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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기스 플랜 (Maggie's Plan, 2015)

삶을 유쾌하게 다루는 고급 기술


뉴욕의 겨울을 배경으로 에단 호크와 그레타 거윅 그리고 줄리안 무어가 우디 앨런 영화처럼 얽히는 에피소드를 그려낼 것만 같았던 레베카 밀러의 '매기스 플랜 (Maggie's Plan, 2015)'은 예상보다 더 사랑스럽고 유쾌하며, 가볍지만 가볍지 않은 그런 영화였다. 


아이를 원하지만 결혼은 원치 않아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은 결혼할 수 없을 거라고 결론을 내린 경우라고 말해야겠지만) 정자를 기증받아 아이로 낳기로 결심한 매기 (그레타 거윅)는 우연히 자신의 학교에서 강의를 하던 존 (에단 호크)을 만나 그가 쓰고 있는 소설의 매력에 빠져, 이 소설을 이유로 존과 가까워지게 된다. 존 역시 아내이자 업계에서 유명한 교수인 조젯 (줄리안 무어)과의 결혼 생활에서 힘겨워하던 중 우연히 만나 가까워지게 된 매기와 급속도로 사랑에 빠지게 된다. 아마 일반적인 로맨틱 코미디였다면 존이 조젯과 이혼하고 결국 매기와 결혼하게 되는 것이 결말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이 영화는 사실상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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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설명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주 진지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아주 가볍고 유머러스하게 전개되는 이야기도 아닌데, 이 복잡한 연애와 사랑의 감정들을 상당히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보통의 로맨틱 코미디 혹은 소품 같은 에피소드 류의 로맨틱 드라마들에게서 느껴지는 달콤 씁쓸한 느낌이나 '그래서 영화지' 싶은 영화적인 느낌보다는, 현실적으로 깊이 공감되는 설득력과 더불어 유쾌함이 기분 나쁘지 않게 (깔끔하게) 전달되는 매력적인 드라마라고 할 수 있겠다. 


가끔 너무 현실적인 감정의 교류나 이야기 전개를 마법처럼 담아내는 영화들을 볼 땐 오히려 그래서 너무 영화적으로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는데, '매기스 플랜'이 바로 그런 경우다. 이혼을 경험해 본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극 중 존과 매기, 조젯이 나누는 감정들이 얼마나 솔직하고 현실적이기까지 한지는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다른 배우가 연기하는 것이 상상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매기 그 자체인 그레타 거윅을 비롯해, 줄리안 무어와 에단 호크, 여기에 많지 않은 분량이지만 트래비스 핌멜과 빌 하더의 연기는 이 이야기를 (진부하지만) 살아 숨 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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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다 끝나고 감동을 느낀 것은 아니었지만 '매기스 플랜'이 삶을 다루는 기술에 완전히 매료된 것만은 인정할 수 밖에는 없을 듯하다. 아, 진짜 다시 생각해봐도 이 영화엔 묘하게 삶의 정말 많은 조각과 감정들이 아주 현실적인 형태로 담겨 있다. 사랑에 관한 감정의 솔직한 표현과 행동이 극단적인 실패나 비난 혹은 삶의 성공이나 완성으로 마무리되지 않고, 또 허무 맹랑한 긍정이나 뒷 맛이 씁쓸한 풍자로 연결되는 것을 선택하지 않더라도, 이렇게 공감되고 유쾌하면서 마냥 가볍지 만은 않은 삶의 면면을 그려낼 수 있다는 건, 이 영화를 보고 난 후의 가장 큰 수확이라면 수확일 것이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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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 (Seymour: An Introduction, 2014)

삶과 예술 그리고 질문과 대답



감독이자 배우 에단 호크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만 사실 무대공포증으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만난 세이모어 번스타인과 소울 메이트가 되고 자신의 속 깊은 고민을 털어놓게 된다. 피아니스트로 살아가며 음악계의 주목을 받았던 세이모어 번스타인. 그는 좋은 예술가가 되는 것과 부와 명예를 누리는 것이 방해가 된다는 것을 깨닫고 예술의 도시 뉴욕 작은 스튜디오에서 피아노 교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출처 : 다음영화)


배우로서 몹시 애정하는 에단 호크가 연출을 맡은 다큐멘터리 영화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 (Seymour: An Introduction, 2014)'는 한 명의 배우이자 예술가인 에단 호크의 진정성 있는 질문과 피아니스트이자 교육자인 세이모어 번스타인의 삶과 대답을 담은 또 다른 예술 작품이다. 에단 호크는 작품성에 대한 인정은 물론 상업적으로도 적지 않은 성공을 거둔 헐리웃의 스타 배우이지만 어느 날 문득 찾아온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거지?'라는 질문에 대해 스스로 선뜻 답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한 삶 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떠올리며 무대 공포증마저 겪던 즈음, 우연히 만난 세이모어 번스타인에게 자신의 이러한 고민을 털어 놓게 되고 그에게서 그간 찾아내지 못했던 대답 혹은 정답을 듣게 된다. 이 영화는 에단 호크가 자신이 경험했던 삶의 고민에 대한 세이모어의 대답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삶)을 더 많은 관객들에게 진심으로 전하고 싶은 마음에 제작된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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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혹은 무대 위에서 대중들에게 박수와 관심을 받는 공연자들의 경우, 경제적인 성공을 거두게 되거나 혹은 자신이 원했던 일정 수준의 경지에 달했다고 생각될 때 그 간의 경력과 삶을 되돌아 보며, 급작스런 회의(懷疑)에 빠지게 되는 일들이 종종 발생한다. 특히 성공을 거뭐지게 된 경험이 있는 아티스트일 수록 그 부와 인기가 허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뒤에는 더더욱 자신이 무엇을 위해 그토록 오랜 시간을 정신 없이 달려왔고, 처음 이 세계에 뛰어 들었던 자신의 모습과 많이 달라졌거나 혹은 전혀 달라지지 않은 모습에 뒤늦게 혼란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사실 이런 기승전결 조차 일종의 패턴으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전형적인 면이 있는데, 에단 호크와 세이모어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 깊이의 측면에서 확실히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일단 에단 호크가 고백한 스스로에 대한 불안과 회의 그리고 진솔함이 느껴지는 질문에서부터 이 영화는 결을 달리한다. 에단 호크의 그 질문이 형식적이지 않고 진짜라고 느껴진 데에는 이 영화의 방식을 보면 알 수 있다. 영화를 보면 에단 호크가 영화 속에서 질문을 던진 자신을 최대한 배제하고, 세이모어의 이야기를 자신이 받아 들였던 것처럼 관객들이 그대로 받아들여 자신과 같은 경험을 공유하기를 바라는 진심이 100% 느껴진다. 스스로가 세이모어와의 만남을 통해 거짓이 아닌 진실 된 답을 얻었기 때문에 그 경험을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관객)에도 진심으로 공유하고 싶은 것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그가 세이모어의 삶을 통해 느끼게 된 것들이 그가 알 수 없었던 질문의 답이 되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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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모어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여러가지 일들을 겪고 감정의 변화 혹은 불안과 상처를 경험하고 나서 백발의 스승이 된 지금에서야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듯한 모습이었는데, 그의 가르침에 마냥 평화롭기 보다는 한 편으론 세이모어가 그랬던 것처럼 삶에서 부딪히게 되는 알 수 없는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결국 오랜 세월이 지나고나서야 초월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도 느껴졌다.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는 뭐라 말로 표현하기가 주저 되는 영화다. 왜냐하면 여기엔 두 사람의 진실한 삶이 그대로 질문과 대답의 형태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세이모어와 에단 호크 두 사람의 삶과 삶의 대한 태도를 통해 지금의 내가 겪는 고민과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여정 역시 작은 위로를 얻게 되었다는 점이다.


1. 한 때 글렌 굴드도 듣고 클래식도 찾아 듣던 시절이 있었는데, 영화를 보니 오랜 만에 예전 클래식 음반들을 꺼내 듣고 싶어졌어요.

2. 세이모어는 예전 한국 전쟁 당시 미군 소속으로 한국에 파병되어 경험한 에피소드들도 들려주는데, (한국 관객으로서)묘한 느낌이었어요.

3. 에단 호크는 다음 국내 개봉할 작품도 쳇 베이커의 이야기를 담은 '본 투 비 블루 (Born to be Blue, 2015)'인데, 점점 더 깊어지는 것 같아 팬으로서 뿌듯하네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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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패러독스 (Predestination, 2014)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에단 호크 주연의 영화 '타임패러독스 (Predestination, 2014)'를 보았다. 일단 영화에 대해 이야기 하기 전에 제목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보시다시피 원제는 'Predestination' 즉 풀이하자면 '예정' 정도로 볼 수 있을 텐데, '타임 패러독스'라는 또 다른 영문 제목이 아주 이상한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너무 영화에 대한 직접적인 소개를 하고 있는 것 같아 조금은 아쉬움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 제목과 더불어 국내에 홍보될 때 다른 시간 여행 영화들과 맞물려 여기에 포커스가 맞춰진 작품이라는 기대를 하게 만들었기 때문인데, 물론 이 영화는 시간 여행에 관한 영화가 맞지만, 영화가 이를 다루는 방식이나 비중을 보면 그 만큼 중요하게 여기는 다른 '이야기'가 있었기에, 너무 시간 여행이라는 소재에만 집중하도록 만든 제목과 방식이 조금은 아쉽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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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본격적인 시간 여행에(만) 집중된 영화인줄로 알았으나 '타임패러독스'는 '왜? 시간 여행이라는 소재를 꺼내들었나'에 대한 물음에 더 충실하고자 하는 영화였다. 마치 슈퍼 히어로 영화들에서 주인공이 히어로로 각성하기까지 1시간 이상 러닝 타임을 할애하는 것처럼, 이 영화 역시 시간 여행이라는 소재를 꺼내 드는 데에 1시간 이상의 시간을 할애한다. 감독이 얼마나 '이야기' 자체에 집중하고 있는 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시간 여행이라는 소재를 지워도 그리 나쁘지 않을 만큼 (물론 그걸 지운다면 결코 완성될 수 없기는 하지만) 극 중 사라 스눅이 연기한 인물의 이야기는 시간 여행이라는 소재 없이도 빠져들 만큼 흡입력 있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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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시간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면 '타임패러독스'가 담고 있는 이 소재에 대한 부분은 그리 새로울 것은 없었으나 (이 영화의 한계라기 보단 시간 여행이라는 소재 자체의 한계 때문), 그래도 그 가운데서 이야기를 만들어 냈고 관객이 놀랄 만한 반전 포인트를 뽑아 낸 건 분명 이 영화의 매력이라 할 수 있겠다. 흔히 시간 여행 영화라고 하면 그 논리에 집중하여 머리 싸움을 하는 영화거나 아니면 다양한 시간과 배경을 등장시키면서 화려한 볼거리로 유혹하거나, 그 가운데 감동적인 스토리를 이끌어 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은 이런 요소들 보다는 상황을 최소한으로 제한하면서 그 안에 담긴 한 사람의 이야기에만 집중한 것이 다른 시간 여행 영화들과는 차별되는 점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인지 아니면 에단 호크가 주연을 맡아서 인지, 직접적인 공통점이 없음에도 왠지 모르게 이 영화의 정서는 '가타카'를 떠올리게 했다. 차갑고 쓸쓸하고 슬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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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패러독스'는 기대 했던 시간 여행 영화는 아니었으나 오히려 그래서 더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특히 여주인공을 연기한 사라 스눅이라는 배우의 매력에 빠지게 되는 작품이기도 했고.



1. 영화를 보는 내내 혼자 생각한 거지만, 여주인공을 연기한 사라 스눅이라는 배우를 보면서 계속 데인 드한이 떠올랐어요. 묘하게 닮은 마스크 때문인가...


2. 에단 호크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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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후드 (Boyhood, 2014)

12년이라는 시간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건 바로



수년 전 쯤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던 실제 12년 전의 뉴스 한 토막은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이 정말 기대된다는 생각을 가질 수 밖에는 없었던 뉴스였다. 에단 호크와 함께 한 비포 시리즈와 '웨이킹 라이프 (Waking Life, 2001)'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리차드 링클레이터가 또 한 번 에단 호크와 함께 촬영에 들어간다는 소식이었는데, 한 소년의 성장기를 무려 10년이 넘는 실제 시간을 들여 촬영하겠다는 놀라운 소식이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잊혀졌던 이 소식은 실제로 2014년 완성된 작품으로 극장 상영을 하게 되었고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이 형식적 기대감과 별개로 그의 최근 작이었던 '비포 미드나잇 (Before Midnight, 2013)'을 인상 깊게 본 터라 이 작품 '보이후드'는 극장에 가는 발 걸음 부터 몹시 두근거렸다. 과연 리차드 링크레이터는 12년이라는 긴 시간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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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링클레이터가 12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조금씩 만들어 온 이 '진짜' 성장담. 작은 의미로는 한 소년, 더 큰 의미로는 한 가족의 성장담을 담은 이 영화는 무엇보다 그 세월 속의 평범하고 보편적이지만 소중한 일상 들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3시간에 달하는 러닝 타임이지만 영화가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요, 오히려 12년이라는 긴 시간을 3시간에 나누어 담기엔 숨 가쁘기 까지 하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무엇보다 감독은 시간의 흐름을 일부러 표현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관객에 이 압축된 3시간 동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12년이라는 세월을 문득 돌아보도록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최대한 배제하려고 하고 있다. 즉, 보통의 영화가 사용하는 '몇 년 후'의 자막은 쓰지 않을 뿐더러, 마치 우리가 실제 삶에서 10여 년 전을 추억하며 '그 때가 정말 엇 그제 같은데..'라고 얘기하는 것과 같은 감정이 들도록, 놀라운 3시간의 압축 물을 만들어 냈다. 이 것만으로도 '보이후드'는 놀라운 3시간의 기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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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후드'를 통해 새삼 느꼈던 감정은 최근 들어 종종 작품성 있는 영화들을 볼 때 느끼게 되는 것과 같은 감정이었는데, 내가 너무 일반적인 영화의 흐름 혹은 템플릿에 익숙해져 영화적인 선입견이 너무 많아졌다는 것이었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운전하는 장면을 보다가 조금이라도 부주의한 장면이 나오면 아마도 사고로 이어지겠지 라는 생각에 긴장감이 절로 발동하고, 비슷한 이유들로 기존의 영화적 방식에 익숙해져 나도 모르게 다음을 유추 (결국엔 착각)함으로 인해 미리 몇 가지의 결과를 대비하게 되는 습관 말이다. '보이후드'를 보면서도 그런 장면들이 여럿 있었는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리차드 링크레이터는 이런 순간들을 그리면서 그 어떤 자극적인 사고나 극적인 요소로 이끌지 않고 있다. 글의 서두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그저 일상, 일상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매일 살고 있는 일상 말이다. 영화는 이 일상을 묘사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시종일관 특별함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냥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덤덤히 지켜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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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0년 넘는 시간의 일상을 늘어 놓는 것 만으로도 사실 충분히 인상적인 결과물일 것이다. 하지만 '보이후드'가 정말 대단한 영화라는 것은 후반부 리차드 링크레이터가 드디어 본인이 전하려는 메시지를 꺼내 들었을 때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들을 보여주기만 했던 그는 주인공 소년이 다 커서 부모의 곁을 떠날 즈음이 되자, 하나 씩 감정이 심하게 동요할 만한 장면들을 선사한다. 스포일러 랄 것도 없지만, 즉 알고 있어도 이 장면에서 이 대사를 들었을 때 그 누구도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직접적인 이야기는 피하고 말하자면, 부모라는 존재에 대해 새삼스럽지만 다시금 진심으로 돌아보게 만드는 순간을 담고 있으며, 아마 내가 부모였다면 그 장면에서 더 큰 감정적 공감으로 인해 더 많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싶다 (이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참 인상적이었다. 패트리샤 아케이드의 연기도 정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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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실 더 놀라웠던 것. 마치 엄청난 반전 영화의 끝에 그 반전의 내용을 알았을 때 만큼의 충격을 받았던 소름 돋는 순간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사실 난 앞서 이야기한 부모 곁을 떠나는 주인공의 대화 시퀀스에서 영화가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이후의 한 시퀀스를 더 준비한 리차드 링클레이터는 비로소 본인이 말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전했다. 이 영화 감독이 무려 12년이라는 긴 시간을 들여, (아마도) 쉽지 않았을 제작과 촬영을 거쳐 끝에 하고 싶었던 말은 놀랍게도 '순간' 이었다. 12년이라는 세월을 실제의 시간으로 촬영하고 나서야 들려준 해답이 순간 이라니. 아, 정말로 소리 내어 '와!' 하는 탄성이 터져 나올 정도로 올해 극장에서 느꼈던 가장 황홀한 경험이자 놀라운 순간이었다. 너무 진부해서 한 편으론 오그라들 수도 있는 결론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그 해답을 찾은 감독이 관객에게 진정성을 얻고자 긴 시간을 투자해야만 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순간이라니. 순간의 중요성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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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 직전까지의 내용 만으로도 '보이후드'는 충분히 올해의 영화 중 한 편으로 꼽히기에 충분한 작품이었지만, 이 마지막 장면 아니 순간을 통해 '보이후드'는 내게 있어 정말 중요한 영화가 되었다. 나와 같은 경험을 더 많은 이들이 하길 바라며.



1. 극 중 소년의 누나로 나온 배우 로렐라이 링클레이터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실제 리차드 링크레이터에 딸이에요. 그렇다면 영화 속 아버지로 나온 에단 호크와의 피임 관련 대화 시퀀스에서 부끄러워서 얼굴을 못 들던 행동이 연기 만은 아니었겠네요.


2. 리차드 링크레이터의 영화 답게 영화 음악이 참 좋습니다. 극 중 밴드 활동을 하는 에단 호크가 부르거나 들려 준 노래들이 정말 좋아요.


3. 꼭 보세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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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 미드나잇 (Before Midnight, 2013)

세월의 무상함 보다는 성숙함



리처드 링클레이터와 에단 호크, 줄리 델피의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시리즈는 다른 시리즈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작품이었다. 두 작품 사이에 10년 가까운 텀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 시간을 고스란히 영화 속 인물들에게도 적용한 것이 더 큰 이유였다. '비포 선셋' 이후 다시 9년. 이들은 '비포 미드나잇'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찾아왔다. 제시 (에단 호크)와 셀린느 (줄리 델피)는 어느 덧 41살이 되었고, 관객 역시 이들과 고스란히 2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해 버렸다. 그리고 '비포 미드나잇'은 전혀 의외의 시점과 상황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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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이번에도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할 것만 같았던 영화는, 서로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자녀를 두고 함께 살아가고 있는 제시와 셀린느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리스 휴양지로 휴가를 떠나온 제시와 셀린느의 가족은 여느 부부가 그렇듯 아이들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여행지에서 만난 이들과 삶과 사랑에 대해 자유로운 대화를 하고 그리고는 정말로 오랜만에, 하지만 관객들로서는 가장 기다렸을 두 사람 만의 저녁 시간을 갖게 된다.


전작들이 그러하였듯이 '비포 미드나잇'도 이렇다 할 줄거리라고 할 것이 거의 없다.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또 한 번 이 두 캐릭터를 두고 끊임없는 대화의 대화를 이어간다. 거의 러닝 타임의 전부가 대화로만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텐데, 결코 수다스럽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아마도 그 대화의 전개 양상이나 이야기 거리가 우리도 삶에서 자주 겪게 되는 것들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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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그냥 휴양지로서 그리스라는 곳을 택한 것 정도가 아닐까 했는데, 제시와 셀린느가 나누는 대화를 쭉 듣고 있노라니 왜 그리스를 선택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비포 미드나잇'은 사랑의 근원에 대해 다시 말하고자 하는 것 같았다. 단순히 오랜 시간 사랑해왔던 둘 이 처음의 그 느낌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사랑이라는 것의 근원 혹은 그 정의에 대해 한 번 더 이야기하고자 하는 듯 했다. 한참을 육아를 위해 인생을 보내다가 오랜 만에 서로를 위한 시간을 갖게 된 제시와 셀린느는 자신들이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부터 지금 사랑해 오기 까지의 감정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다. 그리고 여느 연인들이 다툴 때 처럼 아슬아슬하게 서로의 감정을 비껴 가던 날 선 대화들은, 결국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에 까지 닿게 되고 서로의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드는 것까지 이르게 된다.


이 평범하다면 평범할 수 있는 연인들 간의 대화가 1차적으로 특별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굉장히 디테일 한 삶의 묘사 때문이었다. 즉, 평범하고 보편적인 다툼의 요소들로 인해 오히려 한참을 이야기하는 데도 집중해서 그 둘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둘째는 이 작품만이 갖는 특수성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영화처럼 아름다운 만남과 사랑을 나누었던 이들을 보았었고 또 이들과 똑같은 세월을 함께 한 관객들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나이를 먹은 이들의 대화에 빠질 수 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개인적인 이유로 너무 나도 나와 여자친구 사이의 관계를 문득 문득 떠올려 보게 만들고, 앞으로를 내다보게 만들어 더 깊이 와 닿는 대화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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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다투고 나서 해변가 카페에 앉아 나누는 이 둘의 대화는 울컥하기까지 했다. 왜 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결국 어쩔 수 없다는 것 때문 이라기 보단, 오히려 그래도 아름다운 사랑 때문이라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어찌 보면 남녀가 지내다 다투고 화해하고 하는 것이 전부인 시놉시스인데, 그 시놉시스가 얼마나 정교하게 실제 남녀 사이에 근거해서 만들어 졌던 지 나 외에도 수 많은 전 세계의 관객들이 '이건 내 얘기야' 하고 보게 될 듯 하다.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어떤 커플의 미래의 이야기이거나 과거의 이야기 임은 분명할 것이다.


세월의 무상 함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 보다는 성숙함, 부정하고 싶지 않은 성숙함을 담아낸 멋진 어느 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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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마지막 장면의 대화를 잊지 못할 것 같네요. 오래 연애를 했다 거나 오래 결혼 생활을 한 이들이라면 무언가 느껴질 수 밖에는 없는 장면이 될 거에요.


2. 어디선가 이 작품이 마지막 편이 될 것이라는 얘길 들었는데, 사실이라면 정말 안타까울 것 같아요. 제시와 셀린느가 더 나이를 먹고 등장하는 '비포 던'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말이죠 ㅠ 2020년 쯤 나올 거라고 기대해 봅니다.


3. 줄리 델피의 깜짝 노출에 여러가지 생각이 들더군요. 아마도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의도를 갖고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이 장면을 가져갔다는 생각 도요. 


4. 영화 음악도 참 좋았습니다. 국내 발매된 '비포 미드나잇' 사운드트랙에 해설지를 제가 쓰기도 했는데, 영화 만큼이나 잔잔하면서도 편안해 지는 음악들이 담겨 있어요.




5. 홍주희 씨가 번역을 맡았는데 아슬아슬한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역시 요새 유행하는 단어들이 많이 나오긴 해요.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는데 번역이 누구인지 인지할 정도이긴 했습니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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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Before The Devil Knows You, 2007)
외로운 시대, 외로운 가족의 초상


2007년 작이긴 하지만 이번에 국내에는 처음 정식으로 선보이게 된 시드니 루멧 감독의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는 <12인의 성난 사람들>, 알 파치노가 열연했던 <뜨거운 오후>, 범죄/미스테리 영화의 대표작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 등을 연출했던 거장 시드니 루멧의 작품이라는 점만으로도 일단 관심을 갖게 되었던 작품이었다. 감독의 이름을 보고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여기에 출연한 배우들의 면면을 보니 이건 더 대단한 것이 아닌가. <카포티>와 <다우트>를 통해 새삼스럽게 연기력을 평가받고 있는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과 오랜만에 스크린에서 연기하는 모습을 만나게 된(적어도 개인적으론) 에단 호크, 그리고 최근 <더 레슬러>를 통해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던 마리사 토메이와 대배우 알버트 피니까지. 이런 배우들과 시드니 루멧이라는 감독이 만들어낸 작품은 과연 어떨지 영화 팬으로서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부터는 내용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들께서는 맨아래 단락으로 이동해주세요~)




영화는 범죄 현장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들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지는 일단 생략한채 살인이 발생하게 되는 범죄 현장을 보여주고는 천천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게 된다. 그런데 이 범죄 현장에 얽힌 이들과 사연이 예사롭지가 않다. 아니 오히려 너무 일반적이고 현실적이라 예사로움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형제인 에디(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와 행크(에단 호크)는 각자의 경제적 사정 때문에 보석상을 털기로 계획을 세운다. 아, 계획은 형인 에디가 한 것이며 행크는 단지 실행할 뿐이다. 그런데 이 보석가게는 다름 아닌 형제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가게다. 이 계획에 흥미로운 점은 결과적으로 피해자가 없는 범죄라는 것이다. 자신들은 보석상을 털어서 돈을 챙기고 부모님은 보험을 들어 놓았기 때문에 피해는 커녕 오히려 득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더군다나 범행 예상시간에는 가게 내에 노인 한 명만 지키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별다른 몸싸움이나 인명 피해 없이 저지를 수 있는 상황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훔치려는(얻으려는) 돈이 일확천금이 아니라 단순히 현재 자신들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할 만한 정도라는 것이다.

보통 범죄 영화와 이 영화가 가장 차별되는 점은 바로 이 목적에 있다 하겠는데, 이 계획은 에디와 행크에게는 각자 사소하다면 사소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일 뿐이고, 그들의 계획대로 된다면 아무도 피해받지 않고 서로의 이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들은 표면적으로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 정도만을 목적으로 한 범행이었으며, 더 이상은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들의 이런 계획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전개가 된다. 에디의 계획에는 없었던 인물이 행크의 뜻에 따라 합류하게 되었고, 목숨을 잃은 사람이 2명이나 발생하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형제의 어머니가 가게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죽음을 맞이 하게 된다. 계획대로 일이 되지 않자 이들 형제는 몹시 당황하게 된다. 평소 우유부단하고 독립성이 부족했던 동생 행크는 이 현실에 어쩔 줄을 몰라하고, 모든 일을 계획대로 이뤄 처리하던 형 에디도 자신이 예상치 못했던 변수들로 인해 틀어져 버린 이 현실 때문에 공황상태에 빠져버린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롭게 보았던 점은 바로 이런 점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발생했을 때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인물들이 모습, 더 나아가 결국 이들이(이럴 필요도, 그럴만한 목적이나 악의를 애초부터 갖지 않았던 이들이) 얼마나 급격하게 무너져 내리는 가에 대한 묘사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 영화는 기법 측면에서 사건이 진행되고 나서 그 사이에 각 인물들이 어떤 과정을 겪어왔는가 일종의 플래쉬백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데, 이를 단순히 기법 측면만으로 해석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을 듯 하다. 제목인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전에'에서도 알 수 있듯이, '~ 뭐 하기 전에' 라는 뉘앙스와 계속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 그 전으로 돌아가는 구성 방식은, 이런 일을 겪지 않을 수도 있었던 나약한 인간들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이 담겨있으며, 항상 이런 불안 요소를 잠재한 채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외로운 이들과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의도에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된다.

바로 이 불안감에 대해 영화는 또 깊게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겉보기에는 크게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인물들, 그리고 별로 문제가 될 것 같아 보이지 않았던 일들이 결국 모두 표면 밖으로 터져나오는 걸 보여주면서, 이런 불안감을 항상 잠재하고 있는 현실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듯 했다. 범죄 현장에 무엇을 남기지는 않았는지, 목격자는 없었는지 행크에게 닥달하듯 계속 되묻는 에디의 모습에서는 멀쩡해 보이는 겉모습 뒤에 어떤 불안의 잠재요소가 있는지 되묻는 것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불안 요소를 더 증폭시키기 위해 영화 음악이 의도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이 영화의 영화 음악은 마치 사운드 시스템에 오류가 난 것이 아닌가 흠짓 착각했을 정도로 계속 불안하게 음이 끊긴 채로 전달된다. 이렇듯 관객의 심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영화 속 인물들의 불안한 심리를 더 극대화 시키려는 영화적 장치로 사용되고 있다.




또 하나 생각해볼 수 있었던 건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통한 인물들의 해석이었는데, 아버지로 부터 이어진 가족의 불안요소와 불화가 결국 어떤 결말로 이어지는지를 보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 각 인물들의 상황을 겪으면서 이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어떻게 작용되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 더욱 흥미로웠다. 에디와 행크는 예상치 못했던 일들을 겪으면서 본인도 의도 하지 않았던 일들을 더 저지르며 상황을 악화시키게 된다. 특히 본래는 아무도 죽이지 않으려던(그래서 총도 장난감 총만 준비하고자 했던) 계획을 세웠던 에디는 사태가 급변하면서 이 사건에 관련된 이들을 거침없이 죽음에 이르게 한다. 내러티브 측면에서 왜 에디가 필요없는 사람까지 죽여야 했는가라고 묻는 다면, 이 상황에 놓인 에디는 이미 그런 맥락을 다 따져가며 살인을 저지르는 심리 상태가 절대 아니었다고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 스스로도 공포스러울 정도로 일을 최악으로 몰고 가버리게 되는데, 이건 일종의 불안에 잠식되어버린 연약한 인간상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가족으로 다시 돌아와서. 흥미로운 점은 에디나 행크의 모습이 너무도 외로워 보였다는 것이다. 일단 애초에 문제가 되었던 경제적인 문제를 나누고 들어줄 만한 친구나 동료가 이들에게는 없었으며, 사태가 최악으로 치닫았을 때도 고민을 들어줄 존재라고는 결국 자신들 밖에는 없었다. 특히 에디의 경우는 돈을 주고 마약을 거래하는 마약상에게 자신의 이런 고민을 털어놓게 되는데, 마약상은 딱 잘라 관심없음을 표현한다. 정말 자신을 잘 표현하지 않는 에디가 참다참다 못해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을 사람이 이런 남과도 같은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는 점은, 가정 내에서 문제를 겪은 이들이 얼마나 다른 사람들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데 실패했는지를 통해 이들이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 속에서 에디와 행크가 끊임 없이 서로에게 전화하는 것은(특히 에디가) 단순히 이 사건에 둘이 공모했다기 보다는 이런 고민을 나눌만한 이가 서로 밖에는 없기 때문인 점도 들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외로운 시대에 외로운 존재였던 이들이 어떤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닥쳤을 때 얼마나 쉽게 무너져 내리는지, 이들이 이렇게 까지 되어버린 데에는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얼마나 큰 책임이 있었는지를 이야기하는 텍스트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정작 감독은 이 영화를 멜로 드라마로 규정하기도 했는데, 그런 측면도 발견할 수는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지금까지 얘기했던 것과 같은 것으로 더 받아들이게 되었다.




<다우트>를 보며 '와, 연기만으로도 이렇게 공포감을 느낄 수 있구나'하는 것을 실감하곤 참 대단하다고 느꼈었는데, 이 영화에서 배우들이 보여주는 연기는 또 다른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을 듯 하다.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은 이 영화 내에서 거의 감정이 폭발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는데, 별로 폭발시키지 않고 내색을 하지 않는 듯 하면서도 이렇게 캐릭터에 무게감을 전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이 영화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전작들을 통해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의 여러 종류 연기를 만나볼 수 있었는데, 이 영화에서 그가 보여준 연기는 그의 또 다른 면목을 새삼 느끼게 하는 고수의 연기였다 하겠다.

에단 호크는 자신 본인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의 이미지를 이 영화에서 잘 표현해 내고 있다 하겠다. 단순히 이미지를 소비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기반으로 영화 속에 잘 녹여낸 경우로서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정도를 보여주고 있다. 마리사 토메이는 최근 작품들에서 연이어 노출 장면이 많아 한편으론 '괜찮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그 독특한 말투는 과연 이 사람이 <더 레슬러>에 나왔던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이기도 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은 연기를 펼친 배우는 아버지 역할을 연기한 알버트 피니였다. 복잡하게 얽혀버린 가족사를 점점 알게 되는 인물을 연기하는 알버트 피니의 모습은 현실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과는 다른 측면에서 압도당하는 느낌을 관객에게 전한다. 표정 하나하나에서 그야말로 '열연'을 느낄 수 있었고, 이 영화가 좀 더 풍부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는데에 크게 한 몫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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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나고 이어진 진중권 교수님과의 씨네토크 사진들. 클릭하면 좀 더 큰사이즈로 보실 수 있어요)

이 날은 영화가 끝나고 진중권 교수님이 함께하는 씨네토크가 이어졌다. 기존 영화 관계자나 평론가가 참가하는 씨네토크와는 달리 진교수님이 자신의 정리해온 내용을 발표형식으로 진행한 이후 토크를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아무래도 영화 평론가라던가 관계자와 함께하는 방식이 아니다보니 일반적인 씨네토크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진행이 되었던 것 같다. 좀 색다른 분위기의 씨네토크여서 흥미롭기도 했고, 영화 내용에 관한 토론보다는 철학적 텍스트에 관한 (아무래도 씨네토크 진행자와 참가자들의 성향에 따라 이런 방식으로 흐르게 되었던 것 같다)  이야기로 이어져 신선하기도 했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본문에 사용된 모든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모든 이미지의 저작권은 linse
film에 있습니다.























내 인생의 사운드트랙 vol.4 _ 위대한 유산 (Great Expectations)


01. Finn - Tori Amos
02. Siren - Tori Amos
03. Life In Mono - Mono  
04. Sunshower - Chris Cornell
05. Resignation - Reef
06. Like A Friend - Pulp
07. Wishful Thinking - Duncan Sheik
08. Today - Poe
09. Lady, Your Roof Brings Me Down - Scott Weiland
10. Her Ornament - The Verve Pipe
11. Walk This Earth Alone - Lauren Christy
12. Breakable - Fisher
13. Success - Iggy Pop
14. Slave - David Garza
15. Uncle John's Band - The Grateful Dead
16. Besame Mucho - Cesaria Evora 


에단 호크, 기네스 펠트로우, 로버트 드니로, 앤 밴크로포트 가 출연한, 찰스 디킨스의 원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1998년작 <위대한 유산>. 아마도 내가 에단 호크와 기네스 펠트로우란 배우를 좋아하게 된 것은
이 때 부터였던 것 같다. 에단 호크의 경우는 비슷한 시기에 <가타카>를 동시에 접하게 되면서 더욱
좋아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이 영화는 그 초록빛과 오묘한 분위기도 기억에 남지만, 귓전을 맴도는
사운드 트랙도 아직까지 인상깊게 남아있는 영화 중 하나이다.
이 영화는 록 넘버들이 수록된 O.S.T와 영화음악가 패트릭 도일이 프로듀서한 스코어가 각각 발매되었는데,
내가 소장한 버전은 여러 록과 팝음악이 수록된 사운드 트랙 버전이다.

일단 록/팝 팬들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뮤지션들이 여럿 참여하고 있다.
첫 번째로 인트로곡인 'Finn'과 'Siren'에 참여하고 있는 토리 에이모스(Tori Amos)를 들 수 있겠는데,
에단 호크와 마찬가지로 개인적으로 토리 에이모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이 때 즈음이 아니었나
싶다. 영화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신비스런 음색과 극적인 보컬은 그녀를 설명하기에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일 것이다. 그 다음은 <위대한 유산> O.S.T라고 하면 아마도 가장 먼저 떠오를 모노(Mono)의
'Life in Mono'이다. 여성 보컬 시오반 드 메어가 부르는 이 곡은 몽환적이고 신비스러우면서 왠지 우울한
느낌을 전해주는 곡으로 이 음반에서 가장 대표적인 곡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당시 사운드가든(Soundgarden)의 해체로 충격을 주었던 보컬 크리스 코넬(Chris Cornell)이
'Sunshower'을 선사하고 있으며, 펄프 (Pulp), 스톤 템플 파일럿츠(Stone Temple Pilots)의 보컬리스트
스콧 웨일런드, 이기 팝(Iggy Pop), 그레이트풀 데드(The Grateful Dead), 그리고 베사메 무쵸를 부른
세자리아 에보라(Cesaria Evora)까지.... 모두들 따져보면 우울함과 몽환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는
보컬들이 각자의 개성을 펼치고 있어, 영화와 잘 어울리면서 더 나아가 음반만으로도 굉장히 흥미로운
컴필레이션으로 불리기에도 부족함이 없을 듯 하다.

사운드트랙의 가장 큰 매력이라면 역시 어느 날, 어디에선가 그 음악을 들었을 때,
영화의 한 장면이 절로 떠오르고, 다시금 그 영화를 보고 싶어지는 마음이 드는 것을 꼽을 수 있을 텐데,
'베사메 무쵸'를 듣고 토리 에이모스의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오랜만에 <위대한 유산>을 보고 그 초록빛에 빠져보고 싶어졌다.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2007/11/26 - [BD/DVD Review] - 위대한 유산 (Great Expectations) _ About Feel Gr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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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뜨거운 순간 (The Hottest State, 2007)

<파라노이트 파크>를 보러 간 스폰지 하우스에서 예고편을 접한 뒤 갑자기 보고 싶어졌던 영화.
한 때 <위대한 유산>부터 <가타카>까지 그가 나오는 영화라면 가리지 않고 봤고, 또 좋았던
에단 호크가 감독도 맡고 출연도하고, 거기다 그가 예전에 썼던 원작 소설을 가지고 만든 영화라니
안볼 수가 없었다.

거기다 사실 남자 주인공인 마크 웨버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여자 주인공인
카타리나 산디노 모레노는 <사랑해, 파리>에서 보고 난 뒤 급 빠지게 되었는데,
이 영화에서는 여주인공으로 출연한다하여 너무 기대를 갖게 했었고,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찾아낸 미셸 윌리엄스 또한 출연한다니 충분히 볼만한 이유가 있는 작품이었다.

영화는 20살의 청춘이 성장하는, 넓은 의미의 성장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꿈을 위해 노력하고, 사랑을 알게 되며 아픔과 기쁨을 모두 겪게 되고,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는, 즉 성장하는 과정에서 겪게되는 성장통을 에단 호크의 감성으로 다루고 있다.

영화는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 구조를 갖고 있지만,
거의 내내 감성적인 배경음악을 깔고 있어, 리듬감을 유지하고 있고, 음악을 통해서 주인공의
심리적 상태를 직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내용적인 면에서는 그리 나쁘지 않았던 2시간이었던 것 같다.
일단 가장 기대를 하게 했던 카타리나 산디노 모레노를 거의 2시간 내내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만족스러웠으며, 므흣한 씬까지 연출하며 그녀의 팬이 될락말락 했던 나에겐
팬클럽 가입에 이유를 확실히 보여주었다.
또 다른 기대주였던 미셸 윌리엄스는, 그 분량이 너무 적어 조금 아쉬웠다.

아무리 나이를 조금 먹었다 해도 에단 호크가 20살이 넘는 아들이 있다는 설정은
사실 좀 어울리진 않긴 했지만, 그래도 이마 가득한 주름살 때문인지, 에단 호크도 이제 나이를
먹었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짤방!


 

 
글 / ashitaka (www.realfolkblues.co.kr)


 



플로리다 걸프 해안의 작은 마을에 사는 8살의 핀 벨(Finnegan Bell: 에단 호크 분)은 누나와 함께 산다. 가난한 집안형편이지만 화가가 꿈인 핀은 아름다운 바다를 그리며 자신의 꿈을 키워나간다. 어느 날 그는 탈옥한 죄수 루스티그(Prisoner - Lustig: 로버트 드니로 분)를 우연히 만나 그의 발목에 찬 족쇄를 풀어주면서, 그의 단순하고 평화로운 생활이 깨어짐을 느낀다. 인근에서 가장 부자로 소문나 있는 노라 딘스무어 여사(Ms. Dinsmoor: 앤 밴크로프트 분)로부터 갑작스런 초대를 받게 된 핀은 그녀의 은둔자적인 비밀스런 삶에 두려워 하면서도 그녀의 조카인 에스텔라(Estella: 기네스 펠트로 분)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사랑으로 매일 그녀를 찾는다.



에스텔라는 그런 핀에게 상류사회 특유의 냉정함과 오만함으로 일관하지만 핀이 그녀를 그린 그림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에스텔라를 사랑한다면 그의 마음만 아플 거라는 노라의 충고에도, 어느새 커버린 그들은 서로에 대한 호감을 억누를 수 없다. 노라의 말대로 에스텔라는 홀연히 파리로 떠나버리고 절망에 빠져 헤매던 핀은 그림그리기를 포기한 채 나날을 보낸다. 갑작스런 익명의 후원자 덕분에 뉴욕에 보내진 그는 화가로서의 꿈을 이루며 뉴욕 미술계의 유망주로 떠오른다. 부와 지위, 명성을 한꺼번에 얻게 된 핀은 에스텔라와의 갑작스런 재회에 행복해 하지만 그녀는 다른 남자의 청혼을 받아들였다는 한마디 말로 그에게 또 한번 깊은 상처를 남긴다. 괴로워하는 핀 앞에 갑자기 나타난 루스티그는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며 그가 누리는 위대한 유산의 의미를 깨우쳐 주는데.



[위대한 유산]을 보고 나서 머리 속에 가장 강하게 남는 이미지는, 영화 내내 스크린을 녹색 빛으로 물들였던, 녹색 그 자체의 색감일 것이다. 이러한 색의 이미지는 다분히 감독에 의해 의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온통 초록색의 나무들과 넝쿨 들이 어지럽게 감싸고 있는 딘스무어의 저택과 그녀의 화려한 초록색 옷차림. 그리고 어린 에스텔라의 초록색 원피스와 영화의 중반 뉴욕에서 다시 만날 때의 초록색 의상까지... 어찌 보면 원색 계열이나 우울한 정서를 한껏 담은 블루 톤에 비해 수수하고 무난한 것이 초록이라 하겠지만, [위대한 유산]에서는 얘기가 조금 다르다. 초록 자체의 느낌은 밝고 생동감 있는 것이지만, 영화의 쓰인 그린(Green)의 느낌은, 블루(Blue)보다 우울하고, 레드(Red)보다도 강렬하며, 어떤 컬러보다도 뇌리에 깊이 파고드는 인상을 준다.



이 영화는 알다시피 너무나도 유명한 찰스 디킨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것이 리메이크가 되었던 처음이 건 간에, 원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작품들은 엄청난 부담감을 지고 갈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대부분의 리메이크 작품들은 원작보다는 못하다는 평을 듣는 경우가 지배적이었고, 평균적으로 보자면 [위대한 유산]도 마찬가지라 하겠다. 영화 [위대한 유산]은 분명 동명 소설에서 기초하고 있지만, 일련의 리메이크 영화들과 동등하게 분류하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을 듯싶다. 감독인 알폰소 쿠아론은 원작에 기초하되 가능한 한 새로운 작품을 만들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고, 이 같은 의도는 비교적 성공했다고 여겨진다. 멕시코 출신인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이 영화와 [이투마마]로 자신만의 색을 드러내며 평단과 관객을 모두 만족시키는 감독으로 떠올랐고, 최근에는 줄곧 해리포터 시리즈를 감독했던 크리스 콜롬버스의 뒤를 이어, 3편인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를 작업하고 있다.



[위대한 유산]이 헐리웃 적이고 대중적인 것은 아무래도 출연한 배우들의 영향력이 컸다.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배우들이 ‘즐비’까지는 아니나 ‘제법’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러브스토리의 남여주인공은 에단 호크와 기네스 펠트로가 맡았다. 상업영화에 출연하면서도 헐리웃 적이지 않고, 이지적인 매력을 풍기는 에단 호크는 이 영화에서도 그러한 자신의 매력을 충분히 보여준다. 혹자는 이 영화에서 에단 호크의 연기가 카리스마가 없고 이미지도 약하다고 평하지만, 그것이 연기를 잘 한 것이다. 극중 핀의 캐릭터는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소심하고 자신감이 부족한 여린 캐릭터라 할 수 있다. 영화 내내 자신감이 없어보이던 핀의 얼굴은, 마지막 장면에 가서야 비로서 편안함과 여유를 찾게 된다.



[위대한 유산]에서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기는 배우는 누가 뭐래도 기네스 펠트로 라고 할 수 있다. 도대체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과 행동으로 얄밉기까지 한 에스텔라 역을 맡은 기네스 펠트로는, 적역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 만한 열연을 펼쳤다. 신비스럽고도 도도한 에스텔라 역은 사실 다른 배우가 맡았으면 말 그대로 재수 없는(?)역할이 되었을 런지도 모를 일이다. 대부분 배우들의 이름이 스크린에 오를 때 주연 배우들 외에 유명한 배우들이 조연이나 카메오 등을 맡았을 경우 'and'로 표현되곤 하는데, 위대한 유산에는 'with'가 추가되었다. [졸업]으로 많은 영화 팬들에게 인상을 남겼던 앤 밴크로프트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녀는 이 작품에서 멕시코만의 갑부인 노라 딘스무어 역할을 맡아 그야말로 관록있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짙은 화장과 담배로 외롭게 살아가는 딘스무어 역은 두 주인공보다도 [위대한 유산]을 더 [위대한 유산]답게 만들어 주었다. 슬픈 눈으로 ‘배사매 무쵸’를 부르던 그녀의 연기가 인상 깊게 남는다.



그렇다면 'and'는 누구인가? 더 이상 연기력을 논할 여지가 없는 로버트 드니로가 그 주인공이다. 로버트 드니로는 이 영화에서 출연하는 러닝 타임은 길지 않지만,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위대한 유산’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중요한 인물로서 짧지만 강한 인상을 준다. [위대한 유산]은 이렇듯 젊고 색깔 있는 두 배우와 노련미가 저절로 느껴지는 두 배우가 조화를 이루면서, 영화의 완성도는 뒤로 하더라도 연기력만큼은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영화가 되었다.



영화 속 주인공 핀은 화가로 등장하는데, 그의 그림들을 보다보면 참으로 개성 있고 독특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영화의 등장하는 모든 그림을 그려준 이는 프란치스코 클레멘테(Francesco Clemente)라는 이탈리아의 실제 화가이다. 1952년 나폴리에서 출생한 클레멘테는 80년대 등장한 트랜스 아방가르드 계열의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장 미셀 바스키아와 공동작업으로 전시회를 열기도 했던 화가이다. 처음 이탈리아 벽화를 그리는 화가로 알려졌던 클레멘테는 인물과 사물을 관찰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시선과 밝고 어두운 단면을 모두 잘 소화해 내는 능력을 톡톡히 인정받고 있다. 그러한 면을 반영하듯 영화 속 그의 그림들은, 물고기나 사물을 나타낸 그림들은 비교적 수채화 같이 밝게 느껴지지만, 에스텔라의 초상화라던가 조 삼춘의 초상화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어둡고 슬픔이 묻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필자도 그러하였듯 평소에 이러한 그림들과 화가들을 접할 기회가 드문 이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고, 영화를 계기로 프란치스코 클레멘테 라는 화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 또한 될 것이다.



[위대한 유산]을 아쉽다고 말하는 이들의 공통분모는 극의 후반부로 갈수록 구성이 엉성해지고, 느닷없이 억지스러운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 지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구성에 엉성함이라고 얘기되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사실 이렇다 저렇다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자세히 풀어놓으면 너무 자세하게 얘기해버려서 재미가 반감되었다는 반응이 나올 것이고, 과감히 생략하게 되면 이번처럼 느닷없고 구성이 엉성하다는 반응이 나오듯이, 어차피 양면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피 엔딩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반박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마지막 장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핀은 이혼하여 혼자가 된 에스텔라를 다시 만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된다.



‘해피 엔딩’이란 말 그대로 영화가 다 끝나고 자막이 올라갈 때, 마음이 ‘해피’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개인만의 생각이 될 지도 모르지만, 자막이 올라가고 음악이 흐를 때, 결코 행복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슬픈 운명에 휘말려버린 주인공들이 안타깝게 느껴졌고, 인물들 하나하나를 떠올려 보니 더욱 더 그러한 마음은 배가 되었다. 핀은 오직 에스텔라에게 인정받기 위해 그림에 정진했고, 성공적으로 개인전을 마친 뒤, 보란 듯이 부자가 되었다며 소리쳤지만, 오로지 성공에 집착하느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도 변해버린 모습에 씁쓸함을 느꼈을 것이다. 에스텔라는 자신을 사랑하는 핀에게 확신을 주지 않은 채 아무 말 없이 멀리 떠났지만, 결국 돌아와 보니 남는 것은 후회 뿐 이였다. 딘스무어 역시 에스텔라를 위해 핀을 이용한 것에 대해 뒤늦은 후회에 눈물을 흘렸다. 그래도 루스티그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그는 평생 도망자로 살아온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준 단 한 사람이 어린 핀을 위해,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후원을 하였고, 위대한 유산을 남겼다. 결과적으로 핀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정말 위대한 유산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루스티그에게는 그나마 편히 눈감을 수 있는 이유가 되었던 것 같다.




[위대한 유산]의 아름다운 영상과 이야기를 더욱 돋보이게 한 것은, 장면 장면을 더 인상 깊게 만들었던 음악이었다. 영화와 잘 맞아 떨어지는 팝과 락 넘버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몇몇 아티스트들이 눈길을 끈다. 먼저 'Finn Runs'와 ‘Siren' 두 곡을 수록하고 있는 토리 에이모스를 들 수 있겠다. ’Siren'으로 에스텔라와 그림을 모두 접고 일상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잊고 살아가려는 핀의 마음을 빠른 리듬과 그녀만의 신비한 음색으로 전하고 있다. 그 다음 수록 된 곡은 모노(Mono)의 ‘Life is Mono'인데, 토리 에이모스와 마찬가지로 몽환적이면서도 신비스런 노래로 핀과 에스텔라의 묘한 관계를 역설하고 있다.

이 외에도 최근 오디오 슬레이브(Audioslave)로 활동 중인 크리스 코넬(Chris Cornell)의 'Sunshower'과 펄프(Pulp)의 ’Like a Friend', 스톤 템플 파일러츠(Stone Temple Pilots)의 보컬이였던 스콧 웨일렌드(Scott Weiland)의 ‘Lady Your Roof Brings Me Down', 그리고 이기 팝(Iggy Pop)의 ’Success'까지 편안하면서도 강렬한 락 음악들이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락 음악들보다 [위대한 유산]에서 더욱 기억이 남는 곡은 아마도 ‘Besame Mucho'일 것이다. 세사리아 에보라(Cesaria Evora)가 부르는 ’Besame Mucho'는 영화 속 딘스무어가 흥얼대던 그 느낌과 핀과 에스텔라의 슬픈 사랑, 그리고 핀의 성공과 그를 뒤에서 후원한 루스티그의 운명까지도 모두 포용해 버리는 원숙함을 들려준다. 또한 사운드 트랙의 맨 마지막에 자리하였듯, 이 한 곡으로 영화의 모든 감정을 모조리 정리해 버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장면과 감정들을 스쳐가게 한다.


2003.06.13
글 / 아시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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