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어스 맨 (A Serious Man, 2009)
삶의 불확실성, 그래서 관조하다
코엔 형제는 천재다. 뭐 새삼스럽겠느냐만은 그들의 신작 <시리어스 맨>을 보고서는 삶을 꿰뚫는 통찰력과 이를 영화로서 어떻게 표현해 내는가에 대한 기법, 그리고 무엇보다 탁월한 이야기 꾼인 그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에 혀를 내두를 수 밖에는 없었다. 그들의 작품은 사실 거의 실망한 적이 없었을 정도로 모두 인상깊게 보았었는데, 최근작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보고나서는 코엔 형제의 영화가 한 단계 더 성장하여 어떤 경지에 올랐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번 애프터 리딩>을 통해서는 녹슬지 않은 그들의 재치와 블랙코미디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는 감히 따라올 자가 없음을 역시 확인시켜 주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번 애프터 리딩>을 보고는 코엔 형제의 쉬어가는 작품 정도로 생각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코엔 형제만이 할 수 있는 블랙 코미디를 가장 잘 보여준 작품 중 하나라고 생각되는 작품이었다). 그런데 이러함에도 코엔 형제의 신작 <시리어스 맨>에 대한 기대는 사실 이 정도로 크지는 않았었다. 어쩌면 <번 애프터 리딩>을 보러 갈 때의 기대와 비슷한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런데 막상 보고난 <시리어스 맨>은, 아니 보는 내내 <시리어스 맨>은 참 대단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엔 형제는 또 어떤 걸작을 만들고야만 것인가?
(내용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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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리의 집 안의 구성과 디자인도 빼놓을 수 없는 체크 요소다. 이 집안의 구성원들은 모두 자신들만의 의상 컨셉이 있는데, 딸은 항상 화려한 꽃무늬 잠옷을 입고나오고, 방안의 벽지 역시 모두 다른 화려한 무늬를 가지고 있고, 집 안의 커튼 역시 방 마다 모두 다른 각각의 화려한 무늬를 하고 있다. 아내 역시 매번 다른 체크 무늬 의상을 입고 있다. 이런 이미지는 일종의 강박에 관한 암시다. 관객들에게 강박의 이미지를 전달하는 동시에 매사에 진지한 주인공과는 정반대되는 이상하고 이해되지 않는 패턴으로 뭉쳐있는 집 안의 이미지는, 보는 것만으로도 래리라는 캐릭터에 공감지수를 드높여 준다)
영화는 이상한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이 프롤로그에 관한 개인적인 에피소드는 글 말미에 추가하도록 하겠다). 배경이나 정확히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확신하기 어려운 이 프롤로그는,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살펴보면 상당히 의미있는 프롤로그였음을 뒤늦게 알게 해주는데, 일단 남편과 아내의 의견이 전혀 달랐다는 것 그리고 영어가 아닌 (그러니까 영어권에서 받아들이기에는 외국어로) 언어로 진행되는 시퀀스라는 점 정도만 기억해두자.
영화의 주인공인 래리 (마이클 스털바그)는 대학에서 물리학을 가르치는 교수다. 그는 곧 대학의 종신재직권 심사를 앞두고 있고, 아들은 성인식을 치룰 예정이며, 옆집 사는 남자가 자꾸 자신의 영억을 조금씩 침범하는 것 같아 신경이 쓰이고, 사회화가 부족한 동생이 조금 걱정거리이긴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큰 문제는 없어보이는 한 가정의 가장이다. 그런데 영화는 래리의 소개를 다 마치기도 전에 그의 주변을 둘러싼 여러가지 문제들을 하나씩 꺼내어 놓는다. 시험에서 낙제점을 받은 한국 학생은 낙제만은 면하게 해달라며 슬쩍 돈봉투를 남기고 가버리고, 아내는 오랫동안 이웃으로 살아왔던 '싸이'와의 관계 때문에 이혼을 요구하며, 동생은 도박 혐의로 경찰들이 주목하고 있고, 큰 문제없이 해결될 것만 같았던 종신재직권 심사에 악영향을 미칠 만한 악의적 편지들이 도착하는 등 너무 갑작스러게 많은 일들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정작 래리는 아무것도 '잘못 한 것'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점이다. 래리는 가만히 있었는데 마치 그를 둘러싼 주변은 모두 래리 때문에 이 모든 일이 벌어진냥 그를 둘러싸고 조여온다. 래리는 여기서 심각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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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리가 처한 이 갑작스럽게 닥쳐온 재앙은 하나같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아내는 '싸이'와의 관계 때문에 래리와 이혼하기를 바라지만 싸이를 사랑해서도, 싸이와의 관계가 깊어져서인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냥 위자료를 받아내려는 속셈으로 받아들이기에도 허술하고 부족한 부분이 많다. 아내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아내 스스로도 '내 말이 말은 안되지만 이혼은 해야돼'라고 느껴질 정도다. '싸이'는 또 어떤가. 그의 태도는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싸이는 마치 래리를 아버지처럼 감싸 안으면서 래리에게 왜 이혼을(서약서를) 해야하는지 차근차근 설명한다. 그런데 그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편안하게 느껴진다. 싸이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그의 말이 다 옳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그의 말만 놓고 보자면 이건 전혀 설득이 될리 없는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논리들이다.
낙제점을 면하게 해달라며 돈을 놓고 갔던 한국 학생 '클라이브'의 논리도 말이 되지 않는다. 돈을 두고 간 것을 놓고 래리와 클라이브가 벌이는 대화는 그야말로 블랙 코미디다. 그런데 더 나아가 클라이브의 아버지는 자신들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소송을 건다고 집으로 찾아온다. 이 아버지 역시 클라이브와 래리의 아내의 말처럼 스스로가 '내 말엔 논리가 없다'라는 것을 겉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래리가 항상 불편하게 생각하던 옆 집 남자는, 클라이브의 아버지가 자신을 협박하는 것이 아니냐며 도움의 한 마디를 건낸다. 래리는 이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맞다. 래리 뿐만 아니라 모든 관객이 이 상황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래리는 매사에 '진지한 (Serious)' 남자다. 자신에게 벌어지는 이 모든 일들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음을 인정한 래리는 랍비를 찾아가 도움을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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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보기로 했던 랍비가 자리를 비워서 대신 만나게 된 젊은 랍비는 래리의 말을 다 듣고는 역시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그럴 땐 그저 주차장을 보라' 라는 말은 얼핏 들으면 이 젊은(어린) 랍비의 능력 부족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따져보면 우문현답일 수도 있다. 이렇게 심각한 문제들을 직면했을 때 '그럴 땐 주차장을 보라'는 말은 쌩뚱맞은 말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영화가 말하려는 주제인 불확실성과 다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대할 땐 관조하는 것도 방법이라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것은 영화가 다 끝난 뒤에야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고, 래리는 여기서 자신이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하고 그 다음 다른 랍비를 찾아가게 된다.
두 번째 랍비는 이빨의 관한 이상한 이야기를 하나 들려준다. 이 이야기 역시 이상하기 짝이 없다. 무언가 거창하고 명쾌한 답을 내놓을 것만 같았던 이 '이빨' 이야기는 결국 허무하게 끝나고 만다. 무언가 답을 찾으려던 래리는 이 두 번째 랍비와의 만남에서도 이를 찾지 못하고 결국, 최고의 랍비인 마르샥과의 만남을 어렵사리 시도하게 된다. 그런데 이 결정적인 만남은 결국 이뤄지지도 않는다. 여기서 생각해볼 것은 '왜 래리는 랍비를 만나려고 했느냐'라는 점이다. 앞서 물리학자이지만 수학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불확실성의 이론을 엄청나게 긴 수학적 공식으로 증명하려고 하는 래리의 성향으로 미뤄봤을 때, 래리라 랍비를 찾게 된 이유는 역시 '정답'을 얻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겠다. 마르샥을 간절히 만나려고 했던 것은 본인 스스로 마르샥 개인을 원해서가 아니라, '마르샥 = 정답'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 같았으면 영화에서 특별히 자막까지 삽입해 가며 이 랍비와의 만남의 중요성을 이끌어 갔던 구성상, 마르샥이 모두가 공감할 만한 깨우침을 주고 (그것이 허허실실, 공수레공수거 일지라도) 래리가 이로 인해 삶이 변화를 얻는 것으로 진행할 수도 있었지만, 코엔 형제는 래리에게 마르샥과의 만남조차 허락하지 않고 있다. 고대했던 정답을 마르샥이 갖고 있다 없다를 떠나서, 현실은 이렇듯 생각대로, 단계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을 돌려 이야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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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마지막 래리의 현실은 어떤가. 아내의 이혼 요구로 인해 동생과 모텔에 나와 살았었지만 싸이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어쨋든 다시금 집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아들의 성인식으로 인해 아내와 다시금 화해하는 계기를 갖게 되었고, 동생의 일도 악몽을 꾼 것처럼 끔찍한 일은 당하지 않았고, 걱정하던 종신재직권 문제도 순조롭게 풀린 듯 하다. 하지만 어쩌면 더 커다란 불안요소 일지도 모르는 일의 그림자도 존재한다. 영화 초반 검사를 받았던 의사는 전화가 와서, 검사결과에 대해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한다. 뉘앙스로 봐서 아마도 삶과 죽음이 달린 심각한 정도일지도 모른다.
글에서는 미처 다 언급을 못했지만 래리의 아들의 이야기도 이와 비슷하다. 첫 시간에 마리화나를 산 돈 20달러와 함께 라디오를 빼았긴 아들 대니는, 영화 내내 이 돈을 값지 못해 쫓겨다녔지만 성인식 때 랍비 마르샥을 만나 조언을 듣고 라디오와 돈을 그대로 돌려받는다 (마르샥과 대니의 만남을 보면, 만약 래리가 마르샥을 만났더라면 적절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그래서 영화는 이 둘의 만남을 성사시키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드디어 돈을 돌려주려고 친구를 불렀을 때 그들의 앞에는 커다란 토네이도가 닥쳐온다. 여기서 토네이도가 이들 모두를 덮쳐 죽음이나 큰 사고에 이를 것인가 말 것인가는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영화가 계속 말하는 불확실성에 대한 것처럼, 저 토네이도가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불확실성 그 자체에 가깝다. 내내 불편했던 돈을 드디어 값을 수 있게 된 순간에 토네이도를 만나 모두 망쳐버릴 현실에 맞닥들이게 된 것은, 역시 '정답은 없다'라는 것과 '생각한대로 되지 만은 않는다' 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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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에 사용된 외국어처럼, 영화는 내내 이 언어에서 오는 불확실성을 통해 주제를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국인 학생 클라이브의 너무나 외국인스러운 딱딱한 발음과 억양은 그를 이해하기 어려운 불확실성이었으며, 아들 대니가 친구들과 사용하는 언어가 대부분 욕설로 이루어져 있는 것 역시 래리와 대니의 관계의 거리를 보여주는 장치이며, 래리가 아내와의 이혼을 위해 이혼증명서라는 뜻의 랍비 언어를 매번 사람들에게 설명해야 하는 것 역시 언어의 차이에서 오는 서로간의 불확실성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아들의 성화에 못 이겨 안테나를 바로 잡으러 올라간 지붕 위에서 옆집 부인의 나체를 보게 되는 것 역시 우연을 가장한 불확실성이다.
사실 영화는 보는 중간에는 키득 거리며 보는 시간이 더욱 길었지만 (마치 홍상수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를 볼 때와 비슷한 경우였다), 글로 정리하려 되돌아보니 영화 중간 중간 느껴졌던 삶의 대한 깊이가 더 와닿는 작품이었다. 영화 속 래리는 너무 진지한 사람이라 (영화가 말하는 진지함은 '잘못됨'이 아니라 오히려 지극히 '정상적임' 이다), 젊은 랍비의 말처럼 그저 관조하지 못했지만, 코엔 형제가 이 영화를 그리는 방식은 분명 관조다. 시리어스 맨인 래리를 주인공으로 두고 래리에게 '그냥 주차장을 한 번 봐!'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생각해도 '주차장을 봐'라는 대사는 이 영화의 명대사다 (웃음에서나 깊이에서나 말이다).
1. 프롤로그에 관한 개인적인 에피소드가 무엇인고 하니, 상영시간에 딱 맞춰서 상영관에 입장을 해서 정신없이 앉았는데,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포스터에서 느껴지는 시대와는 전혀다른 시대와 배경의 프롤로그가 등장한 겁니다. 그런데 이 혼란을 더욱 부추겼던 건 바로 옆 상영관에서 카트린느 브레야 감독의 <푸른 수염>이 상영중이었다는 것이죠. 옆에 앉은 분도 저에게 '시리어스맨 보러 오신거 맞죠?''라고 물어오시고, 저도 좀 더 잠자코 있어보자 하며 떨고 있었는데, 이것 참 코엔 형제에게 보기 좋게 당했습니다. 4:3화면비라 '그래 푸른 수염은 아닐꺼야'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순간 혼란스러웠다구요 ㅎ
2.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보았는데 특별히 디지털 상영이라는 말은 없었던 거 같은데, 이건 분명 필름의 화질 수준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화질이 무척이나 좋더군요.
3.
리뷰를 쓰는데 200% 도움을 주었던 사운드트랙 'Dem Milner's Trern'.
사운드트랙은 아무래도 아마존에 주문을 해야겠네요. (했습니다 -_-v)
4. 마이클 스털바그의 모습에서 은근히 톰 행크스의 모습이 연상되더군요. 아마 예전 같으면 <레이디 킬러>의 경우처럼 톰 행크스가 했을 수도 있겠죠.
5. 미드 '빅뱅이론'으로 익숙한 사이몬 헬버그의 등장에 혼자 빵 터졌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