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디오 지브리의 시대는 이대로 저무는가


일본 애니메이션, 아니 지브리의 팬으로서 어제 본 뉴스는 몹시 충격적이었다. 그 즉슨, 스튜디오 지브리가 더 이상 애니메이션 제작을 하지 않고 앞으로 기존 작품들의 저작권 관리만 하는 회사로 남게 된 다는 전망이었다. 이 소식을 듣는 순간, '아 올 것이 왔구나'라는 생각과 '이게 무슨 청천벽력!'이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는데, 전자는 요 근래 지브리의 성적이 연속적으로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고, 후자는 그래도 스튜디오 지브리라는 일본은 물론 애니메이션을 대표하는 하나의 스튜디오가 이렇게 제작을 접을 것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많은 애니메이션 팬들에게 스튜디오 지브리와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존재는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내게도 지브리와 하야오는 인생의 여러 고비에서 위안과 행복, 메시지를 전달해 준 작품을 선사한 곳이었다. 그런 지브리이기에 이번 소식을 그냥 두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이번 소식이 전해진 결정적인 요인은 지브리의 최신 작 '추억의 마니 (思い出のマーニー, 2014)'의 흥행 부진이었다.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감독이 연출한 이 신작은 역시 최근 개봉했던 지브리의 '가구야 공주' 보다 도 흥행이 부진할 것으로 예상되며, 이 위기는 점점 현실로 받아 들여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카하다 이사오의 '가구야 공주'는 올해 본 영화 가운데서도 손꼽힐 정도로 참 좋은 영화였다).



가구야공주 이야기 _ 모든 것을 새삼 돌아보게 만드는 설화



사실 성적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 보다 중요한 것은 작품의 완성도와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언제부턴가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은 우리가 지브리의 열광하던 그 때의 작품들에 비해서 많이 부족한 느낌을 주었다. 그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 아주 예전으로 돌아간다면 미야자키 하야오가 '모노노케 히메' 이후 처음 은퇴 선언을 했던 때부터 시작해야 하겠지만 (이제와 돌이켜 보면 여기서 부터 무언가 하야오의 계획이 틀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직접적으로 세간에서 지브리의 위기를 이야기했던 것, 미야자키 하야오의 후계자에 대한 의문과 걱정이 표면적으로 드러나게 된 것은 아마도 그의 아들 미야자키 고로가 연출했던 '게드전기 - 어스시의 전설' 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게드전기'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본인의 후계자로서 자신의 아들을 (본인도 썩 탐 탁 치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대중에게 선보인 작품이었다. 개봉 당시 국내의 반응도 선명하게 기억하는데, 이제부터 지브리의 작품은 보지 않겠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어쨋든 강도는 저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중론은 미야자키 고로는 아버지의 뒤를 이을 인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참고로 미야자키 고로는 '게드전기' 이후 2011년 '코쿠리코 언덕에서'를 연출하기도 했는데, 다른 평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바람이 분다'가 있기 전까지 거의 유일하게 좋지 않은 평을 했던 지브리 작품이기도 했다.


코쿠리코 언덕에서 _ 직설적이어서 부담스러운 메시지



  '게드전기'는 이제와 다시 보면 그 정도로 혹평을 받을 작품이었나 하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되기도 하지만, 어쨋든 지브리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충분한 소스를 가진 작품이었음에도 연출이나 전반적인 면에서 부족함을 많이 드러냈던 아쉬운 작품이었다. 이런 과정을 보면 결국 스튜디오 지브리 = 미야자키 하야오 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하야오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라고 보았을 때, 하야오가 적절한 시기에 자신의 후계자를 키워내지 못한 것이 지금의 위기와 현실을 맞게 된 이유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미야자키 하야오가 후계자에 대한 계획이 없었느냐?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생각한 자신의 후계자는 바로 '귀를 기울이면'을 연출한 콘도 요시후미 감독이었다.





아... 다시 생각해도 콘도 요시후미는 너무 안타까운 인재였다. '빨강머리 앤'의 캐릭터 디자인과 작화 감독을 맡기도 했던 콘도 요시후미는 '귀를 기울이면'으로 데뷔 했지만 아쉽게도 이 작품은 데뷔작이자 유작이 되어버렸다. 실제 스튜디오 지브리에는 적은 수이긴 하지만 몇 명의 후계자로 거론될 만한 이들이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앞서 있고 사실상 유일한 대안이라 할 수 있는 이는 콘도였다. 오래 전부터 지브리에서 차근 차근 과정을 밟아왔으며 성공적인 데뷔작을 내놓아 더는 문제가 없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후 은퇴를 번복하고 다시 금 현역으로 돌아오게 되고 2001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발표하며 전 세계적으로 다시 한 번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귀를 기울이면 _ 리얼리티로 살아나는 아련함



그 사이에 안노 히데아키, 오시이 마모루 그리고 호소다 마모루 까지, 지브리와 직간접적으로 얽혀 있는 감독들이 있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이런 저런 이유로 가능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지브리 출신인 콘도 요시후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지브리의 현재의 위기가 시작된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복귀 한 이후에도 미야자키 하야오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 (2004)', '벼랑 위의 포뇨 (2007)'를 선보이며 건재함을 증명하기도 했었는데, 그럴 때마다 그 다음, 자신의 다음 지브리를 책임질 이에 대한 걱정은 어쩌면 더 커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처음 부터 은퇴 작이라고 명명한 '바람이 분다 (2013)'를 내놓은 뒤로는 더 이상 작품 활동은 하지 않고 있던 터였다.



바람이 분다 _ 이기적 순수함의 안타까움



문제작 '바람이 분다' 이후 앞서 이야기했던 '가구야공주 이야기'와 신작 '추억의 마니'를 내놓은 지브리는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작품을 제작하지 않는 다는 소문 아닌 소문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결국 미야자키 하야오의 후계자를 찾지 못하고, 스튜디오 지브리는 일본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끼치던 자신들의 시대를 떠나 보내는 것일까. 아직 공식적인 것은 없지만, 이런 뉴스를 접하니 참 기분이 허하고 쓸쓸하여 남겨 본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본문에 사용된 모든 스틸컷/포스터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모든 이미지의 권리는 스튜디오 지브리 에 있습니다.





바람이 분다 (風立ちぬ, 2013)

이기적 순수함의 안타까움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 스튜디오의 오랜 팬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내가 한 손에 꼽을 만한 감독으로, 그의 작품들은 내 닉네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런 그의 신작이자 마지막 작품(아마도) '바람이 분다 (風立ちぬ, 2013)'를 기다리는 마음은 내내 편치 않았다. 잘 알려졌다시피 이 작품이 담고 있는 역사 의식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떤 말들이 쏟아져 나오든, 내 입장은 직접 보기 전에는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 어느 때보다 가슴 졸이며 보게 된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은, 아쉽지만 보는 내내 불편한 작품이었다. 혐오스러운 장면이나 잔인한 장면이 나와도 '영화니까' 불편함은 없었던 나였는데, 이 작품은 '영화기 때문에' 불편한 경우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간 성향이나 가치관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바람이 분다'를 보면서도 이 작품에 대한 논란에 대해 방어할 수 있는 논리를 본능적으로 찾게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더 아쉬움이 남는다. 결국 그 논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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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는 근본적으로 반전을 끊임없이 작품을 통해 말해왔으며,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는 등 그가 '바람이 분다'를 통해 군국주의를 옹호했다거나 일본의 침략 전쟁을 옳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들은 맞지 않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들은 그의 작품들을 제대로 보지 않았거나 그냥 이슈를 위한 제 3자들의 어쩔 수 없는 시선일 것이라는 건 이미 예상했었다. 따지고 보면 미야자키의 이전 작품들에서도 본인이 좋아하는 것과 가치관에 대한 모순과 갈등은 계속 존재했었다. 그는 일관적으로 반전을 외치며 '살아라'라는 메시지를 전달해 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날 것과 탈 것,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서 비행기이자 전투기였다. 이전 작품에서도 이러한 성향은 계속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이 작품과 가장 비교될 만한 작품은 그의 전작 '붉은 돼지'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붉은 돼지'는 하늘을 나는 것과 전투기에 대한 그의 애정이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 된 작품이자, 그 스스로도 모순이라고 생각하는 전쟁이라는 것에 대해 최대한 빗겨가려고 애 쓴 작품이기도 할 것이다.


'붉은 돼지'는 개인적으로도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서, 어른의 드라마, 낭만과 아름다움을 멋지게 표현해 낸 수작이었다. 그렇다면 '붉은 돼지'도 문제인가 라고 물을 수 있는데, 이 경우는 조금 다르다. 일단 아름다움에 집중한 것은 맞지만, 포르코는 전쟁 자체에 대해 회의를 갖고 이를 행동으로 표현한 인물이었고, '바람이 분다'의 지로는 회의 감은 갖고 있다고 봐야 겠지만 행동과는 거리가 있었던 이었기 때문이다. 이 별 것 아닌 차이점이 '바람이 분다'의 역사 의식을 말해주는데, 이것은 결국 미야자키 하야오가 갖고 있던 모순과 갈등이 적어도 일본인들을 제외한 (특히 아시아인들이) 이들이 기대하던 바로는 표현되지 않은 몹시 안타까운 경우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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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미야자키 하야오가 제로센을 설계한 지로의 이야기를 통해, 일본의 침략 전쟁을 정당화 하고 군국주의를 옹호하려 했다면 차라리 나았을 런지도 모르겠다. 그냥 최근 아베 정권처럼 역사를 잊은 민족에 터무니 없는 주장이라고 받아들이면 고민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의 경우는 '바람이 분다'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상당히 고민스럽다. 고민스럽다는 것이 이 영화가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고민스럽다는 것이 아니라, 영화 자체가 모순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이 동경해 오던 아름다운 비행기를 만든 설계자의 이야기를 언젠 가는 꼭 한 번 하고 싶었을 것이다. 앞서 여러 번의 은퇴 번복이 있기는 했지만, 평가를 떠나서 이 작품 만큼 그의 마지막 영화로 어울리는 주제도 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로의 이야기를 풀어내려고 보니 그가 설계한 제로센은 결국 전쟁에 동원되어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고, 그 것은 일본이 피해자로서가 아닌 가해자로서 범한 전쟁이었다. 그것을 미야자키 하야오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을 것이다. 바로 모르지 않기 때문에 영화는 의도적으로 전쟁에 관한 장면들을 피하는 한 편, 지로라는 캐릭터도 상당히 건조하고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작품 속에서 갈등을 드러내고 있는 요소는 몇 가지가 있는데, 전쟁 장면을 전혀 등장 시키지 않고 있는 점과 지로의 꿈을 지속적으로 교차하고 있는 것, 그 꿈에 등장하는 이가 아름다운 비행기를 설계하려 했던 카프로니 백작이라는 것, 독일인이지만 히틀러 정권에게 쫓기고 있는 융커스의 이야기가 바로 그 것이다. 사실 난 이 영화가 논란의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뤘다고 하더라도 '일본'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하야오가 전쟁을 피한 것처럼, 최대한 피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예상했었다. 하지만 정반대로 그는 지로의 꿈 장면에서 여러 번 언급되는 것처럼 '일본 소년'이라는 걸 특별히 강조하고 있고, 이후에도 관동대지진과 이후의 고통 받는 사람들의 삶을 장면과 대사로 표현하면서, '일본'이라는 실질적 존재를 유난히 도드라지게 언급하고 있다.


앞서 일본이라는 존재 역시 전쟁처럼 피해갈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은 그렇게 해서 모순이 되는 요소에 대해 최대한 언급하는 것을 자제했을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즉, 하야오가 일본이라는 현실을 전면에 내세우게 되면 반드시 이 모순에 대해 답을 해야 했기 때문에 이를 굳이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고, 이를 제외한 방식으로 자신이 추구하려는 순수한 아름다움에 대해 풀어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건 예상이라기 보다 그랬으면 하는 바램에 가까웠던 것 같은데, 결국 그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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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미야자키 하야오의 순수함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엄청난 계산과 의도를 가지고 이 영화를 일부러 만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날 것에 대한 동경은 그를 직접 만나보지 않아도 알 정도로 여러 작품들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표현되어 왔으며, 그의 전작들은 노인이 되어도 잃지 않은 순수한 동심이 있어서 가능한 순간들이 여럿 있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람이 분다'는 그럼에도 순수함으로 평가할 수 없는 순진함이 여실히 드러난 작품이었다. 순수한 것과 순진한 것은 하늘과 땅 차이인데, 특히 이번 경우처럼 민감한 주제를 다룰 때 순진한 것은 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순수함이 어떤 결과를 만들지를 반드시 예상했어야 했다. 아니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이 만든 이야기가 어떤 결과를, 특히 다수의 일본인들 외에 한국을 비롯한 전쟁 피해 국가의 관객들에게 어떤 반응으로 받아들여질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 고민의 결과는 작품에 분명 드러나 있다. 하지만 역지사지가 정말 그렇게 어려웠던 것일까? 간과라고 하기엔 그 무게가 심히 무겁고, 순수함의 발로라고 하기엔 너무 이기적인 처사였다.


하야오의 논리는 이랬던 것 같다. 지로는 제로센을 설계하기는 했지만 전쟁을 옹호하는 이는 아니며, 지로가 겪는 삶의 일화들을 통해 정의롭고 인정이 많은 면모를 부각하여 그가 결코 나쁜 의도를 가지고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지로 스스로도 고뇌가 없지 않았다는 것 역시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은근 슬쩍 독일(나치)과 일본의 차별점 역시 이야기한다. 만약 지로가 자신이 순수한 의도를 갖고 만든 비행기가 침략 전쟁에 사용되었다는 것을 몰랐다면 이 얘기는 수긍이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이게 아니면 처음에는 몰랐으나 후에 어떻게 쓰이게 되는 지 알게 된 후 행동으로 표현하는 이야기였다면 역시 수긍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것은 무관심이나 회피 정도가 아니라 공범에 가까운 행위이라는 점에서, 그냥 의도치 않던 결과로 그도 계속 고뇌하고 후회했다 라는 것 정도로는 면죄부를 얻기 힘들다. 더더군다나 지로는 자신이 만든 것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분명히 알고 있지 않았던가. 그의 동료에 말처럼 '우린 그냥 비행기만 만들면 돼'라는 건 결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논리가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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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그것이 아름다웠던 그렇지 않던, 순수함의 발로이던 그렇지 않던, 지로가 만든 비행기는 본인도 알고 역사도 알 듯, 일본의 침략 전쟁에 도구로 사용된 것이 사실이라면 지로라는 인물을 다룰 땐 특별히 조심, 아니 지금 시점에 이런 이야기가 가능한 것인지 더 면밀히 조사와 책임을 따져봤어야 했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이 지로의 이야기를 개인의 순수한 삶의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점일까? 독일 국민들과 비교하면 분명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독일은 패전 이후 분명한 전범처리와 국제 사회에 대한 사과가 있었고, 최근에야 비로소 독일인 가운데서도 나치에 반대했던 이들의 이야기라던가, 전범국이 되어버린 이후 태어날 때 부터 원죄를 갖게 된 세대들의 고민과 고통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씩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는 어떠한가. 전범에 대한 처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국제 사회에 명확한 사과보다는 자위대를 조금씩 다시 정당화 하려는 움직임이나, 대한민국의 침략에 대해 정당화 하려는 우익의 움직임이 정부차원에서 그 어느 때 보다 강하게 주장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미야자키 하야오의 순수함은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순진해도 이건 너무 순진한 거다. 본인 스스로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아베 정권에 대해 비판적이라면 '바람이 분다'의 이야기는 발표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라는게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것이 정말 순진한 생각이었던 것이다. 한쪽에서 아직도 가해자가 잘못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 통에, 잘못한 건 맞는데 사실 그 안에도 이렇게 순수한 꿈을 쫓는 이의 이야기도 있었는데 오해 없이 봐주었으면 좋겠다 라는게 가능하다고 생각한 그 생각이.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이 작품이 어떤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를 더 배려있게 생각했어야 하는게 도리였다. 그가 진정 반전주의자라면 이건 옵션이 아니라 필수여야 했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순수한 마음을 객관적으로 봐주지 않을까 생각하고 밀어 붙였던 것 같다. 아무리 좋은 쪽으로 평가한다고 해도 시기상조 였다는 것 밖에는 말할 수 없겠다. 그래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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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바람이 분다'에 짙게 깔린 역사 의식만 걷어낸다면, 난 이 작품을 그의 작품 중 한 손에 꼽았을 것이다. 영화적으로도 아쉬웠다는 많은 이들에 평가와는 다르게, 난 불편한 가운데도 지로의 이야기가 객관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마다, 이 작품에 깊게 빠져들기도 했다. 어쩌면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거장의 필모그래피를 마무리 하는 작품으로서 최고의 선택이 되었을 수도 있었기에 그 안타까움은 더했고,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이 작품은 내게는 오점으로 남게 되었다.


사실 마지막까지 그가 기자회견에서 '직접 보면 알 것이다'라는 말 때문에 일말의 믿음을 끝까지 갖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위와 같았다. 아.. 내가 지브리 작품, 그것도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 이런 부정적인 글을 쓰게 되다니... 글의 부제를 '안타까움' 정도로 순화한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호의라는게, 이 작품에 대한 내 감상을 단정적으로 말해준다.



1. 오늘따라 '붉은 돼지'가 보고 싶네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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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쿠리코 언덕에서 (コクリコ坂から, 2011)

직설적이어서 부담스러운 메시지



지브리 스튜디오의 2011년 신작 '코쿠리코 언덕에서'를 보았다. 잘 알려졌다시피 이 작품은 전작 '게드전기 (ゲド戦記, 2006)'를 연출했던 미야자키 고로가 연출한 작품으로서 기대보다는 걱정이 더 많았던 작품이기도 했다. 참고로 개인적으로는 '게드전기'가 물론 아쉽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브리라는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 경우인 정도라고 관대한 평가를 하기도 했었는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그보다도 더 아쉬운 작품이었다. 여러 평가들이 '게드전기'보다는 나아간 작품이라는 평이 더 많은 듯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메시지가 너무 직접적인 동시에 주제를 둘러싼 이야기의 연관성이 깊지 못하고 더불어 21세기에 즐기기에는 너무 올드 풍의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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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배경은 1960년대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준비하는 일본 사회,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아직 상처가 다 아물지 않은 베이비붐 세대의 시작을 그려낸다. 그리고 이 가운데 이 시대적 배경에 영향을 받고 자란 소년 '슌'과 소녀 '우미'가 있다. 이 둘의 러브 스토리는 나이답게 풋풋함이 서려있지만, 그 배경을 둘러싼 시대와 영화의 메시지가 이들에게 너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뭐랄까, 슌과 우미는 순수한 소년 소녀이지만 시대가 만든 아픔으로 인해 일찍 성숙함을 배워야 했던 것은 물론, 이 가운데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마저 짊어져야 하는 부담스러운 짐을 진 듯 한 모습이었다. 이 영화의 메시지를 얘기해보자면 결국 오래된 것들을 지키고 계승하자는 것과 더 나아가 60년대를 살았던 일본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며 21세기를 살고 있는 일본인들에게 당시의 젊은이들에게서 배우자 라는 이야기가 될 텐데, 이 모든 짐을 풋풋한 러브스토리만 이끌기에도 벅찬 소년 소녀에게 전부 맡겨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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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 미야자키 하야오가 어느 정도까지 관여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스텝롤에 나온 역할 만으로는 알 수 없다는 얘기), '코쿠리코 언덕에서'의 메시지 전달 방식은 기존 미야자키 하야오가 보여주었던 방식과는 많은 차이가 느껴졌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아주 보편적인 메시지를 전달함에 있어서 표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배경 묘사를 통해 영화를 깊이있게 볼 수록 메시지가 드러나도록 구성하거나, 아니면 매우 직접적인 은유를 통해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시대와 배경, 판타지와 현실과는 무관하게 효과적으로 전달해 왔었는데, 이번 작품의 메시지 전달 방식에서는 이러한 영민함 보다는 홍보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너무 직선적인 느낌을 받았다. 특히 극 중 고등학교 동아리 건물 철거를 둘러싼 학교의 이야기는, 슌과 우미의 러브스토리 측면으로만 보자면 없다하더라도 이어갈 수 있을 정도의 약한 연관성을 갖고 있는데, 영화는 이 학교를 둘러싼 이야기에 많은 비중을 두며 메시지 전달의 활로로 이용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바로 이 점이 이 영화를 더욱 풋풋하고 은은한 지브리다운 러브스토리로 만들 수 있었음에도 그렇지 못했던 가장 아쉬운 점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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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코쿠리코 언덕에서'가 극 중 등장하는 깃발의 의미처럼, 숨겨둔 신호로서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은은한 방식이었다면, 그것이 아니라면 소년 소녀의 러브스토리 보다는 시대의 아픔을 짊어져야만 했던 그 세대의 이야기와 그들에게서 배우고자 하는 메시지에 더 확실히 집중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물론 이 영화를 선택했을 때에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어쩔 수 없이 '귀를 기울이면'을 연상하며 전자의 기대를 했었기에 너무도 직접적인 이 영화의 방식에 조금은 불편한 감이 없지 않았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일본인들이 보기에는 60년대 일본을 추억할 수 있는 장치들이 많아 이런 불편함이 조금은 상쇄되지 않았을까 싶다. 


결론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했고, 어떤 감성을 담으려고 했는지 의도는 알겠으나 그 것이 가슴으로 전달되지는 않았던 아쉬움이 남는 지브리의 첫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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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솔직히 저도 좀 당황스럽긴 하네요. 이른바 '지브리빠'인데, '게드전기'도 재미있게 본 저인데, 이 작품은 극장을 나오며 아무런 뭉클함이 느껴지지 않았거든요.

2. 물론 조각조각 좋은 장면들은 여럿 있었어요. 또 급하게 공감해서 울컥한 장면도 없지 않았구요. 하지만 이것들이 하나로 잘 모아지지 않았다는게 결국 이 작품을 아쉬운 작품으로 결론짓게 한 이유인 것 같네요;

3. 극 중 수록된 음악들의 분위기는 참 묘합니다. 60년대 일본과 잘 어울리는 동시에 미국의 예전 흑백영화를 보는 듯한 분위기도 자아내거든요 (어쩌면 둘이 같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서도).

4. 지브리 스튜디오 작품 가운데 처음으로 DVD나 BD를 구매하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ㅠ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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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나는 그 장면 #4 
하울의 움직이는 성 (ハウルの動く城)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모노노케 히메' 등 미야자키 하야오의 예전 작품을 좋아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대부분 외면을 당했지만, 나에게는 앞선 작품들 만큼이나 아련한 (혹은 더 감정적인) 작품이 바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작품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 가운데서도 가장 소녀적인 감성이 잘 드러난 작품이며, 애틋함의 정서가 굉장히 직접적으로 드러난 따듯한 작품이었다. 특히 이 작품은 히사이시 조의 음악이 (그리고 리듬이) 완벽하다 못해 그 자체로 하나가 되어버린 정말 마법같은 작품이었다. '인생의 회전목마'에서 들려준 왈츠는 아직까지도 '하울의 움직이는 성'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되었으며, 바로 오늘 '눈물나는 그 장면'에서 소개하려는 이 장면에서도 히사이시 조의 음악의 힘은 참으로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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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말미. 소피가 하울의 어린시절로 돌아가 켈시퍼와 하울이 계약을 맺게 되는 순간을 만나게 되는 이 장면. 이 장면 소피가 문으로 들어가며 배경이 온통 검게 변하고, 저 멀리서 뿌옇게 하울의 아지트가 밝아올 때 흐르는, 그 음악에서부터 감정이 치닫기 시작하는데 하울에 대한 소피의 간절함이, 그 간절함이 미야자키의 연출로 승화된 아름답고도 슬픈 장면이 아닐 수 없겠다. 이 코너 '눈물나는 그 장면'의 영화들이 대부분 그러하지만, 다들 울고 감동받는 장면 외에 개인적으로 특히 더 슬프거나 유별나게 슬픈 장면들이 많은 편인데,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바로 이 장면도 개인적으로 특히 기억에 남고 감정적으로 북받쳤던 장면이었다. 그냥 소피에게 흠뻑 동화되어서인지 아니면 또 다른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유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이 장면은 언제봐도, 그리고 언제 들어도 참 눈물나는 장면이 아닐 수 없겠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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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 밑 아리에티 (借りぐらしのアリエッティ, 2010)
지브리의 메시지는 계속된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신작 '마루 밑 아리에티'가 드디어 개봉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각본 및 기획을 하고 신예 감독 요네바야시 히로마사가 연출을 맡은 (신예라고는 하지만 단독으로 연출을 맡은 장편이 없었을 뿐, 지브리에서 15년 간을 애니메이터로 활약해온 준비된 감독이다) '마루 밑 아리에티'는 미야자키의 아들이 연출을 맡았지만 실망스러운 평가를 받았던 '게드 전기'와는 달리 공개 시점부터 좋은 반응과 기대를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에게도 좋은 반응을) 모았던 작품으로, 자칭 지브리의 광팬인 나에게도 아니 기대할 수 없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요네바야시 히로마사가 연출을 맡기는 했지만 원작이 존재하고 미야자키 하야오가 각본을 맡은 만큼 완전히 요네바야시 만의 작품으로 보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마루 밑 아리에티'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연속성을 이어갈 만한 괜찮은 작품이기는 하나, 오랫동안 지속되는 문제인 '과연 미야자키 하야오의 후계자는 누가 될 것인가?'라는 문제의 답으로 보기는 조금 어려운 작품으로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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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인형의 집을 바라보는 다양한 인간들의 시선에 주목한다)

'마루 밑 아리에티'는 전작인 '벼랑 위의 포뇨'에 비하면 상당히 더 어른스러워진 느낌이다. 여기서 '어른스러워졌다'라는 표현은 내적인 부분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전개나 분위기가 그렇다는 이야기인데, '벼랑위의 포뇨'가 내적으로는 죽음을 관통하는 무거운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겉으로는 아이들도 유쾌하게 즐길 수 있는 이야기였던 것이 비해, '마루 밑 아리에티'는 지브리의 오랜 메시지인 환경과 '살아라'라는 화두는 그대로지만, 겉으로만 보았을 때는 '포뇨'에 비해 아이들이 즐길 만한 요소는 확실히 부족한 느낌이다. 소인이라는 종족의 등장한 평소 우리가 접하는 모든 것들이 거대해졌을 때 느끼게 되는 쾌감은 전달해주지만, '마루 밑 아리에티'는 이 세계를 아름답고 신비하게 포장하는데에 생각보다는 크게 주목하지 않고 있다. 생각보다 이런 설정들이 활용될 만한 에피소드를 자제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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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좀 더 메시지를 지우거나 유쾌함으로 전달하려고 했다면, 소인 종족과 인간들의 만남에 있어서 화합의 에피소드를 강조했을텐데, 이 영화가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은 오히려 공포에 가깝다. 실제로 이 영화를 보는 어린이들은 아마도 처음으로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누군가에게는 아주 공포스러운 존재가 될 수도 있구나 라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영화 속에서 나름 악당으로 등장하는 아줌마가 그려지는 방식이야 그렇다쳐도, 주인공인 '쇼우'의 첫 등장 장면은 그야말로 공포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아주 쇼킹한 방식으로 그려지는데 (실제로 이 장면에서는 객석 여기저기서 '무서워'라는 말이 터져나오더군요),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지브리가 인간을 그릴 때 자주 묘사했던 방식처럼 인간이라는 존재의 공포 (특히 다른 종족이나 사물, 세계 등과 비교했을 때는 더욱)를 '마루 밑 아리에티'에서도 여전히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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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후부터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들께서는 맨마지막 단락으로 이동해주세요~)


'마루 밑 아리에티'에 담긴 정서는 확실히 쓸쓸하다. 한창 때의 디즈니 영화처럼 '그리고 오랫동안 행복했습니다~'라는 식의 이야기는 여기서 찾아볼 수 없다. 보통 같으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소인세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주인공에 의해 인간과 소인이 모두 행복하게 '함께' 살아가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겠지만, 이 작품은 이것보다는 훨씬 현실적이고 세기말적인 느낌을 전달한다. 특히 가장 눈여겨 볼 점은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소인인 '아리에티'와 교감을 맺고 있는 주인공 '쇼우'가 죽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좀 더 드라마틱한 만화적 전개라면 소인들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쇼우의 심장병을 치유라도 해주겠지만, 보시다시피 영화 속 소인들에겐 아무런 능력도 없다. 그들은 단지 인간에 비해 몸의 크기가 매우 작을 뿐이다. 그리고 영화는 말미에 가서도 쇼우에게 확실한 건강을 허락하지 않는다. 쇼우는 그저 힘내겠다 라는 말을 남길 뿐이다. 오히려 이 마지막은 죽음을 인정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한다. 

유일하게 자신과 다른 세계를 인정하고 공존하려했던 인물이 죽어간다는 것은, 이 영화가 주는 쓸쓸하고 씁쓸한 느낌의 핵심인 부분이다. 아, 그리고 아까 이야기했던 인간의 공포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쇼우의 첫 등장장면 만큼이나 쇼우와 아리에티의 대화 장면에서 그 공포와 잔인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는데, 아리에티에게 너희와 같은 소인 종족이 멸종해 가는 종족이라는 점을 아주 잔인할 정도로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모습은, 속으로 '와, 아이들도 보는 영화인데 너무 무서운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대놓고 '너흰 죽어가고 있어'라고 이야기하는 터라 정말 놀랍기까지 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쇼우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아리에티의 가족이 결국 화해나 공존을 포기하고 이사를 선택한다는 것은 희망적이라기 보다는 세기말적인 쓸쓸함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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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런 와중에도 지브리가 포기하지 않고 있는 또 다른 교훈인 '살아라'의 대한 것과 다른 세계를 그 자체로 인정하는 것이 진정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메시지 역시 여전하다. 쇼우의 행동에서 이러한 메시지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쇼우는 직간접적으로 아리에티를 도우려고 하지만, 마지막의 순간에는 아리에티가 직접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 선에서 자신의 역할을 마무리 한다. 아리에티의 엄마가 아줌마에 의해 잡혔을 때도 직접 아줌마를 따돌리고 엄마를 구해서 아리에티 앞에 턱 하고 놓을 수도 있었고, 더나아가 악당인 아줌마를 할머니에게 고자질해 아줌마를 집에서 떠나게 하고, 아리에티 가족과 함께 잘 살 수도 있었고, 그것이 아니라면 이사를 위해 험난한 여정을 가야만 할 아리에티의 가족을 새로운 보금자리로 더욱 안전하게 도울 수도 있었으나, 쇼우는 그냥 길을 터주고 미련 없이 보내는 것을 택한다.

지브리가 택한 방식은 매번 이런 방식이었다. 어려움에 처했거나 약자를 돕는 방식에 있어서 직접적으로 주인공이 나서서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것보다는, 약자가 스스로 이겨나갈 수 있도록 힘을 보태는 것 말이다. 물론 쇼우도 맘은 그렇지 않았지만 첨부터 이런 지혜를 완전히 깨우친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직접 해결해주기를 원해서 각설탕을 그대로 전달해 주기도 했으나, 처음 쇼우가 준 각설탕과 마지막에 준 각설탕의 의미는 확실히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첨에 준 각설탕은 말그대로 '너희가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내가 줄께'라는 식의 것이었지만 (그래서 아리에티는 쉽게 받을 수 없던 것이었지만), 마지막에 준 각설탕은 아리에티와 이런 모험과 교감을 겪고 나서 진심으로 전하는 '선물'의 의미, 즉 '그 땐 내가 경솔했어, 하지만 이제는 내 진심을 받아줄 수 있지?'라는 마음과 함께 전달되는, 그래서 아리에티도 더이상 '빌려가지' 않고 오전히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도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내내 '빌려가는'것으로만 살아왔던 이 두 종족의 관계가 더 이상 빌려가고, 도둑질 해가는 것이 아닌 선물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관계가 된다는 것 말이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 이런 교감을 나눈 쇼우는 죽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마루 밑 아리에티'는 희망과 절망을 모두 담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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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히사이시 조 없는 지브리의 사운드트랙은 기존의 작품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원작이 영국의 동화작가 '메리 노튼'의 판타지 소설인 것과 더불어 사운드트랙을 맡은 프랑스 출신의 여성 아티스트 '세실 코벨'의 음악은, 기존 지브리의 작품들 보다 훨씬 더 유럽풍의 인상을 준다('하울의 움직이는 성'보다도, 유럽을 배경으로 했던 '붉은 돼지'보다도 더하다). '썸머워즈'에서 목소리 연기를 맡았던 카미키 류노스케 군은 주인공 '쇼우'를 연기하고 있으며, '도쿄 타워'와 '걸어도 걸어도'에서 좋은 연기를 펼쳤던 키키 키린은 나름 악당인 '하루' 아줌마 역할을 맡아 열연하고 있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본문에 사용된 모든 스틸컷/포스터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모든 이미지의 권리는 스튜디오 지브리 에 있습니다.





히사이시 조 - 지브리 애니메이션과 함께한 25년간
블루레이 리뷰

영화나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공연들이 한 두가지씩은 있을 것이다. 좋아하는 뮤지션의 공연을 라이브로 직접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은 물론, 영화나 애니메이션의 팬이라면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나 애니의 사운드트랙 공연 실황을 보고 싶다는 바램을 갖게 되기 마련이다. 개인적으로는 영화 만큼이나 애니메이션을 사랑하는터라 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에 수록된 곡들을 직접 라이브로 만나볼 수 있다면 얼마나 황홀할까 하는 생각을 한 두번 해본 것이 아니었다. 그중 가장 보고 싶은 두 가지 공연을 꼽으라면 첫 번째로는 <카우보이 비밥> <신세기 에반게리온> <천공의 에스카플로네>등 수많은 애니메이션의 음악을 만들었던 칸노 요코의 공연을 들 수 있을텐데, 정말 다행스럽게도 몇 해전 국내에서 가졌던 내한 공연에 참석할 수 있었고,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황홀한 경험을 만끽할 수 있었다. 이날 공연으로 느낄 수 있었던 건 확실히 그냥 일반 뮤지션의 콘서트와 애니메이션 사운드 트랙 공연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가수의 노래를 직접 듣는 것과 애니메이션의 수록곡을 직접 듣는 경험은 같은 종류로 비교되기 어려울 정도로 분명 '다른' 체험이었는데, 뭐랄까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이었다.


ⓒ2009 NHK Video. All Rights Reserved


칸노 요코의 공연 보다 조금 더 보고 싶었던 공연이 있었다면 바로 스튜디오 지브리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에서 항상 만나볼 수 있었던 영화음악가 히사이시 조의 공연을 꼽을 수 있겠다. 헐리웃에 스티븐 스필버그와 존 윌리엄스 콤비가 있다면, 일본에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히사이시 조 콤비를 바로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에 히사이시 조의 음악이 없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다. 물론 히사이시 조는 지브리의 작품들 외에 여러 극영화들과 개인 음반 등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했었지만, 가장 빛을 발하고 가장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왔던 것은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런 히사이시 조가 미야자키 하야오와 함께한 25년의 세월을 정리하며 기념 공연을 가졌다는 소식은 팬으로서 당장 일본으로 날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의 반가운 소식이었으며, 지난해 NHK를 통해 방영했던 공연을 스트리밍 영상으로나마 접한 뒤 하루 빨리 블루레이나 DVD로 출시를 고대했었는데, 드디어 올해 일본 내에서 반갑게도 블루레이 포맷으로 발매가 되어 이 미칠듯한 고환율을 온몸으로 맞아가며 타이틀을 구매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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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 4일과 5일 양일간 무도관에서 열렸던 '히사이시 조 in 무도관 _ 지브리 아니메와 함께 걸어온 25년간' 공연 실황은 지난 해 개봉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 <벼랑위의 포뇨> 개봉에 촛점이 조금 더 맞춰져 있기는 하지만 '함께 걸어온 25년간'이라는 제목처럼 그 간의 작품들 속에 담긴 주옥같은 곡들을 모두 만나볼 수 있는 공연이었다. 200인조로 이뤄진 뉴 저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800명에 달하는 합창단으로 이뤄진 이번 공연에서 히사이시 조는 기존 곡들을 조금씩 편곡하여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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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공연에는 미아쟈카 하야오가 감독한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의 모든 음악을 만나볼 수 있는데, 그 서막을 장식하는 것은 1984년작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風の谷の ナウシカ)>이다. 오프닝 테마 속 히사이시 조의 피아노 솔로를 듣는 순간 관객은 순식간에 애니메이션 세계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대규모 코러스가 함께하는 레퀴엠이 이어진 뒤 공연장 가운데를 가득 채운 스크린에서 나우시카의 한 장면이 나옴과 동시에 'The Battle Between Mehve And Corvette'이 이어진다. 이 공연의 가장 큰 매력이라면 역시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과 더불어 삽입곡을 라이브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그 특유의 아이들 코러스가 매력적인 레퀴엠이 이어지며, 나우시카의 엔딩곡 'The Bird Man : Ending'으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섹션은 마무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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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만나게 되는 작품은 바로 내가 10년 가까이 쓰고 있는 닉네임인 '아쉬타카'의 어원이 된 '아시타카'가 등장하는 1997년작 <모노노케 히메 (もののけ)>이다. 'The Legend Of Ashitaka'의 웅장한 사운드를 듣는 순간 숨이 멎을 듯 했다. 그 다음은 <모노노케 히메>속 장면들과 함께 합창단과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사운드가 이어지고, 마지막으로는 메인 테마곡 '모노노케 히메'가 하야시 마사코에 의해 불려진다. 하야시 마사코는 <벼랑 위의 포뇨>의 주제곡에도 참여하였는데, 개인적으로는 역시 본래 이 곡을 불렀던 요시카즈 메라가 불렀다면 더 감동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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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섹션은 1989년작 <마녀 배달부 키키 (
魔女の宅急便)>가 이어진다. 이번 공연에서는 좀 더 애잔하고 감성적인 느낌의 편곡으로 이뤄져있는데, 특히 두 번째로 만나볼 수 있는 '마음 아픈 키키' 같은 곡은 '키키가 이렇게 슬펐었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공연에서 만나볼 수 있는 다른 작품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마녀 배달부 키키>의 경우 스크린 속 영상과 음악이 더 멋지게 조화를 이루어 감동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바이올린 솔로 역시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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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배달부 키키>의 섹션이 끝나면 이 공연의 주요 테마라고 할 수 있는 <벼랑 위의 포뇨 (
崖の上のポニョ)> 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 때 쯤 되서야 히사이시 조가 처음으로 마이크를 들고 무대 앞에서서 자신과 오케스트라, 합창단을 관객에게 소개한다. <벼랑 위의 포뇨>에는 무려 8곡이 포진되어 있는데 중간 중간 보컬 곡이 포함된 관계로 크게 지루하지 않은 편이다. 첫 번째 보컬 곡은 앞서 '모노노케 히메'의 메인테마 곡을 불렀던 하야시 마사코의 '바다의 엄마 / 海のおかあさん'이다.  '파 도 타는 물고기 포뇨 / 波の魚のポニョ'에서는 브라스의 활약이 돋보이며, 두 번째 보컬 곡은 후지오카후지마키가 등장해 '후지모토 / フジモト'의 테마곡을 들려준다. 세 번째 보컬 곡은 '폭풍 속의 해바라기 집 / 嵐のひまわりの家 '인데 이 곡을 부른 '마이'는 다름 아닌 히사이시 조의 친 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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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역시 대미를 장식하는 곡은 '포뇨'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포뇨 포뇨 포뇨~'하는 메인테마곡이다. 후지오카후지마키와 어린 소녀 오오하시 오조미가 부르는 이 곡은 한 번 들은 사람들은 입에서 땔 수 없을 정도로 중독성 있는 곡으로 라이브를 많이 본 이들이라면 율동마저 외우게 되는 곡이다(길을 가다 이 곡이 나오면 나도 모르게 율동이 나와 당황스러웠던 적도 -_-;;). 참고로 오오하시 오조미와 함께 이 곡을 부른 후지오카후지마키를 그냥 '아저씨들'로 알고 있는 이들이 상당히 많은데 이들은 이전 70년대에 방송금지곡을 연달아 발표하며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밴드 '마리챤즈'의 멤버인데, 이들이 이렇게 어린 꼬마와 '포뇨 포뇨~'하는 곡을 부르는 모습도 이색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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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이어지는 작품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또 하나의 대표작인 1986년작 <천공의 성 라퓨타 (天空の城ラピュタ)>이다. 고적대가 객석 뒤에서부터 등장해 공연장을 가득 채우는 연출이 인상적이며, 라퓨타의 메인 테마라 할 수 있는 '合唱 君をのせて (합창, 너를 태우고)'도 인상적이다. 마지막 곡은 오케스트라가 모두 퇴장한 가운데 고적대의 반주로만 이뤄진다. 합창이 이뤄질 때 무도관을 가득 채운 관객들이 숨죽이듯 감상하는 자세도 또 다른 볼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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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미야자키 작품들 중 하나인 1992년작 <붉은 돼지 (
紅の 豚)>이다. 특히 여기서 히사이시 조가 피아노 솔로로 연주하는 마르코와 지나의 테마곡은 지브리 사운드트랙을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이번 공연에서는 히사이시 조의 피아노와 더불어 섹소폰 및 브라스의 연주로 들려주고 있는데, 작품이 그러한 것처럼 성인 취향의 분위기가 물씬 나는 편곡이었다. 이번 공연에 <붉은 돼지> 관련 곡은 마지막 앵콜 곡을 포함하여 딱 두 곡 뿐인데, 마지막 엔딩 테마인 '때로는 옛 이야기를'을 들을 수 없어 살짝 아쉽기도 했다. <붉은 돼지> 섹션이 끝나고 나서는 스크린에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인터뷰가 나오는데, 자신과 예전부터 작품을 함께 해온 히사이시 조의 대한 감사와 추억을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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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작품은 2004년작 <하울의 움직이는 성
ハウルの動く城)>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Merry- go-round'는 역시 지브리 사운드 트랙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테마이기도 한데, 오케스트라를 통해 만나니 더욱 웅장하고 후반부에는 박진감마저 느껴진다. 특히 왈츠 리듬의 '따라라라~ 따라라라~따라라라~라 라라라라라~'로 이어지는 후렴구는 언제들어도 행복해진다. 하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 중 하나는 극 중에서 하울이 처음 켈시퍼를 만나게 되는 그 장면, 소피가 그 광경을 목격하던 순간에 흐르던 곡인데, 이번 공연에서도 바로 그 장면과 함께 만나볼 수가 있었다. 'Merry- go-round'는 피아노 솔로가 메인이 되어 다시 한번 들려주는데, 이 곡의 왈츠 리듬을 듣고 있노라면 정말 몸을 가만히 있기 힘들 정도다. 극중 하울 목소리 연기를 맡았던 기무라 타쿠야의 목소리도 절로 떠오르고 그 공중을 걷던 장면도 생생히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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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작품은 2001년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
千と千尋の神隱し)>인데, 처음 만나게 되는 곡은 본래는 경음악 곡인 '어 느 여름날(あの夏へ)'인데 이번 공연에서는 히라하라 아야카의 보컬 곡인 '생명의 이름(いのちの名前)'으로 편곡되어 불려진다. 두 번째 곡 '또 다시 ( ふたたび )' 역시 본래는 경음악이었으나 히라하라 아야카의 보컬 곡으로 편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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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만나볼 작품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대표작인 1988년작 <이웃집 토토로
(となりの トトロ)>이다. 하프 연주가 인상적인 '風 のとおり道 (바람이 지나는 길)'이 흐르면 어느 덧 무도관은 일본 시골의 어느 마을로 변해버린다. 다양한 코러스 파트의 합창이 돋보이는 'さんぽ (산책)'의 후렴구에는 지금까지 출연했던 출연진이 모두 무대 위에 등장해 합창으로 마무리한다. 이 곡이 끝나고 나면 대형 스크린을 통해 미야자키 하야오와 픽사 스튜디오의 존 라세터가 함께 토토로의 노래를 따라부르는 영상이 잠시 나온 뒤, '토토로! 토토로' 하는 <이웃집 토토로>의 메인 테마곡이 연주된다. 토토로가 끝나고 나면 무대 뒤에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직접 꽃을 들고 나타나 히사이시 조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데, 이 장면은 정말 뭉클해 지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25년간을 함께 해온 이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장면이었는데, 두 사람 모두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보니 팬으로서도 뭉클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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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앵콜 곡으로는 히사이시 조의 피아노 선율이 인상적인 <붉은 돼지>의 삽입곡 'Madness'와 <모노노케 히메>의 마지막 장면에 흐르던 'ashitaka and san'이 연주된다. 대단원의 콘서트를 마무리 하는 곡으로는 사실 조금 의외의 선곡이었는데(그래서 더 좋았지만), 차분하게 정리하며 마무리할 수 있어서 더 뜻 깊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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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가영상으로는 메이킹 필름이 담겨있는데 2008년 8월 2일과 3일 가졌던 전체 리허설 장면을 만나볼 수 있다. 히사이시 조의 인터뷰도 만나볼 수 있으며, 공연에 참여하고 있는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의 소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공연 당일 이뤄진 출연진들의 인터뷰도 수록되어 있다. 이 역시 모두 HD영상으로 제공된다. 그 밖에 공연 중에 대형 스크린을 통해 볼 수 있었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의 영상을 따로 감상할 수 있는데, 흥미로운건 이 작품들이 아직 블루레이로 출시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HD영상으로 만나볼 수 있는 거의 최초의 기회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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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아마도 스튜디오 지브리의 팬이라면 이번 히사이시 조의 공연은 그야말로 '꿈'같은 공연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함께 해온 지브리 작품들과 그리고 히사이시 조의 음악들과의 추억들을 되새겨 볼 수 있었던 아주 소중한 시간이었으며, 무엇보다 다시금 책장에 꽃혀있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DVD들을 꺼내보게 했던 매력적인 타이틀이었다. 아마도 이번 공연 실황 타이틀은 지브리 타이틀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무 때나 불쑥 꺼내어 봐도 언제든 행복해질 타이틀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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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본문에 사용된 모든 블루레이 캡쳐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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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였나, 일본 TV를 통해 방송되었던 히사이시 조와 그가 만든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의 수록곡들로 이뤄진 음악회 실황 클립을 본 적이 있었는데, 스튜디오 지브리의 골수팬인 나로서는 이 음악회의 감동은 실로 이루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이후 이 음악회가 일본내에서 블루레이로 출시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미칠듯한 환율에 꾹꾹 참고 있던 중 발매와 동시에 '저도 받았어요~'하는 글들을 보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차, 친한 형님께서 미개봉 타이틀을 파신다는 글에 재빨리 연락을 취해 좀 더 저렴한 가격에 득템할 수 있었다!

나중에 차근차근 리뷰를 해보게 되겠지만, 이 영상물은 일본에서 발매된 제품이라고 하더라도 음악회라는 특수성 때문에 자막 없이도 본 공연을 즐기기에 크게 부족함이 없으며, 부족함이 있다 하더라도 충분히 극복하고도 남을 만한 공연을 들려주는 것이 사실이다.

히사이시 조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작품과 함께 해온 25년을 정리하는 공연으로서, 일본의 대표적인 공연장인 무도관에서 진행이 되었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나중에...




근래 질렀던 블루레이들. 엇그제 밤에 자미로콰이 보다가 졸았음 -_-;;
나머지 작품들도 당췌 만만치 않은 작품들이라 얼른 큰 맘먹고 감상하고 리뷰도 써봐야 할듯.




사진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벼랑 위의 포뇨 (崖の上のポニョ, 2008)
다섯 살 아이의 순수함, 그 세계

스튜디오 지브리. 제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화(애니메이션) 제작사이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작품들을 만들어낸
스튜디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미야자키 하야오로 대표되는 애니메이션 제작 스튜디오이지요(이 창대한 시작 문구로
알 수 있듯이 저는 지브리와 미야자키 월드에 흠뻑 빠져있는 팬이며, 객관적인 평가가 되지 못할 수 있음을 미리 경고해
둡니다. 하긴 평이라는 것이 어차피 주관적이지만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후 다시금 직접 몸소 나서신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인 <벼랑 위의 포뇨>는 기획 단계서부터
큰 기대를 갖게 했던 작품이었습니다. 미야자키의 아들이 연출을 맡았던 <게드 전기>가 전체적으로 아쉬움이 많았던
작품이었기 때문에 더 기대를 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네요(제가 쓴 <게드 전기>리뷰를 보면 아실 수 있지만,
엄청난 혹평들에 비해 저는 그럭저럭 최악은 아니었다고 봤었구요).

<갓파쿠와 여름방학을>의 경우가 그랬듯이, 사실 <벼랑 위의 포뇨>는 포스터만 보고는 별로 끌리지는 않았던 작품이었습니다.
뭐랄까, 제가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 얼굴이랄까요? <갓파쿠와 여름방학을>같은 경우도 일본 애니메이션의
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보질 않았던 것도 갓파쿠의 생김새가 크게 작용했었거든요.
이렇게 엄청난 기대와 조금의 우려도 있었던 <벼랑 위의 포뇨(이하 '포뇨')>는 결과적으로 다시 한번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법같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었던 애니메이션이었으며, 무엇보다 어른으로서 잃어가는 순수함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
작품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이후 부터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께서는 마지막 단락으로
이동해 주세요)




(이 스틸컷만 보니, 마치 괴수물의 도입부분과 흡사하군요. 어떤 공포스런 미확인 물체가 인간을 덮치기 이전에는
꼭 저런 앵글의 컷이 등장하죠. 멀리서 간을 보는 장면이랄까요. 물론 <포뇨>에서는 전혀 이런 분위기를 찾을 수 없지만요)


고전인 <인어공주>의 이야기를 미야자키 하야오 식으로 풀어낸 <포뇨>는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는 인면어 '브룬히루데'가
인간인 소스케를 우연히 만나게 되면서 겪게 되는 일들을 다섯 살 어린이의 시각으로 그린 작품입니다. 소스케 등장 이전에
'브룬히루데('포뇨'라는 이름이 붙여지기 전에 본래 이름입니다)'가 살고 있는 세계가 묘사되는데, 이 세계의 모습은
동화 속 그것을 연상하게 합니다. 인간이지만 바다의 여신과 결혼하여 바다 속에서 인간들로 인해 오염된 세계를 정화시키기
위해 나름 꾸준히 노력하고 있는 '후지모토'를 중심으로 이 세계는 조명되는데, 마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하울과도
같은 포스의 뒷모습을 풍기는 듯 하지만, 이 후지모토 캐릭터의 역할은 '하울'과는 분명 다른 점에 있다 하겠습니다.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후지모토'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연민이 느껴졌는데, 그에게서는 <렛 미 인>에 등장했던 '이엘리'의
보호자 격 남자의 모습과, <빌리 엘리어트>의 '빌리' 아버지와도 같은 부정이 엿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포뇨>는 악당이
나오지 않는 드문 작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혹자들은 '후지모토'가 악당 역할이 아니냐 할 수도 있겠지만,
자세히 보면 자식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느낌이(매우 동양적인) 강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포뇨가 인간이 되는 것을 막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포뇨가 인간에게 선택 받지 못해 인간이 되지
못했을 경우 받을 상처와 일들이 걱정이 되어 미리 예방하려 하는 것이고, 인간과 다른 존재와의 결합이 행복하지 만은
않다는 것을 자신 스스로가 직접 느낀 바가 있기 때문에(아마도 그는 바다의 여신을 극진히 사랑해서 인간 세상과 멀어져
바다 속 삶을 택한 것이겠지만 그로 인해 외로움도 느꼈을테지요. 자신의 딸인 포뇨가 이런 외로움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
조심스러워 했던 것 같구요. 잘 생각해보면 '인어공주' 스토리는 포뇨의 아버지인 후지모토의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자신의 품 안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돌보고 싶었던 '아버지의 마음'이 깊었던 경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후지모토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포뇨가 인간인 소스케와 더불어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애초부터 있었다는 걸
엿볼 수도 있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끝끝내 둘의 만남을 막거나 했어야 했는데 결국엔 그러지 않았고,
더 나아가 애초부터 '브룬히루데'가 '포뇨'라는 이름을 얻게 된 이후로 '포뇨'라는 이름을 적극적으로 불러주었거든요.
<포뇨>에서 후지모토라는 캐릭터는 단순히 개그를 치는 조연 캐릭터로 보일 수도 있지만, 자세히 보면 이 세계를 풍부하게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캐릭터라 생각됩니다.




초반 바다속 에서 포뇨가 처음 등장했을 때 잠깐 움찔 놀라게 됩니다. 왜냐하면 포뇨와 닮은 수 많은 '포뇨스럽게' 생긴
이들이 단체로 등장하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포뇨는 저들의 엄마인가? 하고 생각할 때쯤 '엄마'가 아니라 '언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저는 단순히 포뇨가 먼저 태어났거나 마법으로 인해 생겨난 프로토 타입이라던가 라고만은
생각하게 되지 않더군요. 이후 포뇨가 소스케의 피를 마시고 인간으로 변하기 이전에도 포뇨는 동생들보다 월등히
큰 몸집을 갖고 있었는데, 마치 '매트릭스'의 존재를 깨우친 네오와도 같이, 물 밖 인간들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인해
동생들이 모르는 세계에 대해 일찌감치 깨우치게 되었고, 이런 깨우침으로 인해 궁금한 점들이나 욕구들이 많아졌으며,
그로 인해 발달하지 않았던 신체가 발달하여 동생들과는 사뭇 다른 존재가 되지 않았나 싶더군요.
이렇게 보자면 아예 동생이라고 불리는 이들과 똑같이 만들어지거나 태어난 존재였지만, 유독 발달하여 '언니'로서의
입장에 놓이게 된 것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애초부터 프로토 타입으로 생겨난 존재일지도 모르겠구요.

아마 이 동생들도 포뇨가 이렇듯 시스템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기 전까지는 별다른 욕구불만이 없었겠지만,
작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동생들이 굉장히 포뇨를 부러워하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래서 자신들은 못하지만 포뇨가
꿈을 이루는데에 적극적으로 돕게 되고, 이를 통해 자신들도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겪게 되는거죠.
포뇨와 동생들의 관계도 흥미로웠던 설정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정통 클래식 음악에 가까운 배경음악과 함께 포뇨가 파도위를 춤추듯 달리는 이 장면은, <벼랑 위의 포뇨>의 명장면 중
하나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속도감도 좋았고, 묘한 느낌도 좋았죠)

이 영화에서 또 하나 독특한 캐릭터를 꼽자면 소스케의 엄마인 '리사'역할을 들 수 있겠습니다. 초반부터 심상치 않은
운전 스킬로(폭풍우 치는 좁을 길에서도 드리프트를!!) 보는 이를 움찔하게 했던 리사는, 어린이들의 세계가 주가 되는
<포뇨>에서 '후지모토'와 포뇨의 엄마와 더불어 어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사실 대변한다기 보다는
이런 어른이 되야 한다 라는 쪽이 더 어울리겠네요). <포뇨>에서 리사가 가장 돋보이는 점은 화려한 운전 실력도,
남편의 빈자리를 채우다 못해 영웅적인 면모까지 발휘하는 모습도 아닌, 포뇨를 받아들이는 모습에 있다 하겠습니다.
사실 갑자기 어디서 이상한 아이가 굴러들어왔을때(포뇨는 굴러들어왔다는 느낌이 강하죠 ㅎ), 단 한번의 의심이나
고민도 없이, 아무런 스스럼없이 포뇨를 소스케와 동일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미야자키 월드에서나
가능할 법한 일일이도 모르겠는데, 마법을 부리고 더군다나 며칠 전에 물고기로서 만났던 이가 갑자기 꼬마 아이로
등장했음에도 이 아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리사의 모습은, '멍청하다' '허술하다'라기 보다는 '깨어있다' '열려있다'로
봐야 더 맞을 듯 합니다.

이 영화가 결국 말하려는 것은 아이의 순수함에 대한 경이와 그 세계에 대한 동경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어른의 입장에서 봤을 때 순수함을 갖은 아이에게 얼른 어른이 되는 방법을 가르치기 보다는, 그 순수함을 더 오랫동안
지켜나갈 수 있도록 곁에서 도와주는 것이 옳은 부모의 자세다 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초반부터 언급한 후지모토를 비롯해, 소스케의 엄마인 리사, 그리고 포뇨의 엄마인 '그랑망마레'까지...
<포뇨>는 어린 아이들의 순수한 세계를 가감없이 편견없이 그려내려고 노력한 작품인 동시에, 한 편으론 이런 아이들을
보호자 입장에서 바라보는 부모에 대한 영화로도 읽을 수 있을 것 같네요.



(리사의 옆 모습에선 '하울'이 어렸을 적 '캘시퍼'를 처음 받아들일 때의 옆 모습과, '나우시카'의 옆 모습이 동시에
연상되더군요)

부모에 관한 작품이라는 점은 후반부에 가서 직접적으로 드러나는데, 포뇨의 앞으로에 대한 일들을 놓고
소스케의 엄마인 리사와 포뇨의 엄마인 그랑망마레가 마치 학부모 모임에서 만나듯 '누구 어머니 되세요?'하며
만나게 됩니다. 물론 여기에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말도 안되는 비현실 세계에 대한 편견이 없는 리사에 가치관이
있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가능했던 일이겠지요. 그리고 여기에는 리사와 포뇨의 부모들과 함께 노인정에서 피신한
노인들이 등장하는데, 이들도 리사와 마찬가지로 거리낌없이 이들을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이 중에 한 할머니가 계속 되는
의심을 갖고 불신을 이야기하는데, 사실 여느 작품 같다면 이 할머니가 유일하게 깨어있는 사람으로 등장해서 마수에 걸려있는
중생들을 깨우치는 역할을 했겠지만, 미야자키 월드에서는 '왜 순수하게 믿지 못하는가?'라는 것을 되묻기 위한 캐릭터로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인터뷰를 보니 '다섯 살 아이들은 신과 인간의 중간에 놓여있다' 라고 했던데 이런 마음에서, 어른들은
잃어버린 순수함에 대해 노인이 된 미야자키 하야오가 들려주고 싶은 '원석'과도 같은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부모들에 대한 얘기를 좀 더 해보자면, 리사와 그랑망마레의 대화는 영화 속에 직접적으로 묘사되고 있지 않지만,
분위기로 보았을 때 그저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자 라는 식으로 흘러갔다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 결국은 옳은 것이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아이들의 세계를 멀리서 지켜주자 라는 것이 이 두 부모의
선택이었던 셈이이죠.



(아마도 '포뇨'는 지브리 역사상 가장 귀여운 캐릭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대책없이 대놓고 귀여우니까요 ^^;)

<벼랑 위의 포뇨>를 일반 영화보는 방식으로 보게 되면 여기저기 모순 점 투성이고 이해안되는 부분도 분명 많을 거라
생각됩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도 다른 영화를 볼 때는 의심이 눈초리로 보게 되는 경우가 많고, 캐릭터의 몸짓, 말짓
하나에도 무언가 암시하는 의도가 있지는 않나 생각하며 보는 스타일인데,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특히 포뇨는!)이런 의심 가득한 시선들 없이 맘 편하게 즐겨라 하고 얘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 가운데는 마냥 즐기는 것보다는 메시지가 중심이 되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지만,
여기서 말하는 '의심의 눈초리'는 필요없는 작품들이었거든요.

다섯 살 아이가 중심이 된 순수한 세상에 어떤 의심의 눈초리가 필요하겠습니까. 제가 봤을 땐 한창 때의 미야자키 하야오
였다면 이런 작품을 만들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따져봐도 나름 젊었을 때(?)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을 보면
결국 순수함과 진리로 포용하기는 했지만, 환경파괴와 문명화, 기계화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가 강했었는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후는 점점 손자, 손녀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입장으로서 비판적인 마인드 보다는
순수함에 대한 동경과 보호가 더 앞서는 작품들을 만들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센과 치히로..>를 보면서도 감독이
치히로를 그리는 것을 보면 안타까워 함을 느낄 수 있었는데, <포뇨>에서는 이렇듯 아이를 할아버지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좀 더 강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 것이 일부에서는 일종의 '늙었다'라는 단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를 아우르고 있는 기본 정서가 동심을 비롯한 순수함에 근거했다는
점에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여겨지더군요.
장면 장면에서 따뜻한 시각을 느낄 수 있었고, 동심의 순수함을 동경하는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거든요.
많은 이들이 유치하다라고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다섯 살 아이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위해 만든 할아버지의 작은
선물이니까요.




히사이시 조의 음악은 전체적으로 임팩트 면에서는 최근작 <센과 치히로..>나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비해 조금
약하다고 느껴지긴 했지만, 엔딩 크래딧에 흐르는 '포뇨~ 포뇨, 포뇨~'하는 주제곡만으로도 깊은 각인을 전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나 싶네요(이 노래가 입에서 떨어지질 않는군요). 물론 앞서 잠시 언급했던 정통 클래식 스타일의 곡들도
좋았구요. 역시나 미야자키 월드를 완성시키는 건 히사이시 조의 음악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팬심없이 바라본다는 건 어쩌면 어려울 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의 근거는
항상 변하지 않는 순수함에 있기 때문인데, 이를 보는 관객들은 점점 나이를 먹기 때문이죠. 작품은 계속 아이의 순수함으로
머물러 있으나 보는 이들은 나이를 한살 한살 먹어가기 때문에 점차 간극이 벌어지는 듯한 느낌도 있구요.
그래서 인지 개인적으로는 다른 작품들을 보면서 벌어진 이 공간을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보며 다시 좁혀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사실 영화를 보기 전에 포스터의 '포뇨'모습만 보고 조금 이상하다 하고 생각했던 것이나,
'포뇨'의 주제곡을 미리 듣고는 조금 유치하고 아동스럽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작품을 보고 나서는 다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거든요.

환경 파괴에 대한 메시지도 분명 담고 있지만, <포뇨>는 이를 전작들에 비해 깊게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이런 비판적 메시지가 깊게 담긴 작품들을 다시 만들어주기를 기대하고 있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의미가 있듯이, 이런 작품은 이런 작품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이 미야자키 월드이구요.

영화라는 것은 어차피 그 세계에 빠지지 못하면 공감하기 힘든 장르라 할 수 있습니다.
<벼랑 위의 포뇨>는 5세에 맞춰졌기에 더 많은 이들이 공감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인듯 싶구요.

개인적으로는 다시 한번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야기와 그 세계에 매료되게 된 작품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1. 며칠 전 <다크나이트> 블루레이를 사려고 들렀던 매장에서 <벼랑 위의 포뇨>OST를 보고는 고민하다가 그냥
   지나쳤는데, 결국은 질러야 겠군요!

2.

후지모토는 왠지 살짝 목소리도 그렇고 오다기리 죠가 연상되기도 하더라구요. 문득 문득 멋진 모습도 보여주는데
폐인스러움도 갖췄다고 할까요 ㅋ

3. 크리스마스에 한 번 더 봐야 할 것 같군요.

4. 사실 닭살스러운 캐릭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포뇨'는 대책없이 귀여운대도 좋았던 것 같습니다.

5. '소스케! 좋아!' 더 많은 대사는 필요없어요. 사실 여기에 다 담겨있기도 하구요.




 
 
글 / ashitaka (www.realfolkblues.co.kr)


본문에 사용된 모든 이미지의 저작권은 스튜디오 지브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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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기울이면 (Whisper Of The Heart, 耳をすませば, 1995)
리얼리티로 살아나는 아련함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전의 대부분의 지브리 스튜디오 작품이 그러했듯이, 이 작품 <귀를 기울이면>
역시 용산에서 구한 일본에서 넘어온 불법 VCD를 통해 처음 접하게 되었던 애니메이션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전에 기억으로만 남아있던 이 작품이 지난해였나, 대원에서 <마녀 배달부 키키>와 함께 DVD출시를
하기 위해 메가박스에서만 단독으로 잠깐 개봉을 했었고, 그 당시 기회를 놓치지 않고 '키키'와 함께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었죠. 그 이후에 DVD가 결국 출시되긴 했지만, 이번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열린
'세상의 모든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귀를 기울이면>을 상영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왠지 그냥 지나칠 수가
없더군요. 요즘은 조금 시들해졌지만 한 때 지브리 하면 만사 재쳐두고 DVD며 피규어며, 디오라마며, OST며,
화보집, 설정집 등 닥치는대로 모으던 때가 있었는데, 그 때 모았던 각종 아이템들과 선물해주었던 피규어들을
다 모으자면, 조금 오버해서 지브리 스튜디오 서교분점 정도 될지도 모르겠네요.
메가박스에서 개봉했던 당시에는 너무 감상에만 젖어 제대로 된 감상기를 쓰지 못했었는데,
이번에는 한 번 써보는데 까지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지브리 DVD타이틀이 출시되면
열심히 줄줄이 리뷰를 썼던 것에 반에 반만이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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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훔베르트 폰 지킹겐 남작과의 첫 만남! 남작은 이후 <고양이의 보은>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일단 이 작품은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이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지브리의 느낌과는 약간 틀린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이는 감독이 미야자키 하야오가 아닌 콘도 요시후미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미야자키 하야오가 대부분의
지브리 작품들이 그렇듯 각본이나 기획 작업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콘도 요시후미가 연출한 영화의 분위기는
확실히 미야자키의 판타지스러움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장면장면의
디테일은 매우 현실적이라 할 수 있는데, 주인공인 '시즈쿠' 캐릭터는 정말 또래의 사춘기를 겪는 소녀의
미묘한 감정과 하루하루의 일상적인 모습을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시즈쿠를 둘러싼 그녀의 가족들의
모습이라던가(도서관에서 일하는 아빠, 대학원 논문 준비로 시즈쿠 만큼이나 바쁜 엄마, 그리고 이제 막
사회로의 한 걸음을 내딛으려고 하는 언니까지), 시즈쿠의 가장 친한 친구인 유코와 스기하라의 알콩달콩
미묘한 사춘기의 감정 묘사도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전혀 밋밋하게 느껴지지 않는 연출력을 선보입니다.

특히 굳이 그런 설정들을 넣을 필요까지 있었을까 싶을 정도의 디테일을 보여주는 장면들도 있는데,
시즈쿠가 유코의 집에 놀러갔을 때, 유코가 아버지와 다퉈 냉전중이라 이층으로 올라가는 중에도
아버지가 시즈쿠와는 인사를 나누지만 유코와는 냉랭하게 지나치는 장면 같은 경우는,
이런 애니메이션에서는 좀 처럼 만나기 힘든 리얼리티라고 아니할 수 없는 장면입니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굳이 극중 전개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은 설정들을 삽입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기도하지만,
생각해보면 이 외에도 부모가 맞벌이를 하기 때문에 자녀가 빨래, 청소, 공과금 납입 등 집안일을 분담해야
하는 것이나, 여학생들이 점심시간에 자신들이 좋아하는 선생님의 방에 모여 선생님과 함께 도시락을 먹는 등,
소소하지만 현실적인 디테일들을 여럿 배치하면서 관객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좀 더 이야기에 공감하고
몰입하도록 하는 장치로 작용하고 있는, 즉 내 얘기, 혹은 우리 딸 아이의 얘기로 여기게끔 돕고 있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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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지브리 작품 가운데 명장면 베스트 5에 꼽힐 '컨츄리 로드' 연주와 노래 장면)

지브리의 작품들은 주인공이 현대를 배경으로 등장하는 경우, 동네나 거리 모습의 작화에 있어 실제 있을 법한
(물론 이 가운데는 실제 있는 경우를 토대로 애니메이션화 한 경우도 아주 많죠, 이런 방법이 좀 더 적극적으로
사용된 경우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초속 5cm>같은 작품을 들 수 있겠네요) 분위기로 그리는 경우가 많은데,
<귀를 기울이면>에서는 어스름한 새벽녘의 장면이나 해지는 도시의 장면 연출을 볼 때, 거의 실사가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전신주나 일상 풍경들을 아주 디테일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콘도 요시후미 감독의
의도적인 연출이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실제로 예전에 어느 글에선가 이 작품에 배경이 된 실제 동네가
일본 내에서도 부자 동네에 속하는 동네이고 작품 속 처럼 아래로 훤히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는 얘길 본적이 있는데, 작품 속에서는 그리도 소박해보이던(신비스럽긴 했지만, 귀티나진
않았었는데 말이죠) 동네가 실제로는 부촌인 것을 확인한다면 실망하게 될까요? 그래도 언젠가 직접 일본에 가서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을 포기할 수는 없을 것 같네요.
(좀 더 확인해보니 도쿄 교외의 타마시 라는 곳이 배경이 되었다고 하네요)

이 작품이 더 오래 기억되는 이유는 바로 영화에 삽입된 노래 때문입니다. 존 덴버의 곡인
'Take Me Home Contury Road'가 바로 그 곡인데, 이 작품에는 올리비아 뉴튼 존이 부른 버전이 초반에
삽입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듯이 원곡의 느낌보다도 시즈쿠가 세이지와 할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 친구들의 연주에 맞춰 수줍지만 열심히 부르는 그 버전이 더욱 깊이 가슴에 남을 수 밖에는
없을 듯 하네요. 거기에다가 이 작품에서만 만날 수 있는 '콘크리트 로드'를 더하자면, 가끔 이 애니메이션의
영어제목이 'Contury Road'가 아닐까 하고 착각할 정도로, <귀를 기울이면>에서 이 곡이 주는 인상은
그야말로 절대적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귀를 기울이면> 중 'take me home county road')

<귀를 기울이면>하면 <고양이의 보은>이 절로 따라올 정도로 이 두 작품의 연관성은 이미 많이
언급되었지만, 그래도 나도 한 번 더 언급해본다면 (--;;), 이 작품에 등장하는 심술쟁이 고양이 '문'과
('문'은 <귀를 기울이면>에서도 '문'외에 여러 이름이 있다며 '무타'라는 이름이 후반부에 잠깐 언급되기도
하는데, <고양이의 보은>에서는 바로 이 이름 '무타'로 등장합니다)
영롱한 눈을 갖고 있던 훔베르트 폰 지킹겐 남작이 <귀를 기울이면>에서는 좀 더 비중있게 주연급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시즈쿠가 극중에서 썼던 소설 '귀를 기울이면'의 내용을 보자면 <고양이의 보은>은
시즈쿠가 쓴 소설의 또 다른 버전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현실적인 작품에서 유일하게
판타지스러운 설정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시즈쿠가 쓴 소설 속의 내용 뿐인데, <고양이의 보은>은
이 판타지스러운 요소를 전면으로 가져와 소녀의 사춘기와 성장기를 그린 작품으로 볼 수 있겠네요.
물론 두 작품의 원작이 모두 히이라기 아오이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겠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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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리타 히로유키 감독의 2002년작 <고양이의 보은>)        

잘 알려졌다시피 <귀를 기울이면>은 콘도 요시후미 감독의 데뷔작이자 유작이기도 합니다.
<빨강머리 앤>의 캐릭터 디자인과 작화 감독을 맡기도 했던 콘도는(그래서인지 <귀를 기울이면>에 등장하는
시즈쿠의 친구인 유코의 모습에서는 얼핏얼핏 '빨강머리 앤'이 보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지브리 스튜디오에 가장 큰 기대주였는데, 아쉽게도 이 작품을 시작이자 끝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이 일로(직간접적으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불가피하게 은퇴를 번복할 수 밖에는 없었고,
지금까지도 지브리 스튜디오 내에서 미야자키를 이을 이렇다할 확실한 후계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많은 이들이 콘도 요시후미가 살아서 <고양이의 보은>을 연출했으면 어땠을까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고양이의 보은>은 캐릭터만 비슷할 뿐, 소소한 리얼리티보다는 더 지브리적인 판타지적 요소가 강조된
작품이라 콘도와는 잘 맞지 않는 작품인듯 하고, 정작 <귀를 기울이면>의 속편 격 작품은 따로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꼭 그 작품이 아니더라도 콘도가 만약 지금까지도 지브리 스튜디오에 미야자키의 후계자로 남아있었다면,
지브리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지 너무도 궁금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그가 떠난 이후로
지브리에 <귀를 기울이면>같은 색깔의 작품은 나오지 않았다는 점으로 미뤄봤을 때,
다시 한번 그의 죽음이 너무도 아쉽다고 밖에는 할 수 없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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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1992년작 <붉은 돼지>. <귀를 기울이면>에서도 <붉은 돼지>의 흔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고양이의 보은>의 경우 <귀를 기울이면>을 얘기할 때마다 반드시 등장하는 작품인데 반해,
<붉은 돼지>와의 연관성은 그리 자주 언급되지 않는 것 같아 짧지만 정리해보자면.
세이지의 할아버지가 드워프 왕자의 애절한 사연이 담긴 오래된 시계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시계의 바늘이 자리한 곳을 보면 'Porco Rosso'라는 이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정도면 그냥 이름만 살짝 끼워 넣은 것이구나 할 수도 있겠는데, 그 다음 할아버지의 대사를 보면,
'이 시계를 만든 사람도 한 때 힘든 사랑을 했었던 것 같아'라고 하는데, 이 부분은 <붉은 돼지>에서도
정확하게 묘사되고 있지는 않지만, '포르코'와 '지나'가 한 때 결혼까지 하려고 했던 사이였다고 미뤄봤을 때,
세이지 할아버지의 저 대사와 <붉은 돼지>의 포르코 로소의 이야기는 정확히 매치가 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세이지는 바이올린의 장인이 되기 위해 이탈리아 유학을 계획하는데,
<붉은 돼지>하면 '이탈리아' 아니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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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코 로소가 만든 환상적인 대형 시계. 2008년 극장에서도 저 시계가 작동하는 장면에선
 관객들이 모두 탄성을 내지르더군요!)


마지막으로 이들 작품 외에 <귀를 기울이면>에서 만나볼 수 있는 다른 작품의 흔적으로는 1989년작
<마녀 배달부 키키>를 들 수 있겠는데요, 시즈쿠의 책상에 정확히 키키는 아니지만 빗자루를 탄 검은 복장의
인형이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팬들에게 작은 즐거움을 선사하기 위해 넣은 그림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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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기울이면>이 특별한 또 다른 이유는 단순히 사춘기의 미묘한 사랑에 관한 감정을 그린 것 만이 아니라,
청소년기에 자신의 진로와 미래에 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진지하고 중요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책 읽는 것을 친구들보다 더 좋아하고 글 쓰는 것(정확히 말해 번역일)을 단순히 좋아하던 시즈쿠는,
어린 나이에도 자신의 진로를 정하고 하나하나 노력하고 준비해 나가고 있는 세이지의 모습을 보고,
단순히 부럽다, 멋지다라고만 느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부족함과 나태함을 돌아보게 됩니다.
이러면서 세이지에게는 좋아하는 감정과 더불어 일종의 질투심 또한 느끼게 되는데, 이런 감정은
'나랑 똑같은 책을 읽었는데, 나는 뭐하고 있었나'라던지, '세이지만 너무 앞서가는 것 같아서 저도
무언가 해야겠다는 생각에'하며 눈물 흘리는 장면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현재 DVD가 없는 관계로
극장에서 본 기억만으로 대사를 쓰려니 정확하지가 못합니다. 양해해 주세요~ ^^;).

이런 설정은 적어도 지브리의 일반적인 작품에서는 보기 힘든 설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TV 연속극에나
나올 법한 얘기에 가깝기도 하구요. 소녀가 진로를 고민하고, 자신보다 앞서서 한참이나 멀리 나아가고 있는
애정의 대상에게 지지않기 위해, 아니 자신이 생각하기에 부끄럽지 않은 동등한 입장이 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부모님과 진로 상담을 하게 되고 여기서 일반적인
진학의 길을 가느냐, 아니면 무언가 꿈을 위한 도전을 하느냐에 대해 가족 구성원들과 자기 자신과도
깊은 갈등을 겪고, 그런 과정에서 스스로 성장하는 것은 물론, 가족이라는 자체가 성장하게 되는 결과를
얻게 되는 이 이야기는, 앞서 자주 언급했던 것처럼 너무도 현실적인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귀를 기울이면>이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인상적인 지브리의 애니메이션 중 하나로 손 꼽히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여기에도 있습니다. 극중 시즈쿠가 겪는 고민들이 내가 겪었던 사춘기의 그것과
너무도 닮아있기 때문이죠. 시즈쿠를 통해 나의 사춘기를 돌아보는 한 편, 나는 왜 시즈쿠 처럼 좀 더
적극적으로 도전해보지 못했었나 하는 생각도 들게 되고, 어른이 된 지금 나는 사춘기 때 꿈꿨던 것들을
얼마나 이루었는가 하는 것도 되돌아 보게 되는 계기가 되니까요.
그래서 이 작품이 그저 소녀의 꿈같이 판타지스런 사춘기를 그린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더더욱 오랫동안 가슴 속에 깊이 자리하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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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기울이면>은 1995년 작으로, 만들어진지가 벌써 10년이 훌쩍 넘은 작품이긴 하지만,
앞으로도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아련한 추억으로 남을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겠지만), 극장에서 떠들거나 크게 웃는 것 등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 작품을 볼 때 이 또래의 자식을 둔 어머니 분들이 장면마다 크게 웃으시는 것은 별로 불편하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웃음에는 영화가 웃겨서 웃는다기 보다는 시즈쿠가 자신의 딸처럼 느껴져서,
귀여운 마음에 웃으시는 것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거든요. 저는 아직 시즈쿠에게 감정 몰입을 더 하고
있지만, 한 10년 쯤 지나면 저도 오늘 극장에서 만난 어머니들처럼 시즈쿠를 제 딸 보듯 보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본문에 사용된 모든 이미지의 저작권은 스튜디오 지브리와 대원 C&A 홀딩스에 있습니다.





4년은 긴 시간이었다. 더군다나 [원령공주] 이후로는 더 이상 직접적으로 감독하는 작품이 없을 것이라는 미야자키 하야오에 말에(하지만 젊은 스텝들과 일을 나누어서 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면 아직 만들고 싶은 작품이 한,두 작품 더 있다는 말도 했었다), 이 시간들은 더욱 더 길게만 느껴졌었다. 하지만 2001년 그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하 [센과 치히로])을 발표함으로서, 이 기다림에 시간들은 헛되지 않은 소중한 것이 되었다. 이러한 기대들은 흥행성공으로 이어져, 일본에서는 그 자신이 [원령공주]로 가지고 있었던 일본내 최고 흥행기록을 갱신하였고(일본내 2,400만 관람), 국내에서도 [이웃의 토토로]의 흥행부진으로 반신반의했었던 올 여름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면서, 흥행에 대성공을 거두었다(국내 2백만 7천명 관람). 사실 [이웃의 토토로]의 흥행부진 요인은, 하야오의 이전 작품들은 이미 볼 사람은 다 보았다는 핸디캡이 존재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센과 치히로]은 국내 관객들이 컴퓨터가 아닌 극장에서 먼저 접하게되는 최초의 미야자키하야오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이다.



사실 가족영화라는 사실을 내세우며 극장가에 출사표를 던지는 작품들은 많지만, 그 중에서 실제로 가족 모두를 만족시킬 만한 영화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가족 영화라는 슬로건을 건 영화들은 아이들은 만족할 만한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어른들은 그저 아이의 보호자로 참석하는 것이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센과 치히로]는 달랐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상상력으로, 아이들에게는 놀라운 판타지와 화면들을 제공하면서 볼거리와 교훈 등을 주었고, 어른들에게는 그저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넘어서서 영화적 재미와 감동도 전달했다. 또한 [센과 치히로]는 미야자키 하야오에 작품들 가운데 가장 일본적인 작품이라 불러도 좋을 영화였지만 특별히 거부감 같은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전 작품들에서 자연과의 공생관계나 기계 문명, 독재 등을 비판하는 메세지를 담아왔던 반면, [센과 치히로]는 기존의 그의 영화들 보다는 메시지나 주제의식 등이 전면에 들어나지 않고, 팬터지적 재미의 요소만을 부각시켜 보여주었음에도 영화를 가볍지 않게 완성했다는 것은, 이젠 경지에 오른 미야자키 하야오에 영화적 기술에 저절로 박수를 보내게 한다.



[센과 치히로]는 이전 그의 작품들에서 보여주었던 요소들을 모두 포함하는 동시에, 이전 작품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일단 [원령공주]의 '산(san)'이라던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의 '나우시카'와는 전혀 비슷한 점을 찾아보기 힘든 주인공 '치히로'의 모습이다. 남성보다는 여성주인공을 더 선호하는 페미니스트적 성향을 가진 하야오 답게 [센과 치히로]에서도 10살의 소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산'과 '나우시카'가 갖고 있던 용맹함이나 강한 의지등은 치히로에게는 없다. 치히로는 그저 평범하고 엄마, 아빠에게 투정도 잘 부리고, 겁많은 그 또래 소녀일 뿐이다. 하지만 돼지로 변한 부모님을 구해야하는 '센'의 경우는 달랐다.

[센과 치히로]가 미야자키 판타지의 결정판으로 불릴 수 있었던 것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각기 다른 개성강한 수많은 캐릭터들 때문이라 해야겠다. 그의 전작 어느 작품들 보다도 다양한 캐릭터들이 말그대로 총출동하여 팬터지적 요소와 영화적 재미를 더하는데 큰 몫을 하였다. 미야자키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톡톡튀고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이러한 경우는 상당히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 코드 1, 2번의 타이틀이 코드 3번 보다는 더 알차게 실리는 경우가 많다.(물론 전부다 그런것은 아니다) 이미 일본 현지에서 화면에 붉은 색감이 지나치게 강하게 표현된 문제로 말들이 많아 코드 3 발매가 기대가 되었었는데 이 부분은 말끔히 보정이 되어 파래진 하늘색을 접할 수 있다. (최근 일본에서는 이 문제로 인해 [센과 치히로]DVD가 극장에서 본것 과는 전혀 다른 영화였다며 판매원인 디즈니 재팬을 상대로 법적 소송까지 걸리기도 하였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이전 DVD타이틀이였던 [원령공주](code2)보다는 화질이 떨어진다는 평도 있고 전체적으로 뿌연 화질을 보인다는 말들도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만족할 만한 화질을 선보인다.



붉은 색감의 보정만큼이나 코드 3 발매의 기대를 모았던 것이 한국어 더빙이었다.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의 특수성과 아이들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센과 치히로]라는 작품에 특성상 국내 DVD 사용자들은 한국어 더빙이 옵션이 아닌 꼭 수록되어야할 필수 목록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한국어 더빙이 5.1채널로 수록이 되었고, 일본어 더빙도 DTS-ES 6.1로 실려, 캐릭터들의 특이한 효과음들과 영화의 중간중간 흐르는 히사이시 조의 감동적인 선율을 즐기는데에는 부족함이 없는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다.



아마레이 슈퍼 클리어 더블케이스에 담겨져 있는 타이틀의 2번째 디스크에는 몇가지 서플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아무레도 코드 2 버전에도 수록되지 않은 다큐멘터리이다. 니혼 TV에서 방영한 개봉직전 스페셜 TV 프로그램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제작 다큐멘터리가 약 48분 가량의 분량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이전에 우리가 접하기 힘들었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젊은 스텝들과 일하는 모습이라던가, 스튜디오 지브리 직원들이 시간내에 작업을 마치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장면 등이 담겨있다. 이 외에도 애니메이션에서는 절대 빠질 수 없는 더빙 작업의 모습이 담겨져 있는데, 기존의 성우들보다는 연기자들이 위주가 된 더빙작업이었음에도 혼신에 힘을 다해 열연을 펼치는 모습을 살펴 볼 수 있다. 그리고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부터 쭉 음악 작업을 해왔던 히사이시 조의 작업 장면에서는 그의 꼼꼼한 성격을 옅볼 수 있다.

이외에도 국내 극장 예고편, 케이블 예고편, 일본 극장 예고편 등 여러 예고편들이 수록되어 있으며, 완성된 영화가 아닌 그림 콘티만으로 진행되는 [센과 치히로]도 또 다른 재미를 맛볼 수 있다. 그리고 2003년 발매예정인 [원령공주]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이웃의 토토로]의 예고편도 만나 볼 수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일 것이다. 그는 관객들을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감독이며, 실망을 주지 않는 감독이었다. 친구의 딸의 모습을 보며 그 아이가 언제까지 이런 세상에서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까 걱정하며, 그런 어린 시절의 행복함을 잊어버리지 않게 하기위해서 이 영화를 만들 결심을 했다는 그는, 당시 열 살이었던 그 소녀를 비롯해 한 때 열 살이었던 어른들에게 또한 이제 열 살이 되려는 아이들 모두에게도 행복함을 전달해주는 영화를 만들어냈다. 위에서 그의 이전 작품들보다는 주재의식이 약하다는 이야기를 꺼냈었지만, 사실 그의 영원한 화두인 자연에 대한 사랑과 보존은 이 작품에서도 꾸준히 나타나고 있다. '강의 신'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기 위해 센을 비롯한 모든 온천탕 식구들이 힘쓰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오염된 자연을 복귀시키기란 쉽지 않음을 말하고 있고, 주인도 없는 식당에서 음식을 많이도 먹어치우던 치히로의 부모가 돼지로 변한다든가, 금을 나눠주는 가오나시에게 잘 보이기위해 오로지 여기에만 매달리는 온천장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욕심과 과욕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치히로가 센으로 일하면서 행방불명된 자신의 이름을, 하쿠의 도움으로 잊지 않고 기억해서 부모님을 구해 결국 다시 자신의 세계로 돌아올 수 있었듯이, 현재를 사는 우리들도 미야자키 하야오를 비롯한 스튜디오 지브리의 도움으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반드시 마음속에 간직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겠다.



2002.12.07
글 / 아시타카



[모노노케 히메]를 통해 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가 하고 싶었던 말은, ‘살아라!’라는 한 마디에 모두 함축되어 있다. 미야자키의 기본적인 주제의식이 모두 담겨있고, 가장 강렬하게 표현한 액션 활극!



북쪽의 끝, 에미시족의 마을에 어느 날 갑자기 재앙 신이 나타나 마을을 위협한다. 이에 에미시족의 후계자인 ‘아시타카’는 결투 끝에 포악해진 재앙신을 쓰러뜨리지만 싸움 도중 오른팔에 저주의 상처를 받고 죽어야할 운명에 처하게 된다. 결국, 재앙신의 탄생 원인을 밝혀 자신의 저주를 없애기 위해 서쪽으로 길을 떠난 아시타카는 여행 중 서쪽 끝 ‘시시’신의 숲에서 들개 신과 사투를 벌인 ‘타타라’ 마을 사람들을 발견하고는 그들을 구해주었는데 먼발치서 자신을 지켜보는 들개 신 ‘모로’와 그의 곁에서 상처를 치료해주는 신비스러운 소녀를 보게 되고 묘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귀빈 대접을 받으며 ‘타타라’마을에 머물게 된 아시타카는 마을을 습격하는 ‘원령공주’를 목격하게 되고 그 원령공주가 바로 숲에서 만난 소녀임을 알고 당황하게 된다. 함정을 파 놓고 총포로 무장한 인간들은 사람들을 공격하던 원령공주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순간, 망설이던 아시타카는 원령공주를 구해 마을을 빠져나가는데....



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주제의식은 무척이나 뚜렷하다. 미야자키는 [미래소년 코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부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이르기까지, 그만의 정신과 주장이 깃든 작품들을 만들어왔다. 일단 [모노노케 히메]를 얘기하려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이하 나우시카)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여러 가지 면에서 [모노노케 히메]가 [나우시카]를 닮았기 때문이다. [나우시카]는 항상 미야자키 감독 작품의 주제가 되는, 자연과 인간간의 공생, 근대 기계 문명에 대한 견해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모태가 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나우시카]의 경우가 그러한 경우라면, [모노노케 히메]는 스타일과 내용적으로 한층 업그레이드 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서두에 밝혔다시피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강렬하고 많은 액션이 등장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제철장과 ‘에보시’로 대변되는 근대문명과 ‘산(san)'과 태고적 모습을 한 신들로 대표되는 자연과의 관계는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배경이자 포인트가 되고 있다. 에보시와 제철장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위해 나무를 베고 숲을 개척하여 무사들이 난무하는 혼란스런 세태 속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한 편, 갓난 아이 인 채로 인간들에게 버려져 들개들에게 길러진 ’산‘과 자연 속에서 태고적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신들은, 점점 자연을 더럽히고 있는 인간들로부터 산(mountain)과 나무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나가고 있다. 이들은 너무나도 다른 환경과 선입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쉽게 서로를 이해하기 힘들고, 그런 노력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면 미야자키가 이러한 인간과 자연과의 공생을 위해 꺼내든 카드는 과연 무엇일까?



먼저 산(san)은 인간이긴 하지만 한편으론 들개인 모호한 존재이다. 그는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인간들에게 버려져 들개들에게 길러졌으며, 지금은 누구보다도 인간들에게 커다란 반감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그녀는 ‘모로’일족의 일원으로서 오염과 황폐해져가는 자연을 지키기 위해 인간들과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진 소녀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우두머리 격인 에보시를 암살하기 위해 홀로 제철장에 뛰어 들었고, 자신이 지켜야할 자연을 위해 죽음 따윈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시시신(사슴신)님이 인간들을 벌하고 자신들과 자연 모두를 구원해 줄 것으로 믿고 있다.



한 편 에보시의 입장은 전혀 다르다. 에보시는 군사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시절 신식 무기와 리더쉽을 통해 마을을 구해냈고, 강가의 제철장을 세워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를 위해 연료가 되는 나무를 베고 환경을 오염시켜 자연과는 적이 되었고, 군부에도 굴복하지 않아 이들에게도 적이 되었다. 또한 계속되는 신들과의 싸움을 끝내기 위해 모두들 두려워하는 사슴 신의 목을 베는데 앞장서게 된다. 산과 신들에게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이지만, 제철장 사람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리더이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심한 피부병 환자들을 인간적으로 거둬준 존재이기도 하다.

만약 [모노노케 히메]에 모노노케 히메와 에보시만 존재한다면 이 영화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한 뻔한 영화가 됐을 것이다. 서로 상반된 주장이 맞서기만 하다가 결국 한 쪽 손을 들어주는 그런 영화 말이다. 하지만 [모노노케 히메]에는 아시타카가 있었다.
아시타카는 나우시카와 같이 미야자키의 생각을 작품 속에서 실천하는 적극적인 캐릭터이다. 사실 이 같은 대립 형세에 시골 작은 마을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던 아시타카가 개입될 의무는 없었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 재앙신에게 시위를 당겨 저주를 받기는 하였지만, 어디까지나 아시타카는 제3자의 입장에서 관망할 수 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살아라!’라는 말처럼 미야자키는 행동하길 원했다. 아시타카는 산을 좋아하고 숲이 풍성한 자연을 지켜야 한다는 데에는 산과 뜻을 같이 했지만, 제철장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도 알고 있었다. 그들 역시 자신의 생계와 삶을 위해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였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도 저버릴 수가 없었고, 양쪽의 중간에 서게 된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산은 끝내 에보시를 용서하지 않았고, 에보시 역시 모로에 의해 목숨을 건지게 된 사실에 쓴 웃음을 짓기는 하였지만, 처음 보다는 많이 누그러진 이 같은 공존의 가능성은 바로 아시타카가 열어 준 것이다.



어느 한 편에 크게 치우쳐 있지는 않지만, 자연과 인간의 공생 관계에 있어 자연을 지키고 보호하는 쪽에 조금 더 무게를 둔 것은 사실이다. 그 같은 그의 메시지는 생명을 불어넣고 앗아가는 줄로만 알았던 사슴 신이 죽을 때, 사실 사슴 신은 꽃을 피우는 신이였단 걸 제철장 사람들이 깨닫게 되는 순간 느낄 수 있다.




우선 반갑다. 사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색 보정이유로 홍역을 겪은지라 많은 기대 가운데, 또한 많은 우려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출시된 타이틀은 우려했던 마음을 잠재울 수 있을 만한 수준급의 퀄리티를 보여주고 있다. 사실 [모노노케 히메]는 개인적으로 가장 많이 다시 보았던 작품 중에 하나인데, 물론 DVD포맷이 아닌 VCD의 조악한 화질로 관람한 것이었다(VCD의 화질을 조악하다고 쉽게 평할 수 있는 현실이 참 행복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그런지 화질에 세세한 디테일에 정통한 전문가들은 예전 작품임을 감안한다면 만족할 만한 화질을 선보였다고 평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화질이라고 생각된다. [모노노케 히메]는 미야자키 감독 작품 가운데 최초로 CG를 사용한 작품답게 스펙터클하고 스피디한 영상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 같은 장면을 표현하기에 16:9 애너모픽 와이드 스크린 포맷은 부족함이 없었다고 생각된다.



미야자키 감독의 작품을 논할 때 결코 빠져서는 안 될 것은 바로 히사이시 조의 스코어이다. 항상 감동적인 음악을 들려주는 히사이시 조는 [모노노케 히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스코어를 들려준다. 일본 전통의 토속적 사운드와 클래식 적 요소가 적절히 융합된 모노노케 히메의 음악은 미야자키의 메시지를 더욱더 효과적으로 전하고 있다. 돌비디지털 5.1채널로 전해지는 사운드는 위와 같은 히사이시 조의 감동의 선율과 아시타카의 활 쏘는 소리, 야클의 발굽 소리 등을 웅장하고 선명하게 전달한다. 또한 5.1채널의 일본어 더빙 트랙 외에 한국어 더빙 트랙도 5.1채널로 수록하고 있는데, 목소리만 들어도 알만한 유명 성우들이 참여한 한국어 더빙도 기대치 않았던 5.1채널로 수록되면서 상당히 좋은 반응을 끌고 있다.



다음은 서플먼트인데, 사실 조금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수록된 서플은 지브리 타이틀이 공통적으로 수록하고 있는 것들인데, 그림 콘티, 멀티 앵글로 보는 본 편과 예고편 모음, 출시 예정 작 소개, 캐릭터와 시놉시스, 스텝 소개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래도 조금 흥미로운 점은 한국어 더빙 성우들을 소개하는 메뉴에서 더빙 현장 스케치 영상이 수록되었다는 것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비교해 보았을 때, 제작 다큐나 다른 영상이 수록되지 않은 것은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 아 그리고, 타이틀과 함께 제공되는 DVD 홈 시어터 관련 도서는 DVD플레이어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싶고 궁금했던 가장 기본적인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어, 앞으로 DVD를 즐기는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2003.08.07
글 / 아시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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