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러드 : 더 라스트 뱀파이어 (Blood : The Last Vampire, 2009)
피 방울방울이 만든 만화같은 스타일 액션



전지현의 헐리웃 진출작으로 널리 알려졌던 <블러드 : 더 라스트 뱀파이어>(이하 블러드)는 원작 애니메이션을 아주 인상깊게 보았던 이로서 충분히 기대할 만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애니메이션을, 특히 일본산 애니메이션을 서양에서 리메이크 한다고 했을 때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이른바 '양키 센스' 때문에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섰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일단 확인하고 넘어갈 것은 이 영화는 전지현의 헐리웃 진출작이라고 100% 보기는 어려운 것이 일단 미국자본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작품이라는 점이다. 홍콩, 일본, 프랑스, 아르헨티나가 공동 제작한 작품으로서 헐리웃 진출이라고 할 때 동반되어야 할 미국 자본은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감독인 크리스 나흔도 프랑스 출신이기 때문에 '양키 센스'라는 것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일단 가볍게 얘기하고 넘어가자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홍보 방향과 이를 대하는 언론에 문제인 듯 싶다. 이 영화에 대한 기대치, 헐리웃 진출이라는 대중들이 혹할만한 떡밥을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에 후에 이것이 진짜 헐리웃 진출이다 아니다라는 얘기나 나왔을 때, 일부에서는 속았다는 반응이 나오게 되는 것이며, 영화자체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져있던터라 실망감도 커질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이 작품을 보기 전까지는 그랬었다. 개인적인 우려와 이미 본 이들의 쏟아지는 악평들 덕에 볼까 말까를 고민했을 정도로 기대치는 낮아졌지만, 그래서인지 막상 극장에서 감상하게 된 <블러드>는 몇 가지 아쉬운 점은 분명히 발견되었지만, 뭐 이 영화에 어차피 그 이상을 바라지는 않았음으로 그럭저럭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정도였으며, 개인적으로는 전지현이 그 동안 출연했던 영화들 가운데 가장 재미있었던 작품이었다.



Production I.G 의 애니메이션 'Blood : The Last Vampire'

영화 <블러드>를 이야기하면서 원작이 된 애니메이션 <블러드 : 더 라스트 뱀파이어>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인랑>과 <공각기동대>를 만들었던 프로덕션 I.G에서 전략적으로 만든 이 애니메이션은 짧은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역시 I.G 라는 말이 절로나왔을 정도로 강한 인상을 남겼던 아니메였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던 100% 풀디지털 방식으로 만들어진 점도 인상적이었지만 무엇보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 기억으로도 '상당히 무서웠던' 작품으로 기억에 남았을 정도로 공포스러움과 스타일을 두루 갖춘 프로덕션 I.G 또 다른 대표작이었다.

참고리뷰 - 애니메이션 '블러드 : 더 라스트 뱀파이어' DVD 리뷰
http://www.realfolkblues.co.kr/43




영화는 초반에는 거의 원작인 애니메이션의 내용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따르고 있다기보다는 몇 몇 인물들의 설정이 변한 것만 제외하면 거의 그대로 만들려고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특히 인트로 장면에 지하철 씬 같은 경우는 앵글은 물론 제작사 이름이 뜨는 위치까지 똑같아서 상당히 놀라기도 했었다. 원작 애니메이션을 본 입장에서는 애니 속 장면들이 거의 그대로 실사화 되는 부분이 일단은 매우 흥미로웠다. 애니의 마지막 장면까지 영화는 거의 그대로 따라가기 때문에 어쩌면 영화 만의 이야기를 들려주게 되는 것은 애니메이션의 이야기가 끝나는 그 지점이 된다고 봐야겠다.

등장인물들의 묘사라던가 미국공군기지의 묘사, 그리고 배후에 있는 조직에 대한 묘사들은 원작과 비교했을 때 크게 떨어지는 부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원작과 비교했을 때 공포스러움을 조장해가는 그 분위기 측면에서는 아쉬움이 많았는데, 원작에서는 처음 요괴(혹은 괴물)라는 정체가 밝혀지고 그 실체가 등장할 때까지 굉장히 마음 졸이며 보았던 기억이 나지만, 영화 <블러드>는 이런 점이 없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공포'보다는 '액션'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에 이런 점은 원작에 비해 조금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그대신 액션 장면 연출에 있어서는 그 비중도 훨씬 크고 스타일 적인 측면에서 인상적인 것도 사실이다.




영화 <블러드>는 날카롭고 긴 칼을 가지고 벌이는 핏방울이 그야말로 '방울방울'대는 액션 장면들이 많은데, 만약 리얼리티를 중시하는 관객들이라면 큰 실망을 하게 될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피는 정말로 많이 튀고 등장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거의 만화같은 수준으로 펼쳐진다. 또한 너무 빠르게 베고 또 베는 탓에 신체 회손의 끔찍함을 제대로 만끽(?)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마치 만화같은 이 스타일이 이 작품에는 제법 어울린다고 생각된다. 어차피 요괴가 등장하는 점이나 원작이 애니메이션인 점만 봐도 이 작품에서 너무 정극에 가까운 효과들이 등장했다면 오히려 이질감이 느껴졌을 수도 있고 이 영화만의 색깔을 내기에는 역부족일 수도 있었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거의 대부분의 액션 씬은 1대 다수의 시퀀스인데, 그렇기 때문에 액션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상당히 빠르고 숨가쁘게 진행된다. 전지현이 연기한 주인공 '사야'는 제법 다양한 몸동작으로 적들을 물리치곤 하는데 칼부림 외에 교복 치마라는 드레스코드에 전혀 신경쓰지 않는 다양한 발차기 등도 인상적이었다. 검집에서 검을 빼내는 동작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 그리고 예전을 회상하는 액션 씬 가운데 사야가 사용한 한 동작은 마치 <바람의 검심>에 등장하는 '비천어검류'같아 혼자 흥분하기도 했다 ;;;




이 영화가 가장 취약한 부분 중에 하나는 다름 아닌 CG파트일 것이다. 필연적으로 본모습을 드러낸 요괴와 결투를 벌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요괴'를 묘사한 컴퓨터 그래픽의 수준이 참담한 것이 사실이다. 마치 예전 특촬물에 등장하는, 사람이 탈을 쓰고 들어가 움직이는 괴물의 모습을 조금 컴퓨터로 손 본 수준으로 가끔 등장할 만큼 (이건 보는 이에 따라 심한 비약으로 느낄 수도 있겠다) 자체의 퀄리티도 아쉬웠지만 무엇보다 실사 인물들 그리고 실사나 그래픽으로 이루어진 배경들과의 조화 측면에 있어서 많은 이질감을 발생시키고 있다. 앞서 언급한 핏방울의 묘사 역시 이런 아쉬운 컴퓨터 그래픽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겠구나 싶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는 원작이 애니메이션이라는 작품의 특수성을 감안하였을 때 앞서 언급한 점만 제외하면 그리 나쁘지않은 컴퓨터 그래픽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건 주인공 사야의 피부 표현이었는데,  일반 사람들의 얼굴 빛과는 물론 틀리고 창백한 얼굴도 아니면서 거의 회색 빛에 가까운 얼굴 색의 표현은 '사야'라는 캐릭터를 표현함에 있어 그 눈빛과 더불어 상당히 인상적으로 기억될 것 같다.




전지현의 연기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은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여기 출연한 배우들 가운데 거의 제일 나은 수준이었다. 이 영화의 퀄리티를 깎아먹고 있는 또 하나의 부분은 바로 배우들의 연기 퀄리티라고 할 수 있을텐데, 주요 역할을 맡은 몇몇 서구 배우들의 연기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이른바 '서프라이즈' 연기라 전체적인 작품의 퀄리티마저 떨어트리는 결과를 낳고 있다. 배우들의 연기 퀄리티가 전체적으로 조금만 더 좋았다 하더라도 이 작품이 좀 더 좋은 평가를 받는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전지현의 연기에 대해서는 크게 아쉬운 점이 없었다. 특히 액션 연기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대역배우나 CG가 사용되었는지는 몰라도 그 분위기 만큼은 사야라는 캐릭터에 잘 어울렸던 것 같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할 영어 대사처리에 있어서는, 영어대사만 딱 떨어트려 놓고 보면 그리 어색한 편은 아닌데, 극 중에서 막상 보고 있노라면 꼭 발음이 나빠서라기 보다는 무언가 어색함이 느껴지긴 한다. 헌데 따지고보면 주인공 '사야'는 정확히 일본인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약간 국적불명의 캐릭터이니 영어를 잘 못하는 것도 귀엽게 이해해 줄 수 있지 않을까? ㅎ (참고로 극중에서 일본어로 연기하는 장면도 나온다)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아무래도 짜임새가 완벽하다거나 생각지 못했던 엄청난 반전이 등장한다던가 하는 이야기 구조는 절대 아니다(반전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조금 식상한 수준이다). 개인적으로 내용적인 측면에서 조금 아쉬웠던 것은 너무 1대 다수의 액션 시퀀스에만 집중하다보니 정작 가장 중요한 액션이라고 할 수 있는 숙적 '오니겐'과의 대결 시퀀스가 너무 허무하게 끝나버린 다는 점이다. 어디선가 보니 이 작품이 3부작으로 기획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을 염두에 둔 결말일런지는 모르겠지만, 어쨋든 그 무섭다는 '오니겐'의 활약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끝나버리는 건 분명 아쉬운 점이었다.





1. 전지현의 외국 이름이 'Gianna' 더군요. 전지아아나. -_-;;

2. 영화 중간 중간의 느낌이 살짝 <킬 빌> 분위기가 나기도 하네요.

3. 만약 이 영화가 지금같은 홍보 없이 슬쩍 개봉했다면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요.

4. 괴작이라고 하기엔 모자르고, 그냥 조금 아쉬운 애니 원작 액션 영화 정도로 볼 수 있겠네요.

5. 3부작으로 기획되었다고 하는데 과연 본래 계획되로 후속편이 나올 수 있을까요?

6. 서두에도 얘기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전지현 출연작들 가운데 제일 좋았습니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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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그 미 투 헬 (DRAG ME TO HELL)
클래식한 B급 호러 무비의 그야말로 재미


비슷한 부류의 경쟁상대가 없다는 것은 그 것만으로도 충분히 끌리는 이유가 되곤 하는데, 최근 개봉한 작품들 가운데도 장르적으로보나 스타일로 보나 확연히 눈에 띄는 작품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이 영화 <드래그 미 투 헬>이었다. 이 영화에 맨 처음 관심을 갖게 된 이유를 꼽으라면 역시 첫 째도 샘 레이미요, 둘 째도 샘 레이미 일 것이다. 호러 영화에 별로 관심이 없는 이들이라던가 블록버스터 영화에만 관심이 많은 이들이라면 아마도 그를 기억할 때 <스파이더 맨>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겠지만, 그 반대의 이들은 누구라도 <이블 데드>를 떠올릴 것이다. 마치 피터 잭슨의 팬들이 <반지의 제왕>이나 <킹콩>에서 <고무인간의 최후>의 잔상을 찾으려고 하는 것과 같이(혹은 그래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과 같이), 샘 레이미의 팬들 역시 <스파이더 맨>에서 그런 장면들을 찾아내길 바랬었으나 피터 잭슨과 비교하자면 이렇게 본인만의 스타일(혹은 악취미)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샘 레이미에겐 그리 많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드래그 미 투 헬>은 기대작, 그것도 초기대작이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알려진 바와 같이 샘 레이미가 <이블 데드>를 통해 보여주었던 그 만의 스타일을 선보일 수 있는 호러 장르였기 때문이다. 결론은 마치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플래닛 테러>를 보았을 때처럼 B급 무비만의 재기 발랄함과 클래식함에 웃으며 볼 수 있는 호러 영화였고, 무섭기도 하거니와 무언가 생각해볼 만한 여지도 남겨둔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아래부터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들께서는 맨 마지막 단락으로 이동해주세요~)





물론 샘 레이미가 연출을 맡았다고 한 시점부터 그러려니 하긴 했었지만, <드래그 미 투 헬>은 매우 노골적으로 클래식함을 내세우고 있다. 영화의 시작 유니버설의 정말 오랜만에 보는 로고는 물론이요, 크리스토퍼 영이 맡은 음악 역시 고전 호러 영화들에서나 등장할 법한 악기들, 효과들로 가득채워져 있다(크리스토 영은 여러 작품에 참여하긴 했지만, 역시 그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았을 때 <나이트 메어 2> <헬레이저> <플라이 2>등 공포영화들이 단연 눈에 띈다). 물론 대문작만한 'DRAG ME TO HELL'이라는 타이틀도 빼놓을 수 없겠다.

주인공인 크리스틴 브라운은 은행직원으로 공석으로 남아있는 팀장 자리를 위해 다른 직원과 경쟁을 치루고 있기도 한 여성이다. 어느 날 남루해보이는 한 할머니가 주택 융자금 상환을 연장해 달라며 크리스틴을 찾게 되는데, 그녀는 처음에는 이 할머니의 사정이 딱해 연장을 지점장에게 요청하지만, 팀장 자리를 위해 결국 '본인 선택'에 따라 상환 연장을 거부하게 되고, 이 때부터 크리스틴의 악몽 같은 날들이 시작되게 된다.

이 부분은 단지 에피소드로 작용하기 위해 등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이 영화에서 생각해 볼만한 첫 번째 점인데, 주인공 크리스틴은 결국 영화 내내 자신의 이 선택을 후회하게 된다는 것이다. 단순히 한 번 정도 언급되는 것이 아니라 몇 번씩 언급될 만큼 이 선택에 대한 후회는 자주 등장하는데, 앞서 언급했듯이 연장을 해줄 수도 있는 권한이 있었음에도 결국 승진을 위한 욕망 때문에 자신 스스로 연장을 거부하고 말았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더 큰 짐으로 오래 남게 된다.




그렇다고 노인을 냉정하게 뿌리친 크리스틴의 행동이 반드시 잘못된 것이냐고 하면 그건 절대 아니올시다다. 관객들은 크리스틴이 처음에는 연장을 해주려고 했다는 것도 알고 있고, 이 할머니의 행색이 범상치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으며, 더 나아가 이후에 조금씩 언급되는 그녀의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들을 통해, 승진을 위해 할머니를 뿌리친 행동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크리스틴은 시골 출신으로 열심히 살고 있는 직업여성이지만 부잣집에다가 잘 나가는 남자친구에게 어울리기 위해 또 그녀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부모님에게 인정받기 위해 '팀장(부지점장)'이라는 사회적 자리는 놓치기 힘든 유혹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녀가 과거에는 굉장히 뚱뚱한 몸매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일도 자기관리도 얼마나 독하게 해와서 지금의 자리와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게 되었는지는 어렴풋이 유추해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 잘해보려던 그녀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가는 것이며 반대로 단 한 번의 선택으로 인해 모든 것이 망쳐지고 마는 그녀의 현실에 안타까움도 들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이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후반부에도 매우 중요한 지점에서 다시 들고 나오는데, 악마인 라미아에게 영혼을 빼았기지 않기 위해 저주를 받은 물건(단추)을 다른 사람에게 주면 된다는 말에 크리스틴은 아침이 오기 전에 이 단추를 전달할 사람을 찾게 된다. 관객은 앞선 이유들로 그녀에게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와 승진을 두고 다퉜던 남자에게 줘버렸으면 하는 생각을 크리스틴과 마찬가지로 하게 된다(단순히 경쟁상대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행동이 좋지 않았기 때문인 것은 당연하다). 크리스틴은 사람이 많은 식당에 앉아서 이 저주를 자신에게서 옮겨갈 사람들을 고르는데, 할머니의 어려운 상황을 들어주려했던 그녀 답게 쉽사리 사람을 고르지 못한다. 결국 아무도 찾지 못하고 자신의 일을 망쳐버렸던 경쟁직원인 스투를 불러내어 단추를 주려고 하지만, 결국 눈물을 흘리는 그의 모습에 마음 여린 그녀는 단추를 전달하지 못하고 만다. 결국 이런 엄청난 재앙이 그 시작도 자신의 선택이었고, 재앙을 끝낼 수 있는 것도 본인의 선택이라는 설정은 의미있고도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드래그 미 투 헬>은 B급 호러무비 답게 무섭고도 유머러스한 영화다. 앞서 <플래닛 테러>와 비교하기도 했었는데 사실 정확히 두가지가 비교대상으로 보기는 어려울 듯 하다. <플래닛 테러>가 B급 호러 무비의 감성을 가지고 '웃길려고 작정한' 영화였다면, <드래그 미 투 헬>은 '작정하고 B급 호러무비의 감성을 제대로 담으려고' 한 영화라고 보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물론 여기서 '웃기다'라는 것은 다순히 웃껴서 웃는 것 외에 신나는 것 그리고 이해 대한 '환호'가 포함된 의미다). 포스터만 보면 단순히 무섭기만 할 것 같았던 이 영화는 은근히 아니 대놓고 웃겼던 재미있는 영화였다. 보통 공포 영화같으면 하나의 시퀀스가 휘몰아치고 나면 '한숨을 먼저 쉬며 숨을 돌리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숨을 돌리는 동시에 절로 웃음이 터져나온다. 그 직접적이고 만화같기까지 한 장면들이 한 편으론 징그럽고 더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론 시퀀스가 끝나고나면 그저 웃긴 장면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이 부분은 참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보면 아는데 그냥 무서움과 더러움 그리고 웃음이 함께 터져나온다).

뻗어나간 주먹이 입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고, 파리가 콧구멍으로 들어갔다가 나오고, 머리에 강한 충격을 받자 눈알이 마치 총알처럼 튀어나오고, 틀니가 빠진 할머니가 크리스틴의 턱을 마치 삼킬 듯이 물어대고, 호치키스가 박혀 눈을 뜨지 못하는 장면 등등은 묘사만 보면 호러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으나 막상 보면 뭐랄까 박장대소는 아니더라도 더럽거나 역겨운 장면을 보았을 때 내곤 하는 '으....'하는 소리와 함께 슬쩍 슬쩍 웃게만드는 장면이기도 하다. 또한 이 할머니와 크리스틴이 차 안에서 격투를 벌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 역시 묘한 B급 호러의 감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장면이다. 공포의 존재가 주인공을 계속 공격하는 무서운 장면이지만, 이 둘의 격투 가운데는 분명 우스운 부분이 존재하고 공격을 성공하고 나서는 스스로 대견함과 이겼다는 것에 만족하며 웃어대는 크리스틴의 모습은 만화같아서, 또 그냥 우스워서 웃음이 나기도 한다.

이 처럼 공포와 웃음, 악마의 등장과 주술적인 이미지 그리고 쌩뚱맞으면서도 뻔뻔한 대사나 행동들이 절묘하게 결합한 분위기는 이 영화만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단 적인 예로 마지막 라미아의 영이 씌워진 남자가 공중에서 춤을 추는 장면은 이런 두 가지 요소가 극대화된 장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선택한다는 것과 맞물려 겉보기엔 약해만 보였던 크리스틴이 막판에 가서는 매우 능동적으로 두려워하지 않고 싸운다는 점에서 인상적이기도 했다. 결국 이미 무덤에 묻혀있는 할머니를 찾아가 단추를 전해주고야 마는 장면에서 크리스틴의 모습은 어느 영화의 여전사 못지 않은 포스를 자랑하는데, 여기서 그녀의 모습은 그녀가 무력적으로 강인해서라기 보다는 심리적으로 분노에 차서 나타나는 행동들이기에 굉장히 '시원하게' 느껴졌다(그런데 그러고나서는 갑자기 힘없이 버둥대는 모습도 재밌었다 ㅎ).

크리스틴 역을 맡은 알리슨 로먼은 개인적으로 <빅 피쉬>의 청순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이미지로 형상화되 남아있는 배우였는데, 적어도 한동안은 이 영화의 이미지로 남을 듯 하다. 잠시 그 빛나는 금발과 노란 드레스를 입었을 때는 슬쩍 <빅 피쉬>가 연상되기도 했을 정도. 크리스틴이라는 캐릭터가 결코 호락호락한 캐릭터가 아님이 분명할 텐데(육체적으로 감정적으로 둘다) 알리슨 로먼은 관객이 그녀의 현실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연기를 펼쳤다는 점에서 합격점을 주고 싶다. 남자친구인 클레이 역의 저스틴 롱 역시 이 영화에 현실감을 주고 있는 캐릭터를 잘 소화하고 있으며, 짧지만 영매 역할을 훌륭히 소화한 <바벨>의 아드리아나 바라자('바벨'에 비해 살이 많이 빠진 모습이었다)도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역시 무엇보다 그 무서운 '가누시'부인 역할을 맡은(지금까지 리뷰에서 '할머니'라고 지칭했던;;;) 로나 라버의 연기는 그 무섭고 지저분한 분장들이 더해져 이 영화에서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이미지를 선사했다. 'You Shame Me'라는 대사가 얼마나 공포스럽게 들렸는지 아직도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을 정도며, 아마도 한 동안 틀니만 보면 그녀가 생각나지 않을까 싶다.




<드래그 미 투 헬>은 <이블 데드>를 인상깊게 본 영화팬들이라면 절대 놓쳐서는 안될 B급 호러영화의 수작이자, 샘 레이미의 호러를 오랜만에 만나볼 수 있는 놓칠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할 것이다. 아...생각만으로도 공포스럽고 웃기기까지한 이 영화!


1. 극장에 외국인이 많아서 인지 제가 예전 <플래닛 테러>를 리뷰했을 때 썼던 것처럼 조금 소리내어 반응하고 환호하는 분위기가 펼쳐졌습니다. 이런 영화는 이런 분위기가 훨씬 어울리더군요 ㅎㅎ

2. 그 점보는 집에 들어갔을 때 TV에 고전 흑백영화가 나오고 있었는데 혹시 이 영화 아시는 분 계실지?

3. 은행에서 일하는 분 가운데 오늘 상환연장이나 대출 거절해준 분이 이 영화를 본다면 얼마나 공포스러울까요? ㄷㄷㄷ

4. 원래 imdb의 트리비아까지는 거의 살펴보는 편이 아닌데, 이 영화는 2번 내용이 있나 확인해보려 들어갔었는데 흥미로운 뒷이야기들이 제법 있군요 (http://www.imdb.com/title/tt1127180/trivia)

5. 이 영화는 놀랍게도 (국내)15세 관람가입니다. 18세 관람가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멋진 호러영화를 만들 수 있는 것.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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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1318 (If you were me 4, 2008)
청소년 영화, 그 이상의


<과속 스캔들>로 큰 인기를 얻은 박보영 양이 포스터에 큼지막히 자리잡고 있는 청소년 영화 <시선 1318>은, <여섯 개의 시선>에 이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제작한 또 하나의 옴니버스 영화이다. 처음 이 영화를 알게 되었을 때만 해도 (더 나아가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보기 직전까지도) 이 영화에 대한 기대치는 그리 높지 않았었다. 김태용, 방은진, 윤성호, 이현승, 전계수 감독 같은 믿을 만한 감독들의 작품들이 엮여 있음에도 이 작품을 섣불리 오해했던 것은 윤성호 감독의 작품 제목처럼 '청소년 드라마의 이해와 실제'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이었는데, 흔히 '청소년 영화'라고 하면 어느 정도 그려지는 그림들이 있기 때문에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5편의 작품이 하나하나 막을 내리는 순간, 점점 움찔움찔하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고, 결국 맨마지막 김태용 감독의 작품으로 영화가 마무리되었을 땐 적잖은 소름마저 발견할 수 있었다. 사실 <시선 1318>을 단순히 '청소년 영화'라는 범주로 남겨두기엔 아쉬운 점이 많다. 청소년 영화라기보단 '청소년의 영화'라고 보는 편이 오히려 더 맞을 듯 싶다. 어른의 시각에서 청소년을 바라본 영화가 아니라 그들의 시점에서 최대한 자신들의 얘기를 미화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그대로 현실적으로 그려낸 이야기. 청소년이라면 더욱 공감했겠지만 그렇지 않은 나로서도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번갈아가며 감동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진주는 공부중
방은진 감독 작품


<시선 1318>에 담긴 다섯 가지 작품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도 한, 그래서 다른 한편으론 편안한 작품이기도 하다.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박진주와 말썽꾸러기이자 꼴지로 대변되는 마진주, 즉 '진주'라는 같은 이름을 가졌지만 사회에서 바라보았을 때 전혀 다른 아이인 이 두아이를 주인공으로 입시지옥에서 살고 있는 10대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전체적인 주제도 그렇고 이쁘고 공부잘하는 아이와 공부 못하고 그리 이쁘지 않게 생긴 두 아이를 대치점으로 묘사한 방식은 굉장히 익숙한 방식이라 신선하지는 않지만, 이런 보편적인 구성을 뮤지컬이라는 방식으로 지루하지 않게 그려내고 있다.

또한 이 두 아이를 완전히 가르기 보다는 그저 조금 '다른'(틀린이 아닌) 아이 정도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고 또한 박진주의 이야기와 마진주의 이야기를 모두 다 비중있게 그려내면서 각각이 겪는 문제(물론 박진주에게 좀 더 포커스가 가 있긴 하다)를 동시에 풀어내려고 시도하고 있다. 공부를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왜 하는지도 모르게 세뇌당하듯 해야하는 청소년들의 현실을 그려냈고, 이를 탈출하는 방식으로 춤과 음악을 더했는데 여기에 아기자기한 컴퓨터 그래픽이 더해져 소녀들의 풋풋함과 싱그러움을 더한다.





You and Me
전계수 감독 작품


<삼거리 극장>을 연출했던 전계수 감독의 작품은 개인적으로 다섯 작품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취향에 가까운) 작품이기도 했다. 역도선수로 운동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소영과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해 호주로 이민을 준비하고 있는 철구의 이야기는 각각 다른 듯 하지만 맞닿아 있는 구성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보는 내내 <아모레스 페로스> <바벨> 등을 연출한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작품을 보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는데, 전체적인 색감도 그렇고 한 장소나 각각의 인물이 무심한 듯 교차하는 방식이나 같은 인물이 각각 서로가 모르게 관계를 맺고 있는 구성, 그리고 인물들의 얼굴을 타이트하게 클로즈업하는 장면이나 굉장히 길고 느리게 진행되는 호흡에서도 이냐리투 감독의 아우라가 느껴지기도 했다.

무언가 확실하진 않지만, 꼭 정답을 찾아야만 되는 가에 대한 답답함 그리고 자신의 불투명한 미래 아니 불투명하다기 보다는 아직까지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을 찾아내지 못한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감성적인 화면으로 담아내고 있다. 그리고 두 주인공을 맡은 이 아이들은 어찌나 연기를 잘하는지 표정 하나하나가 흡입력이 대단했다. 영화 장면 가운데 갑자기 바닷가에서 소방수가 물을 뿌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은 마치 프랑스 예술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기이한 판타지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자신의 미래마저 선택하지 못하는 불운한 청소년의 현실이 담겨있다. 아, 그리고 이 작품을 보는 내내 속으로 '참~ 잘 찍었다'라는 생각이 몇 번이나 들었다. 카메라의 앵글이나 색감이나 로케이션 모두 감탄을 불러 일으킬만한 멋진 작품이었다.





릴레이
이현승 감독 작품


박보영 양의 출연으로 화제가 되었던 <릴레이>는 <그대 안의 블루> <시월애>등을 연출했던 이현승 감독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다섯 작품을 통틀어 가장 유머러스한 분위기를 시종일관 다루고 있고 다양한 까메오의 출연으로 지루하지 않은 작품이기도 하다. 청소년의 임신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단순한 소동 정도로 보여지지 않기 위해 겉으로는 가벼워보이지만 속으로는 뼈가 있는 장치들을 여럿 배치해 두었고, 배우들이 카메라를 직접 바라보고 이야기하는 설정을 두어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기도 하다.

'왜 미혼모만 있고, 미혼부는 없어?'라는 대사는 가볍게 웃고 지나칠만한 대사는 결코 아니었으며, 아이를 낳은 여학생의 학습권에 대해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아이들 외에 학교에 선생님으로 등장하는 어른들을 그린 방식도 인상적인데, 초반에는 각자 자신의 과목 스타일로 이 문제를 해결해버리려는, 쉽게 말해 어른의 이기적인 잣대로 그저 무마시켜버리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후반부에 가서는 어른들도 '이해는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렵지 않느냐'라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것이 결국 제목인 '릴레이'처럼 청소년이 혼자서 혹은 선생님을 비롯한 어른들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까지 곁들여져 모두가 함께 고민하고 풀어가야 할 문제라는 사실을 직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문성근, 정유미 씨의 출연은 전혀 몰랐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서프라이즈 했으며, 문성근씨의 '그것이 알고 싶다' 연기는 또 하나의 흥미였다. 학교 내에 비추는 자연광으로 묘사한 마지막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청소년 드라마의 이해와 실제
윤성호 감독 작품


앞서서 이현승 감독의 작품을 이야기하며 '다섯 작품을 통틀어 가장 유머러스한 분위기'라고 이야기했지만, 이것은 좀 대중적인 코드의 유머를 뜻한 다면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었던 작품은 역시 윤성호 감독의 작품 <청소년 드라마의 이해와 실제>였다.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았던 이 영화는 여러 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는데, 챕터 제목들만 봐도 이 작품의 분위기를 반절은 느낄 수 있다. 비트박스와 화면 중간에 등장하는 자막으로 리듬감과 감성을 더했으며, 화면의 톤을 대사와 인물의 등장에 따라 다운시키고 돌리고 하는 방식도 인상적이었다.

'이해와 실제'라는 제목처럼 윤성호 감독은 과장되거나 보기 좋은 드라마 보다는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를 원했는데, 크래딧을 보니 실제 학생들이 자신의 출연 부분에 있어서는 대사를 직접 만들고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던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에 등장하는 대사들은 하나 같이 주옥 같다. 뭐랄까 'You and Me'를 보면서 나중에 DVD가 출시되면 살까 말까 고민하던 심정이 이 작품을 통해 확정으로 굳어졌달까. 마을 어귀에서 두 아이가 나누는 대화는 윤성호 스타일이 가미되었으면서도 전혀 가공되지 않은 느낌의 신선함 그 자체의 순간이며, 아이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는 어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투박하긴 하지만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들이 담겨있다. 대사가 만들어내는 맛과 편집과 구성이 이끌어내는 리듬, 그리고 메시지마저 더해진 이 작품은 분명 윤성호 감독과 아이들이 직접 만든 또 하나의 '우주' 그 자체일 것이다.





달리는 차은
김태용 감독 작품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김태용 감독의 <달리는 차은>은 감성적으로는 대중적으로나 가장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 작품이 아닐까 싶다. 전작 <가족의 탄생>과는 또 다른 '가족의 탄생'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청소년 기에 겪는 이성과 꿈과 현실에 대한 고민들을 잘 어루만지고 있다. 다문화 가정에 대한 이야기 역시 인권을 이야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소재로 더이상 새롭지 만은 않은 이야기이지만, 김태용 감독은 마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작품 같은 절제된 장면들과, 인물들에게 강요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방식을 선택하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주제를 부담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생각이 들었던건, 앞서 'You and Me'가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 작품이 떠오르는 것은 비교가 안될 정도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우라를 심하게 느낄 수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주인공 차은 역할을 맡은 전수영 양의 클로즈업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고레에다 히로카즈 월드에서 지금 막 뛰쳐나온 캐릭터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굉장히 인상적인 얼굴과 표정을 갖고 있었다. 전수영 양을 비롯해 엄마 역할을 맡은 아르세니아 씨 역시 비전문 배우라고 하는데, 이들이 만들어내는 장면들은 그 오스카 위너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장면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깜깜한 밤 아스팔트 도로 위를 달리는 장면도 뇌리에 남고, 무엇보다 차은이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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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빈치 코드 : 블루레이 리뷰 (Da Vinci Code : Blu-ray Review)
http://dvdprime.paran.com/dvdmovie/DVDDetail_Sub.asp?dvd_id=1791&master_id=11



확실히 영화 자체가 아쉬운 점이 많았던 작품이긴 하지만, 블루레이로서는 비교적 만족스러운 퀄리티로 발매된 타이틀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더 (Mother, 2009)
그녀의 이름은 마더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을 연출했던 봉준호 감독의 <마더>는 박찬욱 감독의 <박쥐>와 홍상수 감독의 <잘알지도 못하면서>와 더불어 올해 한국영화 가운데 가장 큰 기대작이었다. 박찬욱과는 다르게 또한 홍상수와는 다르게 자신만의 영역을 확실히 하고 있는 봉준호 감독은, 앞선 두 감독들 보다는 좀 더 대중적이면서도 그 안에 자신이 하려는 이야기를 잘 녹여내는 동시에 '봉테일'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완성도와 짜임새 면에서는 항상 만족감을 주었던 감독이기에, 그의 2009년 신작 <마더>는 태생부터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던 작품이었다. 더 적나라하게 얘기하자면 국민 엄마로 불리우는 김혜자씨의 캐스팅도, '얼마면 돼'를 외치던 꽃미남 원빈의 복귀작이라는 이유는 전혀 관람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마더>에 대한 기대는 오롯이 감독인 봉준호에 대한 것이었다.

더 기대가 되었던 것은 개봉 전 알려져있던 대략의 시놉시스였다. 조금은 모자란 아들 도준(원빈)이 살인사건에 억울하게 휘말리게 되면서 이를 구하기 위해 어머니인 '혜자'가 (크레딧에는 이름 없이 '마더'라고만 표기되지만 각종 인터뷰를 통해 감독은 이 역할을 '윤제문 - 제문' '전미선 - 미선'과 마찬가지로 '혜자'라고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직접 나서게 된다는 것이었는데, 대략의 줄거리만 놓고 보았을 때 이 영화는 브라이언 싱어의 <유주얼 서스펙트>가 되거나 수오 마사유키의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가 되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시놉시스를 놓고 보았을 때는 누가 범인인지를 가지고 <유주얼 서스펙트>식으로 풀어내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아보였다. 그렇다면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와 같은 주인공의 심정에 완전히 동화된 작품이 나올 것인가 하면 이 쪽은 봉준호 감독의 스타일과는 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결국 봉준호 감독은 반전 자체가 핵심이 되기 보다는, 자신의 작품들이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사건 자체의 구조보다는 그 안에서 한국사회 특유의 문제점을 꼬집는 동시에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인물이 겪는 심리상태와 갈등에 더욱 집중하는 영화를 선사하고 있다. 이 영화가 비슷한 줄거리의 영화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 것은 주인공이 바로 '엄마(mother)'였다는 점일 것이다.



(이후 부터는 내용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들께서는 맨 마지막 단락으로 이동해주세요~)




(홀로 들판에서 춤을 추는 영화의 첫 장면은 슬프다 못해 너무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줄거리만 놓고 보자면 이건 완전 신파 드라마 연속극으로 그리기 딱 좋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자신에겐 전부인 아들을 구해내기 위해 역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게 되는 어머니의 모습은 우리내 정서와 맞물려 찡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기 손쉬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이 이렇게 완만한 드라마를 만들리는 만무한 일. 감독은 살인사건이라는 소재를 가져와 직접적으로는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에 대해, 부수적으로는 한국 사회의 병폐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한 인간의 집착이 얼마나 잘못된 행동들을 정당화 하게 되는지 그리고 눈에 쉽게 보이는 것들 즉 믿고 싶어하는 것들의 허구가 얼마나 많이 인간 스스로를 세뇌시키는지에 대해, 그 시작과 과정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나는 마지막까지 마치 춤추듯 리듬을 타며 전달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영화 속 엄마와 도준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도준은 약간 지체를 겪고 있는 어른으로서 혜자에게는 항상 걱정거리다. 시간 맞춰 약을 먹이고 약 먹다가 도망쳐버리는 도준을 잡기 위해 버스 뒤를 쫓기도 하고, 쉽게 말해 하나 부터 열까지 다 보살펴주려고 애를 쏟고 있다. 그런데 이 둘의 관계는 단순히 홀어머니와 부족한 아들로만 미뤄 생각하기엔 너무 흥미로운 점들이 많다. 이 영화에서는 상당히 아슬아슬하게 성적인 코드가 담겨있는데, 그 대상이 어머니라는 점에서 더 흥미롭게 다가오는 듯 하다. 밤 늦게 집에 돌아와 자리에 눕는 도준은 옆에 누워있는 엄마의 젖가슴을 만지며 잠이든다. 그리고 밥상 머리에서 삼계탕을 먹으며 정력에 좋다는 얘기를 나누며 '정력은 있어서 어디 쓸 데나 있어?'라며 수줍게 도준에게 묻기도 한다. 물론 정말 제 몸 같은 자식에게 갖는 어머니로서의 모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부분이겠지만, 영화 속 혜자의 미묘한 표정들과 대사들은 단순한 '모정'이라고만 보기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정력은 뒀다 모하게?' '잘 여자나 있어?'라고 물어볼 때 혜자의 표정과 목소리는 미묘하게 떨린다. 이는 단순히 자식이지만 이런 말을 나누기가 민망해서라기 보다는 모정 그 이상의 존재 대 존재로서의 사랑이 존재하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만약 정말 모정만으로 이런 얘기를 나눴다면 아마도 <박쥐>에서 라여사가 강우에게 그랬던 것처럼 되어야 했을 것이다.



(영화 초반 노상방뇨를 하고 있는 도준을 따라가 약을 먹이는 장면은 정말 여러가지를 은유하고 있는 장면이라 할 수 있겠다. 먹는 것과 배설이 동시에 일어나는 그로테스크한 묘사는 물론, 도준이 떠나고 나서 그 현장을 지우기 위해 애써 발을 움직이는 혜자의 모습은 앞으로 일어날 여러가지 일을 암시하기도 한다)

혜자의 캐릭터를 보았을 때 앞선 것들과 같이 성적인 코드로 읽을 만한 장면은 더 있다. 범인으로 의심되는 진태에게서 증거를 잡아내기 위해 진태의 집 안 옷장에 숨었을 때 혜자는 진태와 술집 맨하탄 집 딸이 정사를 나누는 장면을 보게 된다. 여기서도 카메라의 위치 등을 고려해 보았을 때 감독은 분명 혜자의 숨겨진 성적 코드를 의도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아들 같기도 하고 다른 한 편으론 마치 집 나간 남편처럼도 느껴지는 진태가 성관계를 갖는 모습을 바라보는 혜자의 시선에서는 묘한 감정이 느껴지는데 이것 역시 민망함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그 이후 문아정의 친구의 부탁으로 마트에서 생리대를 사다주는 장면에서도 점원의 의심스런 눈초리와 혜자의 얼굴을 번갈아 보여주는 컷도 이런 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영화에서 서 너 차례나 반복되는 '도준이는 엄마랑 잔다며' 식의 농담도 한 두 번은 그저 모자라 보이는 도준의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해 삽입할 수 있는 대사였겠지만 이렇게 여러 번 언급되는 것 또한 같은 의미라 할 수 있겠다(그런 의미에서 남학생이 '진짜 엄마랑 자요?'라는 식으로 얘기했을 때 진태가 화를 내는 장면은 혜자와 진태에 관계를 생각해봄에 있어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을 남긴다).

진구가 연기한 진태 캐릭터에 얘기가 나온 김에 더 해보자면, 이 '진태'라는 캐릭터도 쉽게 종잡을 수가 없는 캐릭터다. 처음에는 혜자의 시선처럼 진태가 문아정의 살해범으로 생각되기도 했지만 결국 진태는 용의 선상에서 멀어지게 된다. 자신을 의심한 혜자에게 거액을 요구할 때는 다시 나쁜 놈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이후에 도준의 결백을 밝혀내려 혜자를 돕는 모습은 그저 까칠할 뿐 살해범이라던가 아주 나쁜 이는 아니구나 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리고 '이 동네 전체가 좀 이상해...'라는 식으로 얘기할 때는 마치 모든 것을 다 꿰뚫고 있는 듯한 뉘앙스마저 풍긴다. 얼핏보면 그저 작은 시골 마을에서 힘을 내세워 권력을 얻으려는, 그래서 아마도 나중에는 이 지역의 국회의원이나 공직을 차지할 것만 같은 진태의 모습은 이 영화 <마더>의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이다. 하나 아쉬운게 있다면 무언가 흥미로운 구석은 많이 남겼지만 결국 별다르게 결론짓지 않은 채 마무리 지어버렸다는 것이랄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자면 진태 라는 캐릭터에 대해서는 굳이 다 설명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진태라는 캐릭터는 아주 흔한 캐릭터 같으면서도 굉장히 이해하기 어려운 캐릭터이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아무도 믿지마, 나도 믿지마'라는 진태의 대사는 관객들에게로 향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관객들은 언제나 처럼 주인공인 혜자에게 동화되어 그녀가 보고 믿는대로 역시 믿게 되지만 영화의 결론처럼 실제 사건의 결론은 혜자의 믿음을 배신하고 있다. 진태의 말대로 주변의 도움없이 혼자의 힘으로 사건을 추리해 가던 혜자는 고물상을 운영하고 있는 한 노인이 진짜 범인임을 알게 되는데, 범인이라는 증거를 확보하거나 스스로 확인하려고 만났던 이 노인에게서 정작 진짜 범인은 도준이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하지만 혜자에게는 오로지 '도준이 범인은 아니다'라는 진리와도 같은 맹신 밖에는 없기 때문에, 그 노인의 말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이 노인의 말을 인정할 수 조차 없는 것이다. 면회를 갔던 자리에서 '네가 진짜 죽였더라도 안그랬다고 해야지'라는 말처럼, 혜자에게는 도준이 범인일 수도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이나 여지도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그 노인의 말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라던가 '아니라고 밝혀졌던데요'라고만 끝맺지 못하고 결국 그 노인을 죽일 수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사실 이것을 핵심적인 반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것은 영화의 반전이라기 보다는 극 중 혜자가 느끼는 반전일 것이며, 관객이 느끼는 반전이라면 '주인공은 항상 옳다'라는 선인겹에서 오는 반전이었다고 말할 수는 있겠다. 생각해보면 혜자는 처음부터 '도준이는 범인이 아니다'라고 믿었다기 보다는 '아닐 것이다' 혹은 '아니어야 한다'라고 믿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극 중 혜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그녀의 행동들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특히나 한국사회에서 특히 강한 모정이라는 점에 기인하자면 그 어떤 어머니라도 자신의 아들이 살인자로 몰렸을 때 '아니다'라는 것에서 부터 시작하게 될 것이며, 아들을 구하기 위해 혜자처럼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공감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영화 속 도준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극 중 혜자의 행동들은 다 이해가능한 부분이었다.

더더군다나 영화 속 혜자에게는 아들에 대해 커다란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5살 아들과 동반자살을 하려고 바카스에 농약을 타서 먹였다는, 즉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아들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인데, 도준이 이 일을 또렷하게 기억해 내면서 혜자의 이런 트라우마는 더더욱 그녀를 압박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궁금해지는 것은 바로 혜자와 도준의 관계에 있어 아버지라는 존재다. 영화 속에서는 거의 단 한 번도 혜자의 남편이자 도준의 아버지에 대한 묘사가 없는데, 반대로 다르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장면들이 있음으로 해서 영화는 조금 더 혼란스러워진다. 영화의 중반 사진관을 하는 미선에게가서 찢어진 도준의 옛날 사진을 크게 확대해서 뽑아달라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사진에 대한 언급이 그 이후에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도 의아하지만 왜 사진이 찢껴져 있었는가에(혹은 찢었는가) 대해서도 궁금한 점이 많다.

 그저 '세상 좋아졌구나'라는 대사를 등장시키기 위해 그렇게 오랫동안 도준의 예전 사진을 포토샵으로 보정하는 장면이 등장했다고 보기엔 어려운 점이 있고, 왜 꼭 찢어진(찢은) 사진이었는가에 대해서도 의문스러운 점이 많다. 영화를 보신 동료 분께서 제기하셨던 것처럼 도준이 혜자의 친아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설도 가능한 일이다. 또 하나 드는 의문점은 어찌되었든 동반 자살을 결심하고 먹게 된 농약 때문에 도준이 지체장애를 겪게 된 것인지 아니면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갖고 있던 도준과 더 이상 살아갈 자신이 없어서 자살하려고 했던 것인지, 아니면 더 나아가 장애를 겪고 있는 도준을 잠시나마 죽이려고 했었던 것인지(그래서 트라우마가 더욱 깊어진 것인지)가 불분명 하다는 것이다. 세 번째 언급한 가능성은 좀 많이 나간 것이라고 쳐도, 앞선 두 가지 의문점은 도준의 아버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과 맞물려 이 가족의 관계 설정의 미묘함을 더하고 있다.




만약 이 영화가 도준이 실제 범인임을 혜자가 알게 되는 것으로 (마치 반전 영화처럼) 끝나버렸다면 아마도 지금과 같은 감흥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이 영화는 반전 영화로서 밖에는 평가 받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치 마지막 장면임을 암시하듯 보여준 첫 장면과는 다르게 영화는 그 이후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 해서 한 발 더 나아가고 있다. 일반적인 스릴러 영화였다면 혜자가 도준이 범인임을 알고서 경악하게 되고 교차 편집으로 도준이 사실은 천재에 가까운 자였다는(이 이야기는 이 영화에서도 충분히 아직도 가능하다. 이 것에 대해서는 아래에 다시 쓰겠음)것으로 끝나버렸을텐데, 봉준호 감독이 포커스를 두고 있는 점은 스릴러 보다는 한 인간의 드라마였고(사건이 포인트가 아닌 것처럼), 어머니라는 존재로서 풀어냄으로서 다른 결말을 가능케 했다. 실제 범인이 도준임을 알고 있는 혜자에게 경찰인 제문이 찾게 되는데 여기서 관객은 혜자가 고물상 노인을 살해한 것을 제문이 알고 잡으러 왔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제문은 뜻 밖의 얘기를 하게 된다. '범인 잡혔어요.'

혜자가 굳이 범인이라고 하는 종팔이를 면회가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다. 종팔을 만난 혜자는 종팔에게 누구 있냐고, 엄마 있냐고 물어보는데, 아무도 없다는 대답에 더 오열한다. 여기서 종팔은 바로 며칠 전까지의 도준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도준과 종팔이 다른 점이 있다면 (실제 살인범인가 아닌가를 떠나서) 도준에게는 혜자라는 어머니가 있지만 종팔에게는 이렇게 자신을 구원해줄 존재가 없는 것이다. 그걸 잘 알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의 양심을 꺽고 또 한 명의 희생양을 만들게 되어버리는 자책감과 자멸감에 슬퍼하는 것이고,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울지 마라'라고 얘기하는 종팔을 도준과 맞바꿀 수는 없었던 어머니로서의 자신 때문에 미안함에 눈물을 흘리고 마는 것이다. 혜자는 종팔에게도 어머니가 있길 간절히 바랬겠지만 현실을 그렇지 못하고, 그걸 알고도 묵인해야만 하는 혜자의 모습은 또 하나의 씁쓸한 현실과도 같다.




영화의 마지막, 마을 사람들과 관광을 떠나려고 준비하는 대합실에서 도준은 혜자에게 화제 현장에서 주운 침통을 전한다. 스스로 잊으려고 했던 혜자에게(혹은 잊은 줄로만 알았던) 침통을 다시금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는 매개체로 작용한다. 그리고 버스에 몸을 실은 혜자는 영화 속에서 여러 번 얘기했던 바로 그 '모든 것을 싹 잊게 해주는, 자신 만이 알고 있는 침자리'에 스스로 침을 놓는다. <마더>가 무서운 이유는 바로 이 엔딩에 있다. 관객이 공감하고 믿었던 주인공 혜자가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의 아들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하고, 무고한 이가 범인으로 몰리는 데에도 침묵하면서 결국 진실보다는 어쩔 수 없이 도준을 택하는 모습이 비현실보다는 오히려 현실적으로 느껴진 점이 섬뜩한 부분이었다.

모든 것을 잊게 해주는 침을 스스로에게 놓고 나서 정신없이 춤을 추고 있는 아줌마들 사이로 모든 것을 포기한냥 춤을 추는 모습은 그래서 압권이었다. 더 인상적인 건 처음에는 많은 아줌마들 사이에서 혜자를 확실히 구분할 수 있었지만, 혜자가 버스 중심으로 이동해 갈 수록 혜자를 다른 이들 사이에서 놓쳐버리게 된다. 여기에서는 자신 들의 일이 아니면 금새 잊어버리고 마는 사회에 대한 메시지를 엿볼 수도 있다. 자신의 사욕을 위해 스스로 묵인을 결심한 혜자와 같이, 결국 세상도 뒤섞여 버린 혜자의 모습처럼 잊어버리게 될 것이고 이런 일들은 또 어디선가 계속 될 것이기 때문이다(홀로 춤추는 첫 장면과는 달리 여럿과 섞여서 춤추는 마지막 장면은 완벽한 대구를 이루고 있기도 하다).

이런 메시지는 영화의 전반에 드리워져 있는 한국사회의 문제점들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봉준호 감독은 <살인의 추억> <괴물>등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마더>에서도 이런 사회적인 문제들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양념으로서만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절대 가볍게 볼만한 요소들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학생 살인사건이 일어났는데 충격을 받기 보다는 그저 '우리 동네에 살인사건이 일어난게 얼마만이지'하며 '허허' 웃는 모습은 대사처럼 살인사건이 그리 자주 일어나는 곳이 아님에도 얼마나 다른 사람에 일해 무뎌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며, 잘잘못을 가려내기보다는 적당한 합의를 권하는 모양이나 다른 사람에겐 전부가 될 수도 있는 문제를 자신과 주변의 이익을 채우기 위해 마무리하려하는 변호사의 모습, 그리고 결국 살인자가 누구인가 보다는 '누군가가 되면 된다'라는 식의 처리 과정은 씁쓸한 현실을 곱씹어 보게 한다.



(시골 형사들의 디테일을 보여줌에 있어서는 한국영화계에서 아마 봉준호 만한 이는 없을 듯 싶다)

이 영화는 의외로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많다. 그리고 다양한 설들을 낳기 충분한 텍스트로 구성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도준이 혜자의 친아들이 맞는 가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겠고, 진태와 혜자의 묘한 관계도 그렇고, 가장 핵심적으로는 과연 도준이 문아정을 죽인 것인가에 대한 것도 그렇다. 고물상 노인의 말이 100% 사실이라고만 단정 짓기에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며, 애초에 커다란 돌이 날라왔던 것으로 보았을 때 여학생인 문하정이 그렇게 무거운 돌을 쉽게 던졌다고 생각하는데에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또한 고물상 노인도 역시 문아정과 관계를 했던 이들 중 하나였음을 감안한다면 자신의 알리바이를 위해 도준을 이용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바로 도준이 어린 시절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엄마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 모든 것을 치밀하게 이용했다는 점이다. 영화 속 도준의 모습에서는 가끔씩 정상적인 모습이 발견되곤 한다. 특히 도준이 무혐의로 출소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와 혜자와 식사를 하게 되는 장면에서는 확연히 드러나는데, 항상 자신만 알았던 도준이 스스로 물을 뜨러가서는 본인 것 외에 혜자의 것도 함께 가져온다. 이는 다양한 해석이 충분히 가능한 부분이며, 침통을 혜자에게 돌려주는 장면 역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영화 속 도준은 기억의 패턴이 일정치 않아서이지 두 손을 관자놀이에 가져다 대면서 예전 기억을 끄집어 내곤 하는데, 만약 도준이 실제 범인임을 더 확실히 하려면 (그리고 도준을 정말 지체 장애를 겪는 인물로 그렸다면) 혜자가 도준이 범인임을 알게 되는 것과 동시에 교차편집으로 도준이 자신이 죽인 것을 기억하게 되는 장면을 넣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것은 마치 자신이 원하는 것만 의도적으로 보여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며, 영화 전체에 미묘한 점들과 맞물려 충분히 다른 생각을 하게 끔 만들고 있다.

만약 이 영화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누가 범인인가' 하는 것에 관한 집중적 서스펜스 스릴러였다면 이 같은 떡밥들에 대해 미친 듯이 파고들어야 마땅하겠지만, <마더>는 이 것보다는 주인공 '마더'가 겪는, 자신이 믿었던 것들에 대한 배신과 허탈함에 스스로를 견뎌내지 못하는 존재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기 때문에 이 정도로만 마쳐도 좋을 듯 하다(하지만 몹시도 궁금한 것 사실이다. 이건 <괴물>에서 박강두가 굳이 골뱅이 통조림을 먹었던 것보다 더 큰 떡밥이 아닐 수 없겠다).




'마더'를 연기한 김혜자씨의 연기는 나무랄데가 없다. 그녀는 두말할 필요없는 베테랑이며 그간 TV속에서 '국민엄마'이미지에 가려 보여주지 못했던 열정을 이 영화를 통해 여지없이 표출해내고 있다. 특히나 새로웠던 것은 '어머니'라는 이미지는 물론이고 '여자'라는 이미지까지 완벽하게 소화해 내는 모습이었는데, 장면장면의 임팩트 측면에서도 그렇고, <마더>는 누가봐도 김혜자의 영화임이 분명하다.  원빈의 경우 사실 조금 걱정한 부분이었는데 캐릭터 자체가 더 단면적이라 그랬던 것도 같다. 캐릭터 자체의 운신폭이 그리 넓지 않았기 때문에 배우로서도 한계가 있었겠지만, 너무 뻔하지 않으면서 크게 어색함이 느껴지지도 않는 괜찮은 연기였다. 진구는 아무래도 <비열한 거리>가 겹쳐보이기도 했었는데, 확실히 이런 남성적인 캐릭터에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부분은 있지만 너무 굳어져 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기도 한다(하긴 두 작품과는 전혀 다른 캐릭터를 연기한 <초감각 커플>이 어색하게 느껴진 걸 보면 한 우물을 파는 것이 나을지도;;).

영화를 딱 본 소감은 마치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본 듯한 느낌이었다는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봉테일이라는 별명 답게 찾아내기 어려운 떡밥보다는 좀 더 섬세하고 명확한 것들을 미리 배치해 두고 관객들이 발견하게 하는 쪽이었는데, <마더>는 마치 박찬욱 감독의 영화처럼 느껴질 정도로 이미지로 설명하려는 장면들이 상당히 많았다. 몇몇 앵글이나 장면 같은 경우는 굉장히 상징적인 장면들이라 봉준호 영화가 맞나 싶을 정도. 물론 여기에는 박찬욱 감독과 여러 작품을 함께 해온 미술감독 류성희씨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겠다. 그녀의 손길이 아마도 여러 장면장면에서 박찬욱스러운 스타일을 느끼게 했을런지도 모르겠다.

이병우씨가 맡은 영화음악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완벽하게 비극적이지만 않고 리듬감이 있는 음악을 배치하면서 묘한 정서를 불러일으키고 있는데 메인 테마라 할 수 있는 '춤'과 '축제'는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1. 버스에서의 엔딩 장면은 요 몇 년간 본 엔딩 중에 개인적으로 최고의 장면이었습니다. 이 장면만을 보면서 속으로 '와, 봉준호 감독이 또 한 걸음 성장했구나'하는 걸 절로 느끼게 되더라구요. 그 음악과 곁들여진 최고의 결과물이란 ㅠㅠ

2. 문방구 오락실 앞에 있던 아이들의 배역 이름이 참 다채롭더군요. 문방구 오락기 중딩, 문방구 오뎅 중딩, 문방구 떡복이 중딩, 문방구 안경 중딩 등. 그 외에도 박수치는 룸아가씨로 표현된 캐릭터 이름도 재미있었구요.

3. 그러고보니 전미선씨는 <살추>에서는 남에게 주사를 놔주시더니, <마더>에서는 침을 맞는 것으로 상황이 역전되었군요.

4. 약사 역할로 나오셨던 이대현씨는 <살추>에서도 국과수 직원 역할로 나왔던 분이라 반갑더군요.

5. 일부 극장에서는 김혜자씨가 들판에서 춤을 추는 첫 장면에서 관객들이 웃었다던데...그 극장에서 안보길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살았습니다.

6. 역시 한 번 더 봐야 할까요? ^^;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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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기사 - 봉준호 감독 "스포일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http://10.asiae.co.kr/Articles/view.php?tsc=06.02.02&a_id=2009060810434166085




터미네이터 4 : 미래 전쟁의 시작 (Terminator Salvation, 2009)
아쉬움 가득한 터미네이터라는 이름의 4번째 작품


<터미네이터>는 단순한 영화 한 편, 혹은 시리즈라기 보다는 일종의 신드롬이자 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뭐 여기서 그 얘기를 다 하자면 연작으로 해도 모자를 터이니 간단하게 말하자면,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감독, 배우 등 다른 요소들에 전혀 상관없이 오로지 '터미네이터'라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에 관심을 갖고 보게 될 이들이 부지기수라는 것이다. 실제로 <터미네이터 2>의 경우는 마니아층이 아주 두터운 작품이라 출시된 DVD의 경우만 해도 일반판, SE, CE, UE 등등 수 많은 에디션들과 각국에서 출시한 버전을 따로 컬렉팅하는 유저들이 유난히 많았던 작품으로도 기억되는 영화다. 엄청난 혹평을 받았던 3편을 뒤로하고(개인적으로는 3편의 엔딩이 참으로 마음에 드는 편이다) 4편이 제작된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팬들 사이에서 기대보다 우려가 더 컸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도 크리스찬 베일이 존 코너를 연기한다고는 하지만 감독이 맥지(McG)라는 부분이 가장 불안요소였는데, 결과적으로 이 불안요소는 그대로 작용한 편이었고 <터미네이터 4>는(이 리뷰에서는 굳이 한국어 부제목인 '미래 전쟁의 시작'이라는 말은 가급적 사용하지 않으려고 한다. 'salvation'(구원)이라는 부제가 엄연히 있고 뜻하는 바가 분명 있는데 대중들이 혹할 만한 '미래'와 '전쟁'을 조합한 이 부제목은 역시나 아쉽다. 아마도 이 부제목은 이 영화가 5편, 6편쯤 갔을 때 실제 부제목으로 등장하지 않을까도 싶다), 호평 보다는 혹평이 더 쏟아지는 작품이 되어버렸다.



(이후 부터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들께서는 맨 아래단락으로 이동해주세요~)





일단 불만 혹은 아쉬운 점을 꼽자면 아무래도 영화에 시나리오와 스토리 텔링 부분을 들 수 있겠다. 만약 이 영화가 '터미네이터'가 아닌 그냥 '미래 전쟁의 시작'이었다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SF 액션 블록버스터라고 부를 수 있었을 것이다(이런 영화로서의 장점은 나중에..). 그런데 잘 알다시피 이 영화는 '터미네이터'다. 더군다나 대외적으로 프리퀄이라고 홍보한 것도 아니고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임을 자명하고 있는 작품이라는게 이 영화에 가장 아쉬운 점에 시작일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 영화를 보게 될 대부분의 관객은 그냥 액션 영화를 보자가 아니라 '터미네이터'의 새로운 시리즈는 어떨까?하는 궁금증과 기대치로 이 영화를 접하게 되기 때문에 일반 액션영화로서는 절대 이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영화 최대의 적이 '기대치'라는 점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터미네이터 : 살베이션>이 예상 보다 훨씬 더 큰 혹평을 받고 있는건, 이렇게 수년간 새로운 시리즈를 기다려온 팬들로 하여금 '아, 아쉽다'가 아니라 '이건 아니잖아'라는 생각을 하게 할 정도로 터미네이터라는 세계관에 맞지 않거나 어긋나게 묘사되고 있는 장면들과 이야기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잘 알다시피 <터미네이터>는 단순한 SF/액션 영화라기 보다는 자신 만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갖고 있는 하나의 '세계'이다. 이런 세계관이 있는 영화에서 디테일은 옵션이 아니라 필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시리즈는 너무도 이런 디테일을 놓치고 있는 장면이 많아 더 큰 아쉬움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1,2편을 보면서 상상했던 2018년의 모습은 스카이넷이라는 거대한 힘 앞에 인간들이 지하나 굴 속에 숨어 살며 존 코너를 중심으로 게릴라를 펼치는 것 정도(그러니까 스카이넷에 비해 굉장히 열악한 시설이라 해야할까)로 생각했었는데, <살베이션> 속에 등장하는 저항군의 위용(!)은 가끔 스카이넷과 동등하게 느껴질 정도다. 특히 가장 이해할 수 없던 장며는 저항군의 본부라 할 수 있는 곳에서 도망치는 마커스를 잡기 위해 대규모 공격과 폭격을 퍼붓는 장면이었는데, 이 장면에서 처음 총성이 났을 땐 나도 모르게 '어, 저러다가 스카이넷에게 들키겠다!' 했으나 스카이넷에 레이더는 자신들 기지 근방 몇미터에만 적용이 되는지, 밤중에 시끄럽도록 펑펑 총과 폭탄을 쏟아부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더라(더더군다나 물 속에는 이들을 공격하는 로봇도 있지 않았던가). 이와 비슷한 장면으로는 마커스와 블레어가 본부로 돌아가던 중 밤중에 장작을 모아 불을 피우는 장면이었는데, 사실 이 장면에서도 속으로 '불을 피우게 되면 스카이넷에서 열감지를 해서 걸리는게 아닌가'했지만 역시 걸리지 않았다. 나중에 스카이넷 본부에 존 코너가 소니 기계 하나 들고 마커스와 연락하여 유유히 들어가는 것도 그렇고, 존 코너를 막 쫓던 아놀드(!)가 카일 리스의 이야기로 잠시 갔다온 뒤엔 갑자기 거리가 멀어진 점도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었다. 저항군의 묘사에 있어서 A-10 전투기로 스카이넷의 비행선을 격추하는 장면등은 사실 전혀 의외이기도 했다.

이렇게 시나리오 측면에서 '터미네이터'임을 망각하고 단순 'SF/액션' 정도로만 접근하고 있는 부분은 이것 외에도 상당히 많다. 각 인물들의 행동들에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면에 있어서도 아쉬운 점이 많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언급하자면 분명 스카이넷에서는 '카일 리스'를 중요 인물로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별다른 조치를 끝까지 취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위에서 계속 언급한 헛점들 가운데 몇가지는 굉장히 이 작품을 이해하는 입장에서 풀어보자면 나중에 만들어질 5편 혹은 6편에서 본격적으로 풀어내기위해 던져둔 떡밥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과연 그럴까 싶기도 하지만). 왜 스카이넷이 카일 리스를 계속 그냥 두는가. 마커스의 모호한 존재에 대한 설명. 그리고 엔딩에 드러난 마커스와 존 코너의 애매한 결말 같은 경우는 후속편에서 설명하고자 하면 설을 충분히 풀어낼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만약 정말로 이렇게 후속편에서 모든 것을 설명하기 위해 던져둔 설정들이라고 해도, <살베이션>의 구성은 너무 헛점이 많았고 팬들로 하여금 아쉬움이 들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수준임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감독인 맥지가 이 영화가 '터미네이터'임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니 굉장히 고려하려고 노력한 느낌도 받을 수 있었다. 기존에 <터미네이터>를 인상 깊게 보았던 사람들이라면 쉽게 눈치챌만한 오마주와 설정 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것들에 앞서서 전체적인 이야기의 짜임새가 선행되지 못하다 보니 이런 오마주들 마저 감동적이라기 보다는 부족하게만 느껴지는 효과를 낳고 있다(얼마전 개봉했던 <스타트렉>의 경우와 좋은 비교가 될 것 같다). 사라 코너의 내레이션을 오마주한 존 코너의 내레이션도 그렇고, 카일 리스와 아놀드가 분했던 터미네이터의 그 유명한 대사(I'll be back은 정말로 전혀 살리지 못한 것 같다)도 전혀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고, 공장을 배경으로 용광로가 등장하는 장면도 그렇고, 100% CG캐릭터로 새롭게 태어난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모습도 <스타트랙>의 경우가 감동적이었던 것과는 달리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아무리 CG캐릭터라고는 하지만 터미네이터 라기 보다는 마치 이안 감독의 '헐크'처럼 느껴졌다). 아마도 맥지 감독은 이런 장면들과 설정들을 삽입하면서 무언가 이 시리즈의 팬들의 향수와 호응을 불러일으킬 것을 기대했을 것 같은데, 물론 그런 부분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100% 성공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MTV스타일의 화려하고 볼거리 가득한 액션 장면을 만들어내곤 했던 맥지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도 이런 액션 장면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오토바이 형식의 터미네이터와 추격전을 펼치는 액션 장면도 괜찮고, 헬기와 비행선을 통해 벌어지는 액션 장면들도 나쁘지 않으며, 대형 로봇이 등장하는 장면도 <트랜스포머>에 까지는 못 미치지만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관객이 얻으려고 하는 재미는 충분히 전달하는 편이다. 그리고 카메라 앵글 같은 경우도 일부 장면은 관객으로 하여금 더 실감나도록 하는 앵글을 사용하여(헬기 추락씬 같은 경우) 체감을 더하고 있기도 하다. 액션 장면들이 SF/액션 영화로서 부족한 편은 아니지만 아예 액션을 강조한 오락영화의 길을 택하던지 아니면 마커스를 중심으로한 필립 K.딕의 세계관을 통해 고민하는 철학적 내용으로 담아내었던지(물론 가장 좋은 건 이 두가지의 조화일 것이나) 하면 조금 더 좋을 수도 있었겠으나, 맥지 감독은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가 결국 다 놓쳐버린 꼴이 되어버린 것 같아 아쉬움이 든다.




마커스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샘 워싱턴이 연기한 마커스 라이트는 사실상 <터미네이터 : 살베이션>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분명 존 코너의 감정선 보다는 마커스의 감정선을 따르고 있으며, 캐릭터가 주는 임팩트도 오히려 마커스가 존 코너보다 나은 편이다. 마커스라는 캐릭터는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이기도 한 필립 K.딕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에서 영향을 받은 캐릭터라고 할 수 있을텐데, 그래도 샘 워싱턴의 연기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연기한 완전한 로봇 같은 이미지보다는 본인이 인간임을 굳게 믿는 존재로서의 혼란스런 가치관을 잘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었으며, 그 여정에 어느 정도 설득력도 있어 보였다. 만약 이렇게 마커스라는 새로운 캐릭터에게 큰 비중을 주고 있는 영화라면 오히려 더 마커스에게 집중해서 그의 가치관과 존재의 비밀까지 파해치는 영화가 되었으면 (존 코너는 거들 뿐) 차라리 색깔있는 시리즈 중 한편으로 인정받지 않았을까도 싶다.

존 코너 역할의 크리스찬 베일은 나쁘지는 않으나 영화 속에서 존 코너라는 캐릭터 자체가 큰 인상을 주지 못하다보니 별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분위기다. 많은 팬들이 '그래도 크리스찬 베일이라면....'하고 기대했던 것에 비해서는 조금 아쉬움이 남을 듯 하다(이건 본인의 연기문제라기 보다는 시나리오상의 문제겠지요). 카일 리스 역을 맡은 안톤 옐친은 <스타트렉>에 이어 자주 얼굴을 보게 되었는데, 영화가 끝나고 한 관객분이 '원래 영어 잘하네'라는 말을 하시던데, 공감한다 ㅎ 카일 리스라는 캐릭터가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라는 점에 비춰봤을 때에는 역시 아쉬운 부분이 들기도 한다. 블레어 윌리엄스 역할을 맡은 문 블러드굿은 딱 기대했던 정도의 모습이랄까. 왠지 메간 폭스를 떠올리게 하는 느낌도 있었다. 초반에 살짝 등장해주었던 헬레나 본햄 카터는 뭐 비중이 크지 않아 별로 할 말이 없을 듯 하고, 이젠 영화배우로서 더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커먼(common)은 개인적으로는 더 멋진 앨범으로 돌아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마이클 아이언사이드는 출연여부를 몰랐기 때문에 등장만으로도 상당히 반가웠었는데 반가움 이상으로 발전할 비중은 없었던 것 같다. 케이트 역을 맡은 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는 아마도 속편을 위한 떡밥을 담당하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개인적으로는 괜찮았다.




결과적으로 이번 작품 <터미네이터 : 살베이션>은 터미네이터의 새로운 시리즈를 기다렸던 많은 팬들에겐 아쉬운 작품이 될 것 같다. 분명 후속편을 염두해 두고 있는 작품이라는 점이 과연 앞으로 기대로 작용하게 될지 더 큰 불안요소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터미네이터>를 액션 영화로만 접근하면 어떤 아쉬움을 자아내는지 스스로 보여준 영화가 아닐까(그렇다면 5편은 아예 철학적 난해한 텍스트로? ㅎ).


1. 이 영화는 터미네이터의 창조자 '스탠 윈스턴'에게 헌정되었습니다.

2. 본문에도 있지만 맥지 감독이 기존 팬들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한 건 느낄 수 있었어요.

3. 롯데시네마 였던가 이 영화 예고편을 패러디해서 '매너전쟁'이라는 캠페인 광고를 만들었었는데, 크리스찬 베일이 극중에서 'we are all dead'할 때 자꾸 매너전쟁이 오버랩되서 곤란했다는 ---;;;

4. 그런데 블레어 눈 주위에 붉은 색은 처음에는 비행선에서 탈출할 때 헬멧을 오래 쓰고 있어 생긴 자국인줄 알았는데, 마지막 장면에 다시 등장하더라구요. 위장이고 하기엔 좀 어색한 것 같은데. 사실 로봇과 전쟁하는데 얼굴에 위장하는건 소용없는 일이잖아요;;

5. 완전 잡담으로, 전 언제부터가 영화에서 헬기타고 떠나기만 하면 <영웅본색 3>가 떠올라요 -_-;;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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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bee - The Passage
거품 싹 뺀 힙합앨범

소울컴퍼니(Soul Company)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키비(Kebee)의 세 번째 앨범 'The Passage'가 발매되었다. 소울컴퍼니를 알게 된 이후부터는 언제부턴가 무브먼트 크루나 부다 사운드 같은 그래도 나름대로의 메이저 힙합 음악들 보다도, 오히려 이들의 참신하고 새로운 사운드에 더 주목하게 되었던 것 같다. 한참 Nujabes에 빠져 있을 때 The Quiett이 만들어낸 비트들은 단번에 주목을 받기에 충분한 것이었으며, 키비의 곡들 역시 라임과 비트가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듣기 시작한 소울컴퍼니의 앨범들은 각자의 솔로 앨범들과 프로젝트 앨범 그리고 소울컴퍼니가 모두 참여했던 'The Bangerz'앨범들까지 관심을 갖게 했고, 결국 키비의 세 번째 앨범은 나름 기다리기까지 하는 앨범이 되었다.




CD를 플레이어에 넣고 첫 트랙 'Soulport'를 만났을 때의 느낌은 약간 의외였다. 빠르고 경쾌한 비트와 어쿠스틱 기타 사운드가 조화를 이뤄 마치 해변도로를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인스트로멘탈 곡은, '여정'이라는 앨범의 타이틀을 다시 한번 떠올려볼 수 있는 곡이었다. 곡 말미에 우주적인 사운드를 삽입한 것은 자켓 디자인과 연관되는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두 번째 트랙 'Diving'의 베이스가 되는 백킹 사운드는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감'이다. 이런 사운드가 만들어내는 특유의 공기가 있는데 이 곡을 통해서도 이런 분위기를 맛볼 수 있었다. 굉장히 세련된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곡으로 이번 앨범에 전체적인 퀄리티도 가늠해볼 수 있었다. 'Wake Up'은 스크래치 사운드와 일렉트릭한 사운드가 강한 비트와 라임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곡이다. 그 다음 트랙 '사진기'는 여성적인 분위기와 소년의 감성으로 다루고 있는 곡으로 후렴구의 lady Jane의 피쳐링이 돋보이는 곡이다. 굉장히 팝적인 곡으로서 이 정도면 충분히 대중적이라고 생각될 정도다. 물론 그 가운데서도 퀄리티의 저하는 겪지 않고 있으니 안심해도 될 듯 싶다.

다섯 번째 트랙 '불면제' 역시 샛별의 피쳐링이 더해진 곡으로 키비의 멈추지 않는(?) 랩핑이 돋보이는 곡이다. 전체적으로 비트나 사운드가 만족스럽다보니 오히려 인스트루멘탈 버전으로 앨범을 통으로 발매해도 괜찮겠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키비의 라임이나 랩핑이 불만족스럽다는 것이 아니라 비트가 만족스럽다는 쪽의 반영이다. 넋업샨, Loptimist, Jinbo가 피쳐링으로 참여한 '화가, 나'는 각각의 개성을 맛보는 재미가 쏠쏠한 곡이다.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각각의 다른 컬러를 맛볼 수는 있지만 각각의 매력이 최대한 발휘되지는 않는 다는 느낌이었다.




'Go Space'는 역시 경쾌한 기타 사운드와 일렉트로닉한 사운드 소스가 결합해서 신나는 분위기를 연출하는 곡이다. 예전 키비의 음반을 들었을 때는 느린 비트의 감성적인 곡들에 더 잘 어울리는 랩핑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번 앨범을 들으면서 약간은 생각이 틀려진 편이다. 빠른 비트의 팝적인 곡에서도 상당히 잘 어울리는 랩핑을 선보이고 있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트'는 아무래도 타블로가 참여해서 화제가 되지 않을까 싶다. 랩이 아닌 노래하는 키비의 보컬을 들어볼 수 있고, 역시 우주적인 일렉트로닉 사운드 소스가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곡으로 전체적인 앨법 컨셉에 부합하는 곡이라 할 수 있겠다. 아홉 번째 트랙 'Goodbye Boy'는 역시 키비의 장기라고 할 수 있는 아기자기하고 심플하면서도 가사의 집중력이 높은 곡이다. 앞서서 빠른 비트의 곡에 잘 어울린다는 얘기를 했었는데, 물론 그렇다고 해서 느린 비트의 아기자기한 곡에 어울리지 않는 다는 말은 아니다. 이런 소년 같은 감성과 분위기는 역시 키비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열 번째 트랙 '그림자'를 지나 'Where is the Claps?'를 듣고 있노라면 점점 음악의 전체적인 분위기 보다는 좀 더 디테일한 면을 찾아들어보게 되는데, 잘 들어보면 상당히 세심한 면까지 신경쓰고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음악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단순히 보컬과 반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악기 하나하나, 소스 하나하나를 들어보면 이 음악에 창작자가 얼마나 많은 공을 쏟았는지 알 수 있는데, 키비의 음반에서도 이런 노력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열 세번째 트랙 'Still Shining'은 더 콰이엇과 D.C가 피쳐링으로 참여하고 있는 곡이다. 이 곡은 세 번째 앨범을 발표하게 된 키비의 자전적인 심정이 담긴 곡으로서 '달라질건 없지'라는 가사처럼 지금의 현실을 직시하고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다짐이 담긴 곡이기도 하다. 마지막 트랙 '이 별에서 이별까지'는 첫 번째 트랙과 대구를 이루고 있는 인스트루멘탈 곡인데, 첫 번째 곡에서 말미에 살짝 우주적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맛만 보여주었었다면 마지막 트랙에서는 본격적으로 이 사운드를 이용해 곡을 진행하고 있다. 뭐 당연한 것이겠지만 곡 곡이 아니라 하나의 앨범으로서 평가받으려는 키비의 의지가 담긴 설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전체적으로 이번 앨범은 키비 특유의 장점을 잘 가지고 있으면서도 대중적으로도 크게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접근성이 용이한 음악이 수록되었다고 생각된다. 샘플링을 최소화 하고 심플한 악기 구성과 플로우 만으로 세련되고 퀄리티 높은 음악을 만들려는 키비의 노력은 앨범에 잘 묻어나있다. 하지만 이것이 힙합 씬에 완전히 새로운 방향성이라고까지 보긴 어렵지 않을까 싶다. 새롭다기보다는 미니멀하면서도 그들만의 장점을 잘 살려낸 괜찮은 힙합앨범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피노키오 : 플래티넘 에디션(PE) - 블루레이 리뷰
http://dvdprime.paran.com/dvdmovie/DVDDetail_Sub.asp?dvd_id=1789&master_id=11


1940년작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화질로 복원된 <피노키오 PE>블루레이 리뷰입니다. 이 리뷰는 일종의 퀵뷰로서 좀 더 자세한 리뷰는 앞으로 제 블로그를 통해서 다시 할 예정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만만하게 봤다가 완전 한 방 먹은 듯한 충격을 받았던 블루레이였어요. 작품도 클래식한 멋스러움이 살아있고 복원 상태도 워낙에 좋아 추천할 만한 타이틀 입니다~










김씨 표류기
그들은 과연 괜찮아졌을까?


사실 장진+정재영 조합에 어느 정도 지쳐있기도 했고, 완전 코미디인 것만 같은 홍보방향에 안봐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하고 크게 계획에 없던 영화였는데, 시사회를 통해 들려오는 지인들의 소문은(이 '지인'가운데는 저만 일방적으로 알고 있는 이들도 존재합니다 -_-;;) '괜찮은' 영화다가 지배적이어서 내심 속으로, 역시 <천하장사 마돈나>를 이해영 감독과 함께 쓰고 연출했던 이해준 감독이 재능이 어디가진 않았나보다 라는 생각에 개봉 첫 주에 냉큼 보게 되었다. 얼핏 보면 톰 행크스 주연의 <캐스트 어웨이>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하는 <김씨 표류기>는 코믹한 요소를 전면에 배치하고는 있지만, 잘 따져보면 되게 슬픈 영화인 동시에 이런 코미디 영화에서는 잘 취하지 않는 결론을 택하면서 요즘 한국영화계에 불고 있는 약간의 '일본식' 감성이 더해진 묘한 영화 한편을 만들어냈다.



(아래부터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들께서는 맨 마지막 단락으로 이동해주세요~)




영화의 간단한 줄거리는 카드빛이 억대가 되어 갚을 능력이 없게 된 남자 김씨(정재영)가 자살을 기도하며 한강 다리 위에서 떨어졌으나 죽지 못하고 밤섬에 표류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리게 된다. 또 다른 주인공인 여자 김씨(정려원)는 히키코모리로서 벌써 몇 년째 방안에 틀어박혀서 세상과는 담을 쌓고 지내고 있으며, 유일한 취미는 달 사진을 찍는 것 뿐이다.

일단 이 영화를 사사건건 따지고들자면 애초의 설정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서울 시내 한 복판에 있는 밤섬에서 몇 달 동안이나 표류하게 된다니. 핸드폰 베터리가 떨어졌다는 설정이 가미된다고 해도 이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를 논리적으로 파고들게 되면 이미 시작하기 전부터 말이 안되는 설정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캐스트 어웨이>처럼 정말 무인도를 배경으로 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아니면 도심 한가운데 맨홀 구멍에 빠진다던가 해서 고립되게 되는 좀 더 설득력있는 설정을 가져올 수도 있을텐데 왜 밤섬에 남자가 표류된다는 설정을 가져오게 된 것일까. 해답은 영화 속 카메라 앵글들을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무인도는 말그대로 사방이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이기 때문에 별로 희망자체가 없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없다기 보다는 완전히 막연한 공간이랄까. 하지만 <김씨 표류기>속 밤섬은 완전히 다르다. 마치 탈출을 시도하고자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을 정도로 멀지 않은 곳에 서울시내가(속세) 보인다. 63빌딩이고 한강을 가로 지르는 다리고, 유람선이고, 고층 아파트고 다 보인다. 카메라는 이를 의식하듯 남자 김씨의 시선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밤섬에 앉아서는 거의 섬 밖 서울을 바라본다.

처음 자살을 시도하는 것에서 부터 드러났지만, 남자는 자살까지할 용기도 없는 사람이다. 정말 자살을 원했다면 애초부터 63빌딩 정도로 향해야 했을 것이고 섬에서 그렇게 오래 표류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 밤섬이라는 공간은 그냥 카드빛 등 경제적인 문제, 이성 문제등으로 속세에서 지친 영혼이 모두 훌훌 털고 떠나고만 싶은 일종의 파라다이스에 가깝다. 무인도라는 공간이 어떻게 낙원이 될 수 있는가 되물을 수도 있겠지만, 속세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린 이에겐 아무런 속박없이 지낼 수 있는 무인도 만큼 좋은 곳은 아마 없을 것이다. 초반에 잠깐 탈출을 꿈꾸던 남자는 이내 이 곳에 적응하게 되고 자신만의 공간을 이곳에 꾸미게 된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는 이 곳에 또 하나의 자신만의 공간을 꾸민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다. 쓰레기를 주어다가 이것저것을 만들고 고장난 티비를 주어다가 안에다가 사루비아 꽃을 넣어두고, 패트병으로 신발을 만들어 신는 것들은 단순히 생존의 문제라기 보다는 또 하나의 소유로 볼 수 있을 듯 하다. 사회의 경제논리에서 살아남지 못한 이 남자는 아무것도 없는 이 곳에 와서도 결국 몸에 밴 습성대로 자신만의 욕망을 채워나가게 되는 것이다. '짜파게티'를 먹기 위해 직접 씨앗을 심고 결국 세상 어느 곳에서도 맛볼 수 없을 음식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절망에서 희망을 찾아가는 과정으로도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속세에 물든 남자가 모든 것으로 부터 자유로운 공간에 놓여졌음에도 결국 속세의 연을 끊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측면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 중 하나를 꼽으라면 '진화라는 건 점점 맛있어 지는 것을 뜻하나 봅니다'라는 대사였는데, 굉장히 재미있는 조크로도 사용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 보았을 때 여러가지 면에서 꼽씹어 생각해 볼만한 대사였다고 생각된다. 폭풍우가 치는 밤에 결국 집과 같은 오리배를 떠나보내게 되는 것은 자세히 보면 '놓쳤다'기 보다는 '놓아주었다'라고 보는 편이 더 맞을 듯 싶다.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한 오리배를 떠나보낸 건 세상 속에서 다시 싸울 용기가 없는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며, 스스로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밤섬에 남고 싶은 욕망이 발휘된 행동이기도 할 것이다. 여기서 남자가 흘린 눈물은 집을 잃어서 라기 보다는 결국 세상으로 다시 돌아갈 용기를 얻지 못하는 본인에 대한 연민이기도 할 것이다.

보통같으면 마지막에 군인들이 섬에 도착했을 때 쌍수를 들고 환영했겠지만 남자는 반기기는 커녕 오히려 잡히지 않으려도 안간힘을 쓴다. 그 때 그는 '그냥 여기살면 안되요?' '이것 조차 허락 안되는거에요?'라고 얘기하는데 여기서도 앞서 언급한 욕망의 고리와 자기 연민을 발견할 수 있다. 보통 무인도가 등장하는 영화에서 이런 경우라면, 단순히 오랫동안 머물렀던 공간에 대한 추억과 정이랄까, 일종의 시원섭섭한 감정 때문에 쉽게 떠나지 못하는 것이겠지만, 이 영화에서는 돌아갈 곳도 없고 돌아갈 자신도 없는 주인공의 심리 상태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 영화가 슬프게 다가왔던건 주인공 남자가 자신의 이런 처지를 스스로 잘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지금까지 영화 속에서 슬픈 장면들을 떠올려보면 은근히 먹는 장면에서 울컥하는 장면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지금 막 떠오르는 예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가 온천장에서 하루를 보내고 하쿠를 만나 주먹밥을 얻어먹는 순간 갑자기 슬픔이 밀려와 눈물을 왈칵 쏟는 장면!), 이 영화에서는 직접 짜파게티를 조재해 먹는 장면이 바로 그 장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친듯이 이 짜장라면이 먹고 싶은 남자에게 여자는 짜장면을 배달시켜 주지만 남자는 보란듯이 거절하고 만다. 일종의 자존심이라는 얘긴데, 이건 이미 남자가 밤섬에서 어느 정도 살만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마도 여기서 짜장면을 그저 눈물 흘리며 먹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진정성이 있음은 물론 덜 유치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직접 씨뿌리고 반죽하고 '조리예'를 정확히 지켜 예시 그림의 상태로 완벽한 시식을 하다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맛있어'서도 있겠지만 남자 스스로 '내가 겨우 이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게 짜파게티를 직접 만들어 먹는 것 뿐이구나'라는 것에서 울컥했던 것이며 속세에서 해내지 못한 자신의 무능에 대한 연민이기도 했을 것이다.

사실 이 영화가 감정적으로 좀 더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려면 왜 이 남자가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어느 정도로 한계에 몰렸었는지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이 있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그로 인해 잃게 되는 부분도 분명 생겼겠지만, 이런 과정이 없다보니 이 남자가 밤섬에 표류하며 하는 일들에는 별로 '절실함'이나 '절박함'이 느껴지지 않으며, 그저 용기없는 낙오자로 생각될 뿐이다. 그러니까 세상이 나은 낙오자라기보다는 세상이야 어떻튼 낙오될 확률이 높은 사람으로 밖에는 생각이 안든달까. 남자 김씨에게 절실함의 공감대를 얻을 수 있었다면 영화는 아마 더 좋지 않았을까.




사실 히키코모리이기는 하지만 여자 김씨의 설정 자체는 더 영화적이다. 영화 속 정려원 같은 미모를 같은 여자가 외모 컴플렉스를 갖고 있다는 점도 설득력이 부족하고(ㅎ), 역시 왜 그렇게 마음을 닫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기 때문에 공감대까지 얻기는 부족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밤섬에 표류한 남자와 도심 속 방안에 표류하고 있는 히키코모리를 접합시킨 것은 흥미로운 시도였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공감대를 100% 느끼기 어려웠음에도 이 영화가 괜찮은 영화로 느껴진데에는 영화 속 주인공들이 조금이나마 영화를 통해 배우게 되는, 발전하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혼자가 아니라 두 명의 주인공을 배치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히키코모리인 여자는 남자를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룰을 깨트려 가면서 대화하는 법,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고, 남자는 여자를 통해 삶을 포기하려던 순간에서 혹은 돌아올 자신이 없던 세상에 미약하나마 돌아올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면서(물론 자의로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결국 세상으로 나오려는 절실함과 용기가 없었던 이들이 조금이나마 에너지를 얻게 되는 영화였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 영화가 개인적으로 좀 더 좋았던 건, 마지막에 마냥 행복하게만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자는 자신의 룰을 많이 깨어버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금방 다른 사람들처럼 정상적인 삶을 살기는 어려울 것이고, 남자 역시 수억원의 빛이 갑자기 없어질리 만무하다. 그렇다고 둘이 급속도로 사귀기라도 할 것 같은가 하면 그건 더더욱 아닐 것이다. 결국 두 김씨는 일종의 해프닝을 겪으면서 조금 배우게 되었지만 세상은 그대로이고 담은 여전히 높기만 하다. 그래도 이 영화가 절망적이지만은 않았던 건, 작지만 배움이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이 배움이 갑작스럽지 않고 갑자기 모든 것을 해결할 정도의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깔끔하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찌보면 일시에 '결심했어'하고 단숨에 모든 것을 바꿔버리곤 하는 영화/드라마 속 인물들보다는 더 현실적이라 마음에 들었다. 영화의 느린 속도도 마음에 들었고.




1. 그런데 엔딩 크래딧에서 정작 '농심'의 이름은 확인하지 못했었는데(정확하진 않지만. 그래서 일부 상품은 다른 의도로 쓰이지 않았다는 문구도 삽입되었죠), 이런 경우라면 예전 <여.친.소>와 비교하자면 훨씬 좋은 방향의 PPL이라고 생각되네요. 정식으로 협찬 받지 않았다면 PPL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 아닐까요.

2. 히키코모리가 등장하는 영화를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이건 정말 부자들만 할 수 있는 거에요. 가난하면 은둔생활 할려고 해도 일하지 않으면 못한다는 ;;; 한강이 바로 보이는 뷰를 갖춘 고층 아파트에 살 정도니 역시 잘사는 집인듯.

3. 옥수수콘 깡통에 다시 옥수수를 심는 설정도 재밌더군요.

4. 뽁뽁이로 이뤄진 침대는 한번쯤 해보고 싶더군요. 아, 그리고 크리닝 테이프로 수면 최면 거는건 정말 탁월했어요.

5. 은근히 CG가 많이 사용되었더군요. 특히 하늘 묘사 부분에 CG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6. 음악이 처음에는 정말 많이 좋았었는데, 갈수록 조금씩 진부해지긴 하더라구요;;

7. 민방위 훈련의 필요성을 홍보하는 대국민 홍보영화랄까요 ㅎ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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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미지의 저작권은 반짝반짝 영화사에 있습니다.








천사와 악마 (Angels & Demons, 2009)
쏠쏠한 재미의 미스테리 로드무비


너무나 잘 알려졌다시피 이 작품 <천사와 악마>는 <다 빈치 코드>를 썼던 댄 브라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한 영화로, 영화화된 <다 빈치 코드>와 마찬가지로 론 하워드가 연출하고 톰 행크스가 주연을 맡고 있다. 책이 그러하였듯이 영화적인 것보다 원작에서부터 계속되온 종교적 논란 때문에 더욱 화제가 되었던 <다 빈치 코드>와는 달리, <천사와 악마>는 이런 면에서 훨씬 조용한 편이다(영화나 책을 읽어본 분들을 아시겠지만, 이 작품에는 그다지 종교적으로 크게 논란이 될 정도의 묘사는 -결과적으로- 없다). <다 빈치 코드>가 책을 너무 재미있게 읽었던 탓에 영화에서 많이 힘이 빠져버린 경우였다면, <천사와 악마>는 책을 일찌감치 사두긴 했지만 사실상 내용이 거의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읽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거의 댄 브라운의 원작에 영향을 받지 않는 선에서 영화를 관람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개봉일에 보게 된 <천사와 악마>는 대규모 자본이 투자된 미스테리 스릴러로서 나름 쏠쏠한 영화였으며,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지루하지 않게 관람할 수 있었던 오락영화였다.

(참고로 본 리뷰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원작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쓴 리뷰라는 점을 참고해주세요~)





영화의 알려진 줄거리는 간단하다. 교황이 죽자 바티칸에서는 전통대로 교황을 선출하는 모임인 '콘클라베'를 갖게 되는데, 이와는 다른 줄기의 이야기로 세계 최대의 과학연구소 'CERN'에서 진행한 연구의 결과물인 반물질이 도난되면서 이 두 가지 사건이 하나의 적을 두고 있음을 알려주고는 여느 때처럼 로버트 랭던(톰 행크스)이 등장해 이 사건들을 풀어가게 된다.

개인적으로 종교적인 신념을 떠나서 이런 미스테리한 사건들을 약한 사실에 근거하여 풀어나가는 이야기를 워낙에 좋아하기 때문에 이 작품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확실히 전작 <다 빈치 코드>보다는 더 흥미로운 방식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두 작품의 이야기가 크게 다를 것이 없기도 하지만, 추리 소설을 읽을 때 다음 장이 궁금해서 휙휙 읽어나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을 정도로, 이 영화의 전개와 구성은 '오락영화'로서 손색이 없을 듯 하다. 어느 다른 리뷰에서 보았던 표현인데, 이렇게 책을 '휙휙'넘기듯 영화를 만들어내는 측면에서는 원작자인 댄 브라운도 그렇지만 이 영화의 각본을 담당한 아키바 골즈먼과 연출을 맡은 론 하워드의 재능이 십분 발휘되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 내용의 깊이가 그리 깊거나 디테일하지는 않지만 군더더기 없이 진행되며 딱 보여주고 설명해야 할 것만(오락영화를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 설명하고 지나가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 영화의 디테일을 따지고 든다면 사실 미흡한 측면이 참으로 많다. 이런 영화에서 흔히 생략하고 마는 언어 문제만 봐도 바티칸의 경찰들이 영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일부 장면만으로 이 영화가 '제대로'하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주인공인 랭던이 라틴어나 이탈리아어를 전혀 모른다는데 더 문제가 있다고 해야겠다. 책을 쓸 정도의 관련 지식을 번역본으로만 접한 것인지 의심이 될 정도로 전혀 다른 언어를 모르는 랭던의 모습은, 안그래도 비중이 덜한 그의 캐릭터의 깊이를 더 깍아먹는 부분이기도 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오락영화'로 볼 때 나름의 의미를 갖게 되는 영화라 이렇게 깊이 디테일을 따지고 들만한 '필요'가 별로 없다고 생각된다. 물론 오락영화 임에도 이런 소소한 디테일들과 아는 만큼 더 보이는 설정들을 여기저기 배치해 두었다면 더더욱 재미있는 영화가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이런 기대치까지 짋어져야할 영화는 굳이 아니라고도 생각된다.

그래서 부제목에 '쏠쏠한 재미'라는 표현을 쓰게 된 것이다. 만약 이 영화가 치밀한 스릴러라던가 아니면 원작에 좀 더 충실한 작품이었다면(원작을 보신 분들의 평에 빗대자면) 아마도 쏠쏠한 재미보다는 실망스런 느낌을 더 받았겠지만, 좀 더 편한 자세의 오락영화로서 관람하기에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미스테리 요소들도 적절히 녹아있고, 극 전개도 빠르고, 좋아하는 배우들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쏠쏠한 재미'를 얻을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들은 역시 로마 시내의 멋진 풍광들을 대형 스크린을 통해 흠뻑 즐길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4K 상영으로 관람하였는데 대형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로마시내의 풍광은 우리가 이런 영화에서 느낄 수 있고, 기대하는 스케일 측면을 만족시켜주고 있으며, 스케일을 더 돋보이게 하는 카메라 워킹도 인상적이었다 (이 영화는 초반 연구소 장면도 그렇고 후반부에 몇 장면도 그렇고 굉장히 이질적인 카메라 쇼트가 등장한다. 초반 연구소 장면은 영화라기보다는 마치 HD다큐에서나 볼법한 앵글이 많았으며, 후반 부 랭던을 잡는 앵글 가운데는 영화 내내 보여주었던 스타일과는 사뭇 다른 앵글도 만나볼 수 있었다).

엔딩 스탭롤을 보면 컴퓨터 그래픽에 상당히 많은 스탭들이 참여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로케이션 촬영과 CG가 결합된 영상은 보는 즐거움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영화의 마지막 반물질과 관련된 하늘 묘사 장면을 들 수 있을텐데(스포일러 없이 써보려니 어렵네요 ^^;), 마치 '천지창조'그림의 배경에나 등장할 법한 하늘의 묘사는 굉장히 환상적이면서도 한 편으로 현실적이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에 그 어느 장면보다 종교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개인적으로는 주인공 로버트 랭던 역할의 톰 행크스의 비중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다. 이 것은 단순히 연기 측면이라기보다는 내용적인 문제로서, 주인공이 능동적이기 보다는 약간 수동적에 가깝다고 느껴졌기 때문에 그의 캐릭터자체가 별로 부각되지 못한 것 같다. 그 반대로 이완 맥그리거는 본래 팬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에서도 역시 강함과 나약함을 동시에 갖고 있는 자신의 매력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특히 개인적으로 그의 목소리와 억양을 너무도 사랑(?)하는데 이 영화에서도 마음 껏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이것만으로도 만족스럽긴 했다 ^^;

<밴티지 포인트>를 통해 낯이 익었던 여배우 아예렛 주어 역시 매력적인 얼굴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 이상의 감흥은 없었으며, 스텔란 스카스가드 역시 비중이 그리 크지 않아 크게 얘기할 부분은 없을 듯 하다. 아미 뮬러-스탈은 출연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이런 양면의 이미지를 갖은 캐릭터를 연기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긴 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선과 악을 다 갖은 얼굴로 관객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원작을 읽으신 분들의 평을 들어보면 책을 읽을 때 느꼈던 긴장감이나 짜릿함은 영화에서 많이 사라진 듯 하다. 얼핏 들어보니 예전에 살짝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나 영화와 비교해볼 수 있었는데, 확실히 영화는 소설과는 방법론이 많이 달랐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천사와 악마>는 원작을 읽은 사람들이 더 손해를 보는 경우가 아닐까 싶다. 그런 면에서 일찍이 사두고 거의 보지 못한 내 신세는 다행이랄까 ^^:


1. 신촌 메가박스 M관에서 디지털 4K상영으로 감상하였습니다. 콜롬비아 픽쳐스 로고 나올 때 확 화질 차이를 느낄 수 있더군요. 그런데 정작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는 워낙에 어두운 장면이 많아서인지 4K를 100% 즐겼는가에 대해서는 살짝 의문이 드네요. 물론 필름상영보다는 훨씬 월등한 화질이었습니다.

2. 영화에 등장하는 과학연구소 'CERN'은 실제로도 있는 곳 인것 같더라구요. 크래딧에 로고 사용 라이센스들이 나올 때 CNN과 몇몇 다른 회사들과 함께 CERN의 이름도 나오더군요.

3. 영화의 마지막 아민 뮬러-스탈의 대사 같은 경우, 확실히 종교적 논란을 염두에 둔 일부러 대사가 아닌가 생각되더군요.

4. 엔딩 크래딧을 언제나처럼 다 보고 나오는데, 마치 클래식 공연을 보고 나온 기분이었습니다. 크래딧에 흐르는 곡이 상당히 박력있었거든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본문에 사용된 모든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모든 이미지의 저작권은 콜럼비아 픽쳐스에 있습니다.






뮤지컬의 왕 팬이긴 하지만 처음 볼 땐 단순히 유치하기만 할 거라고 생각해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는데,
막상 보고나니 기본에 충실하고 유치함도 미덕으로 승화시킨 괜찮은 뮤지컬이었네요.








엑스맨 탄생 : 울버린 (X-Men Origins : Wolverine, 2009)
궁금하긴 했었던 울버린의 탄생과정


<엑스맨>시리즈의 광팬은 아니었으나 1편부터 3편까지 모두 극장에서 거의 개봉일에 관람을 했었기 때문에 이 작품 <엑스맨 탄생 : 울버린>(이하 울버린)에도 관심을 갖긴 했었었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관심일 뿐 기대까지는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선택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것은 배우이기 이전에 역시 감독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감독인 개빈 후드의 전작들이 <특명 델타포스 2,3>등 별로 미덥지 못한 영화들이었던 점 때문이기도 하고, 왠지 모르게 이 작품이 '외전'성격이라기 보다는 쉽게 말해 '짝퉁' 시리즈가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에 관심은 있었지만 기대는 하지 않았던 작품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코믹스를 원작으로 하고 있는 영화들이 그렇듯이, <엑스맨>시리즈를 극장에서 보면서 각 캐릭터들의 더 상세한 이야기가 궁금했었기 때문에 만약 이번 <울버린>을 보지 않는다면 코믹스를 따로 찾아서 보지 않는 이상은 이 궁금증을 풀만한 기회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에 일찌감치 관람하게 되었다(영화를 감상한 건 개봉 주였는데, 리뷰가 늦어졌네요 ^^;).

결과적으로 큰 기대가 없었기 때문인지 액션 영화로서 러닝타임내내 즐겁게 즐길만한 영화였고, 크게 부담스럽지 않는 작품이었다. 아, 물론 <엑스맨>과 연관지어 더 큰 기대를 갖고 있었다면 실망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영화는 간단하게 말해서 휴 잭맨이 연기하는 울버린이 어떻게 하다가 '울버린'이 되었으며 왜 그가 <엑스맨>시리즈에서 그렇게 거칠고 툴툴맞은 성격을 갖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일종의 '비긴즈'이자 '프리퀄'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미국 코믹스를 원작으로 하고 있는 영화들의 캐릭터들은 상당히 세밀하고 디테일한 자신만의 역사들을 갖고 있는데(그 캐릭터가 비록 주연급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엑스맨 가운데서도 주연급이라 할 수 있는 울버린의 과거사가 궁금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예상했던 것처럼 울버린, 아니 로건의 일생은 불행하기 그지 없다. 돌연변이로 태어나 혼란스럽고 고통스런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그 능력 때문에 각종 전쟁에 참여하기도 하지만 본인 스스로 살육을 즐긴다던가 이 능력을 사용하는데에 별로 호전적인 인물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로건이 울버린이 되는 과정에서 여러 명의 동료들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넘어가는데, 아마도 기존 코믹스인 엑스맨의 팬들이라면 가장 아쉬워할만한 부분이 바로 이들의 묘사나 비중이 아닐까 싶다. 코믹스의 기존 세계에 대해 그리 잘 알지 못하는 일반 관객이 보기에는 그저 수많은 돌연변이 캐릭터 중 하나 정도로 생각되거나 제법 비중이 있는 조연급 캐릭터들에 대해서만 살짝 관심을 갖게 되는 수준일테지만, 이 세계의 팬이라면 '아니, 저 능력자이자 비중있는 캐릭터를 이름도 언급하지 않고 지나가다니' 혹은 '저런 몇 장면 만으로 흘려버리다니'하는 불만을 갖기에 충분한 것도 사실일 듯 하다.




물론 기존 <엑스맨> 극장판 시리즈에서도 모든 캐릭터가 다 만족할만한 비중과 묘사의 기회를 얻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이번 <울버린>은 제목 그대로 '울버린'에 촛점을 맞춘 작품이다보니 타 캐릭터들에게는 관심이 덜가는 경향이 좀 더 심하지 않았나 싶다. 여러 명이 함께 등장하고 있는 포스터를 보면 마치 <엑스맨>처럼 각각의 캐릭터의 장점을 십분 활용한 액션 장면이 가득 하겠구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에서는 아예 없는 캐릭터도 있고 있다해도 대부분은 1장면씩 밖에는 할당 받지 못한 분위기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엑스맨'의 팬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의 감상포인트 일 것이다. <엑스맨>에 대해 극장판 영화 이상으로 관심이나 정보가 없는 일반 관객들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제법 괜찮은 비중이라고 생각된다. 로건이 왜 울버린이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여기에 모든 포인트를 집중하고 있으며 주변 캐릭터들도 모두 울버린을 위해 작용하고 있다(그렇기 때문에 다른 캐릭터들에 공감대는 떨어질 수 밖에는 없다).




예전 <삼국지 : 용의 부활>이 삼국지라는 설정을 가져온 액션 영화였던 것처럼 <울버린>역시 아주 냉정하게 본다면 <엑스맨>의 세계관을 가져온 액션 영화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물론 울버린 개인의 역사에 대한 설명의 기능은 충분히 담당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액션 씬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텐데, 개인적으로는 계속 언급하지만(-_-;;) 큰 기대치가 없었기 때문이었는지 액션씬들도 크게 나쁘지 않았다. 이런 액션영화에서 기대하는 이른바 스케일있는 액션. 보는 순간 잠시나마 '오옷'하고 느끼게 되는 액션들이 제법 있었다. 물론 그 반짝이는 순간을 더 나은 액션 시퀀스로 이어가지 못한 부분은 있지만,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기대했던 바는 그 정도였기 때문에 나름 나쁘지 않았다.

다만 가장 아쉬웠던 것은 바로 CG의 퀄리티였다. 이 작품이 과연 마블엔터테인먼트에서 공식적으로 제작하고 헐리웃 탑배우가 주연으로 출연하며 <엑스맨>이라는 시리즈의 스핀오프로서 인정받고 있는 작품인지 의심될 정도로 시대를 한참이나 거슬러 올라간 듯한 어색한 컴퓨터 그래픽은 확실히 몰입도를 해칠 수준이었다. 특히 헬기를 타고 벌어지는 액션장면에서는 헬기밖 배경과 헬기 내 인물의 이질감이 너무 심할 정도였으며, 후반부 액션 장면에서도 이들이 실제 그런 구조물 위에서 싸우고 있다고 느끼기 보다는 3D스튜디오 내에서 가상현실을 통해 겨루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같은 시기에 개봉한 <스타트렉 : 더 비기닝>의 컴퓨터 그래픽이 전우주를 상대로 했음에도 훨씬 실감났던 것과 비교할 때 더욱 아쉬움이 남는 컴퓨터 그래픽이었다.




이 영화를 보고 난 결론은 의외로 간단했다. 엑스맨 팬들은 모든 것이 울버린에 집중되는 바람에 심하게 소외되어버린 다른 매력적인 캐릭터들의 모습에 무척이나 아쉬울 수 밖에는 없을 것이며, 일반 관객들에게는 <엑스맨>의 설정이 녹아든 괜찮은 액션 영화로서 즐기기에 큰 부족함이 없을 작품일 듯 싶다.


1. 그 노부부의 아들이 마치 휴잭맨인듯 옷이 죄다 맞춤싸이즈이던데, 로건은 나이를 천천히 먹으니 설마 이 노부부가 어찌되었든 로건과 연관되었던 것은 아니겠지요? ㅎㅎ

2. <엑스맨>시리즈의 매우 중요한 캐릭터가 깜짝 등장합니다. 이 분은 <엑스맨>에 등장할 때 모습을 보면 포샵이 너무 심한 것 같다는 느낌이 제일 먼저 들어요 ㅎ

3. 저만 그렇게 느낀 건지 모르겠지만 마지막 결투를 끝내고 구조물에서 떨어진 울버린의 모습을 보면 갑자기 머리가 짧아진 느낌이에요 ;;;

4. 또 그 노부부이야긴데, 결국 울버린의 코스튬과 같은 의상 코디는 그 할아버지의 작품이라고 해야겠네요.

5. 엔딩 크레딧이 모두 끝나고 추가장면이 있습니다. 떡밥도 있고, 본편 초반에 등장했던 대사를 인용하면서 '울버린'이라는 캐릭터에 깊은 슬픔과 역사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하죠.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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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런 이벤트가 있는지도 몰랐었는데 우연히 좋은 기회에 초대가 되어 박찬욱 감독과 함께하는 영화 감상과 씨네토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늦게 초대를 받아서인지 좌석이 맨 앞이었는데(티켓 전달해주시면서 '영화는 보셨죠?'하고 미안한듯 물어보시더라는;;), 정말 몇년 만에 맨 앞좌석에서 영화를 보게 된 것인지(예전 메가박스 M관에서 A열 1번에서 <한니발>을 본 뒤 처음인것 같다) 기억이 안날 정도로(기억났죠 ㅎ) 오랜만이었는데, 정말 영화를 미리 본 것이 참으로 다행인 순간이었습니다.

영화는 확실히 여러 번 볼 수록 발견하지 못했던 장면들과 감성들을 만나볼 수 있는 예술임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첫 번째 관람에서는 미처 포착하지 못했던 장면들도 발견할 수 있었고, 첫 번째 감상기에서는 다 쏟아내지 못했던 내용도 추가로 정리할 수 (머리 속에서;;) 있었습니다.

김영진 영화평론가가 말했듯이 <박쥐>관련해서는 박감독님이 거의 이런 인터뷰나 씨네토크 자리를 갖지 않고 있어서 오늘의 행사는 더욱 의미깊게 다가오기는 했는데, 관객 각자의 느낌과 감상을 연출자로서 제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도에서 가능한한 이런 자리를 비롯해 DVD의 오디오 코멘터리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씀을 들으니, 준비했던 질문을 하기가 망설여지더군요.

그래도 계속 손을 들었는데 결국 질문의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ㅠㅜ 그저 맨 앞자리에서 박감독님의 모습을 아주 가깝게 접할 수 있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네요. 시종일관 감독님은 관객들의 질문 하나하나에 굉장히 신중하고 깊게 경청하시는 모습이었으며(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질문에도 매우 성심성의껏 답변해 주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하려던 질문을 하지 못한 것과 씨네토크 시간이 너무 순식간에 끝나버렸다는 것을 제외하면, 흔치 않은 기회였다는 점에서 더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아, 가져간 DVD에 싸인을 받지 못한것도 아쉬운 점이에요 ㅠ)


덧붙임.

간단히 이 날 있었던 씨네토크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원작이라고 할 수 있는 '테레즈 라캥'의 주인공 이름들과 영화 <박쥐>속 인물들의 이름의 유사성에 대해 확답을 들을 수 있었고(테레즈 - 태주, 까미유 - 강우 등), 쪽가위를 입안에 넣고 빼고를 반복하는 장면의 의도를 묻자, 단순히 입이라는 곳이 무언가 들어오고 나가는 통로의 이미지라고 생각해서 기획된 장면이기도 하고 더나아가 병균처럼 외부의 것이 내부로 침입하는 이미지를 생각해 삽입하였다고 한다(개인적으로는 의도적인 불편함을 유발시키기 위한 장치로서도 이해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대한 코멘트로 들을 수 있었는데, 애초에 박찬욱 감독님의 생각은 마치 상현이 엠마누엘 연구소 벽에서 본 듯한 지네의 이미지, 이 지네가 날개도 달리고 더 많은 다리들을 갖은, 이런 이상한 지네들이 엄청난 수로 하늘을 뒤덮고 있는 이미지를 생각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막판에 너무 급작스럽게 감정을 깨버릴 지 모른다는 주변의 (강력한) 우려가 있어 최대한 이 장면을 축소하였고, 영화에서 보는 것과 같은 장면이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했다. 이 장면은 죽음을 앞에 둔 상현이 마지막 환상을 보는 것으로 이해되었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생각해보았던 것이지만, 결국 상현은 자신의 기도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냐라는 질문. 그리고 더 나아가 상현이라는 존재를 가지고 신이 마치 광야에서 시험하듯 한 것이 아니냐는 흥미로운 질문이 나왔는데, 이 영화는 분명히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지점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더나아가 본래 감독님이 구상했던 시나리오에는 상현이 지금보다 훨씬 더 욕망이 강한 인물로 그려졌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덧붙임 2.

제가 원래 하려던 질문은.
'처음에는 뱀파이어가 된 상현이 자신의 욕망을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본래 좋은 일을 하려고 간 것이다. 죽기를 바라는 사람의 소원을 들어준 것이다 등) 이 행위를 합리화해 가다가, 결국 자신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태주를 보며 새삼 자신의 그간의 합리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자살을 하게 되는, 일종의 자살 영화로 이해했었는데, 마지막 죽기 이전에 보면 한동안 상현을 부르지 않았던 태주가 '신부님'이라고 부르는 장면과 동시에 상현이 신부로서 처음 등장 할 때 흐르던 테마 음악이 흐르게 된다. 이걸 보면 이 영화를 사제로서 상현의 순교 영화로 봐야 할 것인가 아니면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으로서의 자살 영화로 봐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이 질문이었어요.

그런데 이것인가 저것인가 라기 보다는 어느 편이 더 의도에 가깝나 혹은 관객으로서 보았을 때 어느 쪽에 더 공감이 가는가 정도로 질문하려 했는데, 아쉽게도 묻지 못했네요. 개인적인 생각은 둘 다라고 생각되요. 정답도 없고.





글/사진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스타 트렉 : 더 비기닝 (Star Trek, 2009)
몰라도 재밌고 알면 더 재밌는 프리퀄!


개인적으로 TV시리즈였던 스타 트렉에 대한 기억들은 그야말로 깨알같은 정도다. 팬이라고 하기엔 물론 부족하고 그저 어린 시절 TV를 통해 가끔 각 캐릭터들의 특성이나 대강의 배경 줄거리 등을 슬쩍 아는 정도일 뿐이다. 윌리엄 셰트너를 '믿거나 말거나'로 만나기 전에 더 익숙했던 프로그램이 '스타 트렉'이었으며 그 쫑긋귀의 캐릭터, 매우 하얀 얼굴의 캐릭터, 또 다양한 외계인 캐릭터들이 '엔터프라이즈호'라는 우주선을 타고 특유의 유니폼을 입고 전 우주를 넘나들며 벌이는 이야기라는 것 정도.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가 개봉 한다고 했을 때 약간 망설여지기도 했었는데, 감독인 J.J.에이브람스가 이야기했듯이 이 영화는 기존 '스타 트렉'의 팬들만 즐길 수 있는 영화가 아니라 나처럼 이 시리즈를 잘 모르고 있는 이도 즐길 수 있는 SF/액션 영화이다.




다들 알다시피 이 영화의 연출을 맡은 J.J.에이브람스는 팬들 사이에서 '떡밥의 제왕'으로 불리는 인물로, TV시리즈 <앨리어스>와 <로스트>를 연출했으며 영화 <미션 임파서블 3>의 감독, <클로버필드>의 제작자이기도 하다. 여기서 그가 지금까지 뿌려놓은 떡밥들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이 것만으로도 또 다른 시리즈를 만들어야 할테니 그건 여기서는 다 말 못할 듯 하다. 개인적으로는 그가 참으로 흥미로운 각본가이자 제작자임은 인정하지만 영화감독으로서의 역량에 있어서는 사실 100% 안심할 수 있는 감독은 아니었는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작품 <스타트렉 : 더 비기닝>으로서 이런 불안감은 거의 해소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하다.

영화의 시작은 전형적인 J.J.에이브람스 스타일이다. 보통 같으면 클라이막스에나 등장할 법한 장면을 초반에 등장시키고 마무리한 뒤 제목을 등장시키며 스윽 시작하는 이 방식은, <인디아나 존스>이전의 고전 액션물에서부터 사용되었던 방식으로 최근에는 에이브람스의 인장처럼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영화를 스타 트렉의 기존 팬들 외에도 무리없이 즐길 수 있는 이유는 이 작품이 '프리퀄' 형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프리퀄 형식의 영화들이 그렇듯이 따지고보면 원작에 생소한 일반 관객들도 즐길 수 있긴 하지만,
기존 팬들이 본다면 더 많은 것이 보이고 더 감동적일 수 밖에는 없는 것이 바로 프리퀄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스타 트렉 시리즈의 아주 미세한 기억만이 있을 뿐이었는데도 몇몇 설정과 장면에서는 예전의 아련한 기억들을 떠오르게 했을 정도였으니 기존 팬들은 얼마나 여기서 감동받았을까 하는 생각을 절로 들게 했다. 우리가 예전 TV시리즈에서 보았던 엔터프라이즈의 커크와 스팍이라는 캐릭터가 어떤 관계였으며 어떤 사건을 겪으면서 우리가 나중에 알고 있는 관계가 되었는지에 대해 이 영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팬이라면 더 알아보고 재미를 느낄 만한 요소들을 곳곳에 배치해 두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팬들 만이 느낄 수 있었을 더 많은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렇다고 영화가 재미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면, 분명 이 장면, 이 대사는 기존 시리즈에 등장했던 대사일 것 같다 혹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설정이나 장면들에서는 이것 역시 기존 시리즈에 빗대어 생각할 수 있겠구나 라는 장면을 여럿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래 영화를 보기 전 거의 아무런 정보를 얻지 않은 채로 보려고 하는 주의지만 그래도 감독과 배우 들의 정보는 어느 정도 알고 가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번 작품의 경우는 배우들 조차 확인하지 않았었다. 그랬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중간중간에 전혀 의외의 배우들의 출연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일단 스팍의 어머니 역할로 등장한 배우는 다름아닌 위노나 라이더 였으며(그녀가 이렇게 나이 많은 역할을 연기한 건 거의 처음이 아닐까 싶다), '네로' 역할은 에릭 바나가 연기하고 있었다. 사실 가장 많이 놀랐던 것은 바로 에릭 바나였다. 워낙에 분장이 심하고 강한 이미지여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얼핏 봐서는 정말 에릭 바나인지 아니면 에릭 바나를 닮은 배우인지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는데, 가끔 연기력있는 배우가 SF물에서 전혀 쌩뚱맞은 캐릭터를 연기하며 최악으로 망가지는 경우에 비교하자면 에릭 바나는 자신의 커리어에 흠을 만들지 않으면서도 SF영화 속에서 톡톡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하겠다. 그가 연기한 네로 역할은 전형적인 악역이라기 보다는 이유가 있어서 악당이 된 캐릭터라고 할 수 있을텐데, 에릭 바나의 연기가 이런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 밖에 <반지의 제왕>의 에오메르 역할로 출연했던 칼 어반과 <새벽의 황당한 저주>의 사이먼 패그(그의 영국억양은 영화 속에서 유난히 튀더라 ㅎ), 한국계 배우 존 조 등이 출연하고 있다. 또 한 명 아주 중요한 배우가 이 영화에 출연하고 있는데 이마저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더 언급하지는 않겠다. 개인적으로는 깨알같은 팬임에도 그의 출연이 감동스러웠다.




아이맥스로 관람하였는데 최신 SF/액션 영화답게 극장에서 느낄 수 있는 만족감을 충분히 전달해주고 있다. 우주라는 배경에서만 맛볼 수 있는 초대형 스케일과 <스타 트렉>만이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설정들은 '영화적'쾌감을 선사한다. 하나의 액션 시퀀스가 끝나게 되면 절로 객석 여기저기서 한숨을 돌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스케일이나 사운드 측면에서 압도적인 장면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야기 측면에서도 비교적 빠른 전개로 크게 지루할 틈이 없다(아역이 조금 더 나올 것 같았는데, 금새 지나가 버린다).

순간이동하는 장면이나 광속으로 워프하는 장면들은 다른 SF영화들에서도 만나볼 수 있었던 장면이긴 했지만, 그 맛은 분명 틀리다 하겠다. ILM이 선사하는 컴퓨터 그래픽은 이 우주를 배경으로 한 장면들에 현실감을 불어넣고 있는데, 바로 엇그제 보았던 <울버린>의 CG와 비교하자면 거의 천지차이다. 어두운 우주에서 대형 우주선들이 벌이는 전투장면의 그래픽도 훌륭했지만 훤한 낮시간에 실사와 비행선이 함께하는 CG에서는 더 실감나는 영상을 만나볼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스타 트렉 : 더 비기닝>은 SF영화답게 스케일 측면에서도 만족스러웠으며,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임에도 전혀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내내 흥미로웠으며, 개인적으로는 일찍이 좀 더 팬이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절로 용솟음 쳐버릴 정도로 프리퀄의 본연에도 충실한 작품이었다. 현재 극장에 걸려있는 영화들 가운데 가장 취향을 덜타고 쉽게 추천할 수 있는 영화를 고르라면 아마도 이 작품을 선택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1. 포스터를 딱 본 순간부터 느꼈던 거지만, 아역도 그렇고 어쩜 저렇게 똑같이 생긴 배우들을 찾아내고 (분장으로) 만들어내는지 없던 향수도 생기더군요.

2. 번역 문제는 심각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분명 문제가 있긴 있는것 같네요. 굉장히 많은 내용을 얘기하는데 간략하게 정리하는건 그렇다쳐도 분명히 'sir'를 붙이고 있는데 그저 반말로 번역해 버리는건 문제라고 생각되네요. 계속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반말을 하다가 나중에 인정하고 존댓말을 하는 부분이 등장하는데, 다 반말로 표현되다 보니...

3. 엄청난 괴수도 횟불하나면 문제없음!

4. 영화를 보고나니 <스타트렉>dvd를 한 편이라도 사서 예전 에피소드를 단 한편 만이라도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지네요.

5. 용산 CGV 아이맥스 감상.

6. 아, 추가로, 오랜만에 진상관객을 한분 옆에 두었습니다. 영화사 로고가 등장할 때 '파라마운트'하고 소리내어 읽어주시더니 계속 대화모드로 초반 임하시더군요. '저 여자가 위노나 라이더잖아' '진짜야?, 아닌거 같은데' 등등. 그런데 은근히 로고 나올 때 소리내어 읽는 분들 제법 계세요 -_-;;;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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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Before The Devil Knows You, 2007)
외로운 시대, 외로운 가족의 초상


2007년 작이긴 하지만 이번에 국내에는 처음 정식으로 선보이게 된 시드니 루멧 감독의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는 <12인의 성난 사람들>, 알 파치노가 열연했던 <뜨거운 오후>, 범죄/미스테리 영화의 대표작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 등을 연출했던 거장 시드니 루멧의 작품이라는 점만으로도 일단 관심을 갖게 되었던 작품이었다. 감독의 이름을 보고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여기에 출연한 배우들의 면면을 보니 이건 더 대단한 것이 아닌가. <카포티>와 <다우트>를 통해 새삼스럽게 연기력을 평가받고 있는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과 오랜만에 스크린에서 연기하는 모습을 만나게 된(적어도 개인적으론) 에단 호크, 그리고 최근 <더 레슬러>를 통해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던 마리사 토메이와 대배우 알버트 피니까지. 이런 배우들과 시드니 루멧이라는 감독이 만들어낸 작품은 과연 어떨지 영화 팬으로서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부터는 내용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들께서는 맨아래 단락으로 이동해주세요~)




영화는 범죄 현장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들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지는 일단 생략한채 살인이 발생하게 되는 범죄 현장을 보여주고는 천천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게 된다. 그런데 이 범죄 현장에 얽힌 이들과 사연이 예사롭지가 않다. 아니 오히려 너무 일반적이고 현실적이라 예사로움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형제인 에디(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와 행크(에단 호크)는 각자의 경제적 사정 때문에 보석상을 털기로 계획을 세운다. 아, 계획은 형인 에디가 한 것이며 행크는 단지 실행할 뿐이다. 그런데 이 보석가게는 다름 아닌 형제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가게다. 이 계획에 흥미로운 점은 결과적으로 피해자가 없는 범죄라는 것이다. 자신들은 보석상을 털어서 돈을 챙기고 부모님은 보험을 들어 놓았기 때문에 피해는 커녕 오히려 득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더군다나 범행 예상시간에는 가게 내에 노인 한 명만 지키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별다른 몸싸움이나 인명 피해 없이 저지를 수 있는 상황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훔치려는(얻으려는) 돈이 일확천금이 아니라 단순히 현재 자신들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할 만한 정도라는 것이다.

보통 범죄 영화와 이 영화가 가장 차별되는 점은 바로 이 목적에 있다 하겠는데, 이 계획은 에디와 행크에게는 각자 사소하다면 사소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일 뿐이고, 그들의 계획대로 된다면 아무도 피해받지 않고 서로의 이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들은 표면적으로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 정도만을 목적으로 한 범행이었으며, 더 이상은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들의 이런 계획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전개가 된다. 에디의 계획에는 없었던 인물이 행크의 뜻에 따라 합류하게 되었고, 목숨을 잃은 사람이 2명이나 발생하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형제의 어머니가 가게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죽음을 맞이 하게 된다. 계획대로 일이 되지 않자 이들 형제는 몹시 당황하게 된다. 평소 우유부단하고 독립성이 부족했던 동생 행크는 이 현실에 어쩔 줄을 몰라하고, 모든 일을 계획대로 이뤄 처리하던 형 에디도 자신이 예상치 못했던 변수들로 인해 틀어져 버린 이 현실 때문에 공황상태에 빠져버린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롭게 보았던 점은 바로 이런 점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발생했을 때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인물들이 모습, 더 나아가 결국 이들이(이럴 필요도, 그럴만한 목적이나 악의를 애초부터 갖지 않았던 이들이) 얼마나 급격하게 무너져 내리는 가에 대한 묘사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 영화는 기법 측면에서 사건이 진행되고 나서 그 사이에 각 인물들이 어떤 과정을 겪어왔는가 일종의 플래쉬백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데, 이를 단순히 기법 측면만으로 해석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을 듯 하다. 제목인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전에'에서도 알 수 있듯이, '~ 뭐 하기 전에' 라는 뉘앙스와 계속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 그 전으로 돌아가는 구성 방식은, 이런 일을 겪지 않을 수도 있었던 나약한 인간들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이 담겨있으며, 항상 이런 불안 요소를 잠재한 채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외로운 이들과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의도에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된다.

바로 이 불안감에 대해 영화는 또 깊게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겉보기에는 크게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인물들, 그리고 별로 문제가 될 것 같아 보이지 않았던 일들이 결국 모두 표면 밖으로 터져나오는 걸 보여주면서, 이런 불안감을 항상 잠재하고 있는 현실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듯 했다. 범죄 현장에 무엇을 남기지는 않았는지, 목격자는 없었는지 행크에게 닥달하듯 계속 되묻는 에디의 모습에서는 멀쩡해 보이는 겉모습 뒤에 어떤 불안의 잠재요소가 있는지 되묻는 것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불안 요소를 더 증폭시키기 위해 영화 음악이 의도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이 영화의 영화 음악은 마치 사운드 시스템에 오류가 난 것이 아닌가 흠짓 착각했을 정도로 계속 불안하게 음이 끊긴 채로 전달된다. 이렇듯 관객의 심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영화 속 인물들의 불안한 심리를 더 극대화 시키려는 영화적 장치로 사용되고 있다.




또 하나 생각해볼 수 있었던 건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통한 인물들의 해석이었는데, 아버지로 부터 이어진 가족의 불안요소와 불화가 결국 어떤 결말로 이어지는지를 보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 각 인물들의 상황을 겪으면서 이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어떻게 작용되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 더욱 흥미로웠다. 에디와 행크는 예상치 못했던 일들을 겪으면서 본인도 의도 하지 않았던 일들을 더 저지르며 상황을 악화시키게 된다. 특히 본래는 아무도 죽이지 않으려던(그래서 총도 장난감 총만 준비하고자 했던) 계획을 세웠던 에디는 사태가 급변하면서 이 사건에 관련된 이들을 거침없이 죽음에 이르게 한다. 내러티브 측면에서 왜 에디가 필요없는 사람까지 죽여야 했는가라고 묻는 다면, 이 상황에 놓인 에디는 이미 그런 맥락을 다 따져가며 살인을 저지르는 심리 상태가 절대 아니었다고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 스스로도 공포스러울 정도로 일을 최악으로 몰고 가버리게 되는데, 이건 일종의 불안에 잠식되어버린 연약한 인간상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가족으로 다시 돌아와서. 흥미로운 점은 에디나 행크의 모습이 너무도 외로워 보였다는 것이다. 일단 애초에 문제가 되었던 경제적인 문제를 나누고 들어줄 만한 친구나 동료가 이들에게는 없었으며, 사태가 최악으로 치닫았을 때도 고민을 들어줄 존재라고는 결국 자신들 밖에는 없었다. 특히 에디의 경우는 돈을 주고 마약을 거래하는 마약상에게 자신의 이런 고민을 털어놓게 되는데, 마약상은 딱 잘라 관심없음을 표현한다. 정말 자신을 잘 표현하지 않는 에디가 참다참다 못해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을 사람이 이런 남과도 같은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는 점은, 가정 내에서 문제를 겪은 이들이 얼마나 다른 사람들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데 실패했는지를 통해 이들이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 속에서 에디와 행크가 끊임 없이 서로에게 전화하는 것은(특히 에디가) 단순히 이 사건에 둘이 공모했다기 보다는 이런 고민을 나눌만한 이가 서로 밖에는 없기 때문인 점도 들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외로운 시대에 외로운 존재였던 이들이 어떤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닥쳤을 때 얼마나 쉽게 무너져 내리는지, 이들이 이렇게 까지 되어버린 데에는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얼마나 큰 책임이 있었는지를 이야기하는 텍스트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정작 감독은 이 영화를 멜로 드라마로 규정하기도 했는데, 그런 측면도 발견할 수는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지금까지 얘기했던 것과 같은 것으로 더 받아들이게 되었다.




<다우트>를 보며 '와, 연기만으로도 이렇게 공포감을 느낄 수 있구나'하는 것을 실감하곤 참 대단하다고 느꼈었는데, 이 영화에서 배우들이 보여주는 연기는 또 다른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을 듯 하다.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은 이 영화 내에서 거의 감정이 폭발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는데, 별로 폭발시키지 않고 내색을 하지 않는 듯 하면서도 이렇게 캐릭터에 무게감을 전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이 영화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전작들을 통해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의 여러 종류 연기를 만나볼 수 있었는데, 이 영화에서 그가 보여준 연기는 그의 또 다른 면목을 새삼 느끼게 하는 고수의 연기였다 하겠다.

에단 호크는 자신 본인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의 이미지를 이 영화에서 잘 표현해 내고 있다 하겠다. 단순히 이미지를 소비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기반으로 영화 속에 잘 녹여낸 경우로서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정도를 보여주고 있다. 마리사 토메이는 최근 작품들에서 연이어 노출 장면이 많아 한편으론 '괜찮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그 독특한 말투는 과연 이 사람이 <더 레슬러>에 나왔던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이기도 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은 연기를 펼친 배우는 아버지 역할을 연기한 알버트 피니였다. 복잡하게 얽혀버린 가족사를 점점 알게 되는 인물을 연기하는 알버트 피니의 모습은 현실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과는 다른 측면에서 압도당하는 느낌을 관객에게 전한다. 표정 하나하나에서 그야말로 '열연'을 느낄 수 있었고, 이 영화가 좀 더 풍부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는데에 크게 한 몫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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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나고 이어진 진중권 교수님과의 씨네토크 사진들. 클릭하면 좀 더 큰사이즈로 보실 수 있어요)

이 날은 영화가 끝나고 진중권 교수님이 함께하는 씨네토크가 이어졌다. 기존 영화 관계자나 평론가가 참가하는 씨네토크와는 달리 진교수님이 자신의 정리해온 내용을 발표형식으로 진행한 이후 토크를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아무래도 영화 평론가라던가 관계자와 함께하는 방식이 아니다보니 일반적인 씨네토크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진행이 되었던 것 같다. 좀 색다른 분위기의 씨네토크여서 흥미롭기도 했고, 영화 내용에 관한 토론보다는 철학적 텍스트에 관한 (아무래도 씨네토크 진행자와 참가자들의 성향에 따라 이런 방식으로 흐르게 되었던 것 같다)  이야기로 이어져 신선하기도 했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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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트 오브 플레이 (State Of Play, 2009)
활자의 감성을 그리워하는 스릴러


<박쥐>야 그렇다치고 또 하나의 화제작이었던 <울버린>을 재치고 더 먼저 보고 싶었던 영화가 바로 이 영화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였다. 러셀 크로우, 벤 에플렉, 헬렌 미렌, 레이첼 맥아담스, 제프 다니엘스 등 연기자들의 이름만으로도 본전은 얻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던 것이 사실이었고, 포레스트 휘태커 주연의 <라스트 킹>을 연출했던 케빈 맥도날드 감독과 본 시리즈와 <마이클 클레이튼>을 썼던 토니 길로이의 이름은 이러한 기대감을 더 굳히는데 톡톡히 한 몫을 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2003년 영국 BBC에서 방영한 TV시리즈를 원작으로 각색한 버전을 담고 있는데, 이런 기본적 정보들 외에 영화에 대해 알고 있던 정보는 단순히 스릴러라는 것 정도였다. 보고나니 이 영화는 권력과 음모에 관래 파해치는 기자와 언론에 관한 스릴러였으며, 무엇보다 블로그로 대변되는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활자로 인쇄하는 신문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있는 영화이기도 했다.




스릴러 영화를 리뷰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이제는 정말 스릴러 영화를 만들기가 더욱 어려워져만 가는 것 같다. 대개의 줄거리들은 이미 다 알려져있는 상황이고, 갈수록 똑똑해지는 관객들을 이끌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도 사실인 듯 하다.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의 줄거리도 아주 새로울 것은 없다. 특히 고물 데스크탑에 마우스 보다는 펜을 신봉하며 책상 앞에 앉아 취재하는 것보다는 몸으로 뛰는 세대의 기자인 칼 맥카프리(러셀 크로우)와 블로그 운영을 하고 있으며 펜은 매번 잃어버리곤 하는 여기자 델라(레이첼 맥아담스)의 관계는 매우 전형적이라 할 수 있다. 누구나 예상하듯이 결국 델라는 칼의 방식과 가치관을 가슴 깊이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 과정도 새로울 것은 없다.

이 영화가 보여주고 있는 주된 음모에 대한 것도 비슷하다. 각종 스캔들 등으로 자신들의 과오를 덮으려는 배후 세력, 그리고 여기에 정치권이 아주 깊이 관여해 있으며, 모든 시장을 독점해가는 거대기업이 얼마나 일반인들이 모르는 사이에 합법적으로 세상을 지배해 나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에 맞서는 이는 역시 힘없고 보잘 것 없는 한 사람의 기자일 뿐이다.




줄거리가 새로울 것이 없다면 역시 그 짜임새를 봐야 할텐데,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런 장르의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는 토니 길로이가 각색을 맡아서인지 깔끔한 스릴러 한편을 보여준다. 이야기는 전형적이지만 극적 긴장감과 몰입도는 여전히 전해주고 있으며, 또한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를 통해 관객들은 쉽게 여기서 눈을 떼지 못하게 된다.

러셀 크로우는 요 몇 작품에서 계속 배나온 캐릭터를 연기한 셈이 되는데, 그래도 이번에 맡은 역할에서는 최소한 얼굴만큼은 강한 포스를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액션을 하는 캐릭터도 아니고 더군다나 누구를 심하게 공격하는 입장이라기 보다는 힘없는 자를 대변하는 캐릭터이지만 러셀 크로우는 이런 역할도 매끄럽게 소화하고 있다. 레이첼 맥아담스는 캐릭터가 좀 전형적이어서 그 나름의 연기를 평가받기에는 조금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 똘망똘망한 표정과 눈빛 만큼은 여전히 빛이 난다. 벤 애플렉 역시 전혀 가볍지 않고 진중한 의원 역할을 연기했는데, 초반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 듯도 보였지만 그래도 나름 괜찮았던 것 같다.

헬렌 미렌은 생각보다는 비중이 그리 크지 않았으며, 그저 닥달하는 편집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 같다. 만약 <더 퀸>의 그녀를 떠올리고 갔다가는 한참 기대에 못 미칠듯 하다. 이건 캐릭터 자체의 문제라고 봐야겠다. 그 외에 제프 다니엘스 같은 경우도 캐릭터의 비중은 적었지만 배우의 무게감으로 유지하고 있으며, <다우트> 이후로 기대를 모았던 비올라 데이비스는 거의 까메오 수준이라 알아보는 것 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최근 숀 펜과의 이혼 소식을 들을 수 있었던 로빈 라이트 펜은 왠지 2% 부족한 다이안 레인을 보는 듯도 했다.




(이번 단락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의 반전이라면 반전일 수 있는 마지막 의원의 실체는 이 영화의 중요한 포인트라고 할 수 있을텐데, 기존 영화 같으면 주인공의 친구였던 의원이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하면서 거대 음모를 드러내는 것을 선택하는 것으로 마무리 할 수도 있었겠으나, 이 영화는 한 발 더 나아가 이 의원의 부조리마저 물고 늘어진다. 그런데 이 부분은 단순히 물고 늘어지는 것으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전에 끝이 났다면 우리는(미국은) 이런 거대음모 속에서도 정치권의 소수일지언정 자신을 희생해가며 음모와 맞서기 위해 싸우고 있다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는 이런 자위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럴것 같아 보였던 의원마저 어쩌면 이런 음모를 둘러 싸고 있는 또 다른 음모였으며 부패한 정치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더나아가 이들에게 속아넘어가는 혹은 이들과 운명적으로 한 배를 타고 있는 이른바 '찌라시' 언론들에 대한 경종을 울리려는 것이다.

영화 속 러셀 크로우가 연기한 '칼'을 통해서도 계속 보여주었던 것이지만, 영화는 엔딩 크레딧에서 매우 노골적으로 이런 감정을 드러낸다. 의원의 비리가 담긴 다음날 조간 신문이 어떻게 인쇄되고 완성된 신문으로서 태어나는지 과정을 담담하게 보여주면서, 표면적으로는 활자(아날로그)를 통한 뉴스 전달에 대한 그리움을, 내면적으로는 부패해버린 거대 언론들의 모습을 조용히 비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따지고보면 이 모든 것이 결국 영화니까 가능한 일인 것 같아 더 슬퍼지기도 한다. 영화니까 저런 기사를 1면에 낼 수 있었지, 현실이었다면 음모에 가담한 권력자들이 이런 상황을 놔둘리 만무하니 말이다. 칼 역시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일이고..쯧..



1. 영화에서 이렇게 블로그가 직접적으로 나온 것은 거의 처음인 것 같아요.

2. 꼭 봐야 할 정도는 아니겠지만, 메시지가 있는 괜찮은 스릴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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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Where is my friend (Khane-ye doust kodjast?), 1987)
제목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는 영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1987년작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는 예전 비디오테입으로 얼핏 본 기억만 있었는데 이번 아트하우스 모모에서의 재개봉을 통해 제대로 스크린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 스치듯 본 기억으로는 그저 어린 소년들의 해맑은 모습들과 친구의 노트를 전해주기 위해 열심히도 달리던 주인공 아마드의 모습만이 기억에 남았었는데, 이번에 나이들어(?) 다시 보게 된 영화는 그저 '유년의 책갈피에 꽂힌 한 장의 꽃잎 같은 영화'라고만 하기에는 상당히 깊은 사회적 문제와 메시지가 담긴 이중적 영화였다. 물론 그저 이란 아이들의 놀랍도록 순수한 눈망울을 보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인상적이었던 영화였지만.


(이후 부터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간단한 줄거리는 엄한 규율을 강조하는 선생님에게 가르침을 받는 아마드가 실수로 짝꿍의 숙제노트를 집에 가져오게 되는데, 한번 만 더 숙제를 해오지 않으면 퇴학시키겠다던 선생님의 말이 떠올라 겁이 난 아마드는 노트를 돌려주기 위해 집에서 한참이나 먼, 그리고 어디인지도 모르는 친구 네마자데의 집을 찾아 한참을 해매이게 된다.

어쩌면 내일 주면 되지 않느냐는 아마드 엄마의 말이 맞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숙제를 해오지 못했더라도 아마 선생님은 네마자데를 퇴학시키거나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아마드에게 이 사건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눈과 귀로 직접 확인한 공포가 있기 때문에, 더군다나 나 때문에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퇴학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은 아마드를 온갖 방해들에도 굴하지 않고 친구의 집을 찾아 떠나게 만든다. 그런데 흥미로운건 바로 아마드가 네마자드의 집을 찾기 위해 떠나는 여정 속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에게서 발견된다. 이 과정 속에서 만나게 되는 어른들은 하나 같이 일방적이다. 아마드가 몇 번씩 물어봐도 들을 생각이 없는 것인지 들리지 않는 것인지 대답은 커녕 시늉조차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얘기만 반복적으로 전할 뿐이다. 그저 단순한 질문에 대답만 해주었다면 간단했을 일이 집요하게 대답하지 않는 듯처럼까지 보이는 어른들 때문에 어린 아마드를 더욱 피곤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의외로 굉장히 분노가 치미는 영화이자 인내를 시험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정말 집요할 정도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어른들은 자신들의 입장만 가치관만 전달하려 한다. 그것이 옳은가 그른가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것보다는 남의 이야기를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아마드가 네마자데의 아버지인줄 알고 따라가게 된 문을 고치는 남자도 그렇고, 아마드의 할아버지도 그렇고 아마드의 선생님도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과연 진짜 저럴까 싶을 정도로 아마드가 마치 투명인간인냥 상대하는 이들의 모습은 절로 분노를 일게 한다. 이들에게 아마드의 외침은 아무런 소득없이 돌아올 뿐이며 정말 말그대로 투명인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일 뿐이다.




지그재그로 이어진 언덕을 오르는 모습을 굳이 리얼타임으로 보여주는 것은 이런 피곤함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관객들은 이 길을 처음 오를 때는 별 생각을 하지 않지만, 이 장면이 반복될 때에는 다들 탄식을 터뜨리게 된다. 다시 말해 관객은 전지적 입장에서 굳이 이럴 필요까지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속에서 고생하는 아마드를 보며 안타까울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아마드가 고생이 많다;).

마치 추리영화의 한 장면처럼 다양한 단서들을 조합하여 네마자데의 집을 찾던 아마드는 (이 영화를 추리극의 면에서 바라보면 굉장히 흥미로워진다. 같은 바지를 알아보고 추적하는 장면이나 네마자데라는 이름을 물어가며 집요하게 추적하는 장면은 마치 <추격자>에서 4885를 찾던 김윤석의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밤이 되어서야 구세주같은 할아버지 한 명을 만나게 된다. 네마자데의 집을 알고 있다는 할아버지의 등장은 관객들로 하여금 '아, 다행이다'라는 안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데, 이 할아버지가 그렇게 돌아돌아 찾아간 곳이 결국 낮에 들렸던 그 '네마자데'의 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관객은 더 큰 한숨을 절로 짓게 된다. 결국 이 곳에서 아마드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으며, 아마드는 체험을 통해서야 이런 현실을 깨닫고는 집으로 돌아와 밤을 새서 친구의 숙제를 대신해주게 된다.

사실 이 영화의 모든 것이 일어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면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일은 처음부터 숙제를 대신 해주었으면 간단했을 일라는 것을 들 수 있을텐데, 이렇게 굳이 이런 일들을 피곤하게 보여준 것은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밖에는 없는 단절되고 피곤한 이란 사회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면에서 따져보면 이 영화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라는 제목에 대부분의 메시지와 감성이 담겨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디인가'라고 묻는 아마다의 말에는 삭막한 사회 속에서 외치는 순수한 존재의 울림과도 같으며, 반대로 가장 친한 친구의 집도 알지 못하는 이란 사회의 폐쇠성과 경제적인 어려움을 엿볼 수 있다. 영화 속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몇몇 장면들로 유추해보자면 이 아이들은 제일 친한 친구임에도 학교에서 어울리는 시간을 제외하면 따로 아이처럼 놀거나 할 여유가 없어보인다. 다들 가사나 일을 돕는데 남은 시간을 써야하기 때문에 단순히 노는데 투자할 시간은 없으며, 더군다나 동네가 떨어져 있는 경우는 더 할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라는 제목은 가장 친한 친구의 집마저 모를 수 밖에는 없는 이란 사회의 현실에 대한 푸념일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1. 재개봉이지만 대부분 영화를 처음 접하는 관객들이 많아서인지 영화가 끝나고나자 '화끈한' 반응을 보여주시더군요. 요근래 엔딩에서 이렇게 화끈한 반응이 있었던 영화가 있었나 싶을 정도였어요 ㅎ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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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Thirst, 2009)
욕망으로 물들인 박찬욱의 새로운 장르영화


박쥐. 박쥐. 박쥐.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박찬욱 감독의 2009년 신작 <박쥐>를 개봉일날 역시 말이 많았던 예매이벤트를 통해 관람했다. 그 덕에 멋진 사인 시나리오 북도 얻을 수 있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을 기다리는 마음은 다른 감독들과는 조금 자세가 다르다고 할 수 있을텐데, 다른 감독들에 비해 박찬욱 감독의 신작은 보기에 앞서 '과연 이번엔 또 어떤 이야기일까?' '어떤 영화일까?'하는 원초적인 궁금증이 더 분비된달까. 마치 서태지의 신보를 기다리는 심정과도 비슷하다. 좋을까? 나쁠까?이기 보다는 '뭘까?'하는 궁금증이 더 크다는 말이다. <박쥐>는 잘 알려졌다시피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켕'을 원안으로(inspired by)한 작품인데(한 인터뷰에서 보니 박찬욱 감독은 이 원작에 'inspired by'하여 만들었는데 이게 '원작'과는 조금 다른 개념이라 다른 우리 말을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해 그냥 '원작'이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에밀 졸라의 책을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내가 들은 얄팍한 지식으로 미뤄보자면 친구의 아내를 탐하는 것이나 살인극, 심리극이라는 것은 맞지만 정작 뱀파이어는 등장하지 않는다고 한다.

얼핏보면 카톨릭 사제가 뱀파이어가 되어서 욕망을 갈구한다는 것은 굉장히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따지고보면 이는 신선하다기보다는 굉장히 전형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카톨릭 사제가 뱀파이어가 된다는 설정만 봐도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욕망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을 알 수 있고, 각각의 욕망과 서로의 욕망이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볼만한 텍스트가 되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사실 개인적으로 박찬욱 영화를 기다리는 마음에는 의외로 '메시지'에 관한 부분이 그리 크지 않다. 내가 생각하는 박찬욱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무엇보다 영화를 장르적으로 접근하여 환상적인 미쟝센들을 만들어내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으며, 쉽게 말해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쾌감을 선사하는 감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이 실망했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도 매우 재미있게 보았으며(참고로 박찬욱 감독은 자신의 지금까지 작품들 가운데 씨네마테크에 남기고 싶은 영화가 어떤 것이냐는 질문에 바로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택했다), <박쥐>역시 이런 기대감에서 접근하게 되었다. 결과는 역시 박찬욱이었으며, 그는 장르영화의 틀 안에 갖혀있지 않고 굉장히 다양한(복잡한) 장르영화적 요소와 영화적 장치들을 <박쥐>라는 하나의 그릇에 온전히 담아내는 시도를 했으며, 그 시도는 괜찮았다.

(이하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들께서는 맨 아래 단락으로 이동해 주세요~)




상현(송강호)은 신부다. 그는 병자들을 돌보는 곳에서 그들을 돕고 있는데, 병으로 죽어가는 환자들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는 것에 인간적으로(또는 신앙적으로) 무력함을 느낀다. 그리하여 외국에서 바이러스 백신을 위한 실험에 자원하게 되고 이 과정 속에서 목숨이 위험해져 수혈을 받게 되는데 이 때 수혈 받은 피로 인해 상현은 뱀파이어가 되게 된다.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상현은 뱀파이어로서 느끼는 욕망과 인간으로서 느끼는 욕망을 신부로서 자제하려 애쓰게 된다.

일단 이 영화 <박쥐>는 공감대 측면 면에서 관객들에게 크게 어필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 만큼 박찬욱 감독은 각 인물들의 히스토리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고 단편적으로만 빠르게 묘사하고 있다. 상현이 외국으로 가서 실험에 자원하게 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신부로서 인간으로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돕고 싶은 마음에 그런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해도 영화가 시작하고 얼마되지 않아 바로 뱀파이어가 되는 과정은 무척이나 갑작스럽다. 만약 상현이 그래야만 했을 더 공감가는 줄거리를 풀어놓았다면 이 과정에 좀 더 공감이 갔을런지는 모르겠으나 영화는 더 정형화 되었을 것이다. 박찬욱 감독은 공감대 측면을 과감히 축소하더라도 자신이 말하려는 메시지의 핵심 자체에만 집중하려 한 듯 하다. 본래 이렇게 주인공이 급작스런 변화나 변이를 겪게 되는 영화는 거의 중반부가 되서야 그 사건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전까지는 평범한 일상 속에 작은 에피소드들을 늘어놓게 마련이고. 이렇게 해야만 변하고 난 뒤 그의 행동들에 어느 정도 '정당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쥐>는 이런 것을 정상적인 단계를 다 밟기보다는 바로 핵심 공략으로 들어가고 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이렇게 직접적인 접근 방식을 선택했기 때문에 감독이 담으려고 했던 다양한 장르적 특성들과 갈등 요소들을 모두 담아낼 여지가 생기지 않았나 싶다.

상현을 비롯해 태주나 강우의 경우도 그렇다. 강우(신하균) 역시 왜 그런 병을 얻게 되었는지 태어날 때 부터 병을 앓았던 것인지 그런 성격을 갖게 된 것이 꼭 병 때문인지는 불확실하다. 태주(김옥빈)도 마찬가지다. 그 지옥같은 집안에서 일탈을 꿈꾸는 모습은 그려지지만 사실 따지고보면 족쇄가 채워진 것도 아니고 도망가려면 언제든 도망갈 수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태주는 몽유병을 가장해 밤마다 거리를 맨발로 뛰는 것으로 억압에서의 자유를 느끼는 것으로만 설명된다(물론 이 둘이 이상한 부부관계에 대한 플래쉬백은 잠시 등장하기도 하고 강우에 대한 이야기도 얼핏 지나가지만, 분명 포인트는 여기에 없다). 상현이 실험에 자원한 것이 그러하였듯이 영화 속 인물들은 자신이 지금까지 겪어온 역사로 인해 영화 속 사건에 반응한다기 보다는 그 각각의 '반응'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해야겠다.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그런' 그 자체인 것이다. 이렇게 영화를 보게 되면 조금 더 집중할 수 있게 된다. 하나하나의 의미를 새겨보기에도 편리해지고.




이 영화가 완전히 박찬욱 영화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물론 나뭇가지 그림자가 비치는 벽을 배경으로 상현이 문을 열고 등장하는 첫 장면부터 범상치 않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긴 했지만, 역시 그의 장점이 가장 잘 드러난 공간은 라여사(김해숙)와 강우, 태주가 살고 있는 행복한복집이라 할 수 있겠다. 이 공간은 딱 보는 순간 그로테스크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공간의 색감은 물론이고 인물들이 입고있는 옷의 이미지는 이를 더한다. 특히 라여사의 어둡과 화려한 드레스와 강조된 인위적 화장은 이 공간의 분위기를 더하고 있고, 퀭한 얼굴의 태주와 해맑게 웃는 강우의 얼굴도 이를 더한다. 한복집이라는 설정은 여러가지를 빗대어 이야기할 수 있는 구실을 주는데, 일을 하는 공간인 1층에서는 라여사와 태주 모두 한복을 입고 손님을 맞는 것은 물론 공간 역시 이에 걸맞는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일과는 무관한 생활의 공간인 2층의 이미지는 한복집과는 정반대다. 마치 김기영 감독의 영화에 등장하는 미장센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보라색 식탁보와 개성강한 인물들, 의상들, 마작을 하는 는 모습은 남인수의 노래 '고향 그림자'가 더해지면서 묘하게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여기에는 감독인 박찬욱과 함께 <올드보이> 등을 함께 해온 류성희 미술감독의 공도 크다하겠다.

김기영 감독에 대한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세트 디자인이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는 물론이고 각 인물들을 그리는 방식도 김기영 감독의 분위기를 심심치 않게 느낄 수 있었다. 박찬욱 감독이 김기영 감독의 열열한 팬이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인데, 그 동안 그의 작품들 가운데 <박쥐>가 가장 김기영 감독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었다. 과장된듯까지한 인물들의 대사와 분위기, 그리고 자신이 말하려는 의도를 전하기 위해서는 거침없이 연출하는 방식에서도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박쥐>는 아무래도 '멜로'이기 때문에 좀 더 낭만적인 느낌이 가미된 점을 들 수 있겠다.

여튼 '행복한복'이라는 이 공간이 주는 느낌은 상당히 강하다. 1층에서 한복을 팔기 위해 마치 마네킹 처럼 한복을 입고 손님들에게 노출되어 있는 태주의 모습에서는 '옷'을 파는 것이 아니라 '몸'을 파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으며, 태주의 얼굴이 가게 문의 할머니(?)얼굴과 정확히 겹쳐지는 장면이라던가 2층의 긴 복도 그리고 지하실 등은 이후 상현과 태주가 이 공간을 라여사로부터 지배하게 되었을 때에도 용이하게 사용된다.




이 영화에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역시 욕망이다. 극중 상현과 태주의 욕망은 대부분의 욕망이 그러하듯 모든 것을 파국으로 만들고 만다. 상현은 뱀파이어가 되고 나서 생존과 신앙 사이에 고민하게 된다. 아니 이건 신앙이라기 보다는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이랄까. 생존을 위해 다른 사람의 피를 마셔야 하지만 사제라는 것을 재쳐두더라도 상현이 그 동안 지켜왔던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상현은 이 '생존'이라는 좋은 구실 때문에 욕망을 이루게 되고 이 안에는 인간으로서 뿐만 아니라 사제로서 억눌려 왔던 욕망도 포함되어 있는 듯 하다. 뱀파이어로서 다른 사람의 피를 먹는 것으로 욕망을 채웠다면 인간으로서는 강우의 아내인 태주와 관계를 맺으면서 욕망을 이루게 된다. 여기에도 물론 앞선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간적인 면과 사제로서의 면 모두 관련이 있다 하겠다. 상현이 사제로 설정되면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다른 인간들에 비해 자신이 욕망을 채울 수 밖에는 없는 이 상황을 스스로 합리화하고 설득시키려 계속 노력하는 과정이 동반된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단순히 '어쩔 수 없잖아' 정도로 끝날지도 모르지만, 죽는 자를 살리고자 실험에 자원했던 '사제'인 상현에게는 이것만으로는 스스로를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노신부에게도 끊임없이 '내가 수혈 받을 피를 고를 수 있던 것도 아니었잖아요?' '좋은 일 하려고 그랬던 거 잖아요'하면서 설득하려 하는데, 이는 노신부를 설득시켜 자신의 처지를 인정받고 싶다기 보다는 자기 스스로를 납득시킬 구실을 만들어야만 했기 때문일 것이다.

뱀파이어가 된 상현은 끊임없이 이런 자기 설득에 애를 쏟는다. 남의 피를 마시지만 살인이 아니라 자살하기 원하는 사람들의 희망을 들어준다는 이유를 만들고, 혼수상태에 있는 사람의 피를 마시면서 깨어 있었다하더라도 분명히 줬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심지어 이블린의 피를 마시면서도 태주에게 '너는 아까 많이 마셨잖아'라고 일부러 얘기한다). 이런 이유 만들기는 그 순간 뿐 아니라 나중에 욕망에 더욱 잠식되었을 때에도 하나의 구실로 사용된다. 처음부터 욕망에 노예처럼 자유롭게 행동했던 태주와는 달리 끊임없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최소한의 방법을 사용해 왔다고 생각해온 상현에게 '그래, 그 동안 나는 할 수 있을 만큼 했잖아'라는 또 하나의 커다란 구실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태주의 욕망은 어떨까. 태주는 라여사의 집에서 강우와 원치않는 인생을 살고 있지만 그녀가 표현하는 욕구해소 행동이래봤자 아무도 없는 밤거리를 속옷 차림에 맨발로 전력질주하는 것 뿐이다. 그런데 태주는 잘 생각해보면 뱀파이어가 되기 전부터 그와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죽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의 피를 마셔야만 하는 뱀파이어처럼 고아나 다름없는 태주는 역시 생존을 위해 이 지옥같은 공간에 있을 수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또한 상현이 뱀파이어가 된 것이 구실이었다면 태주에게는 라여사와 강우가 구실이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태주는 사제인 상현을 유혹하다시피해 관계를 맺기도 했고, 결국 이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상현을 이용해 강우를 낚시터에서 강에 빠트려 죽이고 만다. 사실 태주는 상현이 뱀파이어라는 것을 안 그 순간부터 실제로 뱀파이어가 된 것과 같은 현실을 살게 된다. 자신 밖에는 의지할 곳이 없는 상현을 자신의 마음대로 컨트롤 하려하며 오히려 상현이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할 지경까지 그를 밀어붙인다. 건물 옥상에서 상현에게 여기서 뛰어내릴 수 있냐며 유혹하는 장면은 상현이 사제이기 때문에 마치 예수가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당하는 것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태주는 스스로 뱀파이어가 된 다음부터는 더 과감해진다. 태주에게는 상현과 같은 자기 설득과정이 필요없기 때문에 과감하게 살인을 저지르고 피를 마신다. 상현은 이런 태주를 타이르려고 하지만 이미 뱀파이어가 된 태주를 컨트롤 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 만은 아니다. 상현은 그 동안 똑바로 보지 못했던 자신의 욕망을 태주에게서 서서히 보게 된다. 그래서 오히려 태주를 통해 자신이 욕망마저 버릴 수 있는 구실을 찾게 된다.

영화 속에서 태주를 그리는 방식도 매우 흥미롭다. 혹자들은 김옥빈의 연기에 대해 어설프다며 말이 많지만 이는 분명히 의도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질감이 느껴지는 대사톤과 뱀파이어가 된 이후에 마치 아이처럼 좋아하며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모습, 떠오르는 태양을 피하기 위해 상현에게 때를 쓰며 반항하는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가 투정부리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태주의 욕망을 이렇게 아이의 그것처럼 그린 것은 또 어떤 의도일까. 욕망이라는 것은 결국 순수하다는 것일까. 순수함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야 말로 금기시 되어야 한다는 것일까.




이 영화 속에서 상현과 태주 만큼 중요한 인물은 김해숙씨가 연기한 라여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초반 그로테스크함 가득한 화장과 얼굴로 깊은 인상을 주었던 라여사는 온몸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게 된 이후부터 더욱 큰 의미를 갖게 된다.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가장 처음 드는 생각은 '왜 라여사를 죽이지 않는가?'라는 것이었다. 영화 속 분위기를 보면 그래도 키워주신 어머니라 아니면 살인을 하지 않으려는 상현 때문에 죽이지 않았다고 보기보다는, '남겨두었다'라고 보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마치 듣지 말아야 할 인물이 옆에 있는 가운데 이런 은밀한 진실을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것 자체에서 희열을 느끼는 부분도 있는 듯하며, 반대로 누가 들어주고 보아주었으면 하는 욕망에서 기인한 것 같기도 하다. 이는 영화의 마지막 상현과 태주가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그 순간, 그 장소에도 눈을 감지 못하는 라여사를 굳이 대려간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상현과 태주는 결국 외로운 존재들이다. 자신들이 그녀의 아들을 죽게 했지만 그럼에도 자신들의 마지막에 누군가가 있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마지막에는 이런 감정 외에 상현이 사제로서 자신이 저지른 죄악을 용서받기 위해 그녀가 보는 앞에서 산화를 택한 것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상당히 복잡한 장르적 요소들이 결합된 영화라고 생각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욕망과 뱀파이어의 큰 줄거리에 살인극이 포함되었다는 점이다. 영화는 신하균이 연기한 강우를 두 사람이 죽이게 된 이후부터 이 살인극으로 인한 이야기와 묘사들에도 상당한 관심을 보인다. 특히 두 사람 모두가 물 속에 빠트려 죽인 강우 때문에 지속적으로 강우의 환상을 보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뱀파이어와 욕망에 이야기와는 쉽게 용해되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자는 침대 위에 강우가 중간에 돌을 앉고 있는 모습이라던가, 두 사람이 섹스를 할 때 강우가 두 사람 사이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모습 등의 묘사는 살인을 저지른 자들이 겪는 공포감(두 발 뻗고 못자는)을 나타낸 장면으로 큰 줄기인 욕망의 이야기에 완벽하게 융합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적어도 개인적으로는). 아마도 이 설정은 에밀 졸라의 원작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설정인 것 같은데, 결국 이 설정이 라여사라는 캐릭터에 일종의 '존재의 이유'로 사용되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너무 복잡하게 만드는 요소로 느껴졌다. 송영창과 오달수가 각각 연기한 승대와 영두의 이야기는 한복점이라는 공간내에서 욕망이라는 큰 줄거리와 잘 맞아떨어지고 있지만 죽은 강우의 모습이 두 인물을 계속 괴롭히는 장면은 너무 복잡해진 느낌도 있었다.

박찬욱 감독은 가위를 입안에 여러번 넣었다 뻈다 하는 장면을 여러 번 반복해서 삽입하고 있는데, 다음 번엔 찌를지도 모르겠다고 관객이 느끼는 불안감을 통해 상현과 태주가 강우가 살아돌아올지도 모른다고 불안해하는 감정을 느끼길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영화 속 상현의 대사처럼 뱀파이어는 불사의 존재가 아니듯이, 이렇게 공포에 떠는 나약한 존재임을 이야기하려 했는지도 모르겠고.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는 도구나 장면장면이 여러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경우가 참 많다. 그리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이 숨겨놓은 의미를 찾길 바라는 점도 있는 듯 하고,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미장센으로서 장면 만으로서 이미지로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상현과 태주가 제대로 된 첫 번째 섹스를 병실에서 갖은 뒤 부활절 달걀을 먹는 장면도 그렇다. 태주가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고 드디어 지옥같은 공간에서 빠져나와 상현과 섹스를 나눈 뒤에 부활절 달걀을 먹는 것은, 그야말로 '부활'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나중에, 그 동안 생일을 한번도 치르지 못했다던 태주가 뱀파이어로 다시 태어나자 '해피 버스데이, 태주씨' 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앞선 단계로 이해할 수 있겠다.

전작 <친절한 금자씨>를 보면 금자가 상상하는 장면에서 극중 최민식의 얼굴에 몸은 개가 되어 등장하는 묘한 장면이 등장하는데, <박쥐>는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영화의 대부분이 이런 식의 느낌을 주고 있다. 건물 옥상들을 뛰어넘는 장면들에서는 왠지 모를 낭만이 느껴지고, 온통 하얀 한복가게 2층의 이미지는 빨간 피의 이미지를 준비한 너무 노골적인 연출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상현과 태주가 나는 베드씬에서의 대사들은 마치 홍상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나 부끄럼 타는 사람 아니에요' '원래 좋은 거에요? 이런 대사 말이다.

어째 영화보다 더 화제가 되고 있는 송강호의 노출 장면에 대해서는 반드시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일단 그 전에 감독이 기자 시사후에 이 노출 부분만 화제로 기사를 쓰지 말라고 특별히 요청까지 했다는데, 아니나 다를까 신나게 성기노출 기사만 써낸 기자들은 참으로 자격이 없다. <박쥐>라는 영화가 좋고 나쁘다를 떠나서 영화의 본질은 따로 있는데 마치 이 영화를 노출로 대변되는 영화로 일순간에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그 전엔 김옥빈의 노출 연기만 운운했으니 말 다했다). 이 장면이 반드시 필요했다는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죽음을 맞기 위해 차를 운전하던 상현은 갑자기 수도원으로 항햔다. 수도원 앞에는 자신을 성자로 믿고 있는 이들이 벌써 한참 동안 노숙을 하고 있다. 상현은 이 중에 한 여성의 텐트에 들어가 있다가 여성의 비명소리에 모인 신자들에 의해 발각이 된다. 사람들은 이로 인해 자신들이 성자로 믿고 있는 상현이 사실은 몹쓸 놈이라는 것을 알고 돌을 던지며 상현을 쫓아낸다. 관객들도 미처 눈치 채지 못한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 장면에서 상현은 황우슬혜가 연기한 이 여성을 성폭행 한 것이 아니다. 죽기 전에 자신을 성자로 믿는 자들에 환상을 깨주기 위해 일부러 이런 장면을 연출 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을 통해 의연히 나오면서 알수 없는 표정을 짓는데 이 표정만으로는 살짝 불완전하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그 노출 장면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장면을 보면 상현의 성기는 성행위를 하다가 발간된 직후임에도 발기가 된 상태가 아니다. 이는 바로 상현이 전혀 흥분된 상태가 아니었다는 점이며, 다시 말해 상현이 만든 의도적인 상황임을 알려주는 또 하나의 영화적 장치라는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보였다 안보였다에만 집중하는 모습은 참으로 아쉽다(객석에서도 이상한 탄성이 흘러나오던데, 이건 좀.).




이 영화를 통해 가장 돋보이는 배우는 역시 김옥빈이다. 그녀가 이전에 연기한 작품들을 별로 보진 못했지만, 태주라는 역할은 그녀가 연기를 잘했다 못했다를 떠나서 상당히 김옥빈과 어울리는 캐릭터임이 분명하다. 욕망에 눈떴을 때 그 살아있는 눈빛. 장난기와 희망에 잔뜩 부푼 눈빛과 입꼬리지만 왠지 사악함마저 느껴지는 이 얼굴은 태주라는 캐릭터에 완벽하게 어울린다. 대사 톤은 확실히 약간 어색한데 이는 분명 감독의 의도라고 생각된다. 태주라는 존재는 분명히 영화 속에서 불완전한 존재다. 어린아이같이때를 쓰거나 장난기 어린 모습도 그렇고, 아마 말투도 이런 측면에서 연출된 것이 아닐까 한다.

송강호의 연기는 부족함은 없었으나 최고는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태주의 경우 김옥빈 외에는 생각하기 어려우나 상현의 경우는 송강호 외에도 더 나은 선택이 있을 듯 하다. 약간 뱀파이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허무하고 현실적인) 대사들을 할 때는 그 만의 장기가 살아나는 부분이었지만 좀 더 뱀파이어스럽거나 심각한 연기를 할 때는 약간 임팩트가 떨어지는 듯한 느낌도 있었다. 뭐랄까 90점 이상의 점수를 줄 수 있겠으나 왠지 120점 정도로 연기할 다른 배우가 있을 듯한 느낌.

김해숙의 연기는 확실히 장르화된 연기로서 객석에서 '움찔'하는 반응이 절로 나올 정도로 무서움 그 자체였다. 몸은 완전히 굳은 채로 눈만으로 연기하는 후반부의 연기가 압권이었는데, 확실히 베테랑 답게 눈의 움직임만으로도 공포와 독기를 넘나드는 멋진 연기를 선사하고 있다. 송영창, 오달수의 경우는 캐릭터의 비중이 작은 것도 있지만 어느 정도 정형화된 느낌이 있었으며, 신하균의 경우는 연기도 연기지만 확실히 그 해맑은 미소하나만으로도 캐스팅에 이유가 될 것 같다. 그 해맑음이 이 영화에서는 얼마나 섬뜩하게 표현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으니.




<박쥐>는 확실히 대중적인 영화는 아니다. 단순히 취향이 문제 뿐만 아니라 이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불편함을 느끼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박찬욱 감독의 팬으로서 하나 안타까운 점은 그의 영화 팬층이 너무 갑작스레 광범위하게 퍼져버린 탓에 그의 본래 취향에 성향이 강한 영화들이 나왔을 때 그 어떤 감독보다 실망하는 관객들이 많이 나오곤 한다는 점이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경우처럼 <박쥐>도 많은 사람들이 별로 혹은 최악이라며 악평을 쏟아낼지도 모르겠다(벌써 나오는듯도 하다). 영화야 어차피 개인의 것이고 취향의 차이니 좋고 나쁨에 대해서 왈가왈부 할 맘은 없지만, 그저 너무 엄청난 관심의 대상이 되버린 현실이 안타깝달까. 적어도 <복수는 나의 것>을 본 이들이 많다면 이 정도의 악평이 쏟아질 것 같지는 않은데, <올드보이>나 <공동경비구역 JSA>에 더 익숙한 사람이 많은 터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일 것 같기도 하다. 이 점은 아마도 박찬욱 감독이 계속 짊어지고 나가야할 하나의 짐이라고 해야겠다.

또 하나, 확실히 메시지 자체로 이야기하는 영화는 아니었던 것 같다. 내러티브가 주가 된 영화도 아니었고. 복합적인 장르적 재미와 영화 팬들을 자극하는 요소들을 발견해야만 더 즐길 수 있는 불친절한 영화라고도 생각된다.

개인적으로는 그래서 좋았다. 이 영화 <박쥐>.


1. 관람할 당시 옆 관에서 <스타트랙 : 더 비기닝> 상영이 되고 있었는데, 옆 관의 강한 우퍼소리 때문에 <박쥐>상영관까지 울리게 되어 관람시에 좀 불편하더군요;;

2. 주인공이 뱀파이어 영화인데 영화 중반이 지나도록 피를 먹는 장면에서 관객들이 소리내어 반응하더군요. 초반에는 그럴 수 있어도 뱀파이어 영화라는 점이 인식하고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까하는 바램도.

3. 의외로 유머러스한 장면들이 제법 있더군요.

4. 스쿠버다이버들이 수색을 마치고 물위에서 떠오르는 장면은 분명 의도된 느낌이었습니다.(그 낚시터가 수몰지구위에 있었다는 점도 흥미로웠구요).

5. 유니버설 픽쳐스의 로고를 한국영화에서 보니 그것도 흥미롭더군요.

6. 확실히 딱 한 번 감상으론 부족한 영화인것 같네요 ^^: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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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파리 (Breathless, 2008)
폭력의 역사를 통한 가족의 탄생


제목부터 심상치 않았던 양익준 감독의 영화 <똥파리>는 그 제목 덕분에 일단 관심을 갖게 되었던 영화였다. 제목에 흥미를 갖게 되었을 때쯤 해외 유수 영화제의 수상 소식들도 부수적으로 들려왔는데, 그것이 이 영화를 보게 된 결정적인 이유라고 까지는 할 수 없겠으나(오히려 이유라면 지인들과 취향이 비슷한 평론가들의 칭찬들이랄까)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겠다. 연출과 주연을 맡은 양익준 감독은 이번이 장편 데뷔작이기는 하지만 인디 영화계에서 감독보다는 배우로서 더 인지도가 있던 인물이었다. 사실 처음 이 작품 <똥파리>에 대한 매우 소극적인 정보들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단순히 폭력에 관한 이야기 일 줄로만 알았다. 메이저 영화에서는 잘 다루지 못하는 인디 영화만의 에너지와 이야기가 담긴 제법 괜찮은 영화일 줄로만 알았었는데, 막상 뚜겅을 열어보니 <똥파리>는 참으로 생각해볼 만한 여지가 많은 작품이자 폭력과 가족에 대해 깊은 성찰이 담긴 영화였다.


(이후 부터는 영화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들께서는 맨 마지막 단락으로 이동해주세요~)




영화는 여자를 때리는 남자와 이후 이 남자를 때리는 상훈의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 오프닝 장면은 영화에 대한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집약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처음 남자가 여자에게 폭력을 가하는 장면만으로는 단순히 '폭력'에 관한 것만 이야기할 수 있지만, 이 가해자가 순간적으로 다른 사람에 폭력에 의해 피해자가 되는 상황은 단순히 '폭력'에 대한 것 뿐만 아니라 '폭력의 되물림'과 '폭력의 역사'에 대해 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만약 <똥파리>가 단순히 폭력 그 자체만을 다룬 영화였다면 그저 용역 깡패로 살아가는 상훈의 일상적 에피소드를 전면에 배치해도 좋았을테지만, 이 영화가 말하려는 바는 그 자체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의미심장한 장면으로 영화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똥파리>는 크로넨버그의 영화처럼 폭력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이어져왔고, 인간 내면에서 살아왔는지에 관한 영화라기보다는 폭력의 역사를 통한 가족의 이야기, 결국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영화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포스터에 새겨진 저 문구는 참으로 멋지다.

'세상은 엿같고, 핏줄은 더럽게 아프다'.

보통 영화가 관심을 갖고 관객들이 호기심을 갖는 부분은 '세상은 엿같고'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을텐데, 사실 <똥파리>를 보고 나니 그간 이 '엿같은 세상'을 사는 인물들을 그려낸 영화들이 초라하게 보일 만큼 그 자체로서는 적어도 이보다는 더 큰 의미를 갖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핏줄은 더럽게 아프다' '핏줄은 더럽게 아프다' 라는건 왠지 빠져나갈 수 없는 듯한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엿같은 세상은 아무리 엿같아도 본인이 하기에 따라 즐길 수도 뛰쳐나갈 수도 있지만, 더럽게 아픈 핏줄은 어떻게 한다고해서 바꿀 수 있거나 탈출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나중에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겠지만 양익준 감독이 만든 <똥파리>에서 이 더럽게 아픈 핏줄을 극복하거나 수용하는 방법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폭력의 역사'는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현실들이다. 부모들의 싸움, 술먹고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이들과 그로 인해 생긴 결손 가정. 그리고 나라에서 동원되어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아버지 세대가 겪는 아픔, 그리고 그 다음 세대가 그들의 아픔을 고스란히 받아들여하는 현실. 그리고 이로 인해 생긴 가난한 현실 역시 드러나고 있다. 이 같은 복합적인 요소들이 결국 어디서부터 왔는가를 생각해보면 영화의 시작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폭력 자체에서 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잘 생각해보면 결국 가족이라는 울타리내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주인공 상훈이 이 가족을 복원하기 위해 벌이는 피눈물나는 여정이며 결국 이뤘는지 이루지 못했는지에 대해서는 더 생각해볼 만한 여정이다.

가난과 폭력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보자면 폭력으로 말미암아 생긴 가난이라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다시 사용되는 것이 폭력이다. 영화 속 상훈은 폭력으로 얼룩진 가정 속에서 자라 결국 가난이라는 짐을 짊어지게 되었지만, 그가 이를 벗어나기 위해 직업으로 갖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용역 깡패, 즉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가해 돈을 버는 일이다. 이런 관계는 영재에게서 더욱 도드라지게 나타난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아버지는 그 피해로 정신적 혼란을 겪고 있고 어머니는 이미 죽어버린 이 가정 속에서, 영재는 마치 상훈이 그랬던 것처럼 폭력으로서 세상에 나아가게 된다. 하지만 상훈도 그렇고 영재도 그렇고 이 과정을 단순히 가난을 극복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라 할 수 있겠다. 상훈이나 영재가 이렇게 폭력을 몸에 지니게 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가해졌던 폭력들 때문이며 자신 역시 폭력만을 통해 삶을 살아가는 방법 밖에는 배울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영화에 후반부 영재가 상훈에게 폭력을 가해 결국 죽음에 까지 이르게 하는 것은 그래서 더욱 의미깊다. 영재가 상훈을 공격했던 것은 단순히 돈을 훔치기 위해서도 아니었고, 그저 혼내주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냥 적당히 때렸어도 되었을터. 하지만 영재는 상훈이 죽음에 이르도록 폭력을 가하는데 이는 상훈에게로 향한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이 처한 상황과 가정에 대한 분노에로 향하는 폭력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영재가 상훈에게 폭력을 가하는 장면은 영화의 첫 장면과 동일한 메시지를 준다. 절대적인 폭력의 존재로만 보였던 상훈을 아직 미완의 존재라고 할 수 있는 영재가 공격하는 장면은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 결국 아버지 세대에서 가해진 폭력이 그 다음, 그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영화의 마지막, 연희가 우연히 상훈과 똑같이 용역 깡패로서 활동하는 영재의 모습에서 상훈의 모습을 겹쳐보는 것은 굉장히 노골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폭력의 되물림과 악순환. 아마도 상훈처럼 나중에야 이 폭력의 고리를 끊어야 겠다고 깨울칠 영재의 모습. 영화는 다 끝났다고 생각된 시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되물림에 관한 아픈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따뜻하다'라고 느꼈던건 바로 주인공 상훈의 행동들 때문이었다. 상훈은 앞서 언급한 '엿같은 세상'을 그냥 막살고 말려는 인물이 아니다. 그는 표현하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지만 자신에게 되물림된 폭력의 사슬을 끊고, 이 모든 것을 잉태한 가족의 아픔을 다시금 새로운 가족의 탄생으로서 치유하고자 하는 인물에 가깝다. 알려졌다시피 이 영화 대사의 80%는 거의 욕설들로 채워져있다. 개인적으로는 욕설에 대한 상당한 거부감이 있기 때문에 이 영화를 선택했을 때에도 잠시 머뭇거려지기도 했었는데, 영화 속 상훈의 대사는 분명 입에 담기 힘든 욕설들이기는 하지만 '똥파리'라는 영화의 제목처럼 그가 내뱉는 욕설은 단지 표현 방식 중 하나일 뿐이다. 마치 외국어나 사투리 등과 다르게 생각할 것이 없는 하나의 방법론일 뿐이다. 영화 초반 상훈이라는 인물에 대해 잘 알지 못했을때에는 그가 내뱉는 욕설에 관객으로서 불편하고 기분이 상하기도 하지만, 점차 그를 알게 되면서 그의 욕설들은 대화 그 이상의 의미는 주지 않는다. 마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 토리노>에서 주인공과 이탈리아계 이발소 주인이 나누는 대화가 욕설로만 느껴지지는 않듯이, 상훈의 욕설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듯 하다.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은 일반적인 자존심 정도가 아니라 그렇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일종의 필요악인 것이다.

그가 가족을 이루려는 노력은 영화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배다른 누나의 아들인 형인을 아들같이 챙기면서 돈도 주고 아버지 노릇도 하려고 하는 것도 그렇고(만약 일반적인 자존심으로 똘똘뭉친 인물이었다면 이런 노력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폭력을 되물림한 아버지에 대한 연을 끝네 끊지 못하는 심정도 그러하며, 연희와의 관계를 맺는 장면도 그러하다. 영화 속 상훈과 연희의 관계는 매우 독특하다. 일반적인 연인관계는 물론 아닐 뿐더러 단순한 남매같은 관계로 보기도 부족하다. 개인적으로 이 둘은 서로에게서 서로가 원하는 이상향을 발견한 듯 하다. 서로 모두 벗어나고만 싶은 현실에 놓인 이 둘은, 겉모습만으로 상대를 평가하지 않는 눈을 가졌으며 이 눈은 서로의 진심을 볼 수 있게 해준다. 그리하여 이 둘은 지옥같은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순간에 가장 떠오르는 존재가 되었으며 표현하지는 않지만 서로를 의지하는 관계가 된다.




영화 속에서 이 둘을 그리는 묘사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보통 치정극이나 영화에서라면 가만 두지 않았을 설정을 보기 좋게 무시해버린다는 것이다. 연희의 가정이 더 어려워지게 된 결정적 이유 중 하나인 연희 어머니의 죽음은 바로 상훈이 저지른 것이며, 상훈을 죽음으로 이르게 한 것은 다름아닌 연희의 동생 영재다. 보통 같았으면 이같은 관계설정을 영화 막판에 터뜨리면서 다시 또 하나의 갈등을 야기시켰을 테지만, <똥파리>는 이것에 집중하지 않았다. 아니 그것보다는 이렇게 얽혀버린 각자의 아픈 역사 속에서 상훈과 연희를 지켜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상처마저 남기기엔 두 주인공의 현실과 짐이 너무 크게 느껴졌을 감독의 배려랄까(이런 점 또한 이 영화가 따뜻한 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영화는 끝내 이런 사실을 주인공들에게 알리지 않은채 끝을 맺는다.

연희로 인해 조금씩 변화를 겪던 상훈은 아버지의 갑작스런 자살기도를 통해 자신의 숨겨왔던 진심을 드러내고야 만다. 앞선 과정들만 본다면 상훈은 자신에게 되물림된 폭력에 분노하여 어떻게든 가해자인 아버지에게 이를 쏟아내려는 듯한 측면만 노출이 되지만, 사실 그는 이 더럽게 아픈 핏줄을 인정하는 방법을 배워가는 중이었고 자신은 이 폭력의 역사를 되물림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 와중에도 연희를 찾아간 상훈은 아무 이유를 말하지 않고 그냥 울기만 한다. 이것은 연희라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리라).

상훈이 맺는 결말은 브라이언 드 팔마의 <칼리토>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결국 용역깡패를 그만 두고 자신이 꿈꾸던 가족을 이뤄 정착하려고 드디어 마음을 먹은 상훈에게 이는 허락되지 않는다. 형인이 다니는 유치원 재롱잔치에 상훈의 누나와 연희, 그리고 용역회사의 사장이자 친구인 만식, 그리고 상훈이 초대된 것은 일종의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바로 상훈이 꿈꾸던 새로운 가족의 모습이었으며 자신의 대에서 끝내고 싶었던 폭력없는 가정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훈은 여기에 오지 못한다. 또 다른 폭력의 되물림에 희생자인 영재가 가한 폭력에 사그라들고 만다.




그런데 인상적인건 이제부터다. 상훈이 죽고나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것으로 보이는 시점에 벌어지는 장면들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다. 만식의 고깃집 오픈을 기념하려 모인 상훈의 아버지와 연희, 상훈의 누나와 형인의 모습 어디에서도 상훈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는다. 상훈의 죽음에 슬퍼하는 가족들의 모습은 플래쉬백으로 스쳐 지나갈 뿐 고깃집에 모인 이들의 표정에서는 그 어디도 슬픔이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서 인상깊게 볼 또 하나는 상훈의 아버지이다. 나머지 인물들은 폭력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을텐데 여기에 1세대이자 가해자라고 할 수 있는 상훈의 아버지가 놓여있다. 이는 상훈과 상훈의 아버지는 결국 공존할 수 없음을 은연 중에 말하고 있는 듯하며 감독은 상훈의 아버지를 선택, 새롭게 탄생한 가족의 행복한 모습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상훈이 스스로 자신 없는 가족을 꿈꿨다고 하기엔 (만약 그렇다면 이건 정말 슬픈 영화일듯) 믿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상훈은 분명 상훈이 아버지가 있는 자리에 본인이 있고 싶었던 것이고, 그것이 자신이 꿈꾸던 폭력의 역사가 지워진 새로운 가족이었을 것이다(상훈이 피범벅이 되어서도 조카 유치원에 가야된다고 중얼거렸던 것은 그래서 더욱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감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새롭게 태어난 가족에게는 여전히 불안요소가 있다. 영재는 이 가족에 직접적으로 속하지는 않았지만 상훈과 같은 폭력적인 전처를 그대로 밟고 있으며, 연희도 분식집 아르바이트로 생활이 갑자기 나아질리 없으며, 아버지의 언어폭력과 문제들은 여전할 것이다. 또한 상훈의 아버지 역시 완전히 죄를 뉘우친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만약 그 자리에 상훈이 있었다면 좀 더 희망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관객이 바라는 장면일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이 지겨운 폭력의 역사는 '똥파리(상훈)'가 사라지는 것으로 잠시 멈추었으며, 그가 꿈꾸었을지도 모를 새로운 가족은 행복하게 웃고 있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올해 지금까지 본 영화들 가운데 올해의 '대화장면'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위의 사진 속 장면을 꼽겠다!)


1. 영화를 보고 리뷰를 다 쓰고나서 여기저기 리뷰를 읽어보니 감독의 개인적인 인생사가 많이 녹아있는 작품이라고도 하는데, 그는 어떤 인생을 또 겪었을지 더 궁금해지네요.

2. 영화를 보고나서 고맙게도 무대인사자리도 함께 할 수 있어서 감독님과 주연배우분들도 직접 뵐 수 있어 좋았습니다!
   (똥파리 - 무대인사 사진 (2009.04.25, 아트하우스 모모)

3. 최근 본 영화들 가운데 가장 할 얘기가 많았던 영화였어요. 진짜 위 장면처럼 포장마차에서 양익준 감독님과 밤새 얘기하고 싶을 정도로!!

4. 제 취향은 역시 <워낭소리>보다는 <똥파리>인것 같습니다 ^^; (왠지 어감이 -_-;;)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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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디지털 카메라 IT100을 사용하면서 가장 많이 사용했던 기능이라면 아무래도 오늘 소개할 '스마트 오토(Smart Auto)'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IT100을 유일한 사진기이자 퍼스트 카메라로 사용하려는 이들이라면 조금 틀려질지도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DSLR의 이동성과 조작성의 단점을 커버하는 세컨드 카메라로서 애초부터 접근하였기 때문에 조금은 방식이 틀려질 수 밖에는 없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IT100의 주요 기능인 스마트 오트 기능은 이런 IT100만의 장점을 더욱 살려주는 기능이라 할 수 있겠다(하지만 확실히 이 리뷰를 쓰는 기간이라서만이 아니라 그간 사진을 촬영해야 하는 일들이 있을 때 특수한 경우를(망원 렌즈를 사용해야하는) 제외하면 거의 퍼스트 카메라로 선택되었던 것은 IT100이니 가방 속에 묻혀 가끔씩 IT100 바디 촬영 시에나 사용되는 DSLR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오늘 역시 여러 말 보다는 IT100으로(특히 스마트 오토 기능으로) 촬영한 사진들을 위주로 포스팅을 진행할 예정이다.





문구 점에 있는 형형색색의 다양한 펜들은 각각의 컬러의 표현력을 확인하는데 좋은 소스가 되었다. 위의 사진들은 스마트 오토 - 접사로 촬영된 사진들인데, 조금의 거리는 있었지만 접사로 촬영이 되었다. 그리고 스마트 오토에서 대부분 실내 촬영시에는 플래쉬가 터지도록 세팅이 되곤 하는데, 아무래도 플래쉬가 터지는 사진들은 자연스럽지 못한 경우가 많음으로 플래쉬 기능만 오프로 설정을 수동으로 한 뒤 촬영을 하였다.






위의 세 장의 사진 역시 스마트 오토 - 접사로 촬영된 사진들이다. 앞선 문구점의 사진들과는 달리 접사 기능을 테스트 해보기 위해 촬영된 사진들로서 카메라 렌즈를 피사체에 상당히 가깝게 두고 촬영한 사진이다. 첫 번째 사진의 경우 초밥위의 알들이 하나하나 디테일하게 느껴질 정도로 접사기능이 잘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두 번째 피자 사진이나 세 번째 스태츄를 촬영한 사진에서도 손색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 사진의 경우 실내에서 형광들 조명에 의지한채 촬영된 사진이라 그림자를 피하기 위해 거리를 조금 두다보니 약간 아쉬운 결과물이 나오긴 했는데, 첫 번째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근거리에서의 접사 촬영도 만족할만하다.






위의 세 장의 사진은 야간의 어두운 장소나 실내의 어두운 장소를 스마트 오토 기능으로 촬영한 사진들이다. 첫 번째 사진의 경우 어두운 곳에서 조명을 직접적으로 촬영했을 때 조명 부위만 환하게 나오고 나머지 부분은 매우 어둡게 나오는 경우를 확인하기 위해 촬영한 사진인데, 보시다시피 조명의 디테일도 확인할 수 있으며 주변도 그리 어둡지 않게 표현된 것을 알 수 있다. 이 정도라면 흔히 말하는 '까페사진'촬영에도 무리 없이 사용될 수 있을 듯 하다. 두 번째 사진 역시 스마트 오토 기능만을 사용하여 촬영한 사진인데 실내가 매우 어두운 장소였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만족스러운 사진을 만들어냈다. 어두운 조명 때문에 일부 노이즈가 발견되기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스마트 오토 기능을 테스트해보기 위한 촬영이었음으로, 이런 문제들은 ISO조정이나 다른 기능 조작을 통해 어느 정도 보완이 가능하다.

세 번째 사진은 밤 시간 공원 놀이터를 스마트 오토 기능으로 촬영한 사진인데, 가로등 불빛의 빛샘 현상이 약간 발생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어두운 조명을 감안한다면 만족스러운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별다른 기능들을 설정하지 않고 단순히 스마트 오토 기능만으로 이 정도의 어두운 조명하의 사진들을 만들어낸다면, 이런 환경의 촬영에도 크게 불편함이 없을 듯 하다.






위의 세 장의 사진은 우리가 생활 속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사진들로서 다양한 색들과 조명에 따라 어떻게 표현되는지 확인할 수 있겠다. 모두 실내 촬영 사진들인데 스마트 오토 기능 설정시 플래쉬가 자동으로 켜지게 되어있어 이 부분만 오프로 수동 설정하였다.






위의 세 장의 사진은 약간 흐렸던 날 야외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역시 스마트 오토로 촬영된 사진이었는데 자연광이 그리 강한 날은 아니었지만 오토 설정에서도 플래쉬가 터지지는 않았다. 날이 좋아 파란 하늘을 함께 담을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조금 흐린 날이라 그럴 수 없었던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28mm의 와이드 앵글의 장점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시원한 느낌의 사진을 촬영할 수 있었다. 마지막 사진은 실내에서 촬영된 것으로 역시 넓은 시야각을 통해 다양한 구도를 설정할 수 있었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간편하고 쉬운 사진 촬영을 위해서 IT100을 사용하게 될 유저들이라면, 스마트 오토 기능은 이 같은 점들을 채워줄 핵심적인 기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참고로 IT100은 메뉴얼로 조정할 수 있는 부분들도 많아 좀 더 수동적으로 세팅값을 조정하길 원하는 유저들은 원하는 조건으로 세팅이 가능하다. 대략적으로는 IT100의 다양한 기능들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조금 더 사용을 해본 뒤 다음 포스팅에는 마무리하며 각각의 장단점에 대해 편하게 얘기해볼 작정이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이 글은 IT100 리뷰어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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