퍼즐 맞추기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 이 영화에서 말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그것과는 별개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엘이 클레멘타인과 처음 만난 뒤 헤어지면서 창밖으로 인사를 전해 받은 뒤 살짝 눈 내리는 거리를 뒤로하고 너무나도 행복해하며 차로 돌아가던 장면(그리고 그 때 흐르던 존 브라이언의 그 음악!), 첫 전화 통화를 하며 너무나도 행복해하던 조엘의 얼굴, 기억 속에서 클레멘타인을 놓치지 않기 위해 어린 시절 비 오던 날을 떠올리며 탁자 아래로 비를 피하던 장면(그 때 흐르던 그 감성적 스코어!), ‘몬타우크에서 만나자’라며 속삭였을 때 느꼈던 애잔한 정서, 그리고 이미 앞서 여러 번 언급했던 전율이 흐르던 장면 장면에서 느낄 수 있었던 그 정서가 바로 이 영화 <이터널 선샤인>이 말하고자 하는 따뜻함이 아닐까 한다.

이제 배우들에 연기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사실 ‘이터널 선샤인’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거나 접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이유는 짐 캐리라는 배우의 영향도 컸던 것 같다. 짐 캐리 하면 <마스크>나 <덤 앤 더머>를 떠올리며 코믹 연기에 달인 정도로만(사실 짐 캐리가 펼치는 코믹 연기는 그 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인정받을 만하다) 쉽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가 정극 연기를 한다고 할 때는 그리 큰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 같다(아담 샌들러 주연의 <펀치 드렁크 러브>가 소수에게만 사랑받는 이유도 같은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 맨 온 더 문>, <트루먼 쇼>, <마제스틱> 등에서도 이미 괄목할만한 드라마 연기를 펼쳤으나 아직도 그를 단순히 코미디 연기자로만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가장 아쉽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짐 캐리의 연기는 어느 명배우 못지않은 감동을 전한다. ‘조엘’ 캐릭터는 이전에 그가 연기했던 캐릭터들과 달리 짐 캐리만이 할 수 있는 캐릭터는 아니지만, 짐 캐리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캐릭터임은 분명하다.




클레멘타인 역할에 케이트 윈슬렛은 본인에게도 그러하듯이 조금은 의외에 캐스팅 이였는데, 그동안 주로 영국의 시대극을 주로 연기했던 그녀에게 가장 현대적이고 현실적인 캐릭터를 맡긴 영화의 선택은 어찌 보면 모험일 수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매우 탁월한 선택이 되었다. 케이트 윈슬렛에 말을 빌리자면 ‘조엘’은 케이트 윈슬렛이 그 동안 연기했던 캐릭터들을 닮았고 ‘클레멘타인’은 짐 캐리가 그 동안 연기해왔던 캐릭터를 닮았지만, 이터널 선샤인에서는 다른 배우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개인적으로는 케이트 윈슬렛의 영화를 여러 편 보았지만, 그녀가 이리도 사랑스러운 여자인 줄은 이터널 선샤인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이 밖에 ‘프로도’의 이미지를 벗기 위해 갖가지 다른 역할에 도전하고 있는 일라이자 우드는 영화에 잘 묻어드는 연기를 선보였으며, 마크 러팔로와 커스틴 던스트, 톰 윌킨스 역시 자신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영화 전체를 풍성하게 해주는 캐릭터로서 열연을 펼쳤다. 감독과 작가가 톰 윌킨스와 커스틴 던스트의 연기를 보면서 ‘지도할 필요가 없는 배우다’, ‘너무 잘 해 주었다’라고 말한 것이 단순히 예의상으로 한 말이 아님을 영화를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극장을 나오자마자 DVD는 언제쯤 출시될까 기다리게 되었는데, 사실 내 생애의 영화로 꼽을 만큼 사랑한 영화지만 DVD의 퀄리티는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국내에서 크게 흥행하지도 못하였으며 드라마라는 장르적 특성을 비춰봤을 때 국내 DVD출시 여건상 우수한 스펙을 기대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1장의 디스크에 본편과 예고편만 달랑 수록한 초라한 버전으로 출시될 것 같다는 우려와는 달리 코드 1로 출시된 콜렉터스 에디션을 기본으로 한 2장의 디스크의 스페셜 에디션 DVD는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타이틀이다. 먼저 1.85:1 아나몰픽 와이드스크린의 화질은 신작 DVD로서 손색이 없는 화질을 수록하고 있는데, 영화 자체가 의도적으로 뿌옇거나 흐리거나 어둡거나 하는 등의 기법을 쓴 장면이 많아 100% 화질의 우수함을 체험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사운드는 DTS와 돌비디지털 5.1채널을 수록하고 있는데, DTS 트랙이 특유의 강력함을 뿌리는 장면은 드라마의 특성상 그리 많지 않지만, 감독이 음악에 세심하게 신경을 쓴 만큼, 아기자기한 소품 같은 스코어와 감동적인 배경음악과 함께 대사 또한 또렷하게 전달된다.





이번 스페셜 에디션 DVD의 가장 큰 장점은 뭐니 뭐니 해도 서플먼트에 있다 하겠다. 첫 번째 디스크에는 본편과 함께 미셸 공드리와 찰리 카우프만이 함께한 음성해설이 수록되어 있는데, 음성해설은 기술적인 면이나 스토리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로케이션에 관한 이야기와 배우들의 연기 등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리고 음성해설 도중에 말이 없을 경우 영화 본편의 대사에 대한 자막 처리가 된 점도 특징적이다. 아, 또한 모든 메뉴의 한글화도 눈여겨 볼만하다. ‘이터널 선샤인 영화 속으로’는 별도로 제작된 홍보용 영상으로서 감독과 배우들의 인터뷰가 영화 속 장면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미셸 공드리와 제작진이 들려주는 이터널 선샤인’에서는 좀 더 본격적인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데, 여기서 미셸 공드리 감독의 천재적인 면모가 드러난다. 블루 스크린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미셸 공드리는 대부분의 장면들을 순수하게 아이디어만으로 극복하여 만들어냈는데, 영화를 보면서도 ‘저런 장면은 CG를 썼겠지’했던 장면들이 너무나도 간단하지만 기발한 아이디어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편집으로 인해 만들어진 영상이라고 생각했던 장면들이 배우와 스텝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만들어낸 롱 테이크 원 샷으로 촬영된 장면이라니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짐 캐리와 미셸 공드리 감독과의 대화’와 ‘케이트 윈슬렛과 미셸 공드리 감독과의 대화’에서는 서로 그 동안 말하지 못했던 진솔한 이야기들과 촬영 중 에피소드들을 전해들을 수 있는데, 단순히 웃고 떠드는 내용이 아닌 서로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다는 전재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깊고 소중한 대화가 오간다. ‘Saratoga Avenue 장면이 완성되기 까지’에서는 이 한 장면 속에서 어떠한 컴퓨터 그래픽 등이 사용되었으며 어떠한 아이디어 들이 사용되었는지를 상세하게 그려낸다. 조엘이 창밖으로 클레멘타인에게 너를 지워가고 있다며 말할 때 클레멘타인의 다리가 하나 밖에 없다는 사실은 이 서플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 밖에 ‘메이킹 필름’에서는 촬영장에 모습을 더 가깝게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며, ‘삭제/추가 장면’은 본편에는 수록되지 못한 장면들로 영화의 스토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장면들이 담겨있다(영화 초반 조엘이 클레멘타인의 집에 가게 되어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많은 부분이 삭제되었는데, 이 삭제 장면을 통해 사건에 시간 순서에 대해 확실한 답을 얻을 수 있다). 이밖에 Beck의 'Everybody's Gotta Learn Sometimes'의 뮤직비디오와 그래픽을 통한 짐 캐리의 립싱크가 재미를 주는 'Light & Day'의 뮤직비디오가 수록되었다. 마지막으로 영화 속 라쿠나 회사의 광고가 담겨있어, 뭐하나 놓칠 것이 없는 서플먼트를 마무리한다.




<이터널 선샤인>은 <반지의 제왕>에서 느낄 수 있었던 영화의 위대함과는 또 다른 위대함을 전해주는 작품이다. 영화 한 편으로 인해 얼마나 행복해 질 수 있으며 또한 얼마나 슬퍼질 수 있는지, 삶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알게 해준 작품이다. <이터널 선샤인>으로 인해 받았던 감동과 행복함, 복잡 미묘한 감정들을 포함한 여운은, 영화 속 ‘라쿠나’ 회사와 같이 기억을 지워주는 인위적인 행위 없이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글 / 아쉬타카

2006.01.18




조디악 (Zodiac, 2007)

데이빗 핀처.
그는 그 네임 벨류에 비하면 다작을 하는 감독은 아니지만,
그의 전작들은 모두 다 보는 이로 하여금, 흠뻑 빠져들게 할 만한 무언가 마니아틱한 요소가
강한 작품들이었다.

기존 액션이 강조되었던 1,2편과는 달리, SF적인 요소를 배경으로 아주 심오한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던 <에일리언 3>편. (이런 이유 때문에 한 편에선 에일리언 3가 대우 받기도 하지만,
일부에선 가장 재미없는 시리즈로 여겨지기도 한다.)

뭐 지금까지도 최고의 스릴러 영화 중 하나로 꼽히는 <세븐>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조디 포스터의 출연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던 <패닉룸>은 '데이빗 핀처'를 오랫동안 기다렸던
팬들에게 적잖은 당황과 아쉬움을 남기긴 했지만, 그래도 그의 이름은 여전히 가장 기대되는
감독 그 이상이었다.

그런 그가 제이크 질렌할, 마크 러팔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브라이언 콕스 등 명배우들과 함께
연쇄 살인범에 관한 영화를 만든 다 하니
이건 뭐 아니 기대할 수 없었다.



이 영화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1960년대와 70년대 미국 샌프란시스코 일대에서 무려 37명을 살해한 것으로 알려진 뒤 자취를 감춘
미국역사상 최악의 연쇄살인범이라 불리는 '조디악 킬러'에 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내가 처음 이 영화를 접하고 누군가에게 가장 단순하게 설명을 해줄 때도 그렇고,
영화의 홍보전략에도 있는 것이 바로 '미국판 살인의 추억'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야 연쇄 살인사건이라는 것과 범인을 잡지 못한 미완의 종결수사라는 점일텐데,
소재는 비슷하지만 분위기나 느낌은 참 다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살인이 추억>이 좀 더 극적인 긴장감과 분위기를 조성하는 가운데, 적절한 유머를 섞어가는
작품이었다면 <조디악>은 굉장히 침착하면서도 건조하고 관조하는 가운데, 시종일관 차분하고
어쩌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면서도 2시간 36분에 달하는 러닝 타임이 전혀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긴장감을 잃지 않고 있다. 혹자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긴 러닝타임도 그렇거니와 비교되는 <살인의 추억>에 비해
중간중간 커다란 굴곡이 없고 심하게 집중하지 않으면 놓칠 수 있는 분위기 때문에
지루함을 느끼기도 하였으나, 개인적으로는 그 어느 수사극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몰입감이 있었다.

씨네 21을 보니 '머리로 생각하는 수사'가 아닌 '발로 뛰는 수사'라는 표현을 썼던데,
표면적으로 극중 로버트는 발로 뛰는 수사로 인해 자료를 수집하고 결론을 유추해내게 된다.
<조디악>이 뛰어난 수사 스릴러라는 점은, 바로 이 부분에서 시작된다. 아무래도 수사가 주가 되는 영화에 가장 몰입하는 방법은 관객이 스스로 수사에 더 직접적으로
빠져드는 것이 가장 우선일텐데, 이 영화는 그런 면에서 영화가 취하고 있는 태도가
직접적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 풀어가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보는 이들로 하여금, 단서들을 천천히 제공해주고 함께 풀어갈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 다는 것이다.
아니 여지를 남겨둔다기 보단, 한 발짝 물러서서 차분한 시선으로 사건을 바라보면서
직접적인 감정이나 방향을 제시하지 않는 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극 중 로버트와 거의 동일한 입장과 위치에서
이 사건에 개입할 수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긴 러닝타임이 지루하지 않게 몰입할 수 있었다.

즉 누군가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는 것도 좋지만,
내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직접 읽는 경우라고 하면 어울리는 비교일듯 싶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곤 데이빗 핀처가 많이 변했다. 혹은 그 동안의 인상적인 스타일이 부족하다 등등의
평을 하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첫 장면부터 끝날 때까지(달라지긴 하였지만), 독특한 스타일을 느낄 수 있었다.

단순히 6,70년대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오는 철저한 재연과 고증의 아름다움 뿐 아니라,
감각적인 카메라 웍 이라던가, 스타일을 과하게 표현하지 않은 절제된 스타일은, 그 하나로도 스타일로
여겨질만큼 멋스러웠다. 첨부된 영화 속 스틸 컷들처럼, 무언가 선명하기보다는 부족한 색감들과
차분한 색들은, 결국 미완으로 끝나버린 이 수사를 대변하는 분위기이기도 하다.

(특히 살인사건의 장소가 된 택시가 처음 등장하던 장면에서, 택시의 바로 위에서 택시의 움직임을 따라
이동하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역시 핀처의 영화에서 이런 컷은 꼭 하나씩 나오는구나 하는 반가움도 들었다)



(영화 속 로버트 그레이스미스 역할을 맡은 제이크 질렌할과 실제 당사자이자 이 영화의 각본을 지필하기도 한 로버트 그레이스미스)

핀처의 영화라는 것을 알게 되고, 주연 배우들의 캐스팅 소식을 들었을 때 아니 기대할 수가 없었다.
질렌할이라는 기대하는 배우에, 갈수록 좋은 영화에서 좋은 연기를 펼쳐가고 있는 마크 러팔로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함께 연기한다니 무척이나 기대되는 일이었다.

주연을 맡은 질렌할의 연기는 더도 덜도 아닌 딱 정도였다.
그의 시종일관 무미건조한 표정과 구부정한 몸동작이 인상적이었으며, 가끔 보이는 눈빛은 <도니 다코>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마크 러팔로는 확실히 이제 단순히 기대되는 배우가 아니라 기다려지는 배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원래 그의 발성과 보이스가 그랬나 싶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던 목소리 연기는 물론,
다우니 주니어와 함께 이 영화가 훌륭한 수사 영화가 되도록 분위기를 잡은 가장 큰 공헌자는 바로, 마크 러팔로였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역시, 영화가 거듭될 수록 좀 더 중후하면서도 인상적인 배우로 차곡차곡 자리잡는 느낌이다.

후반부에 그의 비중이 조금 줄어든 것이 살짝 아쉽기도 했지만,
그는 이제 안경과 수염만으로도 무언가 느끼게 하는 배우가 된 것 같다.



긴 러닝타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을 정도로,
몰입도로만 따지자면 최근 본 영화가운데 가장 손꼽혔으며,
무언가 같이 느끼고 호흡할 수 있었던 수사극이었다.
그 시대를 느끼게 해준 음악도 참 좋았다.

패닉룸에서 어느 정도 실망했던 데이빗 핀처.
<조디악>으로 다시금 가장 좋아하는 감독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글 / ashita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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